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밀스: 우리들의 20세기

우리들의 20세기
[비기너스] 이후 마이크 밀스가 내놓은 새로운 영화 [우리들의 20세기]는 [비기너스]에서  단단하게 구축된 밀스의 영화적 세계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1979년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세명의 여성과 두명의 남성이 한 집의 공간을 나누어 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노산으로 늦게 출산한 아들을 홀로 키우는 중년여성의 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 사진작가, 늙은 자동차 수리공,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짝사랑하는 소녀가 만들어내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웃기지만 어쩌면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를 어렵지 않은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독백을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가거나 서사가 흘러가는 와중 몽타주 기법의 사진 활용법 등 감독 특유의 영화적 언어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눈부시도록 쨍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온화하게 담아내는 따뜻한 화면과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서 어깨가 약간 처진 등장인물의 뒷모습을 세심하게 포착해내는 감독의 마음씀씀이도 여전하다. 3,40년대 재즈음악에 대한 감독의 여전한 애정에 더해 이번 작품에서는 70년대말 펑크씬에 대한 감독의 취향까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블랙 플랙보다는 토킹 헤즈다!)

앞서 말했듯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세계는 전작에 비해 조금 더 넓어졌다. [비기너스]를 관심있게 본 사람이라면 마이크 밀스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놓치지 않았을텐데, [우리들의 20세기]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전작에서 게이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회상씬에 잠깐씩 등장하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번 작품에서는 진짜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부여받아 활약하는 느낌이다. 전작이 마이크 밀스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20세기]는 밀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그가 겪은 여성의 다양한 이미지를 20세기라는 특정 시대에 투영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포스터에 등장하는 세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녀들을 경험한 어린 남자가 여성을 알아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한때 히피로 살며 자유주의를 만끽했지만 여성과의 진실된 교감에 실패하여 결코 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늙은 남자가 인생을 정리해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독백에 참여한다. 과거회상임을 전제로 다양한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자는 마이크 밀스 한명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남성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아마도 영화의 개별요소를 차별하지 않는 솔로몬적 공평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를 여러 인물들의 여러 상황에 맞게 변주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에 따라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어린 남자아이의 성장기로도 읽힐 수 있으며 20세기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극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흥미롭다.

아네트 베닝, 그레타 거윅, 엘르 페닝 등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뛰어나다. 배우와 늘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데 능한 감독이니만큼 이번 영화에서도 배우의 연기는 발군이다. 글을 적다 보니 감독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감독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인데, 최근 몇년 간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가 [비기너스]여서 그런지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들의 20세기]도 무척 좋았다.

정지우: 침묵

침묵
[침묵]은 원작이 있는 영화다.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충실히 따랐다고 한다. 두 번 정도 등장하는 반전이 영화의 주된 셀링포인트는 아닌 셈이다. 결말의 묵직한 한 장면을 위해 구성요소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 영화가 내세우는 마지막 ‘한방’은 뜬금없는 부성애다. 사랑하는 여자가 갑자기 사망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하나뿐인 딸이 지목된다. 인생의 큰 위기에 봉착한 주인공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세상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막강한 재력으로 보인다. 영화는 권력에 아부하고 진실을 왜곡시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낮은 모습을 강조하지만, 결말 부분에 이르러 그 모든 과정이 애인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지켜내려는 남자의 고귀한 희생을 위한 장식품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애인’은 현대를 살아가는 건조한 한국 남성에게 부여되는 가장 애틋한 역할이다. 이 두 지위를 낭만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마지막 몇 장면이 존재하고, 영화의 서사구조는 이 몇장면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비틀거린다. 설정은 억지스럽고 등장인물의 성격은 서사를 의해 종종 희생되어 일관성을 상실한다. 박신혜가 연기한 변호사 역이 특히 그러하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서사구조를 부분적으로 구원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주인공 남성을 연기한 최민식이나 류준열의 연기는 일차원적이고 식상하다. 오히려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대상화되는 두 여인, 애인과 딸을 연기한 이하늬와 이수경의 연기가 뛰어나다. 비록 그 좋은 연기력이 그릇된 서사를 위해 낭비되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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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그을린 사랑] 이후 흥미로운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프리즈너스]를 거쳐 [시카리오]와 [컨택트]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다양한 장르에서 균일한 완성도로 발현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그 결과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감독 대열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자 리들리 스콧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고 원작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해리슨 포드가 데커드 역으로 돌아온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쩌면 빌뇌브의 영화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원작 [블레이드 러너]의 말끔한 속편이자 빌뇌브의 필모그래피가 첫번째 절정에 도달했음을 선언하는 과시적인 작품이다.

