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지 않는 인터넷 대중

최근 ‘240번 버스기사 논란’이 인터넷을 후끈 달구었다. 결론은 버스기사의 책임은 없다는 것. 논란의 과정에서 가해자로 규명지을 수 있는 이들은 근거 없는 루머를 최초로 제기한 자와 논란의 중심에 있던 아이 엄마, 그리고 그 루머를 마치 사실인냥 퍼뜨린 이름없는 대중들. 피해자는 버스기사와 버스회사 정도가 되겠다. 가해자 중 실체를 특정당한 이들만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는 모양새다.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비슷한 수준의, 혹은 더 심한 수준의 비난을 퍼부었던 이들은 모두 ‘아니면 말고’ 라고 얼버무리던가 익명성을 무기로 어디론가 숨어 마치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트위터든,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든, 페이스북이든 인터넷 공간은 모두 마찬가지다. ‘오해를 했다’라고 변명하고 자신을 아주 보잘것 없는 공범 중 하나로 포장하기엔 피해자가 느꼈을 ‘피해’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대중의 소문 부풀리기 과정에서 온다는 사실이 너무 크게 다가온다. 이들 중 아마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법적인 책임이 돌아올 확률은 0%에 가깝고,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의 사회적인 ‘마녀사냥’을 되돌림받을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생태계가 이들을 이처럼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임을 느낄만한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실체를 특정할 수 있는 장치를 덧붙인다면 그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는 반대에 직면할 것이다. 개인의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발언이 집단적으로 축적되는 과정은 화장실의 낙서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 그저 배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공개되는 범위를 제한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짐과 동시에 특정인에 대한 비난의 경우 실제와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의 사각지대를 종종 만들어낸다는 분명한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그저 자연적인 현상인냥 두고 보기에는 인터넷 익명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이를 제한하는데 다르는 경제적 비용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수의 자유를 제한할 것인가,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오래된 윤리적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경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수의 피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책이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또다른 사회적 이슈가 십대 청소년의 집단 폭력 문제다. 공교육이 무너져내린 후 손가락만 빨았던 ‘어른’들의 ‘방치’의 결과는 왕따를 넘어선 살인에 가까운 폭력행위다. 청소년법은 여전히 구시대적인데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어른의 폭력성을 습득해나간다. 인터넷 폭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피해자는 신상이 공개되는데 반해 가해자의 대부분은 신상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역차별의 문제가 있다. 법적으로 이것이 정의로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책임을 지지 않는 개인’은 일종의 사회철학의 부재처럼, 혹은 사회적 질병처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새치기를 자랑스럽게 행하며 불법행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문제는 이것이 개인의 충동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지속적으로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 폭력, 혹은 인터넷 상의 이지메 현상은 그러한 사회철학의 뒤틀림을 반영한 시대적 거울일 뿐이다. 법치국가에서 사법당국은 법을 통해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사회가 전체적으로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한숨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성애혐오의 경제적 비용

동성애혐오 문제는 전세계적으로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골치아픈 일이지만,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동성애혐오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보는 일은 나름의 독특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 근본주의, 불교 근본주의에 더해 개신교 근본주의까지 더해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상당한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고 한발 더 나아가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위 등 실질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위험요인으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내 일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는다’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과 정책 당국자의 개인적인 ‘입장'(개신교 신자라던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동성애혐오자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국 연구자들이 앞장서서 한국식 동성애혐오론이 갖는 논리적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논파해나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심리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혐오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추산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 캐나다에서 2001년 발간된 정책보고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The Cost of Homophobia: Literature Review of the Economic Impact of Homophobia on Canada], submitted by Christopher Banks, submitted to Gay and Lesbian Health Service, 2001.)

