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

026-머리부터천천히_앞-600x883
박솔뫼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문장은 완벽하게 문학적이고 소설은 온전히 문학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그녀의 작품을 비유하기 위해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이다. 문학이라는 필름 위에 문장이라는 배우를 등장시켜 글자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능력은 ‘기묘하다’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고심 끝에 내가 떠올린 영화는 데이빗 린치와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조금 불편한 이미지들로 서사를 구성하되 메타-필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영화적 언어에 능통한 다층적 성격을 지닌 작품들이 떠올랐다. <머리부터 천천히>는 장황하고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학적 이미지가 감지되고, 다시 그 낯선 이미지들의 연결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절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이야기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들처럼, 어떤 공간에 있지만 그 공간에 있지 않은 초현실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인물을 통해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을 빙빙 돌려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어쩌면 문학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와 같은 서사를 다루는 다른 예술 장르로 절대 재현할 수 없는 문학만의 미덕을 충실히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학 내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문체와 주제전달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챕터간 구성이 치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챕터별로 화자와 주요인물이 바뀌다 보니 서사구조가 아닌 소설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를 따라가는 것조차 조금 벅찰 때가 있었다. 물론 그조차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x9788937473074
오늘날 한국사회는 ‘치욕의 시대’를 살고 있다. 타인에게 얼마나 더 큰 치욕을 안겨주느냐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급으로 깔아뭉개는 시도는 그래서 일상화되어 버렸다. 타인보다 조금이라도 계급적으로 우수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지독하게 활용하여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 극도로 세분화된 계급구조는 극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로 구성된 사회를 만들어버린다.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진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듯 좁은 땅덩어리와 많은 인구때문이다. 자원은 부족하고 땅덩어리는 좁으니 땅 한평의 가치가 사람 한명의 가치보다 우선시된다.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공부하고 노력했지만 건물을 물려 받은 친구보다 삶의 질이 훨씬 낮은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힘이 탁 풀려버린다. 노동이 죽어버린 사회, 노동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되기란 쉽지 않다. 사회 전체적인 창조성은 빠른 속도로 고갈된다. ‘집주인’이라는 ‘직업’이 높은 지위로 대접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고용 불안정이 상대적으로 덜한 공무원이 최고 인기 직업이 되었다. 집이나 건물을 살 수 있는 돈을 ‘공짜’로 건네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처음부터 틀린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이 사회는 패배하고 있다. 패배의 대상은 다른 아닌 사회 그 자체다. 사람은 죽어가고 땅과 건물만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개걸스럽게 번식해나간다.

이런 사회에서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심리가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다. 영어만 잘 했다면, 능력만 있었다면, 부모가 돈만 대주었다면, “나는 떠났을거야”라고 말하는 겁 많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넘실거린다. 그들의 욕망과 현실 간 괴리가 심해질수록 현실에 대한 투정은 늘어만 가고 외국에 대한 환상은 커져만 간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자신의 원하는 가치를 찾아 조국을 떠난 한 청년의 고생담을 그리고 있다. 외국에서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겠지만 한국 밖을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급적으로 한두단계 밑으로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에서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살아왔던 대졸자가 미국에서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세탁소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풍경은 아니다. 언어장벽과 문화장벽은 ‘유리천장’을 두껍게 만든다. 적극적으로 섞이려는 노력을 해도 수십년 간 살아온 터전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갖은 노력을 다해 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경계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2세는 어떠한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뿌리의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삶의 구석구석에서 차별을 경험할 것이다. 결국 높은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는 외국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업그레이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트레이드 오프’만이 존재할 뿐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계나는 그 트레이드 오프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호주에서의 삶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녀에게는 허풍과도 같은 환상도 없고 조국인 한국에 대한 경멸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조금 더 잘 맞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은 작은 욕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삶의 소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적지 않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 조국의 익숙한 사회 시스템, 언어, 문화, 친구, 가족까지 다 내려놓고 몇년동안 죽을 고생을 해야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만성적인 남녀차별과 불안정한 고용상태, 삶의 벼랑까지 몰아붙이는 냉정한 사회적 공기 등 싫어하는 것들과 멀리 지내기 위해 그녀는 젊음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한다. 그 결과 그녀가 얻는 것은 작으면 작다고 할 수 있고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다른’ 생활이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작은 일상. 그녀는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주인공이 ‘한국이 싫어서’ 택한 국가가 호주라는 점이 흥미롭다. 호주는 넓은 면적과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수를 나타내는 곳이다. 그래서 한국과 삶의 패턴이 매우 다르다. 완성품이 아닌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노동인구 간 경쟁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 대도시를 벗어나면 삶의 속도도 많이 느려질 것이고 집값도 많이 쌀 것이다. 한국과 다른 계절에서 다른 하늘을 품은 그 곳에서 계나가 얻은 작은 일상을 왜 그녀의 조국은 결코 줄 수 없었는지 곱씹어볼 일이다.

