해나 피터드: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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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번역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이 책의 번역은 한마디로 엉망이다.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재창조 작업이다. 언어는 그 것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 역사와 심지어 공기의 냄새까지 품고 있으므로, 하나의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굳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번역하기 위해 작가와 이메일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영어라는 텍스트 뒤에 숨어 있는 도미니칸-어메리칸 이민자 문화의 컨텍스트까지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번역가의 수고스러운 과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의 번역은 놀라울 정도로 성의가 없고 게으르다. 자신의 지식이 일천하여 올바른 번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원문을 병기하는 방식으로라도 독자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채, 번역가는 원작의 원어가 갖는 문체를 완전히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 각각의 단어가 가진 고유한 의미까지 꽤 자주 왜곡하고 있다. 결국 영어 원문을 찾아 읽게 만들고 마는 번역가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한국의 번역 문화는 많이 발전했다. 열정과 실력을 두루 갖춘 우수한 번역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허세에 찌든 가짜 번역가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굴라쉬 브런치>라는, 단 한 글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엉망진창의 동유럽 여행기를 쓴 사람이 이 작품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재앙과도 같은 번역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에서 문체가 가지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늘한 감동을 선사하는건 오롯이 해나 피터드의 원작이 가진 괴력과도 같은 힘에 기인하고 있다. 시시껄렁한 동네 얼간이들이 열여섯 무렵부터 사십대 중반을 지나는 시점까지 살아가는 이야기를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시점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21세기의 <앵무새 죽이기>라고 해도 될만큼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과 따뜻한 인간미를 동시에 머금고 있다. 섹시한 동급생과 섹스하거나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인 남자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평범한 마을에서 한 여자 아이가 실종된다. “우리”는 그 실종사건과 관련이 된 듯, 관련이 되지 않은 듯 적당한 피해의식과 적당한 핑계거리를 번갈아 둘러대며 지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 중 누군가는 대마초에 찌들어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소애성애자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누군가의 부모는 이혼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끝없는 상상력을 무기 삼아 실종된 여자 아이의 미래를 멋대로 그리며 자위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와 어지러운 문장 속에서 삼십여년 간 이들이 살아온 집단적 삶의 실체가 하나 둘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인간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민낯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폭력과 무관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동네라는 세계에서 멀리 달아난 여성과 그를 한없이 사랑한 멕시코 남자,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삶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신비로운 힘이 발휘된다. 화자는 철저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들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대상화된 여성은 뒤틀리고 왜곡된다. 말을 하는 쪽은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저열함을 드러내고, 말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침묵 속에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사춘기의 뒤틀린 욕망이 한 인간을 사지로 내몰수도 있음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독자의 자아성찰까지 이끌어 낸다. 이 과정에서 직조된 서사구조는 매우 탄탄하다. 작품의 화자가 복수로 등장하여 환상과 사실을 오고 가고 시간의 흐름도 뒤죽박죽 섞어 버림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다. 해나 피터드의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볼 것이다. 물론 윤미나의 번역은 피할 것이다.

주노 디아즈: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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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소설을 읽기 전에 주노 디아즈의 단편집 <This is How to Lose Her>를 먼저 읽었다.  당시 크리스 리, 줌파 라히리 등을 읽으며 한참 디아스포라 문학에 빠져 있었고, 주노 디아즈의 이 단편집을 읽은 후 미국 내 소수인종 문제에 대한 관심을 문학의 범주 밖까지 확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의 독후감은 이곳에 있다) 하지만 당시 이 단편집에 대해 “생각보다 별로”라고 평한 사람들이 꽤 많아서 놀랐던 기억도 난다. 아마도 그의 전작이자 그를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과 비교해 실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까지 3년 반이 걸렸네. 결론부터 말하면 나도 동의한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대단히 놀라운 작품이다.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펄떡거리는 생명력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컨텍스트를 소설 속 문장 곳곳에 깊숙히 심어 놓아 소설 밖에서 또다른 현상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담대한 메타-문학적 시도까지 당시 사람들이 왜 디아즈에 열광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설은 오스카라는 뚱뚱한 덕후와 그의 가족에 대한 대서사시다. 도미니카의 독재자 트루히요로부터 비롯된 저주, 즉 “푸쿠”에 사로잡힌 오스카 가족 3대에 대한 이야기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이 어떻게 운명에 좌절하고 운명에 맞설 수 있는지를 (아마도) 가장 독창적으로 드러내는 전에 없던 서사다.  <백년의 고독>과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현대적으로 계승한다고 생각될 정도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지독할 정도로 깊숙히 현실을 파고든다. 도미니카의 아픈 현대사를 놀랍도록 멍청하고 현명하며 미치도록 절망적이지만 한없이 긍정적인 오스카라는 인물에 투영하는 방식이 매우 창의적이며 치밀하다. 디아즈는 오스카뿐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을 치밀하게 설계할 뿐 아니라 그 인물들의 행동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서사구조는 전형적으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황당하지도 않다. 매 페이지마다 흘러넘치는 유머감각은 그 자체로 유쾌하지만 비극적 서사를 달래주는 윤활유처럼 사용된다는 느낌도 받는다. 디아즈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서브컬쳐에 대한 애정은 결국 소설 밖에서 추가적인 담론을 생산할 정도의 파급력을 불러 일으켰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인생>에 검정치마의 음악이 사용되었을 때 우리가 느꼈던 작은 떨림을 기억한다. 디아즈가 이 작품에서 사용하는 광범위한 서브 컬처의 요소들은 현대 디아스포라 문학을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으려는 그의 담대한 시도를 가늠케 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스릴을 느끼게 한다. 결국 디아즈는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가장 그다운 세계에서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있다. 그 모든 과정이 독자에게 매우 설득력있게 전달된다면, 이 소설에 대해 불평할 다른 무엇이 남아있을까?

