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b Boilen: Your Song Changed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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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일주일에 5천원의 용돈을 받았다. 일주일 내내 딱히 돈을 쓸 일이 없던 나는 그 5천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토요일 오전수업이 끝나면 친구 진우와 함께 효자동에 있는 레코드샵에 가서 테이프 하나를 샀다. 그 테이프를 일주일 내내 들으며 쉬는 시간마다 진우와 음악 이야기를 했다. 가끔 돈이 보너스처럼 더 생길 때에는 테이프를 하나 더 사거나 [핫뮤직]이나 [서브]같은 음악 잡지를 사서 읽고 또 읽었다. 중학교 3년 생활이 끝날 때 쯤 내 방에는 약 300개의 테이프와 수십권의 음악잡지가 쌓여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는 테이프가 아닌 CD를 사기 시작했고, 대학생이 되면서 MP3 음악을 다운받아 듣다가 유학시절부터 다시 CD를 사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요즘에는 CD보다 바이닐을 더 많이 산다. 물론 애플뮤직 등을 이용해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기도 한다.

요즘 듣는 음악들도 물론 나를 매번 즐겁게 해주지만, 사춘기 시절 들었던 음악들이 이후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즐거움과 같은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금은 음악이 삶의 습관이자 생활의 일부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자리잡았지만 당시에는 음악이 내 삶의 거의 전부였고 중심이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일주일을 살았고, 테이프 속지에 적힌 음반 해설과 [핫뮤직]에 거의 매달 실렸던 “~ 명반 50선”의 리스트를 외우는 일이 기말고사 준비보다 더 중요했다. 당시 좋아했던 뮤지션들의 언행은 내 삶의 표지였고 당시 좋아했던 음악이 삶의 태도를 결정했다. 나같은 일개 음악팬도 그정도였는데 시대를 빛낸 뮤지션들의 어린 시절은 오죽했을까. 그들의 삶을 바꾸어놓은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살짝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NPR에서 [All Songs Considered]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밥 보일렌(Bob Boilen)은 뮤지션이자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하지만 1년에 약 500개의 공연을 보는 엄청난 음악 매니아이기도 하다. 그는 뛰어난 인터뷰어이기도 한데, 그런 그가 당대의 뛰어난 여러 뮤지션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음악 커리어, 더 나아가 삶 자체를 바꾸어 놓은 음악을 정리해놓은 책이 [Your Song Changed My Life]다. 한국 음악팬들에게 해외 뮤지션들은 상대적으로 약간 먼 거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홍대나 한남동의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없고 말을 걸 수도 없다. 보고 싶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몇 남아있지 않은 않은 국내 음악매체에 자주 노출되지도 않기 때문에 해외 뮤지션들의 사적인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이 책은 그 간극을 매워주는 소중한 인터뷰 모음집이다.

이들이 어린 시절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떤 음악을 듣고 자랐는지, 현재의 음악 커리어를 형성한 근간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을 때의 쾌감이 생각보다 짜릿하다. 거의 대부분의 젊은 뮤지션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환경 요소도 분명해 보이지만(부모님이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엄청난 음악 애호가이거나) 꽤 많은 뮤지션들의 경우 음악을 업으로 삼기로 결정한 이유나 배경이 예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인트 빈센트의 경우 집 앞을 지나가던 배달 트럭이 우연히 떨어트린 박스에 담긴 음반들이 그녀가 접한 첫번째 음악이었다. 제임스 블레이크는 학교 기숙사 친구의 방에서 우연히 접한 1960년대 소울/R&B 아티스트 샘 쿡(Sam Cooke)의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아 현재와 같은 음악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밥 보일렌에 의하면 코트니 바넷의 초창기 음악은 매우 평범했고 밴드의 공연도 미숙하기 짝이 없었지만, 투어 도중 윌코의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현재와 같은 바넷 특유의 기타 테크닉과 가사 창작법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런 디엠시 등 올드스쿨 힙합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컨트리-블루스 싱어 제니 루이스의 고백도 재미있다. 현재 2,30대로 음악적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호지어(Hozier), 아스게이어(Ásgeir) 등 많은 뮤지션들의 사춘기 시절 영웅이자 워너비는 너바나와 펄잼이었다. 나도 너바나와 펄잼을 들으며 성장했기에 더 반갑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만약 나를 닮은 자녀가 생긴다면 나는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생일선물로 악기를 선물해줄 수도 있고, 저녁 시간 내내 음악을 틀어놓고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흥미롭게 관찰해보고 싶기도 하다. 음악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관없다. 하지만 만약 나를 닮은 그 친구가 음악을 좋아하기 시작한다면 상당히 짜릿한 기분을 느낄 것 같다. 내 아버지가 젊은 시절 모아두었던 산울림의 음반을 내가 다시 찾아내어 재생했을 때 아버지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카텔 뮐레르·조제 루이 보케: 몽파르나스의 키키

