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라이트: 베이비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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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movie)를 팝콘과 콜라를 가장 현명하게 소비하는 두시간짜리 처방전이라고 정의한다면 [베이비 드라이버]는 그 소명을 다하고 있는 좋은 상품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열광했을 오프닝 카체이싱 시퀀스를 비롯해 영화는 심심할 틈을 주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단순히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없음을 [트랜스포머]를 비롯한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베이비 드라이버]는 ‘팝콘 무비’가 가져야 하는 첫번째 미덕이 원초적인 리듬과 에너지에 있음을 교과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박찬욱이 이 영화를 두고 “앞으로 연구되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면 (그의 병적인 미장센 집착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근원적인 에너지와 리듬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원초적 힘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캐릭터는 일차원적이고 서사는 진부하지만, [안녕, 헤이즐]로부터 착실하게 성장해온 안셀 엘고트가 무리없이 주인공역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케빈 스페이시, 제이미 폭스, 존 햄 등 베테랑 배우들이 주변을 두텁게 떠받들어 빈틈을 메워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영화를 선택할 때 완벽한 서사구조와 다층적인 캐릭터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자동차와 함께 영화를 구성하는 두가지 핵심요소 중 하나인 음악은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게 선곡되어 있다. 사실상의 음악영화라고 해도 무방한 이 영화에는 많은 뮤지션들이 직접 출연하고 있기도 한데, 꽤 비중있는 대사를 부여받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를 비롯해 주인공 베이비의 어머니로 회상씬에 등장하는 스카이 페레이라(본인 노래까지 부르며 깨알 홍보도 한다), 오프닝 시퀀스의 배경음악을 제공한 존 스펜서 익스플로전의 그 존 스펜서, 그리고 런 더 주얼스(Run the Jewels)의 킬러 마이크까지, 다양한 장르와 세대의 많은 뮤지션들이 B급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는 이 오락영화를 위해 기꺼이 출연을 허락했다.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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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한국 소설을 읽었다.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는 서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 작가의 손에서 나온 아름다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인간에 대한 작가의 근심과 애정을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불리는 장르 위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알몸 그대로의 인간사회를 펼쳐 놓은 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그 폐허 속에서도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는 작가의 방식이 무척 우직하게 느껴진다. 과장되지 않게 느껴지는 가정들을 차곡 차곡 쌓아 나가며 그 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본질적 요소를 간결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방법론에 저절로 동의하게 된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결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가슴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을 한 작품에서 이렇게나 많이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한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런 문장들이 촘촘히 모여 허술하지 않은 서사를 이루고, 그 서사를 통해 단 하나의 단어,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추상적인 그 단어 하나로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책을 읽을 때 설렁설렁 빠르게 읽어내려가는 습관이 있는데 이 소설의 경우 조사 하나 빠트리지 않고 천천히 읽었다. 그렇게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The War on Drugs: A Deeper Understa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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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의 네번째 정규 음반이자 대형 음반사인 애틀랜틱 레코드와 체결한 두 장의 정규음반 계약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A Deeper Understanding]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남달랐다. 전작 [Lost in the Dream]으로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한 필라델피아 출신 6인조 밴드 워 온 드럭스(The War on Drugs)의 다음 행보에 대한 큰 기대감과 함께 안정적인 대형 음반사의 배급망이 주는 ‘압박’이 이들의 정체성을 얼마나 훼손시킬지에 대한 걱정이 함께 했던 것 같다. 결과는 낙관적이다. 밴드가 최초로 공개한 노래가 전형적인 워 온 드럭스 리듬을 고스란히 간직한 11분(!)짜리 곡 “Thinking of a Place”였다는 사실만 봐도 이 밴드가 음반 제작과정에서 자율성을 여전히 담보받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음반의 전체적인 구성도 좋다. 68분여의 러닝타임에 꾹꾹 눌러담은 10개의 곡들 에서 밴드는 마치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느껴질법한 고집스러움을 보여준다. 음반의 기본적인 방향은 밴드가 전작에서 잘 해오던 것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만들면서 살을 조금씩 붙여나가는 식이다. 덕분에 각각의 노래에서 워 온 드럭스의 색깔이 조금씩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음반을 처음 들으면 귀에 확 들어오지 않지만 몇번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어느새 밴드 특유의 청량하면서도 일렁거리는 리듬이 온몸을 에워싸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리버브 사운드도 여전하다. “밥 딜런이 슈게이징을 했다면 이런 사운드가 나왔을 것”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Red Eyes”처럼 귀에 확 꽂히는 킬링 트랙은 없지만 무심결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명곡은 차고 넘친다. 하모니카와 색소폰 등 색다른 사운드를 입힌 곡들에서 작은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책임지지 않는 인터넷 대중