소설은 우선 재밌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구어체로 진행되기 때문에 문체도 맛깔스럽고 페이지도 쉽게 넘어간다. 현지인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묘사도 사실적이고 공감대도 폭넓게 형성될 수 있다. 그 와중에 한국을 조국으로 하는 젊은이들의 고단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길은 결코 무책임하게 밝지 않다. 하지만 절망으로 가득차 있지도 않다. 절묘한 균형감각이 흥미롭게 읽힌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한국은 불균형과 노골적인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다. 윗 세대의 아랫 세대에 대한 억압,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당당한 차별, 자본가와 노동자 간 넘을 수 없는 장벽 등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불균형, 혹은 차별의 대상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일 것이다. 이 나라의 절반이 만성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또다른 절반은 그것이 폭력인지 모른채 살아가거나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음으로써 비판의 대상에서 피해 나가려는 소극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갉아먹는 수많은 요인들 중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남녀 불균형, 혹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고, 가장 먼저 해방되어야 하는 계급이 여성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여성운동, 혹은 페미니즘 운동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 한국 여성의 위상이 지금과 같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과 불편함을 문학의 차원에서 다루는 작업은 매우 소중하고 더 발전되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중반 여성의 ‘평균’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균’의 삶을 살아가는 가상의 여성이 겪는 다양한 폭력을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표현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학교에서 여학생에 대한 비논리적인 억압에 힘없이 저항도 해보며 자라다가 성추행과 성폭력에 무작위로 노출되는 삶을 견디어 내어야 한다. 시스템적으로 불공평하게 설계된 취업관문을 어렵게 통과하면 육아가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처음부터 다시 불공정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결국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가정주부가 되면 자아실현은 배부른 사치처럼 느껴지고, 시댁의 눈치없는 잔소리에 익숙해질 때쯤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이처럼 딱히 실패하지도, 딱히 특별한 삶을 살지도 않은 이 평범한 여성이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을 얻게 된다고 마무리짓고 있는데 그 섬뜩한 결론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위와 같은 여성주의적 시각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는다 해도 대단히 멍청한 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먼저,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노골적으로 페미니즘 문학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 어떠한 새로운 경향이나 에너지를 느끼기 힘들다. ‘평균적인 여성’을 가공하여 대다수의 여성에게 공감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하나 낳은 여성이 한국사회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형적인 평균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위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여성이 훨씬 많을 것이고, 위와 같은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 82년생 김지영씨의 삶은 많은 여성들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읽힐 수 있다. 페미니즘이 사치처럼 느껴지면 안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 안에서 함께 호흡해야 한다. 왜 페미니즘을 드러내기 위해 ‘평균’적인 여성의 삶을 시대순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것인가. 또한, 개개인에 따라 여성주의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갖는 다른 가치에 의해 무시될 수도 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여성, 혹은 아무런 문제 없이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자란 여성 등 ‘평균’이 아닌 양 극단에 속한 여성들이 고민하는 것들이 과연 김지영씨의 삶과 호응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어떠한 답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김지영씨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지나치게 많이 삽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이 폭력적으로 타자화되고 있다. 가족 내에서 모든 특혜를 받는 남동생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고, 아버지는 멍청한 존재로만 묘사된다. 김지영씨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남성은 폭력의 주체로서만 기능한다. 심지어 이 책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조차 자기 자신이 만성화된 남녀 차별의 주체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사회의 절반을 멍청하게 묘사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을 위하는 최선의 방식인지 고민을 많이 했는지 의문이다. 발전적이지도 않고, 자기성찰적이지도 않으며, 이유없이 남탓만 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투정만 잔뜩 적혀 있다. 이 책에는 ‘그래서’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가 없다. 고통의 나열은 이미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2016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씨조차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다. 문장은 새롭지 않다. 건조한 기사나 칼럼을 읽는 느낌이다. 신문 등에서 따온 구체적인 수치가 등장할 때마다 그래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 책의 저자는 성실한 정보수집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문학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 일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목적이 너무 뻔히 읽혀서 재미가 없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나이브해서 설득력이 높지도 않다. 차라리 기사나 칼럼의 형식으로 썼다면 재미없는 글 하나 읽었네, 하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소설의 영역에서 이런 책을 읽으니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글이 아니다. 논문이나 칼럼이라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정책적 해결점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 문학에서는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고통의 한 단면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권여선의 <레가토>가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프로의 냄새가 나지 않고 아마추어의 설익은 의욕만 잔뜩 읽히는 책이다. 차라리 대학생의 습작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편: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개념이 일상화되고 상식화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 서구적 개념이 한국의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전치(displace) 현상의 지역적 특수성을 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해당 개념의 전파속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신현준을 비롯해 기성 학계 내,외부에서 활동 중인 젊은 학자 집단이 일반 대중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법한 이 주제에 대해, 서울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고무적이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는 서양 학계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젠트리피케이션 이론을 홍대, 서촌, 한남동 등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법한’ 서울 내 특정 지역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기존 학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현장연구를 더함으로써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서구사회에서 기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서울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뒤 저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그곳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문헌 중심의 연구가 놓칠 수 있는 미시적 실제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3장은 도시재생 등 정책적 관점에서 특정 지역의 변화양상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계획 및 도시재생 등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흥미로운 지점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언론에서 피상적으로 다루어지며 특정 이익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부족하나마 학술연구의 형식으로 담아낸 것은 이 책이 가지는 최고의 공헌이다.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지역(홍대 등)부터 현재 막 시작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해방촌 등)을 넓게 아우르며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쉽게 지나쳤을 오류들을 세심하게 정정해주는 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이 현재 한국 지역사회의 정신머리없는 발전 일변도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등 이 책이 공헌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이 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내고 있듯, 서구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노동계급-힙스터-고소득 전문직-대기업자본 순으로 이어지는 특정 지역의 점유 구도가 서울의 주요 특정지역에서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의 지역학, 혹은 부동산 시장은 단순히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제주체의 욕망, 혹은 목적함수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아전투구의 장이다. 서양의 일반적인 대도시들처럼 도심과 주변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종 및 수입에 의해 거주지역이 철저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사회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문화’, 혹은 ‘한국의 철학’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만 “힙”해보여도, 즉 조금만 돈이 될 것 같아 보여도 바로 개발이 들어간다. 그곳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 철학적 중심 없이 단기적 수입 창출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는 ‘자본’ – 이것이 “문화자본”이든 “경제자본”이든 돈의 냄새를 맡아 움직이는 본질적 특성은 돌일하다 –  에 의해 거주의 불안정성을 심화되고 난개발은 가속화된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안적 이론, 혹은 우리 사회에 특화된 이론적 틀이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저자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현장연구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논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의 챕터에서 발견된다.

