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힙스터의 지리적 고민

어제 한 대학교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뻔하고 재미없는 금융경제학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어버린 “흙수저” 2,30대 청년층의 서울 내집 마련의 꿈, 정책적으로 풀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두꺼운 가격 장벽이 드리워진 이 투기의 도시에 문화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는 일련의 청년층이 새로운 색깔의 주거 공간을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주거집단이 해방촌이나 문래동같은, 기존의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며, 경리단길이나 익선동과 같은 ‘골목길’이 한국형 힙스터들의 주요 소비처로 탈바꿈한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후 최근 몇년 간 ‘젠트리피케이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독립 자본가, 혹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가진 역량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을 나름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들의 서울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근본적으로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규모 자본에 밀려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로 설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잃는 것은 다양한 독립 문화 자본 정도가 될 것이고, 단기적인 승자는 창의적 소규모 문화 자본을 보다 정형화된 기업 자본 기반의 대규모 산업형 상품으로 변질시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며, 특정 문화 자본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 갖는 향취, 즉 도시환경이 주는 무형의 공공재를 더 강한 자본가 세력이 부당하게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힙스터 소비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소규모 문화 자본 형성에 참여하기 보다는 이 소규모 자본가들이 영업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과 비슷한 – CJ 따위의 – 소비재를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소비 성향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자본의 형성을 촉구한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니 해방촌으로 옮겨가고, 북촌에 이어 서촌까지 사람들로 붐비니 근처 익선동으로 옮겨간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인스타그램에 ‘힙’한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소규모 문화 자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소득 전문가부터 비정규직까지 아마도 다양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 해방촌이나 익선동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그곳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 관광지와 주거지를 구분하는 심리를 은연중에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들 역시 전통적인 서울의 ‘아파트 판타지아’에서 많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비록 쪽방촌 바로 옆에 생긴 예쁜 커피숍들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하더라도 이들의 꿈은 강남의 아파트로 향해있다. 이들에게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잠원동은 주거공간으로서 좋은 선택이지만, 비슷한 거리에 있는 보광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경제적 유전자이며, 솔직하고 이기적인 경제적 판단에 기인한다. 나는 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출산과 육아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신의 소비 패턴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 세대가 윗세대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점은 세대적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회전체적인 지출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욕망의 대체재를 찾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 아직까지 나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주거공간의 가능성 중 기꺼이 생산자와 밀착된 환경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못할 때 공간적 특수성은 담보될 수 있을까? 문래동에 새로운 문화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꾸리고 생산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정체 상태에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소비력을 갖춘 젊은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힙스터 문화 시장’에 한해, 소비자가 생산자의 근거지를 끊임없이 구축(crow out)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을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 독립적인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일부 힙스터에 국한되어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면, 즉 지방에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서울 안 임대료가 저렴한 골목길을 끊임없이 떠돌려 방황하는 예술가들, 혹은 독립 자본가들의 모습을 계속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단 허리디스크에 걸린 한국사회

서울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95% 신뢰구간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허리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는 확신을 어렵지 않게 갖게 될 것이다. 혹은, 이들이 옆으로 걷는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하는 특수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구글 스콜라를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의학계열의 논문이 전무한 상태인데, 이 흥미로운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국의 엑스터 대학교 정도의 연구기관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이미 진행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더 놀라운 사실은, 통근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 혹은 버스의 복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주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백팩이나 핸드백을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백팩이나 핸드백을 어깨에서 내려서 손으로 들고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한국인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중교통수단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타인과의 접촉을 기꺼이 감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접촉면을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은 백팩과 핸드백을 몸에 장착하는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특수한 상태로 진화할 뿐 아니라 허리를 돌려 옆으로 걷는 방법을 망각하게 되는 특이한 퇴행현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이 사회 전체적으로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국사회는 만성적인 허리디스크에 집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보건복지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급한 상황이다.

백팩과 허리디스크, 또는 무통증과의 상관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혼잡스러운 대중교통수단 안에서 한국인은 왜 백팩을 벗어서 들고 타지 않는가, 혹은 그 혼잡스러운 곳을 굳이 걸어서 통과하려고 할 때 타인에 대한 비정상적 신체적 접촉행위에 대해 미안함을 대체 왜 표시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의 출발점은 정보의 미획득이다. 한국인은 혼잡한 공간에서 백팩을 벗었을 때 얼마나 추가적인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지, 몸을 옆으로 돌려 걸었을 때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얼마나 회피할 수 있는지, 혹은 미리 “실례합니다”와 같은 말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서로의 공간을 얼마나 더 양보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버스와 지하철이 공급되기 시작한지 이미 몇십년이 지났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타인에 의한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이 야기하는 불쾌함의 정도에 대한 학습은 이미 완료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비록 정장에 백팩을 메고 타는 ‘패션'(이걸 ‘패션’이라고 기꺼이 불러주는 나도 참 많이 약해지고 부드러워졌다)이 유행한지 몇년 되지 않았다 해도 그 패션을 고집하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대학교때 마자 플라바나 루카스, 혹은 최소한 이스트팩 등 다른 종류의 백팩을 메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본 경험이 최소한 한번 이상은 있었을 것이 분명한 바, 더 나아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습관처럼 말하라는 가르침을 담임선생님께 습관처럼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경험이 한번씩은 있었을 것이므로, ‘학습의 부재’ 가정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판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샘솟는다. 한국인이 얼마나 못되고 싸가지 없으면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접촉을 불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면 분명히 몸이 닿겠구나, 그러면 저 사람도 싫어하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말겠어!’