최근 ‘240번 버스기사 논란’이 인터넷을 후끈 달구었다. 결론은 버스기사의 책임은 없다는 것. 논란의 과정에서 가해자로 규명지을 수 있는 이들은 근거 없는 루머를 최초로 제기한 자와 논란의 중심에 있던 아이 엄마, 그리고 그 루머를 마치 사실인냥 퍼뜨린 이름없는 대중들. 피해자는 버스기사와 버스회사 정도가 되겠다. 가해자 중 실체를 특정당한 이들만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는 모양새다.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비슷한 수준의, 혹은 더 심한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은 모두 ‘아니면 말고’ 라고 얼버무리던가 익명성을 무기로 어디론가 숨어 마치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트위터든,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든, 페이스북이든 인터넷 공간은 모두 마찬가지다. ‘오해를 했다’라고 변명하고 자신을 아주 보잘것 없는 공범 중 하나로 포장하기엔 피해자가 느꼈을 ‘피해’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대중의 소문 부풀리기 과정에서 온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이들 중 아마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법적인 책임이 돌아올 확률은 0%에 가깝고,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사회적인 ‘마녀사냥’을 되돌림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생태계가 이들을 이처럼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임을 느낄만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실체를 특정할 수 있는 장치를 덧붙인다면 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발언이 집단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은 화장실의 낙서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 그저 배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공개되는 범위를 제한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짐과 동시에 특정인에 대한 비난의 경우 실제와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의 사각지대를 종종 만들어낸다는 분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그저 자연적인 현상인냥 두고 보기에는 인터넷 익명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이를 제한하는데 다르는 경제적 비용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수의 자유를 제한할 것인가,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오래된 윤리적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경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책이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또다른 사회적 이슈가 십대 청소년의 집단 폭력 문제다. 공교육이 무너져내린 후 손가락만 빨았던 ‘어른’들의 ‘방치’의 결과는 왕따를 넘어선 살인에 가까운 폭력행위다. 청소년법은 여전히 구시대적인데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어른의 폭력성을 습득해나간다. 인터넷 폭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피해자는 신상이 공개되는데 반해 가해자의 대부분은 신상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역차별의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이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 개인’은 일종의 사회철학의 부재처럼, 혹은 사회적 질병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새치기를 자랑스럽게 행하며 불법행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충동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지속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폭력, 혹은 인터넷 상의 이지메 현상은 그러한 사회철학의 뒤틀림을 반영한 시대적 거울일 뿐이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당국은 법을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사회가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한숨만으로는 부족하다.

출퇴근길 올림픽대로

요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출퇴근하고 있다. 구구절절한 이유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간단히 적자면 이직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삶에 상당한 피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직 이후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같은 여의도 안에서의 이직,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과 몇키로 움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15분 이상 늘어난 출퇴근 시간이 괜히 억울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더운 여름 기간 아침과 저녁 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보내는 중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우선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포기한 대신 듣고 싶은 것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출퇴근길은주로 팟캐스트가 함께 한다. 15년이나 된 차라 AUX 하나 없고 스피커도 좋지 못해서 음악을 한시간 정도 듣다 보면 귀가 쉽게 피로해진다. 차라리 영어 듣기 능력이나 계속 유지시키자 싶어 음악, 스포츠, 경제 등 다양한 주제의 팟캐스트를 듣는다. 팟캐스트에서 배우는 것이 상당히 많다. 요즘 회사 업무가 바쁜 편이라 시간을 내어 책이나 신문을 읽지 못하는 편인데 운전하는 동안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이것저것 좋은 정보를 전달받게 된다. 즐겨 듣는 팟캐스트 중 하나인 [NPR All Songs Considered] 진행자가 최근 이런 말을 했다. 음악을 여유있게 들을 수 있어서 가끔 출퇴근길 교통체증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전적으로 동의한다. 앞으로는 오디오북을 들으며 다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 운전하면 책 권은 다 듣지 않으려나?

