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덩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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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가 관객으로 하여금 전쟁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전쟁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했다는 혀니루님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영화는 매우 재미있고 또 유례없이 새롭다. 적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특이한 전쟁영화는 탈출과 생존이 유일한 목적인 군인들과 그들을 위해 애쓰는 “조국”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와 피로한 피부의 결을 그대로 촘촘히 짜여진 플롯 사이에 재현한다. 영화는 관객을 전쟁터의 한복판에 위치시키기 위해 등장인물의 처절한 사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이전의 전쟁영화들이 당연히 받아들였던 많은 가정들을 버리고 전쟁의 실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 영화의 90% 이상을 할애한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로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려야만 할 것 같은 느낌, 혹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이룩한 가장 큰 성취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력이 탁월한 감독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놀란은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효과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이다. 그는 새로운 차원의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꾼이라기 보다는 기존 영화세계에 존재해 왔던 가장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차용하여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기술자에 가깝다. [메멘토]와 [인섬니아] 모두 이야기 자체가 매우 독특한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영화의 형식을 비틀어 관객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새롭게 느끼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이후에도 놀란의 서사 기술방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셉션], [인터스텔라]로 넘어오면서 조금씩 더 진부해졌을 뿐이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볼 때 ‘새롭다’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다양한 트릭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모두 이전 영화들이 꿈도 꾸지 못했을 ‘꿈 속의 꿈’과 블랙홀 등 현실 저편에 있는 공간을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현해냈다. 놀란이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시각화를 이루기 위해 행해온 과정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심지어 장인정신의 향기까지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많은 공대생-ish한 영화매니아들을 열광케 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덩케르크]는 이러한 놀란의 장점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놀란은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적 장면을 선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관객을 그 공간에 위치시키길 바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제보다 더 극단적으로 연출된 청각적 효과와 영화적 비약까지 감수해가며 관객의 체험지수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영화 내내 심장을 조여오는 한스 짐머의 배경음악, 귀를 찢는 듯한 폭격기 소리와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극단적인 클로즈업 헨드헬드 카메라, 그리고 아주 깨끗한 화면으로 이 모든 것을 재현해 내는 고화질 필름과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놀란의 세계에 초대된 관객은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의도적으로 즐거운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받은 셈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룩한 이러한 시각적 성취는 영화 막판에 이르러 놀란의 빈약한 서사구조 탓에 상당 부분 빛이 바랜다. 물론 대중영화로서의 흥행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택했을 고육지책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쓸데없이 장황하게 이어지는 애국심 고취 장면을 비롯해 영화 막판에 위치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진부하고, 더 나아가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촬영되었기에 더더욱 이 영화에 푹 빠져있던 관객을 사정없이 현실로 끄집어내어 버린다. 처음 맛보는 환상적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무리한 기분이다. [다크나이트] 시리즈가 오락영화의 최전선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이유, [인터스텔라]가 유례없는 시각적 체험을 선사했음에도 애끓는 가족애밖에 모르는 일차원적인 캐릭터 탓에 큰 감동을 선사하지 못한 이유, [인셉션]이 꿈 속의 꿈 속의 꿈을 반복하며 만들어낸 복잡하고 다층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쾌감’ 이상의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 모두 공통적으로 놀란의 치명적인 약점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조금 더 창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 이야기 위에 놀란의 ‘입장’을 드러내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놀란의 영화에는 놀란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영화적 즐거움을 주는 오락매체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철학을 담아내는 예술의 한 플랫폼이기도 하다. 놀란이 기술자 이상으로 나아가 작가로 인정받고 싶다면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놀란의 영화를 보면 먼저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삶에서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의 다음 영화가 나오면 또 보게 되겠지만, 다르덴 형제나 마이크 리처럼 영화를 본 관객의 삶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진정한 체험’은 다음에도 없을 것 같다.