위의 보고서는 동성애혐오, 혹은 성적소수자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받는 피해를 경제학적으로 추산한 작업들을 모아놓은 서베이페이퍼다. 방법론은 간단하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만약 이들이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렸다면 얻게 되었을 효과를 추정함으로써 역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환경경제학이나 보건경제학처럼 어떤 정책, 혹은 집단적 행위의 경제적 효과를 직접적인 통계자료로 추산하기 어려운 경우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보고서는 성적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혐오로 인해 “일반적인” 이성애자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사회적인 장벽으로 인해 성적소수자에게 필요한 의료행위가 적시에 제공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한 지표는 자살률, 흡연률, 기대수명, 우울증, 실업률, 범죄율, 에이즈 발생률 등 8가지 항목이다. 보고서는 만약 호모포비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적소수자들이 나타내는 위 8가지 지표의 수치와  “일반적” 이성애자들의 수치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에서 거의 동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추정한 호모포비아의 연간 경제적 비용은 다음과 같다.

homiphobia costy

예를 들어 자살률의 경우, 2001년 캐나다 기준으로 호모포비아가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이 약 8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호모포비아가 없었다면 더 적은 성적소수자가 자살했을 것이고, 이들이 만약 살아서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영위했을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순효과가 연간 8억 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결과를 두고 “동성애혐오자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라고 주장해도 사실 그리 크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에 발생시키는 경제적 비용은 정확히 추산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성적소수자가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통계도 없고, 더 열등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도 없다. 오히려 동성애결혼 합법화 등이 발생시키는 경제적 순효과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적소수자들을 ‘양성화’시킬 때 그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일부 종교인의 심리적 ‘불편함’ 정도일 것이다. 이건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들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이들에게 동등한 사회적, 의료적 혜택을 부여할 때 돌아오는 경제적 효과는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더 나아가, 성적소수자와 같은 극단적으로 소외받는 계층을 사회적 장치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소수자, 약자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에게 사회적 혜택을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회가 빈민층이나 장애인에게 인색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즉, 사회복지의 전체적인 ‘bar’ 자체가 한단계 높아지는 효과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dbpia나 kiss, kipris 등 국내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동성애 혐오를 경제적 효과와 연결짓는 논문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있을텐데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책과 책장

책을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순간부터 그 책은 시체로서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책장에 꽂아두고 다시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음미하는 그릇된 도축장 주인의 심리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외국서적을 관상용으로 구입한다”는 농담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을 때마다 그냥 웃어 넘겼다. 그 정도의 허영심은 나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있을테니까. 다만 코엑스 별마당도서관과 한남동 북파크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사진으로 접할 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전시가 아니라 박제에 가까운 형태다. 책들을 방문객의 손에 닿지 않는 멀고 높은 곳에 위치시킨 이들이 노렸을 법한 수요층의 심리, 혹은 그 소비구조의 색깔을 헤아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책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하는, 기표와 기의 간 관계가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는 사물에 가깝다. 책 안에 들어 있는 활자들이 여러 사람에 의해 ‘읽혀짐’으로써 비로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책은 아름다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못생긴 책은 못생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책의 표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것은 책에 대한 탐미가 아니라 책의 표지라는 디자인의 작은 분야에 대한 탐미다. 책의 내용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 공간이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차용할 때 느껴지는 절망스러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소비의 본질 중 한 부분을 상징하는 현상이라면 단지 낙담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고등학교