운전을 하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보다 출퇴근 시간을 드라마틱하게 줄이지는 못했다. 출근길은 예전 한시간에서 45분쯤으로 약 15분 정도 줄어들었고, 퇴근 시간에는 정시 칼퇴근의 경우 운전할 때가 더 오래 걸린다.  야근을 하고 9시쯤 회사를 나서면 집까지 30분에 갈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이 것때문에 야근을 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에 막히더라도 일이 없으면 일찍 나오는 편이다. 집에 도착할 때 쯤엔 무릎이 시큰거리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이 편이 훨씬 낫다고 느낀다. 시간적인 요소를 떠나 운전을 매일 하면서 좋은 것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요즘들어 갈수록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다. 타인에게 화를 낼 기회만을 엿보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은데, 특히 출퇴근길에 주변의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나에게 꽤나 큰 스트레스였다. 물론 운전을 해도 비슷한 상황을 마주치긴 한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량은 너무나 쉽게 발견되어 마치 일상의 공기처럼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의 창의적이고 빠른 두뇌회전 능력이 모두 얌체 운전으로 몰빵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불쾌한 신체접촉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운전이 주는 기쁨을 충분히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출퇴근길 운전을 하면서 얻은 최고의 기쁨이자 전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은 올림픽대로라는 서울의 오래된 도로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주로 강변북로를 이용했다. (나는 강북-made product니까!) 당연히 강변북로를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호로-뚝섬로-서빙고로를 따라 나가서 한남동 근처에서 강변북로에 합류한 뒤 공덕에서 마포대교를 건너서 여의도 둔치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일반적인 루트였다. 하지만 8시 출근길 강변북로는 너무 막힐 뿐 아니라 재미도 없었다. 왼쪽편으로 보이는 한강은 그리 예뻐보이지 않았다. 금호터널과 남산2호터널을 지나 삼각지를 통해 원효대교로 빠지는 시내를 관통하는 루트도 시도해봤지만 출퇴근길 시내운전은 넘치는 신호등보다 그보다 더 많은 불법 끼어들기 차량, 불법 주정차 차량 때문에 그리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밑져야 본전의 심정으로 동호대교를 건너 올림픽대로를 타고 출근을 해보게 되었는데 이 길 위에서 신세계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막히지 않아 시간도 꽤나 단축시킬 수 있었을 뿐 아니라(주차장에서 주차장까지 30분 이내에 주파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한강과 강 건너 강북 풍경은 예상외로 아름다웠다. 퇴근길 고속터미널이나 한남대교 남단으로 진출하는 나들목은 서울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운전경험을 선사하지만, 평일 퇴근 러쉬아워만 피한다면(그리고 아마도 주말 오후시간도 피해야 할 것이다) 금호동과 여의도를 오가는 올림픽대로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큰 스트레스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림픽대로를 지날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지하철과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를 지나칠 때이다. 날씨 좋은 날 올림픽대로를 지나갈 때 흘낏 올려 보게 되는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는 꽤나 인상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이건 근처 노들로에서 바라봐도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노들로는 아파트들이 가로막는 구간이 꽤 될 뿐만 아니라 상습정체를 유발하는 구간이 있어 올림픽대로가 가장 좋은 목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강철교 아래를 통과할때 들리는 지하철, 혹은 기차의 그림자와 바퀴소리는 마치 서소문근린공원 앞 건널목에서 통과하는 기차를 바라볼 때의 그 기분을 환기시키는 듯 해 기분이 묘해진다.  퇴근길 여의하류 나들목을 빠져나와 여의도를 왼쪽편에 끼고 한강철교 방향으로 향할 때의 밤풍경도 근사하다. 다른 곳보다 가로등이 많아 환할 뿐 아니라 왼쪽으로 보이는 여의도와 마포구의 아파트, 빌딩들이 함께 밤을 더 환하게 밝혀준다. 지하철과 자동차가 함께 강을 건너는 동호대교를 매일 두번 건널 수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다. 한강의 다리들은 아무런 특색이 없는 회색빛을 띠거나 LED 조명 따위를 달고 우습게 보일 정도로 유치해지기 쉽상인데 동호대교는 한강에서 몇 안되는 운치를 가지고 있는 다리다. 동호대교를 건널 때 쯤 이제 집에 다 왔구나, 싶어 마음이 놓이기 시작한다. 좁은 금남시장 골목을 통과할 때 시장바닥에서 보이는 사람 사는 풍경에서도 배우는 것이 있다.