키키
마리옹 꼬띠야르가 주연한 [라 비앙 로즈]를 보고 에디뜨 삐아프의 생애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요즘보다 더 심한 남녀차별이 존재하던 시기 가난과 불운을 온 몸으로 받아 내며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여인의 생은 그 자체로 이미 영웅의 서사가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완벽한 서사였다. 그녀가 남긴 것은 비단 아름다운 음악만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역사적 증거로서 그녀의 생 전체가 읽힐 수 있다. 삐아프보다 조금 더 일찍 같은 빠리라는 공간에서 태어나 삐아프만큼이나 치열하고 아픈 사랑의 증거로 기록될 삶을 살다간 여성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러 남성 예술가의 뮤즈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독립적인 여성 예술가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돈 많은 남성을 유혹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창녀로 기억되는 알리스 프랭(Alice Prin), 혹은 “몽파르나스의 키키(Kiki de Montparnesse)”라고 불린 이 여성의 삶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그 연표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질 지경이다. [몽파르나스의 키키]는 아방가르드 사진작가 만 레이의 연인이자 후지타 츠구하루, 모이즈 키슬링 등 당대 유명 예술가의 뮤즈였던 그녀의 삶을 그래픽 노블로 옮긴 작품이다.

그림을 그리는 카텔 뮐레르와 글을 쓰는 조제 루이 보케는 [에디트 피아프], [올랭프 드 구즈] 등 역사에 남을만큼 뜨거운 삶을 산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2007년 발간된 [몽파르나스의 키키]는 아버지 없이 애정 없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알리스 프랭이 가난과 무관심을 뚫고 빠리의 몽파르나스를 거점으로 당시 예술계의 뮤즈로 떠올랐다가 마약과 건강악화로 일찍 세상을 등지는 순간까지 그녀의 주요 사건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의 상처를 안고 성장한 키키는 빠리에서 생존을 위해 몸을 팔기도 하고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화가들의 모델로 발탁되어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본인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영화에 출연하는 한편 음반을 발매하는 등 독립적인 예술가로서의 삶도 영위한다. 하지만 한 남성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뜨거운 열정과 한평생 따라다닌 마약이라는 덫이 그녀의 발목을 서서히 잡아 끌어내리고, 결국 마약과 알콜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50세 초반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빠리 예술, 사교계의 스타였다고 한다. 만 레이와 후지타 츠구하루 외에도 모딜리아니, 헤밍웨이, 피카소 등이 그녀를 직간접적으로 스쳐 지나간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리저리 비틀리는 삶을 산 불완전한 인간이기도 했다. 동침하는 남성은 수시로 바뀌었으며 그 중에는 상습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고, 다른 이는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한 불행한 인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 무엇이 되었든, 주체적인 삶을 뜨겁게 살아간 여성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조제 루이 보케는 다사다난한 그녀의 삶을 장소와 시간별로 묶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되 하나의 차원에서 해석되지 않도록 사려깊게 표현했다. 카텔 뮐레르는 키키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드러내듯 한껏 활기찬 이미지의 빠리를 특유의 그림체로 그려냈다. 키키를 둘러싼 역사속 주요 이벤트들을 만화적으로 잘 재현하기도 했다. 쉽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다.