위와 같은 생각이 출퇴근길 한국사회를 허리디스크의 개미지옥 속으로 빠트리는 주된 명제란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도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관찰한 바 출퇴근길 한국인들은 대부분 생각 자체를 잘 하지 않는다. 저렇게 몇 문장으로 이어진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까지의 과정도 이미 너무 벅찬데, 사람으로 꽉 찬 그곳 안에서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심을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끄집어내는 마인드컨트롤을 할만큼 사고의 끈이 긴 한국인은 사실 몇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나마 영혼의 불씨가 어떻게 하다보니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휴대폰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소멸해버린다. 이들은 이미 이마 위에 제 3의 눈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시야를 휴대폰에 빼앗겨도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은 이미 확보해놓았다. 애초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즉,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없어보이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행동패턴을 일정하게 나타낸다면, 즉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면, 그 원인 역시 사회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들은 사회에 의해 등떠밀리는 삶을 살고 있다. 대도시라는 익명성 속에 숨어 불편함을 ‘모르는 타인’에게 전가한 채 찰나의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타인을 조금만 더 불편하게 만들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을 전가하는 타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죄책감은 덜어지고, 당장의 이익은 가시적이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는 것이고, 굳이 백팩을 벗거나 몸을 옆으로 돌려 걸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딱히 남을 해하려는 나쁜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지금 당장 저 눈앞의 자리가 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하차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옆의 칸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옆 사람의 불편함을 인위적으로 망각하는 것 뿐이다. 만약 어깨를 치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 회사 부장님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관계에 약하다. 한국사회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계급이다. 계급이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 간 관계 역시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관계는 연속적이다. 계급의 상층부에 있는 이의 영향력이 가장 말단의 사람에까지 미친다. 청와대에서 기침하면 동네 노점상이 타격을 받는 사회다. 그만큼 타인과 자신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폭력을 정당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억눌려 잇었기 때문에 풀 곳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심지어 공짜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은 그러한 억눌린 관계에서의 해방을 위한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다. 회사 복도에서는 임원이 지나갈때 마치 임금님이 지나가는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내가 왕이므로 모두의 어깨를 치면서 지나갈 수 있다. 관계와 계급에 많이 억눌릴수록 공공장소에서의 행동은 거칠게 발현될 확률이 높다.

무척 슬픈 사실은, 위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타고 빨리 내리면 대체 삶의 어떤 부분이 나아지는가?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저 땀이 조금 더 많이 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가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져버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공포심에 질려 남들보다 빨리 걸으려 하고 남들보다 오래 일하려 하며 남들보다 앞에 줄서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반칙은 정당화되고 거짓말은 별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들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많이, 조금만 더 잘 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다들’ 믿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이 걸린 병은 허리디스크가 아닌 정신병이다. 이들은 집단적인 히스테리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모두가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는 조금씩 더 나빠지고, 지하철과 버스는 조금씩 더 혼잡해진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2호선과 9호선 열차에는 선반이 없다고 한다. 백팩이나 다른 짐을 사람들이 올리지 않으니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것은 사회가 나빠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제 사람들은 백팩을 벗어 올리고 싶어도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더 등떠밀게 된다. 못되지라고, 나빠지라고 등떠밀게 된다.

조던 필레: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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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은 명민한 영화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 감독 조던 필레는 특유의 B급 감성과 독립영화의 자유로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흑백 갈등과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를 미시적인 시선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냈다. 미국사회를 떠받드는 핵심은 ‘가족’과 ‘이웃’이다. 3억이 머는 인구, 다양한 인종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잠재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조되는 ‘커뮤니티’의 중요성에 기인한다.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지만 가족의 위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학교, 군대, 이웃 등 그룹화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개념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주입한다. 그 결과 미국 시민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 덕에 국가적 위기상활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이 견고한 국가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은 문제는 시민 개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한다. 1%와 99%가 서로를 경멸하고, 여성의 어려움을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자의 기본권을 다수자가 지지하지 못할 때 사회는 갈라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요인은 아마도 모두가 알고 있듯 백인과 흑인 간 갈등일 것이다. <겟 아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갈등의 미묘한 시작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또한, 인디 공포-코메디 영화 장르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장르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관객은 충분한 몰입도와 함께 영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며,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식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같은 유색인종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장치들에서 현실적인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오거나 서스펜스적 장치가 들어가 있어서 공포 영화로 인정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 지금 길거리에 실재하는  공포의 조각을 영화적 언어로 잘 옮겨 놓았으며, 그 결과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관 밖에서도 그 공포가 지속된다는 생각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이 영화의 숨은 장치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면, 단순히 이 영화를 ‘재미있는 공포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불편함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아마도 그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와 예의를 숙지하지 못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들에게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인종이 서울에서 공존해야 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내어줄 의사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혹은,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썩 괜찮은 도시에 사는 선진국 출신 백인들의 문화에 동참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어떠한지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잠재성장률이 3% 이하로 내려가고 물가상승률이 2%가 채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은 침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돈을 벌기에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이 되는 셈이고,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타문화 배경의 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국처럼 극도로 예민한 신경질적인 국가에서 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겟 아웃>은 굉장히 심각한 경고의 메세지로 읽혀야 한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천구와 안산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스러운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dignity