나는 외고 출신이다. 당시 학교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외고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학교 중 하나여서인지 그 나름의 전통과 학풍은 충실히 경험하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전통과 학풍”이라 해서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교사를 봐도 그러려니 해야 하고 학생을 성추행하는 교사에 대해 학무보들이 단체로 항의해도 해당 교사를 같은 재단에 있는 다른 학교로 보내는 것 이상의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운영 방침,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8개, 혹은 9시의 수업이 이어지지만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야간 자율학습을 ‘자율’적으로 빠질 경우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나는 사제 관계, 고등학교 3학년 시간표에 미술과 체육 등 수능과 관계 없는 과목은 완전히 제거되며 전공어 수업 시간조차 ‘자율학습 시간’으로 변이되어 국어나 수학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신축적인(?) 수업 운용방식 등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그 학교의 오래된 전통이자 학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방식으로 운영된  학교가 매년 내세웠던 유일한 마케팅은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문대에 진학시킨 학생수였다. 물론 이들 대학교로 진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어문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을 선택했고, 학교는 심지어 “외고에도 이과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가지 했다. 이에 더해 일반적으로 어문계열보다 높은 수능 커트라인 점수를 기록하는 상경, 법학 계열에 진학한 학생수를 따로 추려내어 자랑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대학 잘 보내는 고등학교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언어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단’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에 외고 출신이 굳이 어문계열에만 지원해야 하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제대로 가르치지조차 못했다는 현실이 이러한 반론의 기본 가정부터 흔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외고는 처음부터 외국어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었고, 현재도 분명히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외고는 처음부터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 하나만을 대박내기 위해 짜여진 커리큘럼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이중 소수의 더 ‘나은’ 외국어고등학교는 SAT등 외국의 수능ish한 시험까지 정복하며 명문대 진학률을 극대화시켰다. 외고로 똑똑한 아이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들이 외국어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러한 욕망을 달성했고, 내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거나 자살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어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을 수능 점수를 받아들고 재수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외고 설립 정책은 과학고의 경우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과학’이라는 쉽게 특정할 수 없는 넓은 카테고리를 가질 수 있었던 과학고 정책은 이들이 의대에 가든 공대에 가든 자퇴를 해서 회사를 차리든 설립목적에 어긋난다는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외국어고는 그렇지 않다.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외국어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 자체가 모호할 뿐더러 외국어 교육의 페러다임은 언제든 시장에 빼앗길 수 있다. 외고에 입학하는 학생 중 상당수가 이미 영어에 능통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도 우스운 모순인 것이다. 더 나아가 백번 양보해 외국어 영재를 육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성장할지, 어떻게 쓰여질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운영되어 왔다면 사실상 교육의 성과를 측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 목표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지역에 관계 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명문고가 되어 버리는 한국의 현실에서 일반고에 앞서 학생을 선발할 특권이 있는 이들 외고가 수능점수와 명문대 진학률에 마케팅을 올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외고에서 외국어 교육은 뒷전이다. 엄연한 현실이다. 서울대 법대에 가장 많이 진학시키고 사시 합격을 가장 많이 시키는 출신학교 중 상당수가 외고라는 사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법조인으로 살 기 위해 외국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어의 극치라는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스페인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범인을 잡기 위해 어려운 문법의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가? 코메디가 따로 없다.

나는 물론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오래 공부했다. 하지만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영어로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지난 1월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에 갔는데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외고 프랑스어과 출신이다. 내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익힌 외국어기술은 모두 대학교 입학 이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외고에서의 경험 중 지금까지도 내게 도움을 주는 것들은 당구 실력과 스타크래프트 실력 정도다. 대체 거기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nine to six and monthly paid life

일주일 중 5일을 희생하여 번 돈으로 카드값을 내고 월세를 내고 대출 이자도 갚고 약간의 저축도 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고 있다. 시간외근무를 자주 해야 몇십만원이라도 더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빠듯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빡빡한 생활 리듬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대와 나라를 잘못 만나 훨씬 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이런 불만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사회적으로 안착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윗세대에게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면, 현재 자리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그런 개인적인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규직’ 월급쟁이들이 일확천금과 조기은퇴를 꿈꾼다. 아마도 오너가 있는 큰 회사에서 부속품처럼 사용되는 현재의 위치가 성취감을 제한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것이다. “취집”이라는 말도 어쩌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속품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그렇게 완성된 시스템이 다시 개개인에게 혜택을 주는 순환구조를 이해한다면 부속품으로서의 가치가 결코 작다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루에 여덟시간을 오롯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다달이 예상되는 돈이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삶은 실패에 대한 사회적 보험장치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안전한 보호막일 것이다. 한국사회에 창의성이 부족한 것은 한국인 개개인이 창의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개인의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윗세대의 책임이고 숙제로 남겨져 있다. 창의성을 희생하는 대신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트레이드오프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 등가교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세대가 존재한다. 일부 계층도 아니고 한 세대가 통째로 그런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형 힙스터의 지리적 고민