프레드 울만: 동급생

동급생
내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는 아이오와 작가협회에서 퓰리처상 수상자인 메릴린 로빈슨(Marilynne Robinson)을 사사했다.  포터가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후 “소설의 첫 문장에 가장 많은 공을 들여라. 그 문장이 작품을 대변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항상 마음에 두고 집필활동을 한다고 밝힌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다(읽었는지 팟캐스트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거의 모든 픽션을 접할 때마다 작품의 첫 문장을 유심히 읽게 된다. 작품을 처음 접할 때의 첫 문장이 어떤 색을 띠는지,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첫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좋은 첫 문장을 가진 작품은 긴 시간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게 되더라.

1971년 처음 출판된 이 짤막한 중편 소설(novella) [동급생]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 

이후 르누아르, 혹은 고갱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게 묘사되는 도시에서 그보다 더 아름답게 펼쳐지는 두 소년의 우정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위의 첫 문장이 그저 성인이 된 한 남자의 기억 속에 이쁘장하게 자리잡은 기억의 한 조각 정도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오니즘의 광기어린 유대인 사냥과 그로 인해 갈갈이 찣겨진 소설 속 화자의 가족 이야기를 담담히 전해오는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 다다랐을 때 이미 독자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급기야 마지막 문장에 다다르면 위의 첫 문장이 완전히 새롭게 읽히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작품의 마지막 문장과 첫 문장의 마술적인 호응에 의해 소설의 크기, 혹은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저 호감어린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십대 시절의 풋풋한 감정, 수채화처럼 묘사된 두 소년이 살아간 도시, 마냥 아름다울 것만 같던 서사를 헝클어 버리는 암울한 시대적 환경, 그리고 그 시대를 버티어 낼 수 있게 만든 두 소년의 우정.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문장을 손으로 한땀 한땀 더듬어가며 다시 읽게 된다. 소년은 소년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화자가 기록하지 않은 그 빈틈들 사이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의 삶 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떠나지 않음으로 인해 숭고한 인간성은 그렇게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일까. 책을 덮은 후 많은 것을 천천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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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ㅈㅎ씨와 “몹시 덥고 습기로 가득한 일본의 여름날씨를 마치 뽀송뽀송하고 상쾌한 것처럼 포장하는” 일본영화의 특성에 대해 농담조로 성토한 적이 있다. 한국보다 미세먼지가 적게 배출되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속 일본의 여름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맑아보인다. 강한 햇살을 받아내는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위에 찌들어 지친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10년 전 GRE 시험을 치루기 위해 함께 도쿄를 찾은 당시 스터디 멤버는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며 차분히 가라앉은 일본의 도시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뜻 보이는 일본의 거리는 조용하게 정리되어 있다. 사람들은 말 없이 빠르게 서로를 스쳐지나간다. 상대방에게 어떻게든 영역표시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시선에서 일본사회의 풍경은 솔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많은 한국인 독자들의 평처럼 담백하고 잔잔하다. 존경하는 건축가가 운영하는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사무소의 일상을 함께 체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작가의 풍부한 배경지식과 꼼꼼한 묘사에 힘입어 마지막까지 일정한 호흡을 유지한다. 마치 나오코 오기가미의 영화들, 예컨대 [카모메 식당]이나 [안경], 혹은 오모리 미카의 [수영장]과 같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여름 일본의 풍경이 선선하거나 담백할리 없지만,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단단한 내공에 의존한 유려한 문체덕분일 것이다. 담담하지만 끈기있게 이어지는 만연체의 문장들 속에서 독자들은 어쩌면 잠시 공기좋은 산자락 어딘가로 피서를 떠난 듯한 느낌을 받았을런지도 모르겠다.