나는 노빠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 몇 년 전 어설픈 일기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이후 그를 ‘정치적으로 죽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그가 한 때 몸담으며 꿈을 키웠던 곳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직 국회의원실과 직접적인 업무를 주고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오며가며 그들의 호흡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가 그토록 물리치려고 애썼던 망령의 딸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은 문재인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 없이 누군가의 후광에 기대어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라는 그 친구 나름대로의 판단을 들었다. 박근혜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친구가 당시 지지했던 안철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등 이룬 것이 많기 때문에 믿을만 하다는 논리였다. 그 친구의 논리대로라면 전자와 같은 “후광에 기대려는 사람”의 대표격이 박근혜라면, 후자의 경우 이명박을 안철수와 비슷한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친구처럼 문재인을 노무현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아 대통령직에 오르려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닌,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유명한 말은 노무현 그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작가이자 문재인 대선캠프의 영상팀장이기도 했던 정철영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아!”와 “아~”로 구분했다. 만나는 즉시 이미지와 색깔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오는 사람이 노무현이었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의중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는 사람이 문재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 먼저 세상에 발견되었고, 문재인은 그의 친구가 저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까지 배웅한 뒤에야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세상이 “아~”하며 문재인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에게 ‘자격’과 ‘경력’이 필요하고 그 것들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면, 거대 정당을 이끌고 몇차례의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보다 더 화려한 경력과 더 단단한 자격을 갖춘 이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철저하게 이용한 그녀의 몸에는 동물적인 정치적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수성가의 표상이었던 이명박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국가의 재산을 사유화시키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라는 또다른 기업인 출신 정치인에게 몰표를 주고 대통령 후보로 성장시킨 호남의 심리 역시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레주메가 일천한 그에게 하나의 정당을 ‘창업’시켰다는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우리도 대안을 가져보자”는 열망을 실현시켰으니 말이다. 문재인은 다른 방식으로 자격을 획득했다. 노무현 정부 내내 민정수석과 사회수석 등 청와대 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경험을 쌓았지만 그는 여전히  노무현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색깔과 그만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을 일궈나갔다. 그의 성품에 매료된 인재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촛불이 켜진 광화문으로 뛰쳐나간 수많은 정치인들 중 문재인이 ‘선택’된 것 역시 필연적이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색깔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색깔은 노무현과 다르지만 노무현만큼 깊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결과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다. 세상을 바꿀 기회. 노무현이 꿈꾸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세상. 노무현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이제 문재인은 스스로 운명의 다음 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이상 노무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 “친문세력”에 대한 비토로 상대방의 비난의 물결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노무현을 죽인 두 개의 망령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박정희로 상징되는 친일반공주의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십자가라는 불가해한 조합의 상징물에 의지하며 과거에 천착하려는 천박한 종교적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어지러운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괴물처럼 약자를 잡아 먹으며 성장한 천민 자본주의 세력이다. 재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이 괴물이 낳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씨앗이었다.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전자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면 그보다 조금 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후자는 선거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죽은 노무현과 살아남은 문재인을 괴롭혔다. 그 망령 중 일부는 안철수에게 붙었다. 성공한 기업인, 한국사회에 몇 안되는 올바른 소리를 하는 오피니언 리더, 기업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한 이해도 밝은 해결사 이미지. 안철수는 이 시대의 좋은 대안이었다. 망령의 일부는 홍준표에게 붙었다. 죽어도 문재인은 싫다는 사람들은 박근혜가 속한 정당에서 배출한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정당이 매 선거마다 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잘못을 많이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이번에 내세우는 후보는 과거의 잘못과 상관이 없다” 라는 논리로 무장하여 무지한 노년층과 이기적인 부유층을 자극한다. 이게 정확하게 먹히는 지역이 바로 대구와 경북, 그리고 서울 강남구다. 대구와 경북에 사는 그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매번 스스로를 기만한 결과 모든 나쁜 경제지표에서 순위권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대구는 망해가고 있지만 이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우한 현실은 남탓을 하면 그만이다.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는 아마 5년 뒤에도 유효할 것이다.