어제 한 대학교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뻔하고 재미없는 금융경제학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어버린 “흙수저” 2,30대 청년층의 서울 내집 마련의 꿈, 정책적으로 풀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두꺼운 가격 장벽이 드리워진 이 투기의 도시에 문화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는 일련의 청년층이 새로운 색깔의 주거 공간을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주거집단이 해방촌이나 문래동같은, 기존의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며, 경리단길이나 익선동과 같은 ‘골목길’이 한국형 힙스터들의 주요 소비처로 탈바꿈한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후 최근 몇년 간 ‘젠트리피케이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독립 자본가, 혹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가진 역량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을 나름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들의 서울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근본적으로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규모 자본에 밀려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로 설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잃는 것은 다양한 독립 문화 자본 정도가 될 것이고, 단기적인 승자는 창의적 소규모 문화 자본을 보다 정형화된 기업 자본 기반의 대규모 산업형 상품으로 변질시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며, 특정 문화 자본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 갖는 향취, 즉 도시환경이 주는 무형의 공공재를 더 강한 자본가 세력이 부당하게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힙스터 소비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소규모 문화 자본 형성에 참여하기 보다는 이 소규모 자본가들이 영업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과 비슷한 – CJ 따위의 – 소비재를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소비 성향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자본의 형성을 촉구한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니 해방촌으로 옮겨가고, 북촌에 이어 서촌까지 사람들로 붐비니 근처 익선동으로 옮겨간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인스타그램에 ‘힙’한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소규모 문화 자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소득 전문가부터 비정규직까지 아마도 다양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 해방촌이나 익선동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그곳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 관광지와 주거지를 구분하는 심리를 은연중에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들 역시 전통적인 서울의 ‘아파트 판타지아’에서 많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비록 쪽방촌 바로 옆에 생긴 예쁜 커피숍들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하더라도 이들의 꿈은 강남의 아파트로 향해있다. 이들에게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잠원동은 주거공간으로서 좋은 선택이지만, 비슷한 거리에 있는 보광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경제적 유전자이며, 솔직하고 이기적인 경제적 판단에 기인한다. 나는 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출산과 육아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신의 소비 패턴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 세대가 윗세대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점은 세대적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회전체적인 지출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욕망의 대체재를 찾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 아직까지 나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주거공간의 가능성 중 기꺼이 생산자와 밀착된 환경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못할 때 공간적 특수성은 담보될 수 있을까? 문래동에 새로운 문화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꾸리고 생산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정체 상태에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소비력을 갖춘 젊은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힙스터 문화 시장’에 한해, 소비자가 생산자의 근거지를 끊임없이 구축(crow out)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을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 독립적인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일부 힙스터에 국한되어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면, 즉 지방에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서울 안 임대료가 저렴한 골목길을 끊임없이 떠돌려 방황하는 예술가들, 혹은 독립 자본가들의 모습을 계속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단 허리디스크에 걸린 한국사회

서울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95% 신뢰구간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허리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는 확신을 어렵지 않게 갖게 될 것이다. 혹은, 이들이 옆으로 걷는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하는 특수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구글 스콜라를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의학계열의 논문이 전무한 상태인데, 이 흥미로운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국의 엑스터 대학교 정도의 연구기관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이미 진행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더 놀라운 사실은, 통근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 혹은 버스의 복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주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백팩이나 핸드백을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백팩이나 핸드백을 어깨에서 내려서 손으로 들고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한국인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중교통수단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타인과의 접촉을 기꺼이 감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접촉면을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은 백팩과 핸드백을 몸에 장착하는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특수한 상태로 진화할 뿐 아니라 허리를 돌려 옆으로 걷는 방법을 망각하게 되는 특이한 퇴행현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이 사회 전체적으로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국사회는 만성적인 허리디스크에 집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보건복지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급한 상황이다.