둘째, 성공회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학술연구로서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어진다. 물론 모든 학술연구가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모든 학술연구는 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자본”을 “경제자본”과 확실히 다르다고 가정하고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가 발생시키는 전치현상의 시작을 지나치게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은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이러한 표혀닝나 생각 자체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튼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소규모 생산자들이 임대료가 싸면서도 문화적 창의성을 위협받지 않는 ‘적절한’ 곳에 자리를 틀고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다. 그 이후 상권이 확대되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규모 상업자본이 돈냄새를 맡고 이들을 몰아내며 문화적 창의성은 획일성으로 상쇄된다. 이후 더 큰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거나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로 인해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방식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의 첫번째 단계에서 ‘소외’당하는 원 거주민들의 입장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문화자본을 소유한 생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준에서 이용당하고 희생당한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큰 결점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원 거주자들이 이룩한 거주문화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들어왔다” “이 곳이 갖는 매력에 이끌려 들어왔다”와 같은 뻔한 변명으로 원거주자들의 피해를 뭉뚱그리려는 시도가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쨌든 상권은 확대되었고 임대료는 올랐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삶은 파괴되었다. 문화자본 생산자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싸이 이전에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있었다면 테이크아웃드로잉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테이크아웃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왜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들을 이토록 옹호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이 주어져 있어도 지금과 같은 성격과 규모의 생산활동을 했을지 증명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호의 근거를 찾기 힘들다.