Ken Loach: I, Daniel B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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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 모두 영화의 서사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이다. 다르덴 형제가 영화의 윤리적 기능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철학가라면 켄 로치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담대히 활용하는 사회운동가에 가깝다. 즉,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고민을 강요한다면 켄 로치의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작가의 영화가 미학적으로 훌륭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모든 영화에서, 화면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그 내용에서부터 우러나온다는, 기의를 부여받은 새로운 기표의 탄생을 확인할 수 있는 호사 역시 누릴 수 있다.

[I, Daniel Blake]는 캐릭터의 이름 앞에 “I”라는 1인칭 주어를 다시 한번 강조하여 새겨넣음으로써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한다. 이 주체성은 캐릭터의 것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이기도 하며, 영화를 본 관객에게 전달되는 어떤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영국의 형편없는 사회보장제도를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가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현 사회체계의 전복을 꿈꾸기 보다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받고자 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사회주의 영화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켄 로치 특유의 노동자 사회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은 여전히 살아있다. 또한, 연대하는 노동자 집단과 억압하려 드는 기존 지배구조를 대립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운동가적 기질이 여전히 영화 속에 짙게 배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또다른 축인 미혼모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녀가 다니엘 블레이크의 탄원서를 대신 낭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연대의 연속성을 확장적으로 보여주는 점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 오랜만에 거장의 단단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백: 뷰티인사이드

뷰티인사이드
예술작품에 대한 나의 기호는 대체로 평론가들의 그것과 일치하는 편이다. 어쩌면 평론가의 시선으로 예술작품을 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대하는 나의 감정이나 입장보다는 작품을 만든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작품이 사회, 문화, 공간 따위의 환경과 어떻게 어우러지는 지에 집중한다. 그런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작품을 접할 당시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일 수 있고,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의 역사’ 중 유난히 민감한 지점을 강하게 건드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평론가들의 평이나 대중의 관심과 상관없이 그저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생기게 된다.

최근에는 [뷰티인사이드]가 그랬다. 아마도 절대 주머니에서 내 돈을 꺼내지 않게 만든 포스터와 시놉시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감독, 딱히 챙겨보지 않는 주연배우들.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반복적으로 상영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않았을 작품이다. 케이블 영화채널을 통해 보게 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러하듯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해서 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영화의 후반부부터 보기 시작했고, 몇개월 뒤 영화의 중간 부분을 볼 수 있었고, 또 몇개월 뒤에는 영화의 초반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한 호흡으로 확인한 것은 네번째로 이 영화를 접한 어제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영화는 사실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매일 신체가 변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창조한 고유한 세계도 아니다. 시종일관 어떻게 하면 이뻐보일까를 고민하는 화면과 머나먼(그리고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체코까지 가서 결국 이어지고야 마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이 그리 깊은 철학적 담론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때때로 지루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얻어 걸린’ 듯한 장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대부분 한효주가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에너지 과잉이 알파요 오메가인 한국 영화 판에서 절제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그녀의 연기만이 이 영화가 차별화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자 이 영화가 가진 거의 유일한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서 한효주의 연기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전 작품인 [동이], [광해], [반창꼬], 혹은 이후 작품인 [해어화]에서 보여준 모습이 기존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너지 과잉의 일차원적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쩌면 [뷰티인사이드]에서 감독의 디렉션이 꽤나 훌륭한 것은 아니었는지 추측해보게 된다. (혹은, 그만큼 여성 캐릭터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힘이 한국영화계에 부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효주가 연기한 이수라는 캐릭터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성장해나가는 유일한 캐릭터이자 영화의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는 점에서 영화의 정체성 자체가 현현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거의 대부분 남자 주인공 우진이 맡고 있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매일 신체구조가 변하는 애인을 눈 앞에 둔 이수의 복잡한 심정이 부각되면서 우진은 관찰자적 시선으로 한발 물러선다. 애인이 가진 비밀을 받아들이기 위해 겪었던 혼란,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당찬 모습,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떠나고 다시 돌아와 용기를 내는 모습까지, 영화는 이수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있을 때 잘해라”라는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이 메시지가 매우 통속적이긴 해도 그만큼 강렬하기도 한 것이어서, 빠르게 떠나보내야 하는 상대방의 ‘어제’에 집착한 나머지 ‘오늘’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전해진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롯이 한효주의 연기 덕분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효주의 이런 모습은 다시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더욱 희귀한 경험으로 남게 될 영화다.