백팩과 허리디스크, 또는 무통증과의 상관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혼잡스러운 대중교통수단 안에서 한국인은 왜 백팩을 벗어서 들고 타지 않는가, 혹은 그 혼잡스러운 곳을 굳이 걸어서 통과하려고 할 때 타인에 대한 비정상적 신체적 접촉행위에 대해 미안함을 대체 왜 표시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의 출발점은 정보의 미획득이다. 한국인은 혼잡한 공간에서 백팩을 벗었을 때 얼마나 추가적인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지, 몸을 옆으로 돌려 걸었을 때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얼마나 회피할 수 있는지, 혹은 미리 “실례합니다”와 같은 말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서로의 공간을 얼마나 더 양보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버스와 지하철이 공급되기 시작한지 이미 몇십년이 지났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타인에 의한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이 야기하는 불쾌함의 정도에 대한 학습은 이미 완료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비록 정장에 백팩을 메고 타는 ‘패션'(이걸 ‘패션’이라고 기꺼이 불러주는 나도 참 많이 약해지고 부드러워졌다)이 유행한지 몇년 되지 않았다 해도 그 패션을 고집하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대학교때 마자 플라바나 루카스, 혹은 최소한 이스트팩 등 다른 종류의 백팩을 메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본 경험이 최소한 한번 이상은 있었을 것이 분명한 바, 더 나아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습관처럼 말하라는 가르침을 담임선생님께 습관처럼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경험이 한번씩은 있었을 것이므로, ‘학습의 부재’ 가정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판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샘솟는다. 한국인이 얼마나 못되고 싸가지 없으면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접촉을 불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면 분명히 몸이 닿겠구나, 그러면 저 사람도 싫어하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말겠어!’

위와 같은 생각이 출퇴근길 한국사회를 허리디스크의 개미지옥 속으로 빠트리는 주된 명제란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도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관찰한 바 출퇴근길 한국인들은 대부분 생각 자체를 잘 하지 않는다. 저렇게 몇 문장으로 이어진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까지의 과정도 이미 너무 벅찬데, 사람으로 꽉 찬 그곳 안에서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심을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끄집어내는 마인드컨트롤을 할만큼 사고의 끈이 긴 한국인은 사실 몇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나마 영혼의 불씨가 어떻게 하다보니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휴대폰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소멸해버린다. 이들은 이미 이마 위에 제 3의 눈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시야를 휴대폰에 빼앗겨도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은 이미 확보해놓았다. 애초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즉,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없어보이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행동패턴을 일정하게 나타낸다면, 즉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면, 그 원인 역시 사회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들은 사회에 의해 등떠밀리는 삶을 살고 있다. 대도시라는 익명성 속에 숨어 불편함을 ‘모르는 타인’에게 전가한 채 찰나의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타인을 조금만 더 불편하게 만들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을 전가하는 타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죄책감은 덜어지고, 당장의 이익은 가시적이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는 것이고, 굳이 백팩을 벗거나 몸을 옆으로 돌려 걸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딱히 남을 해하려는 나쁜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지금 당장 저 눈앞의 자리가 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하차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옆의 칸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옆 사람의 불편함을 인위적으로 망각하는 것 뿐이다. 만약 어깨를 치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 회사 부장님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관계에 약하다. 한국사회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계급이다. 계급이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 간 관계 역시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관계는 연속적이다. 계급의 상층부에 있는 이의 영향력이 가장 말단의 사람에까지 미친다. 청와대에서 기침하면 동네 노점상이 타격을 받는 사회다. 그만큼 타인과 자신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폭력을 정당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억눌려 잇었기 때문에 풀 곳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심지어 공짜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은 그러한 억눌린 관계에서의 해방을 위한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다. 회사 복도에서는 임원이 지나갈때 마치 임금님이 지나가는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내가 왕이므로 모두의 어깨를 치면서 지나갈 수 있다. 관계와 계급에 많이 억눌릴수록 공공장소에서의 행동은 거칠게 발현될 확률이 높다.

무척 슬픈 사실은, 위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타고 빨리 내리면 대체 삶의 어떤 부분이 나아지는가?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저 땀이 조금 더 많이 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가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져버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공포심에 질려 남들보다 빨리 걸으려 하고 남들보다 오래 일하려 하며 남들보다 앞에 줄서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반칙은 정당화되고 거짓말은 별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들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많이, 조금만 더 잘 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다들’ 믿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이 걸린 병은 허리디스크가 아닌 정신병이다. 이들은 집단적인 히스테리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모두가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는 조금씩 더 나빠지고, 지하철과 버스는 조금씩 더 혼잡해진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2호선과 9호선 열차에는 선반이 없다고 한다. 백팩이나 다른 짐을 사람들이 올리지 않으니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것은 사회가 나빠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제 사람들은 백팩을 벗어 올리고 싶어도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더 등떠밀게 된다. 못되지라고, 나빠지라고 등떠밀게 된다.