4.5/5

가즈오 이시구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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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2000년 작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조금 다르게 읽힌다. ‘기억’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 내면과 개인을 둘러싼 세상을 한꺼번에 품어내려고 하는 주제의식은 <창백한 언덕 풍경>, <남아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 마>, <녹턴> 등 그의 대표작들과 궤를 같이 하지만, 추리소설 구조의 스릴러적 장치들과 장황하고 화려한 표현들, 빠르게 읽히는 호흡 등은 짧고 간결하게 쓰이지만 느리게 읽히는 전형적인 이시구로 스타일의 문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뒷통수를 때리는 충격적인 반전도 들어있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이 작품은 하나의 잘 설계된 건축물처럼 이시구로가 작정하고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자랑하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시구로는 말초적 즐거움을 위해 표현방식을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스릴러라는 장치를 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영화 <셔터 아일랜드>의 주인공처럼 거대한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어리숙한 사내다. 그의 독백으로 일기처럼 진행되는 소설은 그의 시선과 그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표현들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사설탐정이라는 그의 직업, 실종된 부모를 추적해나가는 절박함, 그리고 중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영국인이 경험하는 중국내전이라는 이질적인 배경들을 조합해보면 작중 화자가 지나치게 생각이 많고 올바른 판단을 잘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수다스럽다는 소설의 설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그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과감히 소설의 호흡과 문체에 변화를 가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몇 백 페이지에 걸쳐 장황하게 그려내는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중국여행 역시 반드시 마지막 부분의 극적인 반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우선 등장인물들이 처한 ‘고아’라는 설정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어릴 때 부모가 모두 실종된 경험을 가진 고아이고, 또다른 고아인 한 여자를 만나 부모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온다. 중국행 전 역시 고아인 한 여자아이의 양육을 맡기로 결정한다. 주인공은 부모를 찾기 위해 이 앙녀의 양육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그를 중국으로 이끈 여자가 함께 마카오로 가자는 청을 거절하고 실종된 부모가 있다고 믿는 위험한 곳으로 걸어들어간다. 결국 그가 맞닥뜨린 ‘진짜 과거’는 그를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부모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또다른 고아들을 고립시킨 그 역시 그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장황하고 화려하게 진행되는 그의 여정은 이러한 세 인물의 외로움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읽힌다. 굳이 스릴러적 구조를 택한 것 역시 주인공의 절박함과 ‘설계된 삶’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이시구로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 소설에서조차 전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대상,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 그 시선 속에 담긴 세상.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끈을 쥐고 있는 주체의 판단에 의해 방향성은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그의 주제의식은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표현상의 스펙트럼이 조금 더 폭넓어짐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3.5/5

 

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 풍경

창백

 

<창백한 언덕 풍경>은 내가 사랑하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역사적인(!) 첫번째 장편 소설이다. 198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마침(..) 나도 1982년에 태어났으니 억지로 인연을 꿰어맞출 핑계를 하나 얻은 셈이다. (이렇게 억지로 거짓된 필연에 발목잡힌 다른 작가로 프란츠 카프카가 있다. 그는 나의 생일로부터 정확하게 99년 전인 1883년 7월 3일에 태어났다) 발표 당시 이미 좋은 평가를 받았고 권위있는 상도 받았다는 소개글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시구로 특유의 정갈하지만 꼼꼼한 문장과 ‘기억’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시도는 이미 이 첫번째 소설에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어린 시절 떠나온 일본과 현재 거주 중인 영국을 오가며 소설의 배경으로 삼는 점은 어디에선가 들었던, 많은 작가들이 첫번째 소설에서 자전적인 부분을 알게 모르게 삽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작가의 초창기를 조금 더 재미있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한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일본을 ‘기억’하는 모습이 전후 어지러운 시기 거짓말과 외로움, 착시와 의존 등의 개념에 치여 힘들어했던 어두운 과거였다는 점은 작가와 ‘떠나온 나라’와의 관계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물론 이시구로는 디아스포라 문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통적인 영미문학의 문법을 따른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다만, 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일본식 이름을 안겨준 한 나라를 어떻게 떠나보냈는지, 혹은 그 안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의 커리어를 따라올라가면서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일같다고 느꼈다.