우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시각적, 청각적으로 경쾌하고 유려하다. 원작의 이미지를 스토리 진행에 맞춰 계승, 발전시켰음은 물론 원작이 가지고 있는 느린 템포의 호흡까지 그대로 가져와 이 영화가 전작의 완벽한 속편임을 여러 측면에서 증명하고 있다. 주인공 K역을 맡은 라이언 고슬링의 표정과 의상은 원작의 데커드와 로이를 반반 섞은 캐릭터의 설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고, 주된 배경이 되는 LA나 월러스사 내부의 경우도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따르는 범위에서 빌뇌브의 취향을 적절히 반영한 세련되고 정제된 형태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청각효과 및 배경음악 역시 무난한 수준으로, 반젤리스의 음악처럼 압도적인 느낌은 없지만 원작의 분위기를 ‘복사’하는 과정에서 충실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이러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통해 원작의 느낌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 과정에서 빌뇌브 특유의 미니멀한 이미지 구현 역시 꽤 근사하게 성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갖는 미덕은 여기까지다. 빌뇌브는 자신이 구축한 필모그래피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을린 사랑]부터 시작된 반전에 대한 강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되어 아마도 그의 근작들 중 가장 한심한 형태의 반전을 가진 얄팍한 서사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원작의 주제의식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다는 점은 최근 블록버스터 속편 영화들의 수준과 비교하면 충분히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원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중심 주제의식은 빌뇌브가 얼마나 주변적이고 기술적인 감독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는 레플리컨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중심 줄거리는 사실 뻔하지만 그만큼 묵직할 수 있다. 다만 빌뇌브는 이 중심 서사구조에 ‘출생의 비밀’과 ‘(충분히 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억지로 하게 되는) 착각’, ‘(전통적인 혈연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가치를 설파하는) 가족의 사랑’같은 질나쁜 양념을 첨가함으로써 그 무게감을 확연히 떨어뜨리고 있다. 그의 서사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컨택트] 감상평에서도 한 바 있는데, 빌뇌브가 가진 좋은 장점들, 예컨대 유려한 이미지 구현이라던가 탁월한 긴장감 조성, 흥미로운 캐릭터의 구축과 같은 감독으로서 가지는 소중한 재능들이 억지스러운 서사의 진행과 이미지의 과잉 전시에 따른 지루한 이야기 진행에 막혀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건 긴장감이 시종일관 팽팽하게 이어지는 [시카리오]나 주인공 역할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의 호연에 정신이 팔려 쉴 틈이 없었던 [컨택트]에서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은 빌뇌브의 단점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시간 4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고 이 중 상당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질나쁜 양념들을 위해 할애되고 있다.