조던 필레: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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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은 명민한 영화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 감독 조던 필레는 이영화에서 특유의 B급 감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흑백 갈등과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를 미시적인 시선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냈다. 미국사회를 떠받드는 핵심은 ‘가족’과 ‘이웃’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3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잠재적인 인종 및 계급 갈등을 극복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조되는 ‘커뮤니티’의 가치덕분이다. 개인의 가치를 억압하지 않지만 가족과 공동체의 위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학교, 군대, 이웃 등 그룹화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개념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주입한 결과, 미국 사회는 시민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에 기반하여 각종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견고한 국가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은 시민 개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한다. 1%와 99%가 서로를 경멸하고, 여성의 어려움을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자의 기본권을 다수자가 지지하지 못할 때 사회는 갈라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요인은 아마도 모두가 짐작하듯 백인과 흑인 간 인종 갈등일 것이다. <겟 아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갈등의 미묘한 시작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이와 함께 인디 공포-코메디 영화 장르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장르의 형식적인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관객은 충분한 몰입도와 함께 영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다. 만약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식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같은 유색인종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장치들에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을 깜짝 놀래키는 서스펜스 장치의 효과적 사용만으로 인기를 끈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 바로 지금 길거리에 실재하는  공포의 원천을 영화적 언어로 잘 옮겨 놓았으며, 그 결과 영화를 본 이들로 하여금 영화관 밖에서도 그 공포가 지속된다는 생각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이 영화의 숨은 장치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면, 혹은 단순히 이 영화를 ‘재미있는 공포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아마도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체득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불편함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아마도 그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와 예의를 숙지하지 못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들에게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인종이 서울에서 공존해야 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내어줄 의사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혹은,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썩 괜찮은 도시에 사는 선진국 출신 백인들의 문화에 동참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평균적인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3% 이하로 내려가고 물가상승률이 2%가 채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은 침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돈이 되는 것들은 점점 사라지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더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로 넘어올 것이고,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타문화 배경의 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국처럼 극도로 예민한 신경질적인 국가에서 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겟 아웃>은 굉장히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혀야 한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천구와 안산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스러운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dignity