소설은 무척 그답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그의 문체는 담백하고 조용하다. 문장은 결코 성내는 법이 없으며 읽는이가 숨가쁘지 않게 닥달하지 않는다. 서사는 천천히 흘러가며,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과정이 꼼꼼하고 정적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마저 가볍거나 잔잔하지만은 않다. 원폭으로 인해 전쟁을 포기한 나라에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개인의 삶은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고 무시될 정도로 단순하거나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속여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어려움을 무시해야 할 정도로 마음이 가난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 기대어, 때로는 거짓말의 힘에 의존하며 환상을 키워나가야만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힘겨운 삶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던 많은 이들 중 한 명을 그저 조용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았던 관찰자로서의 작중 화자가 주제의식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은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다. 작가는 작중 화자가 현재시점에서 가지는 죄의식을 전후 일본의 부채의식과 연결지음으로써 작가는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되살려 놓는다. 이시구로는 원폭, 혹은 전쟁과 관련된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야기를 전개시키지만, 거대한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말없이 매몰되어 버린 개인의 삶을 화자의 눈을 통해 끄집어 내되 이를 화자의 현재 상황, 즉 현대사회의 타자화되고 파편화된 인간관계와 대구를 이루도록 배치함으로써 독자 개개인이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삶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시구로의 조용하고 담백한 문체조차 이러한 주제의식을 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다. 그만큼 빈틈 없이 꽉 짜여져 있어 읽는 맛이 좋다.

4/5

카를 마르크스: 자본 I-1; 경제학 비판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 I-1 경제학 비판, 도서출판 길, 2010년 1판 4쇄

김수행 교수의 번역본은 영문 번역판을 다시 번역했는데 반해 강신준 교수의 번역판은 독일어 원판을 번역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본> 은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제학 비판” 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은 전체 <자본> 의 첫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 의 1권에 해당하는 경제학 비판만이 마르크스 생전에 출판되었고, 2권 “사회주의 비판” 과 3권 “경제학의 역사” 는 그의 사후에 엥겔스를 비롯한 사람들의 주도하에 정리되고 출판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세가지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의 의미와 생성 과정, 그리고 잉여 가치와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다룬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아마 이 부분이 마르크스의 <자본> 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에 의한 잉여 가치의 축적을 현실에서의 노동 문제와 연결시키고, 이것이 계급간의 갈등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적시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공고히 하려는 노력에 버금갈 정도로 그 당시 열악했던 노동 문제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힘을 쏟는다. 그의 눈에 비친 생산 과정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였을 것이고, 그는 천재적이고도 명쾌한 분석으로 계급 투쟁을 위한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2010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여전히 동의를 하는 것은 분명 멍청한 짓일 것이다. 그의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반박을 받아 왔고, 마르크스 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에서 수정이 되어 왔다. 더이상 그의 이론은 신선하지도 않고 이론저으로 냉철하지도 않다. 그는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호도하기도 하고, 불합리한 가정을 앞세워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현대 경제학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들도 그의 책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심지어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상식들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자본> 은 확실히 낡았다.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아직도 마르크스와 <자본> 을 들먹이며 노동 운동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아주 멍청하거나 아주 미련한 사람일 것이다. 현대의 노동 운동은 반드시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에서 다시 설계되어야 하며 최소한 현대 맑시즘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기존 맑시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지 정도는 살펴 봐야 한다. 마르크스가 주창한 노동 문제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 울림의 폭은 여전히 크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토록 주장했던 것처럼 이론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정치적 주장은 공허하고 나약하다. 나는 과거 노동 운동 혹은 학생 운동을 했던 나의 선배들중 몇명이나 이 <자본> 을 정독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그 시대에 어떤 수준 이상의 신념이나 믿음을 가질 정도의 단단한 이론적 토대는 더이상 이 책에 없다. 나의 선배들중 몇명이 마르크스-레닌 주의에서 탈출했는지, 혹은 그것을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많은 이들이 <자본> 을 읽기를 희망한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경제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아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심장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게끔 해주는 냉철한 머리도 가지고 있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일개 대학원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 오류들이 가득한 이 책은 그래서 아직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여전히 토론되어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독서