문재인이 기적적으로 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김대중도 하지 못했고 노무현도 하지 못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고 삼성도 지금까지 쌓아온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들며 버틸 것이다. 대구와 경북에는 아직도 수백만의 사람이 살고 있다.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부유층은 더 집요하게 재산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검찰과 같이 영원한 권력을 가진 집단은 다시 한번 대통령을 모욕주려 할 것이다. 이 모든 장애물을 문재인 혼자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번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입을 것이며 어쩌면 영구히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른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 자체로는 아무런 성취도 얻을 수 없다. 무수히 공격받고 무수히 넘어질 그의 옆과 뒤와 앞에서 그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노무현이 세상을 등질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집단적 부채의식이 ‘미안하다’라는 말을 기어코 한국인의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렇게 아주 큰 씨앗 하나를 한국사회에 심어 놓았다. 문재인이라는 큰 나무 주변에는 그 씨앗으로부터 솟아난 작은 풀잎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서 땅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비가 와도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 내가 앞으로 5년동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노빠다. 빠는 빠답게 해야 할 일이 있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편: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개념이 일상화되고 상식화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 서구적 개념이 한국의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전치(displace) 현상의 지역적 특수성을 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해당 개념의 전파속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신현준을 비롯해 기성 학계 내,외부에서 활동 중인 젊은 학자 집단이 일반 대중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법한 이 주제에 대해, 서울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고무적이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는 서양 학계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젠트리피케이션 이론을 홍대, 서촌, 한남동 등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법한’ 서울 내 특정 지역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기존 학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현장연구를 더함으로써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서구사회에서 기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서울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뒤 저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그곳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문헌 중심의 연구가 놓칠 수 있는 미시적 실제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3장은 도시재생 등 정책적 관점에서 특정 지역의 변화양상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계획 및 도시재생 등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흥미로운 지점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언론에서 피상적으로 다루어지며 특정 이익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부족하나마 학술연구의 형식으로 담아낸 것은 이 책이 가지는 최고의 공헌이다.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지역(홍대 등)부터 현재 막 시작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해방촌 등)을 넓게 아우르며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쉽게 지나쳤을 오류들을 세심하게 정정해주는 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이 현재 한국 지역사회의 정신머리없는 발전 일변도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등 이 책이 공헌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이 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내고 있듯, 서구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노동계급-힙스터-고소득 전문직-대기업자본 순으로 이어지는 특정 지역의 점유 구도가 서울의 주요 특정지역에서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의 지역학, 혹은 부동산 시장은 단순히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제주체의 욕망, 혹은 목적함수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아전투구의 장이다. 서양의 일반적인 대도시들처럼 도심과 주변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종 및 수입에 의해 거주지역이 철저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사회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문화’, 혹은 ‘한국의 철학’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만 “힙”해보여도, 즉 조금만 돈이 될 것 같아 보여도 바로 개발이 들어간다. 그곳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 철학적 중심 없이 단기적 수입 창출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는 ‘자본’ – 이것이 “문화자본”이든 “경제자본”이든 돈의 냄새를 맡아 움직이는 본질적 특성은 돌일하다 –  에 의해 거주의 불안정성을 심화되고 난개발은 가속화된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안적 이론, 혹은 우리 사회에 특화된 이론적 틀이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저자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현장연구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논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의 챕터에서 발견된다.

둘째, 성공회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학술연구로서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어진다. 물론 모든 학술연구가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모든 학술연구는 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자본”을 “경제자본”과 확실히 다르다고 가정하고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가 발생시키는 전치현상의 시작을 지나치게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은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이러한 표혀닝나 생각 자체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튼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소규모 생산자들이 임대료가 싸면서도 문화적 창의성을 위협받지 않는 ‘적절한’ 곳에 자리를 틀고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다. 그 이후 상권이 확대되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규모 상업자본이 돈냄새를 맡고 이들을 몰아내며 문화적 창의성은 획일성으로 상쇄된다. 이후 더 큰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거나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로 인해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방식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의 첫번째 단계에서 ‘소외’당하는 원 거주민들의 입장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문화자본을 소유한 생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준에서 이용당하고 희생당한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큰 결점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원 거주자들이 이룩한 거주문화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들어왔다” “이 곳이 갖는 매력에 이끌려 들어왔다”와 같은 뻔한 변명으로 원거주자들의 피해를 뭉뚱그리려는 시도가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쨌든 상권은 확대되었고 임대료는 올랐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삶은 파괴되었다. 문화자본 생산자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싸이 이전에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있었다면 테이크아웃드로잉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테이크아웃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왜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들을 이토록 옹호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이 주어져 있어도 지금과 같은 성격과 규모의 생산활동을 했을지 증명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호의 근거를 찾기 힘들다.

셋째, 경제학적인 전문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종종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무시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신현준은 자신이 부동산 시장에 대한 공부도 꽤 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서울의 부동상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경제학적인 접근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인터뷰와 현장 답사 등의 형식을 통해 인류학적 접근, 혹은 사회학적 접근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시장과 노동 시장, 그리고 경제정책 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임대료 문제는 서비스업의 임금 문제, 더 나아가 경제정책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권이 형성되는 지역의 공급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건물주, 고용주, 피고용자. 건물주는 불로소득자다. 고용주의 자본은 한계적이다. 피고용자는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위태롭게 노동을 공급한다. 결국 부의 재분배 문제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굳이 “문화” 운운하지 않아도 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조세정책과 도시개발 정책, 서민주거안정 정책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 문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이 절반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부분에 대한 고찰이 극도로 제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분명하고 독보적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다른 책에서 아시아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짓고 넘어가는 것은 왠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앞으로 더 깊은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real labour rigidity

흔히 임금계약의 경직성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명목 경직성은 학계에서도 많이 연구가 되어 있는 주제이지만, 노동의 실질적 이동, 혹은 진화가 더디게 이루어지는 현상을 거시경제학 관점에서 통찰력 있게 들여다본 연구결과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용자 측의 임금 요구 수준에 맞게 노동의 공급이 신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바이지만, 특정 계층, 혹은 특정 노동 집단이 언뜻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판단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의 공급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는 사례에 대한 모형화 작업은 (최소한) DSGE 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되는 사례 두가지만 기록해본다.