Moonlight: Stills

결혼 후 아내와 함께하지 않는 첫번째 월요일, 유난히 잠들기 힘들었고 유난히 일어나기 힘들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출근길을 조심조심 지나 졸린 눈을 비벼가며 오전시간을 보내고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 이어폰을 꽂고 얼마전 아마존에서 주문한 [Moonlight: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의 음원을 듣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본지 몇달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던 마음속 잔상이 다시 강해짐을 느낀다. 영화적으로도 완벽했지만 영화를 떠나 그저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배우들의 눈빛과 숨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을 지긋이 감싸 안아주었던 Nicholas Britell의 사운드트랙도. 이 영화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음을 증명한 몇 안되는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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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필레: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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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은 명민한 영화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 감독 조던 필레는 특유의 B급 감성과 독립영화의 자유로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흑백 갈등과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를 미시적인 시선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냈다. 미국사회를 떠받드는 핵심은 ‘가족’과 ‘이웃’이다. 3억이 머는 인구, 다양한 인종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잠재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조되는 ‘커뮤니티’의 중요성에 기인한다.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지만 가족의 위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학교, 군대, 이웃 등 그룹화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개념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주입한다. 그 결과 미국 시민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 덕에 국가적 위기상활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이 견고한 국가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은 문제는 시민 개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한다. 1%와 99%가 서로를 경멸하고, 여성의 어려움을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자의 기본권을 다수자가 지지하지 못할 때 사회는 갈라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요인은 아마도 모두가 알고 있듯 백인과 흑인 간 갈등일 것이다. <겟 아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갈등의 미묘한 시작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또한, 인디 공포-코메디 영화 장르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장르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관객은 충분한 몰입도와 함께 영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며,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식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같은 유색인종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장치들에서 현실적인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오거나 서스펜스적 장치가 들어가 있어서 공포 영화로 인정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 지금 길거리에 실재하는  공포의 조각을 영화적 언어로 잘 옮겨 놓았으며, 그 결과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관 밖에서도 그 공포가 지속된다는 생각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이 영화의 숨은 장치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면, 단순히 이 영화를 ‘재미있는 공포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불편함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아마도 그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와 예의를 숙지하지 못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들에게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인종이 서울에서 공존해야 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내어줄 의사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혹은,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썩 괜찮은 도시에 사는 선진국 출신 백인들의 문화에 동참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어떠한지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잠재성장률이 3% 이하로 내려가고 물가상승률이 2%가 채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은 침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돈을 벌기에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이 되는 셈이고,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타문화 배경의 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국처럼 극도로 예민한 신경질적인 국가에서 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겟 아웃>은 굉장히 심각한 경고의 메세지로 읽혀야 한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천구와 안산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스러운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드니 빌뇌브: 컨택트(Ar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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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홍보팀의 멍청한 제목 바꾸기 행위로 인해 영화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전체적인 의미가 완전히 왜곡될 위험에 처한 <컨택트>는 굉장히 잘 가공된 깔끔한 SF 영화다. 누군가는 지구 밖 생명체와의 ‘접선’에 초점을 맞추어 동명(..)의 영화 <콘택트>를 떠올렸을 것이고, 다른 어떤 이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과학 이론에 흥미를 느껴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를 비교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연식이 좀 된 관객이라면 <미지와의 조우> 등을 떠올리며 이 영화가 반드시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계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인류를 구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SF 장르의 일반적인 소재를 제외하면 감독과 배우의 역량에 의해 오롯이 자기 색깔을 지키며 독보적인 위치를 획득하고 있다.