한강은 서울이 가진 소중한 선물이다. 난개발이 망쳐놓은 스카이라인을 흉터처럼 가진 크기만 한 도시에 아름다움을 담보해주는 몇 안되는 보물이기도 하다. 그 한강변을 따라 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오래되고 무거운 디젤차량을 타고 다녀서 자연에 대한 미안함을 떨칠 길이 없지만, 요즘 아침과 저녁이 그리 많은 스트레스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얼른 친환경 차량으로 바꿔서 미안함을 덜어야겠다. (..??)

 

Grizzly Bear: Painted Ruins

grizzly bear painted ruins
그리즐리 비어는 2002년 데뷔 음반 [Horn of Plenty]를 발표한 이후 근작 [Painted Ruins]까지 총 다섯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15년이라는 커리어는 생각보다 길게 느껴지고, 다섯장의 음반수는 생각보다 적게 느껴진다. 다작을 하는 밴드는 아닌 셈이다. 그리즐리 비어와 비슷한 시기 데뷔한 뮤지션 중 뉴욕 인디씬을 재조명받게 만든 수퍼스타들이 꽤 있었다. 2001년 스트록스(The Strokes)가 데뷔 음반 [Is This It]을 발표했고 2002년 인터폴(Interpol)이 데뷔 음반 [Turn on the Bright Lights]를 발매했다. 이들보다 조금 늦게 브레이버리(The Bravery)가 2005년 동명의 데뷔음반을 들고 혜성같이 나타났다. 같은 뉴욕 출신인 이들이 화려한 데뷔 음반을 발판으로 각종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를 장식할 동안 그리즐리 비어는 2006년 두번째 음반 [Yellow House]을 발표하기 전까지 상대적으로 조용한 주목에 만족해야 했다. 롤링스톤즈 정도가 짤막하게나마 이들의 데뷔를 축하해주었을 뿐이다.

위에 언급한 세 밴드를 비롯해 뉴욕 인디씬의 선두에서 전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했던 많은 뮤지션들이 말그대로 ‘사라져갔다’. 스트록스와 인터폴은 두번째 음반까지 짧은 전성기를 보낸 후 빠른 속도로 잊혀져갔다. 최근까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그 때의 명성으로 근근히 먹고 산다는 느낌을 받을 뿐 신선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브레이버리는 심지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리즐리 비어는 데뷔 이후 지금까지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조용하게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앞서 발매한 네 장의 음반 모두 평단과 팬들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2009년작 [Vckatimest]와 2012년작 [Shields]는 그리즐리 비어만의 음악스타일을 완성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2002년 브루클린의 작은 선술집에서 공연을 시작한 이들이 2012년 음반 발매 후 2014년까지 2년에 걸쳐 진행한 [Shields] 투어는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마무리됐다. 전세계 음악팬 중 그들의 음악을 모르는 이는 이제 거의 없을 것이고, 그들의 음악을 인정하지 않는 팬도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뉴욕 인디씬을 대표하는 밴드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제 많은 이들이 그리즐리 비어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5년만에 발표한 5번째 정규 음반 [Painted Ruins]는 이미 완성된 줄 알았던 그리즐리 비어의 음악이 한단계 더 성숙해졌음을 알리는 수작이다. 이들은 큰 변화 없이 묵묵히 원래 해오던 것, 잘 해오던 것을 할 뿐이지만 그 안에서 독창적인 리듬과 훅을 만들어내며 귀와 마음이 즐거운 소리를 잔뜩 만들어낸다. 비워야 하는 지점에서 정확하게 빈 공간을 만들어내고 채워야 하는 곳에서는 빈틈없이 꽉 찬 음악을 선보인다. 극단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쉽게 질리지 않는다. 소위 ‘안티-피치포크’적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실제로 피치포크는 이 음반에 73점을 매겼다), 전통의 단절을 굳이 시도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미래로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좋은 면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90년대적 향수가 2010년대에 다시 생명을 얻은 느낌이다. 이들이 비단 ‘살아남았기 때문에’ 뉴욕씬의 강자가 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만큼 뛰어난 내공을 쌓아왔기 때문에 현재 이 씬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이들에게 ‘작가’라는 칭호를 붙여도 좋을 것 같다. 그리즐리 비어의 세계는 창조된 후 지금까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언니네 이발관: 홀로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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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또래의 “리스너”들이라면 언니네 이발관의 이름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한국 독립음악의 역사 그 자체인 이들의 커리어에서 리스너 개인의 역사를 거울처럼 비추어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첫번째 음반 [비둘기는 하늘의 쥐]부터 [후일담], [꿈의 팝송], [순간을 믿어요], [가장 보통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음반 한장 한장에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있다. 더이상 이들을 음악만으로, 좋아하는 음악인만으로 대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이들의 커리어와 함께 섞여들어가 살아왔다. 홍대의 공연장 어디에선가 이들의 음악이 울려퍼질 때 내가 있었고, 학교 도서관 어디에선가 이어폰으로 이들의 음악을 듣는 내가 있었다. 그 순간 순간 나의 감정과 그 당시의 냄새, 코 끝에 닿던 공기의 촉감,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까지 다 기억난다. 그래서 언니네 이발관은, 이석원은 매우 개인적이고 매우 고마운 존재다.