먼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서 정년을 채운, 혹은 정년에 근접한 세대가 두번째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경직성이 발생한다. 원래 이들의 계획대로라면 은퇴 연령에 도달했을 때까지 모든 충분한 자산을 바탕으로 부를 유지한 채 연금 등의 노후대책을 통해 생을 마감해야 하는게 정상이지만, 이들 스스로 창출한 역피라미드 구조의 인구 생태계에서는 연금이 효율적인 노후대책이 될 수 없으며 그 외의 다른 생계수단을 마련해야만 한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이를 부동산 시장에서 찾고 있는 듯 하다. 즉 부동산 시장의 끝없는 거품 생산을 통해 자산가격을 뻥튀기하고 이를 되파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여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작용은 크게 두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한 자산의 축적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즉 시장에서의 균형가격만이 상승할 뿐인 이 현상은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해 반드시 수요 측의 효용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이 젊은 세대에게 전적으로 귀속되고 있으며, 이 결과 세대간 갈등이 증폭될 뿐더러 젊은 세대의 빈곤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이는 또다른 부작용인 노동 시장에서의 공급 부족 사태로 이어진다.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여 은퇴 이후 제 2의 직업을 찾으려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영업으로 몰린다. 은퇴자금을 가지고 가게를 차린 영세자영업자는 이들 스스로 자초한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의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디폴트로 내몰린다. 많은 경험을 축적한 베이비부머가 치킨집과 같은 단순 노동 사업으로 몰리는 이유는 경직적인 한국의 사내 문화와 적극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술을 습득하려 하지 않는 보수적인 사회 문화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 부장까지 한 사람이 자동차 기름을 닦을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은퇴 시기에 다다른 기성 세대는 자신들이 자초한 함정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이를 하나만 낳다 보니 자신들을 부양할 젊은 세대가 극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부동산 시장에 올인하다 보니 그 거품때문에 은퇴 후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차라리 금융상품에 투자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올바른 투자는 기업의 자본을 확충시켰을 것이고 건전성을 확보한 기업은 더 나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는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아이를 조금 더 많이 낳았을 것이다. 경제가 떠받들어 주는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성 세대는 금융 지식이 무척 부족한 편이고, 높은 인구 밀도와 좁은 땅덩어리에서 인간의 노동력보다 땅과 건물의 존재 가치가 더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력을 귀하게 여기고 가족과 개인의 소중함을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했더라면 좁은 땅덩어리가 가지는 한계를 인간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직적인 사회 문화는 또다른 노동의 실질적 경직성을 불러온다. 바로 젊은 세대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이다. 이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 즉 사용자는 더 적은 임금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혹은 높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과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 중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의 수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직자, 혹은 노동 공급자가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경쟁자들보다 먼저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던가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 생활을 영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전자는 인적자본에의 투자이고, 자본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들은 “금수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인적자본을 확충하는 것에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러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노동자는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젊은이들은 차라리 실업 상태를 택해버리고 있다. 이 현상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아직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부모 세대에서 대학 졸업자가 갈 수 있었던 기업의 수준과 현재 젊은 세대가 동등한 학력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기업의 수준은 당연히 같지 않다. 7~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던 시대는 기회의 시대이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발전하고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다. 2~3%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시대는 정체의 시대다. 안정적으로 현실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 각광받는다. 7,9급 공무원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을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이 시대의 가치와 요구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성의 오류’가 발생할 여지 역시 존재한다. 개개인으로서는 안정적인 공무원에 지원하기 위해 집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 몰라도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경제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총명한 재능들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업 관점에서 봐도 비슷하다. 개별 기업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기 위해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를 줄인다. 신입사원 규모를 줄이고 희망퇴직을 실시하여 피고용인 규모를 줄이면 당장의 재무구조는 개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기침체를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줄여버리는 결과를 불러 오는 것이다. 결국, 젊은 세대는 시장에 신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실업률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지금 당장 중소기업에서 입에 풀칠할 정도로 다급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비용으로 저당잡아 버릴 수도 있다.