다만, 주변의 많은 호평과 달리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이 작품이 태생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보수성이 불편했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영화적인 이 작품의 성격에서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높은 습기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듯한 일본영화의 화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다. 주인공 역시 수동적인 것은 마찬가지이긴 하다. 대부분의 캐릭터가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일본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보수성이 삶의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뭍어나온다. 소설은 두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면 딱 좋은 서사구조와 규모를 가지고 있다.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은 풍부한 건축 배경지식 설명 정도일텐데, 이 부분은 픽션이라기 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영역이라 이조차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이 썩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중 화자인 주인공의 독백 부분에서 습관적으로 구어체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현재형과 과거형 어미를 한 문단에서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원문이 정말 이런 표현들을 사용한 것인지, 반드시 필요한 표현이었는지 궁금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딱히 필요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없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김애란 바깥은여름
김애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녀는 장난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른 목적을 위해 글을 희생하지도 않는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진짜 글을 쓴다는 확신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시선이 소설 속 인물들에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이 그러하듯, 김애란도 작품 속 인물의 삶 중 한 부분만을 떼어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이지만 그 인물이 그 전에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서도 시선을 쉽게 거두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지려 한다. 이것이 그녀의 소설을 단지 기교나 표현의 영역에 한정하여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바깥은 여름]은 사랑하는 어떤 것, 혹은 강하게 존재했던 어떤 것과 멀어지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아이를 잃은 부부, 남편을 잃은 아내, 언어를 잃은 영혼, 개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 아들의 순결함을 의심하게 되는 엄마, 오랜 애인을 떠나야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어 상실로 끝나기도 하고, 외로움으로 시작되어 낙담으로 끝나기도 한다. 모든 작품의 마지막에 남는 감정은 공통적으로 쓸쓸하다. 김애란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유머가 한결 줄어들었다. [침이 고인다], [달려라, 아비] 시절 알면서도 뻔뻔하게 모른척하며 지었던 한줌의 미소조차 사라졌다. 한결 어두워졌다. 어쩌면 많은 매체에서 주목하듯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려다 함께 죽은 교사의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문학적인 반응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간의 유머조차 죄책감으로 되돌아오는 참담한 상황에서 김애란 역시 웃음을 의도적으로 거두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펄떡펄떡 뛰는 인물들의 생생한 숨소리는 여전하다. 우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비행운]의 “그 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 등장하는 ‘용대’와 비슷한 존재감을 뽐내는 “노찬성과 에반”의 찬성이가 있다. 이 가난한 소년은 늙은 개를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현실의 벽과 유혹 속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단 돈 몇천원의 들락날락거림에 갈등하는 그의 영혼은 사랑하는 개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

김애란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결코 에둘러 표현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시선에 조미료를 첨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음직한 상황을 설정한 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담히 기술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이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녀의 시선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 낮은 자리를 비추고 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므로, 그 인물들의 삶 역시 계속 지속되고 있을 것이므로, 비록 피곤한 오늘을 사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그들에게 따뜻한 안부를 물어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을 수 있기에 더더욱, 김애란 그 자신이 조금 더 지긋한 시선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Zadie Smith: Swing Time

swing time
[NW] 이후 다시 도전한 제이디 스미스의 소설. 이번에도 길고 장황하다. 한달 넘게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기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존이나 goodreads.com 등의 독자 리뷰에서 많은 이들이 이 책과 오랜 시간 씨름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독자들과 내가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느낀 부분이 비단 소설의 분량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제이디 스미스는 아주 훌륭한 글쟁이지만, 뛰어난 소설가는 아니다. 이것이 이 책에 대한 나의 결론이자 앞으로 제이디 스미스의 소설은 당분간 도전하지 않기로 한 이유다.