영화 내내 일관되게 이어지는 이미지와 분위기는 앞으로도 SF영화 장르를 이야기할 때 계속 언급되어야 할 정도로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예술 장르다. 굳이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말이 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빌뇌브는 이야기에서 실패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고 있다. 라이언 고슬링은 영화 내내 멋짐을 폭발시키지만 영화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빌뇌브의 영화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떠오른다. 두 감독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감독으로 떠오르며 나름의 공고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올리는 중이다. 그리고 그 한계 역시 분명한 감독들이다. 이 둘이 종이 아닌 횡으로만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관찰되어 흥미롭다. 아마도 이들이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일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장르 위에 자신이 발전시킨 독보적인 색깔을 입힘으로써 감독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속한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 이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에드가 라이트: 베이비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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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movie)를 팝콘과 콜라를 가장 현명하게 소비하는 두시간짜리 처방전이라고 정의한다면 [베이비 드라이버]는 그 소명을 다하고 있는 좋은 상품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열광했을 오프닝 카체이싱 시퀀스를 비롯해 영화는 심심할 틈을 주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단순히 더 자극적이고 더 강렬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없음을 [트랜스포머]를 비롯한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베이비 드라이버]는 ‘팝콘 무비’가 가져야 하는 첫번째 미덕이 원초적인 리듬과 에너지에 있음을 교과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박찬욱이 이 영화를 두고 “앞으로 연구되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면 (그의 병적인 미장센 집착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근원적인 에너지와 리듬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원초적 힘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캐릭터는 일차원적이고 서사는 진부하지만, [안녕, 헤이즐]로부터 착실하게 성장해온 안셀 엘고트가 무리없이 주인공역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케빈 스페이시, 제이미 폭스, 존 햄 등 베테랑 배우들이 주변을 두텁게 떠받들어 빈틈을 메워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영화를 선택할 때 완벽한 서사구조와 다층적인 캐릭터를 간절하게 원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자동차와 함께 영화를 구성하는 두가지 핵심요소 중 하나인 음악은 더할나위 없이 적절하게 선곡되어 있다. 사실상의 음악영화라고 해도 무방한 이 영화에는 많은 뮤지션들이 직접 출연하고 있기도 한데, 꽤 비중있는 대사를 부여받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플리를 비롯해 주인공 베이비의 어머니로 회상씬에 등장하는 스카이 페레이라(본인 노래까지 부르며 깨알 홍보도 한다), 오프닝 시퀀스의 배경음악을 제공한 존 스펜서 익스플로전의 그 존 스펜서, 그리고 런 더 주얼스(Run the Jewels)의 킬러 마이크까지, 다양한 장르와 세대의 많은 뮤지션들이 B급 정서를 강하게 자극하는 이 오락영화를 위해 기꺼이 출연을 허락했다.

사카모토 카즈야: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이 짧은 애니메이션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00년에 발표한 커리어 첫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원작은 리메이크작에 비해 훨씬 짧은데, 그 짧은 러닝타임에도 마코토 특유의 서정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고양이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지만 고양이에 대한 묘사는 극히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리메이크작은 원작이 가진 서정성을 대부분 포기하고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초점을 바꿨다. 덕분에 지극히 평범한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양이의 시선에서 인간의 시선으로 바뀌어서인지 고양이가 훨씬 자세하고 예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 것이 리메이크작이 가진 거의 유일한 미덕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독백 대사 중 마음을 울리는 구절이 있어서 이 영화가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 작품 속 고양이는 나이를 먹은 자신의 몸이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고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을 회상한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마지막이 다가올 때 쯤, 고양이는 말한다.

“나는 행복했어.”

대부분의 인간은 동물 한마리와 평생을 함께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반려동물은 단 한 명, 혹은 단 하나의 가족과 평생을 함께 한다. 우리는 그들의 평생의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해야 한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속 주인공 고양이는 유기된 채 ‘그녀’에 게 발견되어 ‘그녀’와 평생을 함께 한다. 하루종일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온 그녀를 따뜻한 체온으로 위로해주는 것이 그의 주된 일상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그런 그녀와 함께 한 평생을 행복하다고 기억한다.

나에게는 그런 동물이 있었을까? 우리 가족은 많은 개들과 함께 했다. 새끼 상태로 떠나보낸 강아지들을 제외하더라도 ‘죽음’까지 함께 한 개만 8마리다. 나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집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했고 방 안에서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개와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밥을 챙겨줄만큼 성실하지도 못했고 그들의 감정에 귀를 기울일만큼 애정이 많지도 않았다. 그렇게 부족한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마리의 개들은 나를 따랐다.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는 가족은 항상 개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여주지도 않았는데, 그들은 나를 보면 항상 웃어주었다.