위의 두가지 사례는 모두 노동 공급의 실질적인 부분에서의 경직성, 혹은 ‘inertia’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대한 근거로 기능한다. 늙은 세대는 늙은 세대대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노동의 비신축적 공급, 혹은 전환 현상에 기여하고 있다. 이들의 선택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가치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선택을 매 기마다 한다고 가정한다면, 늙은 세대는 치킨집을 더이상 차리지 말아야 한다. 젊은 세대는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인정받는 기업으로 취직하던가 그와 동등한 대가가 예상되는 스타트업을 차려야 한다. 의도적 실업과 의도적 파산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되는 사회라면 그 나라 경제는 이미 마비 수준으로 치닫고 있을 것이다.

신화의 종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신화가 있다. 생존과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철학과 가치관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지독한 성격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어 계속 생명을 이어왔다. 일본 제국주의와 남로당, 괴뢰 만주국을 거쳐 신생 공화국의 육군 장교로 살아남아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질긴 숨을 이어나간 그 남자는 불법에 의해 권력을 쟁취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강화한 뒤 기어코 헌법을 바꿔 권력을 영속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그는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가치관을 한국에 심어 놓았고, 그 결과 한국은 동과 서로 나뉘어 반목하고 다투기 시작했으며, “큰 일”을 하기 위해 개인의 가치는 희생되어도 좋다는 주장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한국사회는 제국주의의 지배로 인해 단절되었던 역사를 회복하기도 전에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아주 큰 변화를 아주 짧은 기간에 겪어야 했고, 그 기간동안 일어난 수 많은 고통들은 숫자로 보기 좋게 표현된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묻혀버렸다. 누군가에게는 떼돈을 벌게 해준 은인이자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의 철학은 한국사회의 철학이 되었고, 한국인의 절반은 그의 철학에 동의하며 더이상 발전이 아니게 된 그 ‘발전’이라는 구호를 떠받드는 충견으로 기능해왔다.

그와 그의 철학에 동의하는 그 절반의 한국인이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녀에게 권력을 다시 선물했다. 그녀가 권력을 잡게 된 이유를 분석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지, 부모를 모두 비명에 잃은 그녀의 성장 과정에 어떠한 문제는 없었는지 사려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단지 세대 간의 갈등, 소외 받은 노인들의 실력 행사 정도로 이 기현상의 배경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의 신화는 그의 딸의 신화로 이어졌다.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변해온 나라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수십년 지난 가치들이 다시 현대 한국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미 권력자 한 사람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시스템을 갖게 된 이 사회였지만 여전히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아보였다. 공직사회의 말단 직원이 쓰는 보고서의 톤 하나조차 청와대의 오더를 받아 수정되어야 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마땅한 견제세력조차 보이지 않는 한국사회의 대통령이라는 위치는 단지 물리적인 명령의 현실화 외에도 그 사회의 공기, 분위기, 혹은 집단 철학의 기조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위력을 가진다. 경제는 고꾸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덜 웃게 되었다. 같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끼리 더 많이 다투기 시작했고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는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의 신화가 그의 딸의 신화로 전이되는 최근 몇 년의 기간동안, 한국사회는 분명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의 신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전 대통령의 공헌 또한 무시할 바는 아니지만, 단순히 이기적인 도둑질을 현명하게 성취해 낸 그의 ‘그릇’과, 한국 현대사의 흐름 자체를 통째로 바꾸어 버린 논쟁적 인물의 철학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그녀의 ‘그릇’은 분명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었다. 거짓말, 반칙, 결과주의, 경쟁, 불로소득, 힘, 집중, 대마불사, 물질, 돈, 질투.. 이런 가치들이 한국사회를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분배, 정의, 공정, 상식, 복지, 같은 가치들에 밀려 숨어있던 이 가치들이 조금 더 굳건한 방식으로 한국사회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화는 그와 그녀를 추종하는 이들의 신화이기도 했다. 권력자의 밑에서 조금 작은 권력을 나누어 받은 이들은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할 수 있는한 많이,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개인의 이기심이 우선시되는 사회철학은 이들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시켜 주었다. 권력을 나누어 받지 못한 이들은, 시스템을 바꿀 힘을 부여받지 못한 이들은 점점 가난해져갔다. 몸도 마음도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시스템에서 고통만 쌓여 갔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누군가의 주머니에 돈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며 하루 하루를 허비해야 했고, 그렇게 모인 돈은 권력자를 위해 쓰였다. 돈을 가진 이들과 돈을 갖지 못한 이들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힘을 합쳐 그들만의 울타리를 더 높게 만들었다. 계급 간 차이는 눈에 띄게 커졌고 계급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 모든 과정은 제국주의로부터 시작해 독재와 재벌 중심 계획경제로 귀착되는 불평등한 사회로부터 출발되었고, 더 불평등한 사회로 마무리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가진 유일한 신화다. 이 유일한 신화는 구미 어딘가에서 동상의 모습으로 현현해 있을 뿐만 아니라 꽤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도 무형의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오늘은 이 신화가 무너지는 과정이 출발하는 날이다. 광장에서 시작되었고 민주주의와 헌법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독재와 비상식, 질투와 이기심으로 상징되는 하나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과정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민주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 완성되고 있다. 시민의 상식에 의해 법은 만들어지고 이 법에 의해 권력은 통제되어야 하며, 통제된 권력은 시민 개개인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봉사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법으로 통제되는 범위 내에서 권력의 재분배를 이루어 내는 유일한 수단이어야 하지만 자본주의의 ‘나쁜 이기심’은 다시 한번 법 아래에서 자원의 효율적인 재분배를 위해 통제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세력과 경제적 권력을 쟁취한 세력이 결탁하여 불평등한 사회를 심화시키는 공범으로 활동해왔다. 오늘은 그러한 세력에게 정당한 절차에 의해 책임을 묻는 과정의 출발선인 셈이다. 이제 헌법재판소는 이 신화를 법적으로 끝낼 키를 쥐게 되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직접 투표를 통해 신화를 공식적으로 끝낼 새로운 대표자를 뽑게 된다.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의 실마리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채 오늘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 개인의 미간 주름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개, 돼지” 취급을 받으며 수모와 멸시를 묵묵히 견디어 낸 시민의 목소리는 그 누군가에게라도 들려야 하는 정치적 의사의 표현으로 보상되어질 수 있다.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꽃이 필 무렵이 되면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나갈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이 비뚤어진 신화 아래에서 고통받은 수많은 이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올바른 역사를 써 나가는 것이다. 역사만이 고통을 감춘 과거를 미래로 끄집어내어 위로해줄 수 있다. 그 역사는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에 의해서만 기록되어질 수 있다. 오늘은 그 기록의 첫 날이다.