그들의 마지막 음반이 나왔다. 제목은 [홀로 있는 사람들]. 앞으로 다시 이들의 공연을 볼 수 있을까,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쉽지 않다. 이미 충분히 오랜 시간 함께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석원은 이번 음반에서도 여전히 담담한 문체로 수필을 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찌질이답게 지나치게 소심하고 필요 이상으로 사려깊다. 그런 그를 탓할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는 것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조금씩 자리잡은 “보편적인” 비겁함과 부끄러움에 대해 용기있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수필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음악은 좋아한다. 아주 이상한 음악으로 가득찬 음반을 발표했을 때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음악이 충분히 사려깊었고 또 필요 이상으로 소심했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에 열광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뒤돌아서지도 못했다. 이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나 역시 소심해지고 사려깊어지게 되는걸까. 음반은 좋다. 매우 좋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서인지 괜히 더 좋게 들린다. 음반의 처음을 장식하는 “너의 몸을 흔들어 너의 마음을 움직여”부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아이유와 함께 불렀다는 “누구나 아는 비밀”이 가장 무료하게 느껴질만큼 이석원다운 위트있는 가사와 훅이 잔뜩 살아있는 기타팝 사운드가 음반을 가득 채운다. 러닝타임이 너무 짧아서 혹시 히든트랙이 없는지 숨죽여 기다리게 된다. 더이상 이들의 새로운 음악은 들을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아쉽지 않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Offa Rex: The Queen of He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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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포크 음악(folk music)’이라고 부르는 음악 장르와 잉글랜드 민속음악(folk music of England)이 분명히 구분되는 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아일랜드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며 함께 대륙을 넘은 잉글랜드 민속음악은 흑인 노예들의 종교음악과 서부개척시대의 노동요 등으로 변형되는 시기를 거쳐 오클라호마, 뉴올리언스, 텍사스 등 남부의 지역적 특색과 만나면서 미국 포크 음악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포크 음악 장르를 ‘각 지역의 민속음악으로부터 발전한 현대음악’ 정도로 광범위하게 정의할 경우 잉글랜드 민속음악을 포크음악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현대 포크음악’으로 그 범위를 좁게 잡을 경우 잉글랜드 민속음악은 현대 포크음악의 뿌리로 기억될 수 있는 셈이다. 최근까지도 영국을 중심으로 셜리 콜린스(Shirley Collins) 등 잉글랜드 민속음악으로부터의 유산을 면확하게 드러내는 포크 음악 뮤지션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영국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미 오레곤주 포틀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디 밴드 디셈버리스츠(The Decemberists)는 개인적으로 그들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The Crane Wife] 시절부터 전통적인 장르의 재해석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밴드의 리더 콜린 멀로이(Colin Meloy)가 영국의 포크 뮤지션 올리비아 샤네이(Olivia Chaney)를 발견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올리비아 샤네이는 2015년에 데뷔 음반 [The Longest River] 한 장만을 발표한 신진 뮤지션이었고, 경력면으로 보나 유명세로 보나 멀로이가 이끄는 디셈버리스츠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도였다. (다만 로버트 플랜트와 셜리 콜린스 등 일부 동료 뮤지션들이 극찬했다고 한다) 우연히 샤네이의 음반을 접한 멀로이는 디셈버리스츠의 2015년 투어에 그녀를 초청했고, 투어 도중 그녀를 위한 밴드로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결과적으로 디셈버리스츠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 위에 샤네이의 보컬이 얹힌 새로운 프로젝트 밴드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이름이 Offa Rex, 700년대 잉글랜드 지역에 있던 Mercia 왕국의 왕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들의 데뷔 음반 [The Queen of Hearts]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6,70년대 풍의 잉글랜드 민속음악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만큼 잉글랜드의 옛 향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12곡 중 8곡에서 들리는 샤네이의 목소리가 음반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며, 가끔 들리는 멀로이의 목소리와 밴드 특유의 코드 진행에서 디셈버리스츠의 영향력을 미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이 음반이 가진 최고의 미덕은 아마도 하프시코드, 하모니움 드론(harmonium drones) 등 옛 악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철저히 ‘과거의 장르’ 안에서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노래에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포크 음악을 하기 위해 정제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샤네이의 목소리를 밴드의 탄탄한 사운드가 잘 감싸안아준다. 음반의 구성 역시 지루하지 않게 다채롭다. 블랙 사바스가 연상되는 70년대 록음악 코드가 툭 튀어나오기도 하고 피아노만으로 단촐하게 구성된 인스트루멘탈 곡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느 한 곡도 이질적이지 않게 잘 어우러져 있다. 어쩌면 최근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디셈버리스츠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좋은 포크 뮤지션을 미국 음악씬에 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빠 보이지 않는다.