나는 노빠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 몇 년 전 어설픈 일기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이후 그를 ‘정치적으로 죽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그가 한 때 몸담으며 꿈을 키웠던 곳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직 국회의원실과 직접적인 업무를 주고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오며가며 그들의 호흡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가 그토록 물리치려고 애썼던 망령의 딸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은 문재인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 없이 누군가의 후광에 기대어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라는 그 친구 나름대로의 판단을 들었다. 박근혜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친구가 당시 지지했던 안철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등 이룬 것이 많기 때문에 믿을만 하다는 논리였다. 그 친구의 논리대로라면 전자와 같은 “후광에 기대려는 사람”의 대표격이 박근혜라면, 후자의 경우 이명박을 안철수와 비슷한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친구처럼 문재인을 노무현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아 대통령직에 오르려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닌,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유명한 말은 노무현 그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작가이자 문재인 대선캠프의 영상팀장이기도 했던 정철영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아!”와 “아~”로 구분했다. 만나는 즉시 이미지와 색깔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오는 사람이 노무현이었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의중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는 사람이 문재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 먼저 세상에 발견되었고, 문재인은 그의 친구가 저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까지 배웅한 뒤에야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세상이 “아~”하며 문재인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에게 ‘자격’과 ‘경력’이 필요하고 그 것들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면, 거대 정당을 이끌고 몇차례의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보다 더 화려한 경력과 더 단단한 자격을 갖춘 이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철저하게 이용한 그녀의 몸에는 동물적인 정치적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수성가의 표상이었던 이명박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국가의 재산을 사유화시키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라는 또다른 기업인 출신 정치인에게 몰표를 주고 대통령 후보로 성장시킨 호남의 심리 역시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레주메가 일천한 그에게 하나의 정당을 ‘창업’시켰다는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우리도 대안을 가져보자”는 열망을 실현시켰으니 말이다. 문재인은 다른 방식으로 자격을 획득했다. 노무현 정부 내내 민정수석과 사회수석 등 청와대 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경험을 쌓았지만 그는 여전히  노무현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색깔과 그만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을 일궈나갔다. 그의 성품에 매료된 인재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촛불이 켜진 광화문으로 뛰쳐나간 수많은 정치인들 중 문재인이 ‘선택’된 것 역시 필연적이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색깔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색깔은 노무현과 다르지만 노무현만큼 깊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결과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다. 세상을 바꿀 기회. 노무현이 꿈꾸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세상. 노무현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이제 문재인은 스스로 운명의 다음 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이상 노무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 “친문세력”에 대한 비토로 상대방의 비난의 물결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노무현을 죽인 두 개의 망령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박정희로 상징되는 친일반공주의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십자가라는 불가해한 조합의 상징물에 의지하며 과거에 천착하려는 천박한 종교적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어지러운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괴물처럼 약자를 잡아 먹으며 성장한 천민 자본주의 세력이다. 재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이 괴물이 낳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씨앗이었다.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전자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면 그보다 조금 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후자는 선거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죽은 노무현과 살아남은 문재인을 괴롭혔다. 그 망령 중 일부는 안철수에게 붙었다. 성공한 기업인, 한국사회에 몇 안되는 올바른 소리를 하는 오피니언 리더, 기업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한 이해도 밝은 해결사 이미지. 안철수는 이 시대의 좋은 대안이었다. 망령의 일부는 홍준표에게 붙었다. 죽어도 문재인은 싫다는 사람들은 박근혜가 속한 정당에서 배출한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정당이 매 선거마다 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잘못을 많이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이번에 내세우는 후보는 과거의 잘못과 상관이 없다” 라는 논리로 무장하여 무지한 노년층과 이기적인 부유층을 자극한다. 이게 정확하게 먹히는 지역이 바로 대구와 경북, 그리고 서울 강남구다. 대구와 경북에 사는 그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매번 스스로를 기만한 결과 모든 나쁜 경제지표에서 순위권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대구는 망해가고 있지만 이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우한 현실은 남탓을 하면 그만이다.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는 아마 5년 뒤에도 유효할 것이다.