만약 그들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묻고 싶다. 나와 함께 해서 행복했냐고. 그들이 그랬다고 대답한다면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들덕분에 행복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다시 동물과 함께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고 싶다. 다시는 같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죽기 전 자신있게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놀란: 덩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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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가 관객으로 하여금 전쟁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전쟁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했다는 혀니루님의 평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영화는 매우 재미있고 또 유례없이 새롭다. 적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특이한 전쟁영화는 탈출과 생존이 유일한 목적인 군인들과 그들을 위해 애쓰는 “조국”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와 피로한 피부의 결을 그대로 촘촘히 짜여진 플롯 사이에 재현한다. 영화는 관객을 전쟁터의 한복판에 위치시키기 위해 등장인물의 처절한 사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이전의 전쟁영화들이 당연히 받아들였던 많은 가정들을 버리고 전쟁의 실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 영화의 90% 이상을 할애한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실제로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려야만 할 것 같은 느낌, 혹은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이룩한 가장 큰 성취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력이 탁월한 감독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놀란은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효과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이다. 그는 새로운 차원의 서사를 창조하는 이야기꾼이라기 보다는 기존 영화세계에 존재해 왔던 가장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차용하여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기술자에 가깝다. [메멘토]와 [인섬니아] 모두 이야기 자체가 매우 독특한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영화의 형식을 비틀어 관객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새롭게 느끼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된 이후에도 놀란의 서사 기술방식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셉션], [인터스텔라]로 넘어오면서 조금씩 더 진부해졌을 뿐이다. [다크나이트]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관객이 그의 영화를 볼 때 ‘새롭다’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다양한 트릭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시각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인셉션]과 [인터스텔라] 모두 이전 영화들이 꿈도 꾸지 못했을 ‘꿈 속의 꿈’과 블랙홀 등 현실 저편에 있는 공간을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성공적으로 재현해냈다. 놀란이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시각화를 이루기 위해 행해온 과정이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심지어 장인정신의 향기까지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많은 공대생-ish한 영화매니아들을 열광케 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덩케르크]는 이러한 놀란의 장점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놀란은 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적 장면을 선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예 관객을 그 공간에 위치시키길 바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제보다 더 극단적으로 연출된 청각적 효과와 영화적 비약까지 감수해가며 관객의 체험지수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영화 내내 심장을 조여오는 한스 짐머의 배경음악, 귀를 찢는 듯한 폭격기 소리와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리는 극단적인 클로즈업 헨드헬드 카메라, 그리고 아주 깨끗한 화면으로 이 모든 것을 재현해 내는 고화질 필름과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놀란의 세계에 초대된 관객은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의도적으로 즐거운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제공받은 셈이다.

하지만 영화가 이룩한 이러한 시각적 성취는 영화 막판에 이르러 놀란의 빈약한 서사구조 탓에 상당 부분 빛이 바랜다. 물론 대중영화로서의 흥행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택했을 고육지책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쓸데없이 장황하게 이어지는 애국심 고취 장면을 비롯해 영화 막판에 위치한 이야기들은 너무나 진부하고, 더 나아가 아주 전통적인 방식으로 촬영되었기에 더더욱 이 영화에 푹 빠져있던 관객을 사정없이 현실로 끄집어내어 버린다. 처음 맛보는 환상적인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무리한 기분이다. [다크나이트] 시리즈가 오락영화의 최전선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이유, [인터스텔라]가 유례없는 시각적 체험을 선사했음에도 애끓는 가족애밖에 모르는 일차원적인 캐릭터 탓에 큰 감동을 선사하지 못한 이유, [인셉션]이 꿈 속의 꿈 속의 꿈을 반복하며 만들어낸 복잡하고 다층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쾌감’ 이상의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 모두 공통적으로 놀란의 치명적인 약점에 기인하고 있다. 그는 조금 더 창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 이야기 위에 놀란의 ‘입장’을 드러내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놀란의 영화에는 놀란의 목소리를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영화적 즐거움을 주는 오락매체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철학을 담아내는 예술의 한 플랫폼이기도 하다. 놀란이 기술자 이상으로 나아가 작가로 인정받고 싶다면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놀란의 영화를 보면 먼저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삶에서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의 다음 영화가 나오면 또 보게 되겠지만, 다르덴 형제나 마이크 리처럼 영화를 본 관객의 삶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진정한 체험’은 다음에도 없을 것 같다.