셋째, 경제학적인 전문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종종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무시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신현준은 자신이 부동산 시장에 대한 공부도 꽤 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서울의 부동상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경제학적인 접근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인터뷰와 현장 답사 등의 형식을 통해 인류학적 접근, 혹은 사회학적 접근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시장과 노동 시장, 그리고 경제정책 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임대료 문제는 서비스업의 임금 문제, 더 나아가 경제정책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권이 형성되는 지역의 공급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건물주, 고용주, 피고용자. 건물주는 불로소득자다. 고용주의 자본은 한계적이다. 피고용자는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위태롭게 노동을 공급한다. 결국 부의 재분배 문제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굳이 “문화” 운운하지 않아도 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조세정책과 도시개발 정책, 서민주거안정 정책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 문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이 절반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부분에 대한 고찰이 극도로 제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분명하고 독보적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다른 책에서 아시아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짓고 넘어가는 것은 왠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앞으로 더 깊은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데이브 에거스: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아픈 이야기

d981f1325
일반적인 소설책 크기인 신국판에 신명조체, 폰트 사이즈 10에서 11 정도의 크기로 번역된 책의 두께가 600쪽이 넘어가면 일단 책을 집어 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약간의 고민을 하게 된다. 빠르게 읽어나간다고 해도 최소한 며칠이 걸릴 정도의 분량에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위해 팔과 어깨의 근육에 양해를 구해야 하는 무게, 그리고 혹시나 이 책을 읽기로 한 결정이 잘못되었을 경우 얻게 되는 내상의 크기 등을 생각할 때 책의 첫 쪽을 넘기기 위해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예 작가 데이브 에거스의 데뷔 장편 소설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아픈 이야기>는 장황한 책의 제목만큼이나 수다스럽고, 그래서 분량도 엄청나다.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서사구조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신 없이 ‘무언가가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의 형식은 작가가 품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부모를 모두 암으로 잃은 뒤 7살짜리 어린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20대 초반의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이 겪는 정신적인 혼란을 표현하기 위한 문체와 서사구조는 분명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었다.

제목만큼이나 정신 없는 – 사실 이 소설의 제목이 거의 모든 것을 다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시피 이 소설은 작가의 생애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든, 뉴스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실제 인물이 2차 가공되어 표현되는 그 어떤 생산품에 대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재현하는 것이 갖는 의미 역시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의 시각과 의도에 맞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현실이 얼마나 일관되게 편향되어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로운 읽기 방식이 될 것이다. 에거스는 이러한 면에서 분명 일정 부분 성공하고 있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다가도 인터뷰 등 다른 형식을 삽입하여 독자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가운데 에거스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여러 부조리를 나쁘지 않은 유머와 함께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결국 작가의 혼란을 독자가 충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고, 반대로 이 책의 단점은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600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모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만, 반대로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밑줄을 긋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단어에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그 어떤 단어도 머릿속에 깊게 박히지는 않는다. 적절히 가볍고 적절히 무거운, 기존의 문학 문법을 적절히 배반하면서도 결국 기존 문학이 물려준 유산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요즘 주목받는 신진 작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이디 스미스처럼 완전히 판을 엎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줌파 라히리처럼 기존 문학의 토대 위에 미학적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도 아닌, 뭔가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한,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지루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때문이다.