그녀는 아마도 가장 발전된 형태의 영어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그녀만큼 더 정확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 그녀만큼 더 다양한 형태의 표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소설의 첫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쓰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모든 단어가 정확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문장이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다만, 아름다운 문장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글이 되는 것은 아니며 아름다운 문장들의 기계적 총합이 훌륭한 소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제이디 스미스가 만들어내는 내러티브는 그녀의 문장만큼 아름답지 않다. 물론, [Swing Time]은 웬만한 다른 소설들보다 다층적이고 다차원적이다. 유색인종, 1%의 삶, 부족한 재능, 우정, 부모와 자식 간 관계, 치정까지 다양한 주제를 ‘춤’이라는 하나의 예술 형태를 중심으로 폭넓게 다루고 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한 작가의 고민 역시 결코 얕지 않다. 개별적인 문장이 가진 아름다움과 다양한 주제에 대한 깊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몹시 지루하다. 이 지루함은 아마도 너무나 많은 것을 하나의 소설에 꾹꾹 눌러 담으려고 했던 스미스의 과잉에서 나온 것 같다. 문장은 지나치게 길고 불필요한 정보를 너무 많이 담고 있다. 서사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소설의 3/4은 캐릭터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마지막 1/4 지점에 가서야 중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그 맥락이 설득적이지도 못하다. 때문에 두텁게 쌓인 캐릭터들의 매력이 얄팍한 서사구조에 의해 희석되어 버리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상징적이다. 하지만 너무 영화적이다.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영화적이다보니 이 소설이 가진 ‘소설적인 부분’은 오로지 개별적인 문장이 가진 표현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호흡이 너무 자주 끊긴다. 한 페이지를 두어개의 문장으로 채울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작가가 너무 과신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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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문장은 완벽하게 문학적이고 소설은 온전히 문학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그녀의 작품을 비유하기 위해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이다. 문학이라는 필름 위에 문장이라는 배우를 등장시켜 글자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능력은 ‘기묘하다’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고심 끝에 내가 떠올린 영화는 데이빗 린치와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조금 불편한 이미지들로 서사를 구성하되 메타-필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영화적 언어에 능통한 다층적 성격을 지닌 작품들이 떠올랐다. <머리부터 천천히>는 장황하고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학적 이미지가 감지되고, 다시 그 낯선 이미지들의 연결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절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이야기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들처럼, 어떤 공간에 있지만 그 공간에 있지 않은 초현실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인물을 통해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을 빙빙 돌려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어쩌면 문학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와 같은 서사를 다루는 다른 예술 장르로 절대 재현할 수 없는 문학만의 미덕을 충실히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학 내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문체와 주제전달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챕터간 구성이 치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챕터별로 화자와 주요인물이 바뀌다 보니 서사구조가 아닌 소설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를 따라가는 것조차 조금 벅찰 때가 있었다. 물론 그조차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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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사회는 ‘치욕의 시대’를 살고 있다. 타인에게 얼마나 더 큰 치욕을 안겨주느냐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급으로 깔아뭉개는 시도는 그래서 일상화되어 버렸다. 타인보다 조금이라도 계급적으로 우수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지독하게 활용하여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 극도로 세분화된 계급구조는 극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로 구성된 사회를 만들어버린다.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진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듯 좁은 땅덩어리와 많은 인구때문이다. 자원은 부족하고 땅덩어리는 좁으니 땅 한평의 가치가 사람 한명의 가치보다 우선시된다.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공부하고 노력했지만 건물을 물려 받은 친구보다 삶의 질이 훨씬 낮은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힘이 탁 풀려버린다. 노동이 죽어버린 사회, 노동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되기란 쉽지 않다. 사회 전체적인 창조성은 빠른 속도로 고갈된다. ‘집주인’이라는 ‘직업’이 높은 지위로 대접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고용 불안정이 상대적으로 덜한 공무원이 최고 인기 직업이 되었다. 집이나 건물을 살 수 있는 돈을 ‘공짜’로 건네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처음부터 틀린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이 사회는 패배하고 있다. 패배의 대상은 다른 아닌 사회 그 자체다. 사람은 죽어가고 땅과 건물만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개걸스럽게 번식해나간다.