Ken Loach: I, Daniel B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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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 모두 영화의 서사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이다. 다르덴 형제가 영화의 윤리적 기능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철학가라면 켄 로치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담대히 활용하는 사회운동가에 가깝다. 즉,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고민을 강요한다면 켄 로치의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작가의 영화가 미학적으로 훌륭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모든 영화에서, 화면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그 내용에서부터 우러나온다는, 기의를 부여받은 새로운 기표의 탄생을 확인할 수 있는 호사 역시 누릴 수 있다.

[I, Daniel Blake]는 캐릭터의 이름 앞에 “I”라는 1인칭 주어를 다시 한번 강조하여 새겨넣음으로써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한다. 이 주체성은 캐릭터의 것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이기도 하며, 영화를 본 관객에게 전달되는 어떤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영국의 형편없는 사회보장제도를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가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현 사회체계의 전복을 꿈꾸기 보다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받고자 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사회주의 영화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켄 로치 특유의 노동자 사회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은 여전히 살아있다. 또한, 연대하는 노동자 집단과 억압하려 드는 기존 지배구조를 대립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운동가적 기질이 여전히 영화 속에 짙게 배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또다른 축인 미혼모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녀가 다니엘 블레이크의 탄원서를 대신 낭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연대의 연속성을 확장적으로 보여주는 점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 오랜만에 거장의 단단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백: 뷰티인사이드

뷰티인사이드
예술작품에 대한 나의 기호는 대체로 평론가들의 그것과 일치하는 편이다. 어쩌면 평론가의 시선으로 예술작품을 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대하는 나의 감정이나 입장보다는 작품을 만든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작품이 사회, 문화, 공간 따위의 환경과 어떻게 어우러지는 지에 집중한다. 그런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작품을 접할 당시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일 수 있고,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의 역사’ 중 유난히 민감한 지점을 강하게 건드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평론가들의 평이나 대중의 관심과 상관없이 그저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생기게 된다.

최근에는 [뷰티인사이드]가 그랬다. 아마도 절대 주머니에서 내 돈을 꺼내지 않게 만든 포스터와 시놉시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감독, 딱히 챙겨보지 않는 주연배우들.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반복적으로 상영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않았을 작품이다. 케이블 영화채널을 통해 보게 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러하듯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해서 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영화의 후반부부터 보기 시작했고, 몇개월 뒤 영화의 중간 부분을 볼 수 있었고, 또 몇개월 뒤에는 영화의 초반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한 호흡으로 확인한 것은 네번째로 이 영화를 접한 어제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영화는 사실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매일 신체가 변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창조한 고유한 세계도 아니다. 시종일관 어떻게 하면 이뻐보일까를 고민하는 화면과 머나먼(그리고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체코까지 가서 결국 이어지고야 마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이 그리 깊은 철학적 담론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때때로 지루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얻어 걸린’ 듯한 장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대부분 한효주가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에너지 과잉이 알파요 오메가인 한국 영화 판에서 절제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그녀의 연기만이 이 영화가 차별화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자 이 영화가 가진 거의 유일한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서 한효주의 연기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전 작품인 [동이], [광해], [반창꼬], 혹은 이후 작품인 [해어화]에서 보여준 모습이 기존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너지 과잉의 일차원적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쩌면 [뷰티인사이드]에서 감독의 디렉션이 꽤나 훌륭한 것은 아니었는지 추측해보게 된다. (혹은, 그만큼 여성 캐릭터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힘이 한국영화계에 부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효주가 연기한 이수라는 캐릭터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성장해나가는 유일한 캐릭터이자 영화의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는 점에서 영화의 정체성 자체가 현현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거의 대부분 남자 주인공 우진이 맡고 있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매일 신체구조가 변하는 애인을 눈 앞에 둔 이수의 복잡한 심정이 부각되면서 우진은 관찰자적 시선으로 한발 물러선다. 애인이 가진 비밀을 받아들이기 위해 겪었던 혼란,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당찬 모습,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떠나고 다시 돌아와 용기를 내는 모습까지, 영화는 이수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있을 때 잘해라”라는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이 메시지가 매우 통속적이긴 해도 그만큼 강렬하기도 한 것이어서, 빠르게 떠나보내야 하는 상대방의 ‘어제’에 집착한 나머지 ‘오늘’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전해진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롯이 한효주의 연기 덕분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효주의 이런 모습은 다시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더욱 희귀한 경험으로 남게 될 영화다.