일주일 넘게 이 책을 가지고 출퇴근하며 책을 끝내기 위해 많은 끈기와 용기를 내야 했다. 내가 투자(..)했던 노력만큼 이 책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미국의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일으키는 재미있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있는 젊은 작가의 역사적인 데뷔작(퓰리쳐상 최종 후보까지 갔다고 한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낭비가 많은 소설이었다.

김금희: 너무 한 낮의 연애

x9788954640756
때때로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숭고함은 타인에 대한 경멸로 시작될 때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곤궁한 처지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현실과 정 반대의 길로 자신을 내모는 길을 택한다. 희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종교에 매달리는 모습은 차라리 논리적이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혹은 자신의 모자람으로 인해 발생한 마음의 짐을 이와 관련이 없는 완전한 타인에게 더 큰 상처로 부풀려 넘겨 줌으로써 얻게되는 말초적 쾌감이 마치 면죄부인냥, 회복제인양 부끄러움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이것이 인간 마음의 바닥 언저리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일지라 해도, 그 형상을 지켜보는 마음 역시 편할리 없다.

김금희의 소설집 <너무 한 낮의 연애>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하나같이 어떤 어려움을 견디어내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바라보는 관찰의 대상은 화자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화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수단. 비록 저열하고 옳지 않다고 해도 소설 속 화자는 그 시선을 쉽게 거둘 수 없다. 어쩌면 대상을 억지로 아래로 끌어 내리는 그 비열함이 현재의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직으로 좌천되어 인생의 위기를 맞이한 “너무 한 낮의 연애”의 화자 필용은 관객이 서너명 뿐인 연극을 진행하는 과거의 사랑 양희를 매일 지켜보면서 삶을 견디어 낸다. 과거 인연에 대한 반가움때문이라고 하기엔 뭔가 꺼림찍한 무언가가 필용의 행동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조중균의 세계”의 화자 역시 비정규직의 설움을 딛고 정규직으로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의 변방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회사에서 묘하게 겉도는 조중균”씨”가 구축한 단단한 세계를 애써 낮추어 보려고 한다. 상사가 따라주는 술을 거절할 힘조차 없는 화자는 끝까지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려고 하는 조중균을 우습게 여기는 주변 세상에 결국 굴복하고 마는,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세실리아”와 “고기”의 화자, 혹은 주인공 역시 가만 보면 정상은 아니다.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쌍하고 애처롭게 여길만한 삶을 살고 있다. 거짓과 위선으로 쌓아 올려진 위태로운 그들의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힘은 남들과 아주 조금 다른, 혹은 아주 조금 더 변방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타인의 빈틈을 파고들고 끌어내리는 볼품없는 오만함이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이 ‘평범한 비겁함’을, 김금희는 과연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힘을 내어 거부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지금의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겠냐고 묻는다. 이건 작가 스스로 깊은 성찰을 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솔직함의 영역이다. 한번 접고 들어가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현문에 우답으로 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독자 개개인도 꽤 깊은 수준의 반성과 성찰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응당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삶을 견디어 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의 숭고함을 지켜내는 일조차 참으로 힘든 시대이기 때문이다.