이런 사회에서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심리가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다. 영어만 잘 했다면, 능력만 있었다면, 부모가 돈만 대주었다면, “나는 떠났을거야”라고 말하는 겁 많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넘실거린다. 그들의 욕망과 현실 간 괴리가 심해질수록 현실에 대한 투정은 늘어만 가고 외국에 대한 환상은 커져만 간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자신의 원하는 가치를 찾아 조국을 떠난 한 청년의 고생담을 그리고 있다. 외국에서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겠지만 한국 밖을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급적으로 한두단계 밑으로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에서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살아왔던 대졸자가 미국에서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세탁소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풍경은 아니다. 언어장벽과 문화장벽은 ‘유리천장’을 두껍게 만든다. 적극적으로 섞이려는 노력을 해도 수십년 간 살아온 터전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갖은 노력을 다해 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경계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2세는 어떠한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뿌리의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삶의 구석구석에서 차별을 경험할 것이다. 결국 높은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는 외국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업그레이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트레이드 오프’만이 존재할 뿐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계나는 그 트레이드 오프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호주에서의 삶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녀에게는 허풍과도 같은 환상도 없고 조국인 한국에 대한 경멸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조금 더 잘 맞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은 작은 욕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삶의 소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적지 않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 조국의 익숙한 사회 시스템, 언어, 문화, 친구, 가족까지 다 내려놓고 몇년동안 죽을 고생을 해야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만성적인 남녀차별과 불안정한 고용상태, 삶의 벼랑까지 몰아붙이는 냉정한 사회적 공기 등 싫어하는 것들과 멀리 지내기 위해 그녀는 젊음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한다. 그 결과 그녀가 얻는 것은 작으면 작다고 할 수 있고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다른’ 생활이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작은 일상. 그녀는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주인공이 ‘한국이 싫어서’ 택한 국가가 호주라는 점이 흥미롭다. 호주는 넓은 면적과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수를 나타내는 곳이다. 그래서 한국과 삶의 패턴이 매우 다르다. 완성품이 아닌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노동인구 간 경쟁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 대도시를 벗어나면 삶의 속도도 많이 느려질 것이고 집값도 많이 쌀 것이다. 한국과 다른 계절에서 다른 하늘을 품은 그 곳에서 계나가 얻은 작은 일상을 왜 그녀의 조국은 결코 줄 수 없었는지 곱씹어볼 일이다.