사실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사고체계가 지배당한다”는 한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윤회적 구성을 가지는 외계인의 언어를 인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외계인과 한 언어학자의 사투(?)를 자연스럽고 적절한 서사구조라고 받아들이긴 힘들다. 먼저 작품의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위의 가설이 옳다고 해도 천재적인 한 언어학자에 의해 해독된 새로운 차원의 언어가 강대국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의해 전세계로 뻗어 나가고 그 결과 인류가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3천년이 지난 뒤 그 언어를 창시한 외계 생명체를 돕게 된다, 는 ‘미래’를 관객들도 먼저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간극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원형으로 보여지는 외계인의 문자가 해독되는 과정에서 관객이 참여할 틈을 전혀 주지 않고, 그 구조적 ‘비밀’은 등장인물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자체로 간직된 채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들과 동떨어진 차원에 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인류의 미래가 수정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약간 전체주의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정을 비롯해 영화 곳곳에서 논리적 비약,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이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첫째, 드니 빌뇌브 감독의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기대를 접고 그러려니 하며 보게 되는 것이고, 둘째, 빌뇌브 감독이 이러한 오류들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부분에서 극복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비극적 미래를 뻔히 보면서도 그 미래를 향해 담담히 걸어 나가야 하는 언어학자를 연기한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가 영화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빌뇌브 감독은 그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을린 사랑> 이후 <시카리오>와 <컨택트>를 거치며 온전히 자기만의 리듬,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분위기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누가 봐도 빌뇌브의 영화다, 라는 인장을 처음부터 찍고 들어가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보기 좋다. 아마도 최근 10년 간 가장 자기성찰적이며 내성적인 SF 영화일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여전히 확고한 ‘입장’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그가 SF 쪽으로 빠져서 <블레이드 러너> 속편을 만들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이 잘 못하는 것을 최소화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천재가 아닌 범인의 재능을 가진 작가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에이미 아담스는 빌뇌브의 전작들에서 그저 소모되다시피 한 여배우들의 위치를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그녀는 이 영화가 빌뇌브의 영화가 아닌 아담스의 영화로 기억되게 만드는데, 감정의 아주 미묘한 부분까지 표정의 작은 일그러짐만으로 표현해내는 연기가 매우 탁월했다.

<컨택트>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contact)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들이 지구에 내려와(arrival) 주고간 선물(“gift”)이 과거를 미래로 연결시키고 미래를 현재로 내려오게 하여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내딛게(arrival) 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베리 젠킨스: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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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완벽한 영화다. 영화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영화’ 자체가 되어 그 단어를 정의내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누가 “영화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문라이트>가 영화입니다”라고 답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이 허언같이 느껴진다면 질문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도 좋을 것이다. “2010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이 10년을 꿰뚫는 단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할겁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더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 영화를 맨 앞에 세우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영화는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리더가 바뀌는 나라, 동성애 커플에 대한 법적 지위가 인정되는 나라에서 이민자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나라로 넘어가는 나라, 수백만 달러를 하루 아침에 벌어들이는 헤지펀드 매니저와 십대 시절부터 마약과 폭력에 노출되고 쿠폰 한 장으로 사나흘을 버텨야 하는 흑인이 30분 거리에 사는 나라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다. <문라이트>는 뉴스가 밝은 조명으로 비추어도 시원찮을 현실을 파란 달빛으로 비추는 영화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한 남자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인데 영롱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게 슬픈 그 남자의 눈동자 속에 달빛을 머금은 파도가 일렁인다. 미칠 듯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로 빈틈이 없으며,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강직하다. 벨기에의 작은 공업도시를 다르덴 형제가 지키고 있다면 미국 마이애미의 빈민가엔 베리 젠킨스가 발길을 거두지 않고 있을 것이다. 