해나 피터드: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

ffce67345
특이하게 번역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이 책의 번역은 한마디로 엉망이다.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재창조 작업이다. 언어는 그 것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 역사와 심지어 공기의 냄새까지 품고 있으므로, 하나의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굳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번역하기 위해 작가와 이메일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영어라는 텍스트 뒤에 숨어 있는 도미니칸-어메리칸 이민자 문화의 컨텍스트까지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번역가의 수고스러운 과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의 번역은 놀라울 정도로 성의가 없고 게으르다. 자신의 지식이 일천하여 올바른 번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원문을 병기하는 방식으로라도 독자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채, 번역가는 원작의 원어가 갖는 문체를 완전히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 각각의 단어가 가진 고유한 의미까지 꽤 자주 왜곡하고 있다. 결국 영어 원문을 찾아 읽게 만들고 마는 번역가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한국의 번역 문화는 많이 발전했다. 열정과 실력을 두루 갖춘 우수한 번역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허세에 찌든 가짜 번역가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굴라쉬 브런치>라는, 단 한 글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엉망진창의 동유럽 여행기를 쓴 사람이 이 작품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재앙과도 같은 번역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에서 문체가 가지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늘한 감동을 선사하는건 오롯이 해나 피터드의 원작이 가진 괴력과도 같은 힘에 기인하고 있다. 시시껄렁한 동네 얼간이들이 열여섯 무렵부터 사십대 중반을 지나는 시점까지 살아가는 이야기를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시점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21세기의 <앵무새 죽이기>라고 해도 될만큼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과 따뜻한 인간미를 동시에 머금고 있다. 섹시한 동급생과 섹스하거나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인 남자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평범한 마을에서 한 여자 아이가 실종된다. “우리”는 그 실종사건과 관련이 된 듯, 관련이 되지 않은 듯 적당한 피해의식과 적당한 핑계거리를 번갈아 둘러대며 지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 중 누군가는 대마초에 찌들어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소애성애자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누군가의 부모는 이혼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끝없는 상상력을 무기 삼아 실종된 여자 아이의 미래를 멋대로 그리며 자위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와 어지러운 문장 속에서 삼십여년 간 이들이 살아온 집단적 삶의 실체가 하나 둘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인간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민낯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폭력과 무관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동네라는 세계에서 멀리 달아난 여성과 그를 한없이 사랑한 멕시코 남자,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삶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신비로운 힘이 발휘된다. 화자는 철저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들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대상화된 여성은 뒤틀리고 왜곡된다. 말을 하는 쪽은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저열함을 드러내고, 말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침묵 속에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사춘기의 뒤틀린 욕망이 한 인간을 사지로 내몰수도 있음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독자의 자아성찰까지 이끌어 낸다. 이 과정에서 직조된 서사구조는 매우 탄탄하다. 작품의 화자가 복수로 등장하여 환상과 사실을 오고 가고 시간의 흐름도 뒤죽박죽 섞어 버림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다. 해나 피터드의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볼 것이다. 물론 윤미나의 번역은 피할 것이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나는 술이 주는 효능, 더 정확히 말해 술에 의해 잊혀지게 되는 기억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술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태도를 불신의 핑계거리로 삼았고, 최근에는 술에 의해 흐물흐물해지는 몸뚱아리를 지켜보는 것이 썩 기분 좋지 않아서 술을 멀리하고 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술을 사랑하고 술에 의지하고 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의 태도와 자세까지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술은 충분히 사랑할만한 것이고, 술만이 창조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며, 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인정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슐렝 레스토랑에서 빈티지 와인을 마시는 즐거운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생의 고점에서 축복과 기쁨에 겨워 마시는 달콤한 한 잔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술과 경계선을 맞대고 서 있는 다른 축, 그러니까 죽음과 고통, 인내와 생존, 그리고 상실과 흐릿해진 기억과 같은, 조금은 어두운 것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술이 가진 고유한 쓴 맛의 향취가 책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온다. 술로 고통을 이겨내보려는 사람, 술을 통해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 얼떨결에 벌어진 술자리에서 슬픈 기억을 되살려버린 사람, 술의 또다른 벗인 숙취와 함께 하며 잊고 있던 인간의 저열함을 발견하는 사람 등, 굳이 단편 속 등장인물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충분히 술 생각이 날만한 인생의 불편한 껍질들이 하나씩 둘씩 벗겨진다. 우리는 그것을 슬픔이라고도 표현하고, 특정 사실에 기반하여 이야기하자면 비극이라고도 표현한다. 삶에서 이런 일이 한번 쯤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인생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 일이 일어난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안녕 주정뱅이>는 술 생각이 나는, 혹은 술을 마셔야만 할 것같은 그런 슬픔의 순간들이 견디어지는 과정을 정리한 가지런한 엘레지다.