문재인이 기적적으로 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김대중도 하지 못했고 노무현도 하지 못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고 삼성도 지금까지 쌓아온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들며 버틸 것이다. 대구와 경북에는 아직도 수백만의 사람이 살고 있다.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부유층은 더 집요하게 재산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검찰과 같이 영원한 권력을 가진 집단은 다시 한번 대통령을 모욕주려 할 것이다. 이 모든 장애물을 문재인 혼자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번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입을 것이며 어쩌면 영구히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른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 자체로는 아무런 성취도 얻을 수 없다. 무수히 공격받고 무수히 넘어질 그의 옆과 뒤와 앞에서 그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노무현이 세상을 등질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집단적 부채의식이 ‘미안하다’라는 말을 기어코 한국인의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렇게 아주 큰 씨앗 하나를 한국사회에 심어 놓았다. 문재인이라는 큰 나무 주변에는 그 씨앗으로부터 솟아난 작은 풀잎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서 땅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비가 와도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 내가 앞으로 5년동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노빠다. 빠는 빠답게 해야 할 일이 있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편: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개념이 일상화되고 상식화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 서구적 개념이 한국의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전치(displace) 현상의 지역적 특수성을 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해당 개념의 전파속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신현준을 비롯해 기성 학계 내,외부에서 활동 중인 젊은 학자 집단이 일반 대중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법한 이 주제에 대해, 서울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고무적이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는 서양 학계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젠트리피케이션 이론을 홍대, 서촌, 한남동 등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법한’ 서울 내 특정 지역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기존 학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현장연구를 더함으로써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서구사회에서 기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서울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뒤 저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그곳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문헌 중심의 연구가 놓칠 수 있는 미시적 실제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3장은 도시재생 등 정책적 관점에서 특정 지역의 변화양상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계획 및 도시재생 등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흥미로운 지점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언론에서 피상적으로 다루어지며 특정 이익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부족하나마 학술연구의 형식으로 담아낸 것은 이 책이 가지는 최고의 공헌이다.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지역(홍대 등)부터 현재 막 시작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해방촌 등)을 넓게 아우르며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쉽게 지나쳤을 오류들을 세심하게 정정해주는 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이 현재 한국 지역사회의 정신머리없는 발전 일변도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등 이 책이 공헌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이 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내고 있듯, 서구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노동계급-힙스터-고소득 전문직-대기업자본 순으로 이어지는 특정 지역의 점유 구도가 서울의 주요 특정지역에서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의 지역학, 혹은 부동산 시장은 단순히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제주체의 욕망, 혹은 목적함수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아전투구의 장이다. 서양의 일반적인 대도시들처럼 도심과 주변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종 및 수입에 의해 거주지역이 철저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사회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문화’, 혹은 ‘한국의 철학’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만 “힙”해보여도, 즉 조금만 돈이 될 것 같아 보여도 바로 개발이 들어간다. 그곳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 철학적 중심 없이 단기적 수입 창출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는 ‘자본’ – 이것이 “문화자본”이든 “경제자본”이든 돈의 냄새를 맡아 움직이는 본질적 특성은 돌일하다 –  에 의해 거주의 불안정성을 심화되고 난개발은 가속화된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안적 이론, 혹은 우리 사회에 특화된 이론적 틀이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저자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현장연구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논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의 챕터에서 발견된다.

둘째, 성공회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학술연구로서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어진다. 물론 모든 학술연구가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모든 학술연구는 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자본”을 “경제자본”과 확실히 다르다고 가정하고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가 발생시키는 전치현상의 시작을 지나치게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은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이러한 표혀닝나 생각 자체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튼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소규모 생산자들이 임대료가 싸면서도 문화적 창의성을 위협받지 않는 ‘적절한’ 곳에 자리를 틀고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다. 그 이후 상권이 확대되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규모 상업자본이 돈냄새를 맡고 이들을 몰아내며 문화적 창의성은 획일성으로 상쇄된다. 이후 더 큰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거나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로 인해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방식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의 첫번째 단계에서 ‘소외’당하는 원 거주민들의 입장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문화자본을 소유한 생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준에서 이용당하고 희생당한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큰 결점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원 거주자들이 이룩한 거주문화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들어왔다” “이 곳이 갖는 매력에 이끌려 들어왔다”와 같은 뻔한 변명으로 원거주자들의 피해를 뭉뚱그리려는 시도가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쨌든 상권은 확대되었고 임대료는 올랐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삶은 파괴되었다. 문화자본 생산자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싸이 이전에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있었다면 테이크아웃드로잉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테이크아웃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왜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들을 이토록 옹호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이 주어져 있어도 지금과 같은 성격과 규모의 생산활동을 했을지 증명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호의 근거를 찾기 힘들다.

셋째, 경제학적인 전문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종종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무시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신현준은 자신이 부동산 시장에 대한 공부도 꽤 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서울의 부동상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경제학적인 접근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인터뷰와 현장 답사 등의 형식을 통해 인류학적 접근, 혹은 사회학적 접근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시장과 노동 시장, 그리고 경제정책 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임대료 문제는 서비스업의 임금 문제, 더 나아가 경제정책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권이 형성되는 지역의 공급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건물주, 고용주, 피고용자. 건물주는 불로소득자다. 고용주의 자본은 한계적이다. 피고용자는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위태롭게 노동을 공급한다. 결국 부의 재분배 문제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굳이 “문화” 운운하지 않아도 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조세정책과 도시개발 정책, 서민주거안정 정책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 문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이 절반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부분에 대한 고찰이 극도로 제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분명하고 독보적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다른 책에서 아시아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짓고 넘어가는 것은 왠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앞으로 더 깊은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