희곡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눈부시게 만드는 것은 촬영, 연기(와 디렉션), 음악, 편집과 같은 순수한 영화적인 요소들이다. 까에따노 벨로주의 음악이 나오는 와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에서 회상 장면을 거쳐 식당으로 넘어가는 씬을 비롯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하는 마지막 씬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영화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흑인 사회 내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폭력적 시선, 교육 시스템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같은 묵직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무거움을 온 몸으로 표현해 낸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의 공일 것이다.리틀, 샤이런, 블랙을 연기한 미천한 경력의 세 배우는 나오미 해리스나 자넬 모네처럼 카메라에 많이 노출된 배우들의 틀에 잡힌 연기를 압도하다 못해 깔아뭉개 버린다. 영화가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현실을 비추는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나 <엘리펀트>를 떠올렸을 것이다. 다른 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해피투게더>가 연상되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탠져린>이나 <발라스트>를 되짚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 영화는 괴물처럼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켜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재창조해냈다. 아마도 영화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를 제시한 작품일 것이고, 영화가 앞으로도 사랑받아야 한다면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한 작품일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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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성장 중이다. 두번째 장편 영화라고는 하지만 <언어의 정원>이 45분 남짓한 중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너의 이름은>이 사실상 본격적인 장편 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그가 갈 길이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두시간 분량의 영화를 꽉 채울 정도의 짜임새 있는 서사구조는 발견하기 힘들고, 여전히 <초속 5cm>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학생 남자아이 감수성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도 답답하다. 동시대 감독으로 자주 비교되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특유의 서사구조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을 보면 신카이 마코토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그 발전 속도가 아직 매우 더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성장 중”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과거 작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공간과 시간에 의한 ‘단절’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의 미묘한 어긋남에 집중해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연결’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비록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말이다. 거기에 더해 감독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자연재해 문제를 로맨스와 함께 풀어내는 기민함도 보여준다. ‘노력’과 ‘의지’에 의해 혜성과 같은 천재지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을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고 빨간 실을 부여잡은 채 결국 만남을 이루어낸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치밀한 장면 구성과 혀를 내두르게 하는 표현력은 기대 이상이다. 두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를 꼽자면 그가 창조한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뮤직비디오식 구성은 여전히 감독이 속해 있는 세계를 되새김질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이 역시 일본산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이니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그 음악들이 좋은 것은 덤이다. 감독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다음 작품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니,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 역시 그리 무겁지 않았다.

데이미언 셔젤: 라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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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를 굉장히 나쁘게 봤다. 영화팬과 평론가들을 혹하게 만들만한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는 흥미로운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책임하게 마무리된 서사와 그로 인해 더 모호해진 영화의 윤리성때문이었다. 감독은 <라라랜드>에서 자신이 잘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자신없어 하는 것은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서사구조는 아무런 논란이 있을 수 없는 매우 통속적이고 단순한 뼈대만을 취한다. 무산계급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힘겨운 현실은 한발 늦게 찾아오고, 꿈을 포기한 채 살아가다 결국 각자의 꿈을 향해 제 갈 길을 간다는 줄거리는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안에 불편한 윤리적 시선이 들어갈 여지도 거의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스틸컷처럼 짧게 보여주는 순간 이미 씁쓸한 결말은 예상되어졌다.