전작들에 비해 보다 더 강렬해진 서사와 한결 매끄럽게 정돈된 표현 사이에서 권여선은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의 고단함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처음에는 묵직하게 달려드는 서사구조에 저릿함을 느껴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가(“봄밤”) 시각적으로 파고드는 강렬함에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이모”) 인간 심리의 심연을 가지런히, 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드는 비판의식에 레퍼런스를 찾아보기도 했다(“실내화 한켤레”). 어쨌든, 소설가들이 뽑은 지난 해 가장 좋았던 책, 뭐 대충 이런 제목의 리스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그 정도의 찬사를 받을만큼 뛰어난 책이구나 싶더라. 지금까지 내가 읽은 권여선의 책은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그리고 장편 <레가토> 등 총 세 권이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과거 권여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색깔을 잘 지키면서도 그의 위치를 독보적인 곳까지 올려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봄밤”과 같은 작품이 주는 강렬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Diane Coyle: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

k10183

모두가 아는 GDP, 하지만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GDP. “국격”같은 해괴한 개념을 좋아하는 국민적 특성을 가진 어떤 나라에서는 GDP보다 올림픽 금메달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가의 살림살이나 삶의 질, 그리고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위해 사용하는 주된 지표로 GDP를 선호한다. GDP는 완벽하지 않은 지표다. 한 국가의 경제 수준을 하나의 단일한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부터 엄청난 생략과 왜곡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가 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권위적인 지표로 자리잡았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GDP가 완벽하지 않다면, 새로운 지표를 개발할 것인지, 혹은 GDP를 보완해서 발전시킬 것인지 여부도 생각해야 한다.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는 이러한 고민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책이다. “역사책”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GDP의 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GDP의 현재 위상과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을 합당화시키기 위한 근거자료로써 GDP의 기원이라던가 발전 과정에서의 여러 실책들, 그리고 GDP에 제기되는 여러 비판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고 있는 셈이다. 목적이 분명한 책이기에 포기하는 지점도 많다. 시간순으로 정리된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저자의 주장이 생뚱맞은 곳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매우 얇고 간결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또한 GDP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경제학 전공자들에게는 미진한 감이 느껴지는 정보의 ‘깊이’도 이 책이 가지는 또다른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전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GDP가 발전 초기 단계에서 이미 후생(welfare)의 측정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 후생을 현재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이러저러한 학자들이 이러저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라는 개괄적인 소개만을 간단히 하고 서둘러 마무리짓는 구성은 전채요리만 먹고 본식을 건너뛴 듯한 공복상태를 유지시킨다. 하지만 GDP와 관련된 여러 혜안들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이 갖는 가치는 충분한 듯 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한번 쯤 생각했을 법한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GDP에 포함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주부의 세탁 노동 가치가 한 나라의 금융산업이 창출하는 가치의 총합의 80%에 달한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과 함께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집에 고용되었던 가정부와 결혼할 경우 GDP가 감소한다는 역설(가정부의 노동가치는 가정주부로 신분이 전환됨으로써 GDP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을 예시로 제시함으로써 GDP가 갖는 통계적 허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이런 방식의 논리 전개는 학부 수준의 독자가 GDP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다 정교하고 복잡해진 금융산업이 GDP에 기여하는 바와 인공지능 등 새로운 형태의 자본-혹은 노동-이 탄생함으로써 수정될 수 밖에 없는 기존의 계산 방식에 대한 고민 등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GDP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적당한 수준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시장가치로 환산된 최종거래 금액으로 정리하는 현재의 방식이 정당한가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GDP에 대한 소개서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행복’이나 ‘여가’같은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GDP에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고민은 Weimann 등이 함께 쓴 <Measuring Happiness>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이 책도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들을 어떻게 기존 경제학에 융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현재 수준을 확인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유시민: 나의 한국현대사