SNS에 등장하는 아기들의 얼굴

30대 중반의 나이대로 접어들다 보니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SNS의 계정들이 올리는 그들, 혹은 그들의 주변인들의 아기들의 사진을 자주 접하게 된다. 본인의 얼굴을 인터넷에 올리는 행위와 자신의 자식 사진을 올리는 행위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먼저 사진을 올리는 주체와 공개되는 피사체가 다르다. 둘째, 온라인 상에 공개되는 아기들의 경우 대부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진이 공개되는 경우가 많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나이대의 아기부터 SNS와 인터넷 매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나이대의 아이의 경우 부모가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사진 공개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더러 대부분 실제로 그들에게 의사를 물어보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마지막으로 (요즘 소위 “프로 불편러”들이 제기하는 것처럼) SNS에 등장하는 아기들의 사진은 자랑 일색이다. 사람에 따라서 본인의 사진을 올릴 때와는 확연히 다른 게시자의 ‘자세’, 혹은 ‘의지’가 느껴질수도 있을 정도다.

법적으로 부모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고 부모가 상당 부분 권리와 책임을 가져가는 나이대에 있는 미성년자의 경우 그들의 초상권이 부모에게 전적으로 귀속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공인’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미성년자의 초상권 문제가 어떻게 취급되는지 약간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귀차니즘으로 인해 자세히 찾아보지는 않았다. 다만, 본인의 허락 혹은 동의 없이 미성년자의 초상권이 부모에 의해 전용되는 상황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조금 더 고민해볼만한 지점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아내와 나 역시 아이를 무척 낳고 싶어한다. 우리는 매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다가올 것으로 기대하는 우리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형체조차 존재하지 않는 아이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해진다. 우리의 눈에 얼마나 예뻐보일지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아마도 대다수의 부모들이 우리와 비슷한 심정으로 자녀를 기다렸을 것이고, 그들이 태어난 이후 본격적으로 실제적인 애정을 쏟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그 경험을 가까운 지인과 공유하고 싶을 것이다. 많은 지인들이 그들의 자녀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즉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녀의 사진을 공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인터넷과 모바일기기를 통해 굳이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지인을 닮은 그들의 자녀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편리한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남의 눈에도 그 아이가 이뻐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성인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 세상의 모든 아기가 예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타인에게는 식별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스쳐지나가는 어떤 얼굴로 기억될 수 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개된 사진이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채 평범한 이미지로 소모되는 상황을 만약 그 아이가 성장한 후 알게 된다면? 그 아이가 기분이 좋을지 잘 모르겠다.