소설은 우선 재밌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구어체로 진행되기 때문에 문체도 맛깔스럽고 페이지도 쉽게 넘어간다. 현지인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묘사도 사실적이고 공감대도 폭넓게 형성될 수 있다. 그 와중에 한국을 조국으로 하는 젊은이들의 고단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길은 결코 무책임하게 밝지 않다. 하지만 절망으로 가득차 있지도 않다. 절묘한 균형감각이 흥미롭게 읽힌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한국은 불균형과 노골적인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다. 윗 세대의 아랫 세대에 대한 억압,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당당한 차별, 자본가와 노동자 간 넘을 수 없는 장벽 등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불균형, 혹은 차별의 대상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일 것이다. 이 나라의 절반이 만성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또다른 절반은 그것이 폭력인지 모른채 살아가거나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음으로써 비판의 대상에서 피해 나가려는 소극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갉아먹는 수많은 요인들 중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남녀 불균형, 혹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고, 가장 먼저 해방되어야 하는 계급이 여성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여성운동, 혹은 페미니즘 운동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 한국 여성의 위상이 지금과 같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과 불편함을 문학의 차원에서 다루는 작업은 매우 소중하고 더 발전되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중반 여성의 ‘평균’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균’의 삶을 살아가는 가상의 여성이 겪는 다양한 폭력을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표현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학교에서 여학생에 대한 비논리적인 억압에 힘없이 저항도 해보며 자라다가 성추행과 성폭력에 무작위로 노출되는 삶을 견디어 내어야 한다. 시스템적으로 불공평하게 설계된 취업관문을 어렵게 통과하면 육아가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처음부터 다시 불공정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결국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가정주부가 되면 자아실현은 배부른 사치처럼 느껴지고, 시댁의 눈치없는 잔소리에 익숙해질 때쯤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이처럼 딱히 실패하지도, 딱히 특별한 삶을 살지도 않은 이 평범한 여성이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을 얻게 된다고 마무리짓고 있는데 그 섬뜩한 결론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위와 같은 여성주의적 시각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는다 해도 대단히 멍청한 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먼저,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노골적으로 페미니즘 문학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 어떠한 새로운 경향이나 에너지를 느끼기 힘들다. ‘평균적인 여성’을 가공하여 대다수의 여성에게 공감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하나 낳은 여성이 한국사회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형적인 평균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위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여성이 훨씬 많을 것이고, 위와 같은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 82년생 김지영씨의 삶은 많은 여성들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읽힐 수 있다. 페미니즘이 사치처럼 느껴지면 안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 안에서 함께 호흡해야 한다. 왜 페미니즘을 드러내기 위해 ‘평균’적인 여성의 삶을 시대순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것인가. 또한, 개개인에 따라 여성주의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갖는 다른 가치에 의해 무시될 수도 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여성, 혹은 아무런 문제 없이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자란 여성 등 ‘평균’이 아닌 양 극단에 속한 여성들이 고민하는 것들이 과연 김지영씨의 삶과 호응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어떠한 답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김지영씨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지나치게 많이 삽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이 폭력적으로 타자화되고 있다. 가족 내에서 모든 특혜를 받는 남동생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고, 아버지는 멍청한 존재로만 묘사된다. 김지영씨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남성은 폭력의 주체로서만 기능한다. 심지어 이 책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조차 자기 자신이 만성화된 남녀 차별의 주체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사회의 절반을 멍청하게 묘사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을 위하는 최선의 방식인지 고민을 많이 했는지 의문이다. 발전적이지도 않고, 자기성찰적이지도 않으며, 이유없이 남탓만 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투정만 잔뜩 적혀 있다. 이 책에는 ‘그래서’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가 없다. 고통의 나열은 이미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2016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씨조차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다. 문장은 새롭지 않다. 건조한 기사나 칼럼을 읽는 느낌이다. 신문 등에서 따온 구체적인 수치가 등장할 때마다 그래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 책의 저자는 성실한 정보수집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문학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 일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목적이 너무 뻔히 읽혀서 재미가 없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나이브해서 설득력이 높지도 않다. 차라리 기사나 칼럼의 형식으로 썼다면 재미없는 글 하나 읽었네, 하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소설의 영역에서 이런 책을 읽으니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글이 아니다. 논문이나 칼럼이라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정책적 해결점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 문학에서는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고통의 한 단면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권여선의 <레가토>가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프로의 냄새가 나지 않고 아마추어의 설익은 의욕만 잔뜩 읽히는 책이다. 차라리 대학생의 습작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편: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개념이 일상화되고 상식화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 서구적 개념이 한국의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전치(displace) 현상의 지역적 특수성을 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해당 개념의 전파속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신현준을 비롯해 기성 학계 내,외부에서 활동 중인 젊은 학자 집단이 일반 대중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법한 이 주제에 대해, 서울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고무적이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는 서양 학계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젠트리피케이션 이론을 홍대, 서촌, 한남동 등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법한’ 서울 내 특정 지역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기존 학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현장연구를 더함으로써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서구사회에서 기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서울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뒤 저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그곳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문헌 중심의 연구가 놓칠 수 있는 미시적 실제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3장은 도시재생 등 정책적 관점에서 특정 지역의 변화양상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계획 및 도시재생 등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흥미로운 지점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언론에서 피상적으로 다루어지며 특정 이익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부족하나마 학술연구의 형식으로 담아낸 것은 이 책이 가지는 최고의 공헌이다.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지역(홍대 등)부터 현재 막 시작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해방촌 등)을 넓게 아우르며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쉽게 지나쳤을 오류들을 세심하게 정정해주는 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이 현재 한국 지역사회의 정신머리없는 발전 일변도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등 이 책이 공헌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이 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내고 있듯, 서구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노동계급-힙스터-고소득 전문직-대기업자본 순으로 이어지는 특정 지역의 점유 구도가 서울의 주요 특정지역에서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의 지역학, 혹은 부동산 시장은 단순히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제주체의 욕망, 혹은 목적함수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아전투구의 장이다. 서양의 일반적인 대도시들처럼 도심과 주변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종 및 수입에 의해 거주지역이 철저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사회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문화’, 혹은 ‘한국의 철학’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만 “힙”해보여도, 즉 조금만 돈이 될 것 같아 보여도 바로 개발이 들어간다. 그곳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 철학적 중심 없이 단기적 수입 창출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는 ‘자본’ – 이것이 “문화자본”이든 “경제자본”이든 돈의 냄새를 맡아 움직이는 본질적 특성은 돌일하다 –  에 의해 거주의 불안정성을 심화되고 난개발은 가속화된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안적 이론, 혹은 우리 사회에 특화된 이론적 틀이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저자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현장연구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논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의 챕터에서 발견된다.