x9788971996096
교과서로만 역사를 배우며 베트남 전쟁을 “(나쁜) 공산당과 (착한) 미국이 싸운 전쟁에서 우리나라는 의롭게 참전하여 용감히 싸웠다” 정도로 이해한 내게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사고체계의 방향성을 전환시키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드레퓌스 사건부터 팔레스타인 사태까지 각각의 주제를 다루며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던 8,90년대 제도권 역사 교과서의 해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 책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것이라 짐작한다. 이 책을 쓸 당시 젊은 유시민은 열렬한 투쟁가의 모습에서 살짝 벗어나 유려한 필체로 독자를 설득하는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그러던 그가 노무현과 함께 격동의 시절을 보내고 다시 ‘작가’라는 직함을 달고 다니는 요즘의 모습을 보며 친구들과 함께 “참 행복하고 편해 보인다”라며 괜히 오지랍을 부려가며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한다. 나와 내 친구들에게 유시민은 아이돌이자 판타지스타였다. 통찰력과 의지, 신념을 가진 지식인이 현실 정치에서 휘둘리고 좌절하는 모습은 괴롭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반드시 목격해야만 하는 어떤 현상이었다.

정치판과 공직사회를 경험한 뒤 글쟁이의 세계로 돌아온 그가 오랜만에 다시 역사책을 펴냈다. 제목에 선명하게 박힌 “나의”라는 단어에서 균형감을 갖고 냉정하게 쓰인 교과서적인 역사책은 쓰지 않았다는 선언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학생운동과 정치운동, 정무직 공무원 생활까지 경험하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체험한 그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주제별로 엮은, 일종의 ‘아재의 옛날 이야기’다. 때문에 이 책이 가진 편향성과 뚜렷한 목적의식을 문제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그러자고 마음먹고 쓴 책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국 현대사를 조망한다는 명분 아래 현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과거에 선배들이 겪어 왔던 고초와 현재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의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고,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중요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으며 그들의 영향력이 현재에도 정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난민촌”과 “병영”을 지나 “광장”에 서 있는 현대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넌지시 제시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이 가진 한계도 그래서 명확하다. 작가가 속해 있던 ‘장르’에 대한 이야기는 풍성하고 재미있다. 구체적인 비화까지 등장하는 운동권 시절 이야기를 읽다보면 타고난 이야기꾼의 완숙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경험하지 못했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글쟁이로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작가는 독재정권의 권위 아래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과 급진적 학생운동이 괴리되었던 현상을 지적하며 모든 시민이 단일대오로 함께 싸울 때에만 역사가 진보했음을 설파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가 속해있던 학생운동의 반대편에서 겁에 떨며 생업에 종사해야만 했던 대다수 일반 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다. (이것은 민족주의 사관이 일제시대 민초들의 삶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극소수 운동가들이 과연 식민지 시대에 생존을 목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평범한 일반인 한 명 한 명과 어떻게 연결되거나 분리되었는지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연구에 대한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두 축, 조선일보와 삼성에 대해서도 거의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독재정권 시절을 지나오며 탄압을 당하던 주요 언론사들이 어떻게 본인들의 적극적인 의지로 극우의 편에 서게 되었는지, 정경유착의 고리를 빠져 나오는 과정에서 재벌이 어떻게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지나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다면, 이 책은 “한국 현대사” 라기 보다는 “한국 정치운동사”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시민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를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는 주인공으로, 혹은 관찰자로 늘 현대사의 중요한 시점마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현장을 목도해왔다. 그런 그가 직접 기술하는 현대사는 분명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가 칭송하듯 교과서로 쓰일 정도는 아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한 아저씨가 다음 세대에게 “이런 일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자,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아왔습니다”라고 알려주는 사적 기록의 의미가 더 크다. 객관적인 사료로서의 기능은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어쩌면 그가 가장 잘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한국 확장판 정도를 기대했다면 기대와 약간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