who drives whom?

많은 이들이 정치인과 기업가를 혐오한다.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부당한 방식을 통해 가져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갑”을 상징하게 되었고, “갑”은 “을”을 탈취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지금 너무 급하다”라는 핑계를 댄다. 그들도 사실 어려우니 이해를 좀 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먹고 살기 어려우니, (나보다 조금 더 약한) 너를 약탈할게, 라고 약자에게 사정하는 척 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위와 비슷한 ‘사정’을 많이 목격한다. 지하철이나 사람을 치고 지나갈 때,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인식하고도 문고리를 잡아주지 않을 때, 새치기를 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를 때, 이들은 의도적으로 악한 마음을 먹고 있는, 반(反)윤리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다. 이들의 표정에서 “내가 지금 급해서 (좀 봐달라)”, 혹은 “먹고 살기 힘드니 (좀 봐달라)” 정도의 절박함이 읽힌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 정도의 변명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배려없음’이란, 마치 이 사회의 거짓말과 같이, 딱한 사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선택적 윤리규정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철학의 형성과정은 양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개별적인 민초들의 생활습관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컨센서스가 발전하기도 하고,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몇몇 소수집단에 의해 하향식으로 뿌리내려지기도 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확인이 된 바다. 구성원 개개인의 의식구조와 정치인, 자본가, 언론, 공무원 등 어젠다 세터의 철학이 상호작용을 주고 받으며 한 사회의 집단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이것이 누적되어 ‘문화’ 혹은 ‘국민성’이라고 부르는 특질로 체현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통제하고 약탈하는 “갑”이 탄생했을까,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는 “갑”이 “을”을 탈취했기 때문에 “을” 역시 이러한 지배자의 가치관을 물려받게 된걸까? 전자가 맞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후자가 맞다면 이 사회의 일반적인 구성원은 지배계급에 복종하며 사는 피지배계급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전자가 민주주의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을 재현하고 있다면, 후자는 근대화가 진행되지 못한 사회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어느쪽도 그리 달콤해보이지 않는다.

동지애, 혹은 fraternité, 혹은 camaraderie

한국어로 ‘동지애’, 혹은 ‘형제애’로 번역되는 단어, 혹은 프랑스 국기 중 빨간색을 상징하는 ‘fraternité’ – 종종 ‘박애’로 잘못 번역되는 – 의 영어식 표현인 fraternity, 혹은 camaraderie. 사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어로 표현되는 ‘동지애’나 ‘형제애’는 너무나 협소하다. 그렇다고 영어식 표현인 fraternity나 camaraderie가 내포하는 의미가 한국어로 일대일로 치환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귀찮지만 굳이 뜻을 풀어 ‘목적과 뜻을 공유하는 사람과 나누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메리엄-웹스터에서는 이 “사랑의 감정”을 그냥 “feeling of friendship”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 등장하는 “friendship”을 굳이 ‘우정’으로 번역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사랑과 우정은 맞닿아있기 때문이고, 이 두 감정이 지극해지면 서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녀간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지극해지면 우정이 되고, 친구간의 우정이 깊어지면 사랑을 느낀다. 즉,’ 에로스적인 사랑’ 이상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동지애’ 개념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궁극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의 감정”이라 함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최종 종착지같은 감정 같은거다. 그리고 이 ‘동지애’가 바로 모든 종류의 사랑과 우정이 지극해질 때 발견되는 그 궁극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뜨거운 친밀함, 친구에게 느끼는 우정,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동료의식, 가족에게 느끼는 애틋함, 이웃에게 느끼는 편안함,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지의식,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안도감, 세계인들에게 느끼는 형제애,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하나의 감정을 향해 있다. 차별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시기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한한 사랑의 감정. 그 감정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환대’의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고,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체득되는 후험적인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거기까지 다다르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추구한다. 그 감정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인생에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내 인생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은 타인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게 다 허리를 다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최저임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나요?