만약 자녀를 갖게 된다면, 나는 그(들)의 사진을 절대 인터넷에 공개하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 부부의 자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부탁하면 된다. 그 절차가 약간 번거로울지라도 불특정 다수에게 자녀의 사진을 공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에게만 특별한 존재일 뿐 타인에게는 그정도로 가치있는 존재가 아닐 확률이 높다. 나는 나의 자녀가 온라인상 공간에서 의미없이 소모되기를 원치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모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다. 나의 기준에서 그것은 윤리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아이를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도 아니다. 나중에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이가 되면 그 때 가서 상황을 충분히 이해시킨 뒤 사진을 공개할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도 수없이 SNS에 올라오는 아기들의 사진에서 무력감을 느낀다거나 그 사진을 올리는 부모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책임과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아이의 모습을 가까운 지인과 공유하는 것에서 더 중요한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관계된 사람 중 누구도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과정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내 자녀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지고 싶을 뿐이다. 아이가 성장했을 때 그에게 미안할 수도 있는 일은 되도록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다.

Big Thief: Capacity

big thief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4인조 인디 포크록 밴드 빅 띠프(Big Thief)는 데뷔 음반 [Masterpiece]를 발매한 뒤 비교적 빠른 시기에 씬에서 확고한 위상을 획득했다. 핑거팁 어쿠스틱 기타와 퍼지(fuzzy)한 노이즈, 그리고 핵심을 콕콕 찌르는 드럼이 애드리앤 렌커(Adrianne Lenker)의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이들의 음악은 조니 미첼과 조아나 뉴섬의 창조적인 후계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단단하고 풍성하다. 그리고 이들이 첫번째 정규 음반작업을 마친 뒤 7개월만에 다시 작업에 몰두하여 만들어낸 두번째 정규 음반 [Capacity]는 올해 발매된 모든 음반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운드와 가장 끔찍한 가사를 동시에 품은, 매우 독특한 색깔을 지닌 음반으로 기억될 것이다. 밴드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애드리앤 렌커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쓰인 이 음반은 다른 뮤지션이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아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아우라로 가득차 있다. 2015년에 [Carrie & Lowell]이 있던 그 자리에 2017년의 [Capacity]가 자리를 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렌커는 어린 부부 밑에서 태어났다. 이 부부는 렌커를 낳은 뒤 오컬트 신흥종교에 빠져 양육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네살 무렵부터 렌커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음반의 커버아트는 렌커의 삼촌이 어린 렌커를 보살피는 사진이다) 거친 십대 시절을 거치며 렌커는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들이 이 음반에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가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또 너무 구체적이기까지 한데, 그 기억들이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기록되지 않고 렌커의 시선을 거쳐 시적으로 표현되는 지점이 매우 아름답다. 추하고 끔찍한 경험을 아름답게 풀어내는 능력은 예술가가 가진 가장 위대한 재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세상을 구원하는 마지막 동앗줄은 예술가의 이런 손짓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렌커는 노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녀의 그런 정서를 살포시 감싸 안는 것은 밴드의 단단한 사운드다. 버클리 음대에서 수학한 이들의 음악은 결코 ‘아카데믹’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허술하지도 않다. 가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아름답게만 들리는 멜로디라인과 몽롱한 포크록 사운드는 렌커의 시적인 시선을 형상화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가사와 사운드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음반의 통일된 정서가 탄생하는 셈이다.

이 음반에서 렌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생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집으로 가는 길조차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여성이 있다면 바로 그 집으로 가는 길 도중 자신을 따라온 남성에 의해 폭행을 당한 렌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Watering”) 그와중에 그녀에게 가장 많은 폭력을 휘두른 그녀의 어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감정이 복잡해질 수 밖에 없다.(“Mythological Beauty”) 교통사고로 애인을 잃었던 그 순간 함께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망 속에 살아간 그녀였지만, 그 때 자신들을 친 차에 타고 있던 여성의 미소를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로 삶의 섬뜩한 순간을 포착해는 펄떡거리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Shark Smile”) 코마에서 깨어났을 때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를 바랬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Coma”)에 무너지다가도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 “내 안의 여성, 그리고 네 안의 여성을 봐”라고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지점(“Pretty Things”)에서 예술가의 위대함을 목도한다. 결국 이 음반은 “There’s a child inside you who’s trying to raise a child inside me” 의 시절을 지나 (“Mythological Beauty”) “There’s a woman inside of me. There’s one inside of you, too.” (“Pretty Things”) 의 시대로 나아가는 그 지점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사회의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환원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어낼 수 있는 아티스트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이 음반은 단연코 올해의 음반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