Moonlight: Stills

결혼 후 아내와 함께하지 않는 첫번째 월요일, 유난히 잠들기 힘들었고 유난히 일어나기 힘들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출근길을 조심조심 지나 졸린 눈을 비벼가며 오전시간을 보내고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 이어폰을 꽂고 얼마전 아마존에서 주문한 [Moonlight: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의 음원을 듣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본지 몇달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던 마음속 잔상이 다시 강해짐을 느낀다. 영화적으로도 완벽했지만 영화를 떠나 그저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배우들의 눈빛과 숨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을 지긋이 감싸 안아주었던 Nicholas Britell의 사운드트랙도. 이 영화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음을 증명한 몇 안되는 기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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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필레: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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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은 명민한 영화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 감독 조던 필레는 이영화에서 특유의 B급 감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흑백 갈등과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를 미시적인 시선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냈다. 미국사회를 떠받드는 핵심은 ‘가족’과 ‘이웃’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3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잠재적인 인종 및 계급 갈등을 극복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조되는 ‘커뮤니티’의 가치덕분이다. 개인의 가치를 억압하지 않지만 가족과 공동체의 위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학교, 군대, 이웃 등 그룹화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개념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주입한 결과, 미국 사회는 시민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에 기반하여 각종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견고한 국가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은 시민 개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한다. 1%와 99%가 서로를 경멸하고, 여성의 어려움을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자의 기본권을 다수자가 지지하지 못할 때 사회는 갈라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요인은 아마도 모두가 짐작하듯 백인과 흑인 간 인종 갈등일 것이다. <겟 아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갈등의 미묘한 시작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이와 함께 인디 공포-코메디 영화 장르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장르의 형식적인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관객은 충분한 몰입도와 함께 영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다. 만약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식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같은 유색인종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장치들에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을 깜짝 놀래키는 서스펜스 장치의 효과적 사용만으로 인기를 끈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 바로 지금 길거리에 실재하는  공포의 원천을 영화적 언어로 잘 옮겨 놓았으며, 그 결과 영화를 본 이들로 하여금 영화관 밖에서도 그 공포가 지속된다는 생각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이 영화의 숨은 장치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면, 혹은 단순히 이 영화를 ‘재미있는 공포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아마도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체득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불편함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아마도 그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와 예의를 숙지하지 못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들에게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인종이 서울에서 공존해야 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내어줄 의사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혹은,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썩 괜찮은 도시에 사는 선진국 출신 백인들의 문화에 동참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평균적인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3% 이하로 내려가고 물가상승률이 2%가 채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은 침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돈이 되는 것들은 점점 사라지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더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로 넘어올 것이고,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타문화 배경의 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국처럼 극도로 예민한 신경질적인 국가에서 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겟 아웃>은 굉장히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혀야 한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천구와 안산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스러운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