최저임금이 사상 최초로 시간당 6,000원을 돌파했다. 전년대비 8%대 상승률이다. 물가상승률보다는 당연히 높을 것이지만, 여전히 한시간 일해서 밥 한그릇 사먹기 빠듯하다. 당연히 노동계는 반발하고 나섰다. 너무 적다는거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자쪽도 잔뜩 뿔이 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올라가면 고용을 감당 못한다는거다. 양쪽 모두 불만인 결과가 나왔다. 누가 맞는걸까? 해결책은 있는걸까?

우선, 최저임금이 제대로 변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다음의 그림은 최저임금의 전년대비 상승률을 식료품 및 비주류 물가지수(2010년=100 기준)및 전,월세 변화율과 비교한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 때문에 식료품 값보다 최저임금이 더 적게 상승한다면 그만큼 배가 더 고파진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최저임금 노동자들은 자가주택이 아닌 전세 혹은 월세 형태의 주거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임대차비용이 최저임금보다 더 가파르게 상승할수록 이들의 삶은 더 궁핍해질 것이다.

전년대비변화율

98~99년, 09~11년을 제외하고, 최저임금의 전년대비 변화율은 식료품이나 전,월세 변화율보다 항상 더 높았다. (두번의 예외적인 시기는 모두 경제위기 상황이다. 경제위기시에는 임금이 동결 혹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나 환율상승 및 수입원자재, 수입최종재 물가지수의 상승으로 전체 물가는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지수를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을 살펴보자. 이 값이 높을수록 최저임금으로 기본적인 음식을 사먹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식료품물가지수 식료품물가지수변화율

첫번째 그림은 물가지수를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을 시계열로 나타낸 것이고, 두번째 그림은 두 변수의 변화율로 다시 구한 것이다. 두번째 그림은 변화율이기 때문에 들쭉날쭉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검은색 점선인 추세선으로 보면 약간이나마 하락하고 있다. 두번째 그림에서 수치가 1보다 높으면 그해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의 변화율이 최저임금 변화율보다 높았다는 뜻이다. 94, 98~99, 2008~2011년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퍽퍽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먹는 문제, 사는 문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득불평등의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살만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못한다. 그저 시계열상에서 드러나는 ‘상대적인’ 삶의 질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득재분배 효과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통계청에서는 전체가구를 10분위로 나누어 소득분위별 근로소득 및 소비지출을 집계한다. 월별 자료로 환산하기 위해 최저임금에 209를 곱하여 비교해 보았다.

최저임금대비가계소득및지출
파란색 선은 전체가구의 월별기준으로 근로소득을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이고, 빨간색 선은 가구당 소비지출액을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이다. 전체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가구 평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값이 높을수록 평균적인 가구의 근로소득 및 소비지출과 최저임금을 받는 가구의 소득 및 지출 사이에 차이가 크다는 의미다. 그만큼 최저임금 노동자 계층이 평균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이므로, 소득 불평등의 한 척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가 가용한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이 수치는 점차 감소해왔다. 즉, 평균적인 가구의 근로소득 및 소비지출 수준과 비교해 최저임금 노동자 가구의 소득 및 지출 수준이 점차 완화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 수치는 근로소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위계층으로 갈수록 비근로소득(금융소득 등)의 비중이 커질 것이고, 최저임금 가구의 경우 근로소득의 비중이 클 것이다. 때문에 비근로소득까지 포함시키면 불평등의 정도는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음 그래프는 최저임금과 시간당 명목임금의 전년대비 변화율을 비교한 것이다.

시간당명목임금자료가 가용한 2000년부터 비교해보면, 2010년을 제외하고 최저임금의 상승률이 전체가구의 시간당 명목임금 상승률을 항상 상회하였다.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최저임금의 하방경직성을 확보한 결과는 불평등의 완화와 최저임금 계층의 상대적인 삶의 질 개선이다. 물론, 위의 결과들이 여전히 ‘최저임금으로 먹고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는 못한다. 여전히 최저임금 노동자가 한 달에 받는 월수입은 하위 2분위에서 3분위 사이다. 하위 1분위는 월 근로소득보다 소비지출이 더 많다. 즉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극빈층이라는 뜻이다. 그 바로 윗 레벨이 최저임금 노동자들이다. 정규직으로 편입되지 못한 계층이 ‘알바’만으로 은퇴시점까지 생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다달이 월세를 내면서 음식을 사 먹으면서 ‘저축’을 할 수 있는가, 즉 노후를 대비할 여력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과연 하위 몇분위부터 안정적인 저축이 가능한가, 안정적인 노후대비가 가능한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물가수준이나 평균임금상승률보다 더 빠르게 최저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나는 정작 중요한 것은 최저임금이 아니라는 주장을 일전에 이곳에서 펼친 적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노동환경의 안정이다. 근로소득자 개개인이 자신의 미래 근로환경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고 이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전세계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하지만 미국보다 현격히 떨어지는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즉, 비정규직의 사회적 불안정성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최저임금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