둘째, 성공회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학술연구로서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어진다. 물론 모든 학술연구가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모든 학술연구는 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자본”을 “경제자본”과 확실히 다르다고 가정하고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가 발생시키는 전치현상의 시작을 지나치게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은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이러한 표혀닝나 생각 자체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튼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소규모 생산자들이 임대료가 싸면서도 문화적 창의성을 위협받지 않는 ‘적절한’ 곳에 자리를 틀고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다. 그 이후 상권이 확대되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규모 상업자본이 돈냄새를 맡고 이들을 몰아내며 문화적 창의성은 획일성으로 상쇄된다. 이후 더 큰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거나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로 인해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방식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의 첫번째 단계에서 ‘소외’당하는 원 거주민들의 입장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문화자본을 소유한 생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준에서 이용당하고 희생당한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큰 결점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원 거주자들이 이룩한 거주문화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들어왔다” “이 곳이 갖는 매력에 이끌려 들어왔다”와 같은 뻔한 변명으로 원거주자들의 피해를 뭉뚱그리려는 시도가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쨌든 상권은 확대되었고 임대료는 올랐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삶은 파괴되었다. 문화자본 생산자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싸이 이전에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있었다면 테이크아웃드로잉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테이크아웃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왜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들을 이토록 옹호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이 주어져 있어도 지금과 같은 성격과 규모의 생산활동을 했을지 증명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호의 근거를 찾기 힘들다.

셋째, 경제학적인 전문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종종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무시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신현준은 자신이 부동산 시장에 대한 공부도 꽤 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서울의 부동상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경제학적인 접근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인터뷰와 현장 답사 등의 형식을 통해 인류학적 접근, 혹은 사회학적 접근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시장과 노동 시장, 그리고 경제정책 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임대료 문제는 서비스업의 임금 문제, 더 나아가 경제정책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권이 형성되는 지역의 공급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건물주, 고용주, 피고용자. 건물주는 불로소득자다. 고용주의 자본은 한계적이다. 피고용자는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위태롭게 노동을 공급한다. 결국 부의 재분배 문제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굳이 “문화” 운운하지 않아도 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조세정책과 도시개발 정책, 서민주거안정 정책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 문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이 절반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부분에 대한 고찰이 극도로 제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분명하고 독보적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다른 책에서 아시아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짓고 넘어가는 것은 왠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앞으로 더 깊은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