중요한 것은 감독의 시선이 두 주인공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일종의 메타 필름으로 읽었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통속적인 삶을 바탕으로 뮤지컬이라는 전통적인 장르에 기대어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기발한 오프닝씬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헐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각종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인용한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를 그대로 모방한 플라잉 댄스 씬은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차라리 뮤지컬 영화라고 하기 보다는 음악 영화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남자 주인공 세바스챤의 뮤지션으로서의 삶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쇠락해가는 전통적인 재즈를 지키고 싶어하고 그 고전적인 재즈를 연주할 펍을 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연인을 위해 크로스오버 재즈 밴드에 들어가 돈을 번다. 여자 주인공 미아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연인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거듭되는 실패에 배우로서의 정체성마져 흔들린다. 결국 남자의 도움으로 여자는 캐스팅 기회를 얻어 배우로서 성공하고, 남자는 자신의 곁을 떠난 여자를 기다리며 약속한대로 펍을 열어 작은 성공을 이룬다. 그가 펍에서 연주하는 곡은 당연히 전통적인 프리 재즈 기반의 음악이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감독이 재즈를 빗대어 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서는 영화의 마지막씬, 여자, 혹은 남자의 상상 장면이다. 5년만에 다시 만난 남자는 여자와 함께 나누었던 음악을 연주하며 ‘만약 그 때 우리가 조금 더 행복했다면’이라는 상상을 시작한다. 영화의 주요 장면들은 조금씩 뒤틀리고 영화는 이 커플의 완전히 다른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이 매 순간 조금 더 나은 결정을 내렸다면,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이 남자의 곁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마치 <파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두번째 이야기”처럼 <라라랜드>는 영화의 마지막에 서사구조의 완전히 다른 면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파크웨이에서 춤을 추는 영화의 오프닝씬부터 이미 이 영화는 ‘판타지’라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제 이 커플의 ‘조금 더 행복한 인생’을 보여주었으니 영화 내내 보여준 ‘조금 더 현실적인’ 서사를 굳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삶 자체가 거대한 맥거핀처럼 느껴졌다. 감독이 정말 진지하게 이 둘의 사랑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고 진부한 서사구조를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아의 룸메이트 세 명은 곡 하나를 함께 부른 이후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채 거의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감독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영화는 이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저 단순한 뮤지컬 로맨스 영화로 읽어도 충분히 흥미롭다. 배우들의 연기를 훌륭하고 음악은 아름답다. 통속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고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그것이 반드시 재미가 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완전히 같은 서사구조를 가진 우디 앨런의 <카페 소사이어티>가 보여준 처참한 실패는 <라라랜드>가 얼마나 교묘하게 예상된 함정들을 잘 피해왔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나의 연애가 시작되고 그 연애가 현실과 부딪히고, 그래서 연애가 끝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 있었고, 슬픔은 조금 더 오래 남아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흔하고 또 가장 중요한 이 감정의 심연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독의 재능에 대해 의심할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Robert Budreau: Born to be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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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가 1960년대 초반 약물중독과 폭행사고 등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생명에 심대한 위협을 느끼던 시절을 다룬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전기영화라기 보다는 감독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진 뮤지션의 상상도에 가깝다. <레이>보다는 <아임 낫 데어>에 가까운 뮤지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약물에 찌들고 폭행사고로 인해 틀니를 끼우고 트럼펫을 불어야 했던 것, 특정 약물의 도움을 받아 마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등은 사실로 알려져 있다. 감독은 여기에 살을 붙여 쳇 베이커가 어떻게 바닥을 찍고 다시 본 궤도로 올라가려고 하는지,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자 노력한다. 가상의 영화촬영 장면이 나오고, 가상의 여인이 등장하고,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가상의 대화가 등장한다. 데이비스는 베이커를 억누르고 여인은 그를 보살피며 다시 끌어올린다. 데이비스를 이기기 위해 다시 마약을 손에 댈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깨끗한 정신으로 트럼펫을 불 것인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면 감독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베이커의 모습만이 남는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채 실존인물을 그려나가기 위해서는 서사구조의 개연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분명히 실패하고 있다. 서사는 툭툭 잘려 나가며 사건은 우연에 의해 연결된다. 관객이 힘겹게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은 베이커의 여리고 아픈 내면 정도다. 이조차 실제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혹은 다를 것이라는 암묵적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영화는 한 인간이 바닥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감성에 기대어 전시한다. 그 모습이 애틋하고 안되어 보였다면, 그리고 에단 호크가 절정의 연기를 통해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면, 남은 것은 쳇 베이커가 남긴 아름다운 노래들이다. 그의 음악은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소프트하지만, 그만큼 감정적으로 사람을 뒤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직접 노래를 부르며 한땀 한땀 쌓아 올리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가 에단 호크의 눈동자와 교차되는 그 지점에서 묘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