결국,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서울 방문 기간동안 열심히 한글로 된 책들을 읽기로 했다.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책 열두권을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열권으로 줄였다. 십만원을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여덟권으로 줄였다. 결국 한권도 결재하지 못했다. 내일까지 도착하는 택배보다는 (아 펠릭스님께 보낼 택배 아직도 안 보냄 -_- 게으름이 죄요..) 발품을 팔아 한권씩 사는 편을 택했다. 잔뜩 쌓아 놓고 독파해 나가는 재미는 별로 느끼지 못하지만 서점에 가서 책냄새를 맡으며 골라 보는 재미는 크게 느끼는 천성탓이다. 한권을 읽을 때마다 한번씩 더 서점에 가기로 했다.

책 구매 리스트

결국 폴스미스 폴로 셔츠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 돈으로 책들을 구입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결제 버튼 앞에서 우물쭈물하더니 주말에 읽은 책 두권으로 인해 차라리 평소에 사고 싶었지만 사지 못한 책들을 구매하는 편이 더 낫다고 결론을 내려 버렸다. 참으로 미련하고 아둔한 결정이었다.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다)

여기서 한국 책들을 주문할 때 항상 발생하는 이슈가 어디서 구매하느냐의 문제이다. 난 예스24를 싫어하기 때문에, 나의 선택지는 언제나 알라딘US 와 교보문고 해외배송 서비스다. 똑같은 구매 목록을 설정하고 결제창을 비교한 결과, 알라딘이 교보문고보다 한국돈으로 2만원 정도 쌌다. 결국 알라딘US 를 통해 구매하긴 했는데, 이 두 서비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듯 하다. 알라딘US 는 달러로 결제하고, 일정 이상 구매하면 배송료는 공짜다. 아마 UPS 를 통해 배달되는 듯 싶은데 일주일에서 열흘정도 걸린다고 한다. 교보문고는 원화로 결제하고, 책 무게에 따라 배송료가 책정된다. 나는 총 일곱권을 샀는데 배송료가 약 75,000 원 정도 붙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나름 교보문고는 꽤 높은 레벨의 회원인데 이번에는 좀 아쉽게 됐다. 레벨이 어느정도냐 하면 평일 아무때나 가서 책을 한권도 안사도 주차가 두시간 무료인 정도!학부때부터 뼈빠지게 돈을 갖다 바쳐 얻은 상처뿐인 영광이다. (솔직히 그 광화문 사거리에 평일 저녁 차를 끌고 나갈 용기는 없다) 여섯살때부터 부암동에 살았으니 늦어도 국민학교 저학년때부터는 가족과 함께 광화문 교보문고에 습관적으로 갔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명동성당엘 다녔는데, 일요일 아침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성당 두시간 무료 주차권을 활용해 근처 명동교자에서 칼국수를 먹은 다음 소화를 시킬 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어슬렁거리며 책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한권씩 골라 집에 오는 것이 일요일의 루틴한 일상이었다. 물론 나는 책보다는 CD 와 테이프를 더 자주 골랐다. 가끔 컴퓨터 게임도 고르고, 잡지도 골랐다. 안 고를 때도 많았다. 그냥 그랬다는 말이다. 삼천포다.
어쨌든 목록은 다음과 같다.

레이먼드 카버, 김연수 옮김,  대성당

한국에서 가져 온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없어서 한권 더 가지고 있을 요량으로 구입했다. 내 친 누나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서 카버의 모든 책은 한국에 있다.

로맹 가리, 윤미연 옮김, 마지막 숨결
로맹 가리, 김남주 옮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다락방님이 단편집이 좋다고 해서.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정동섭 옮김, 바람의 그림자 1,2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다락방님의 블로그 포스트를 보고 사기로 결심했다.

도리스 레싱, 이태동 옮김, 풀잎은 노래한다

잘 모르는 작가인데 페미니즘 문학에서 유니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들어서 구입했다. (난 버지니아 울프 팬) 읽어 보고 좋으면 ‘황금 노트북’ 도 사서 읽을 생각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

단편들을 찾던 와중에 퍼뜩 생각나 충동 구매. 보르헤스보다는 마르께스의 작품들을 많이 읽어서 늘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아직 영어로 씌어진 책을 원서로 읽는 것에 익숙치 않다. 한국어책과 영어책을 읽는 속도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이언 메큐언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꼭 원서로 읽고 싶다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실행에 옮기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벅차다. 논문으로 단련된 리딩 능력은 픽션이나 인문학 책을 읽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