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ne Coyle: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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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GDP, 하지만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GDP. “국격”같은 해괴한 개념을 좋아하는 국민적 특성을 가진 어떤 나라에서는 GDP보다 올림픽 금메달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가의 살림살이나 삶의 질, 그리고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위해 사용하는 주된 지표로 GDP를 선호한다. GDP는 완벽하지 않은 지표다. 한 국가의 경제 수준을 하나의 단일한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부터 엄청난 생략과 왜곡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가 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권위적인 지표로 자리잡았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GDP가 완벽하지 않다면, 새로운 지표를 개발할 것인지, 혹은 GDP를 보완해서 발전시킬 것인지 여부도 생각해야 한다.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는 이러한 고민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책이다. “역사책”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GDP의 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GDP의 현재 위상과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을 합당화시키기 위한 근거자료로써 GDP의 기원이라던가 발전 과정에서의 여러 실책들, 그리고 GDP에 제기되는 여러 비판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고 있는 셈이다. 목적이 분명한 책이기에 포기하는 지점도 많다. 시간순으로 정리된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저자의 주장이 생뚱맞은 곳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매우 얇고 간결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또한 GDP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경제학 전공자들에게는 미진한 감이 느껴지는 정보의 ‘깊이’도 이 책이 가지는 또다른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전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GDP가 발전 초기 단계에서 이미 후생(welfare)의 측정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 후생을 현재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이러저러한 학자들이 이러저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라는 개괄적인 소개만을 간단히 하고 서둘러 마무리짓는 구성은 전채요리만 먹고 본식을 건너뛴 듯한 공복상태를 유지시킨다. 하지만 GDP와 관련된 여러 혜안들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이 갖는 가치는 충분한 듯 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한번 쯤 생각했을 법한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GDP에 포함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주부의 세탁 노동 가치가 한 나라의 금융산업이 창출하는 가치의 총합의 80%에 달한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과 함께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집에 고용되었던 가정부와 결혼할 경우 GDP가 감소한다는 역설(가정부의 노동가치는 가정주부로 신분이 전환됨으로써 GDP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을 예시로 제시함으로써 GDP가 갖는 통계적 허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이런 방식의 논리 전개는 학부 수준의 독자가 GDP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다 정교하고 복잡해진 금융산업이 GDP에 기여하는 바와 인공지능 등 새로운 형태의 자본-혹은 노동-이 탄생함으로써 수정될 수 밖에 없는 기존의 계산 방식에 대한 고민 등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GDP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적당한 수준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시장가치로 환산된 최종거래 금액으로 정리하는 현재의 방식이 정당한가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GDP에 대한 소개서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행복’이나 ‘여가’같은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GDP에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고민은 Weimann 등이 함께 쓴 <Measuring Happiness>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이 책도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들을 어떻게 기존 경제학에 융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현재 수준을 확인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real labour rigidity

흔히 임금계약의 경직성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명목 경직성은 학계에서도 많이 연구가 되어 있는 주제이지만, 노동의 실질적 이동, 혹은 진화가 더디게 이루어지는 현상을 거시경제학 관점에서 통찰력 있게 들여다본 연구결과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용자 측의 임금 요구 수준에 맞게 노동의 공급이 신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바이지만, 특정 계층, 혹은 특정 노동 집단이 언뜻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판단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의 공급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는 사례에 대한 모형화 작업은 (최소한) DSGE 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되는 사례 두가지만 기록해본다.

먼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서 정년을 채운, 혹은 정년에 근접한 세대가 두번째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경직성이 발생한다. 원래 이들의 계획대로라면 은퇴 연령에 도달했을 때까지 모든 충분한 자산을 바탕으로 부를 유지한 채 연금 등의 노후대책을 통해 생을 마감해야 하는게 정상이지만, 이들 스스로 창출한 역피라미드 구조의 인구 생태계에서는 연금이 효율적인 노후대책이 될 수 없으며 그 외의 다른 생계수단을 마련해야만 한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이를 부동산 시장에서 찾고 있는 듯 하다. 즉 부동산 시장의 끝없는 거품 생산을 통해 자산가격을 뻥튀기하고 이를 되파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여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작용은 크게 두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한 자산의 축적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즉 시장에서의 균형가격만이 상승할 뿐인 이 현상은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해 반드시 수요 측의 효용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이 젊은 세대에게 전적으로 귀속되고 있으며, 이 결과 세대간 갈등이 증폭될 뿐더러 젊은 세대의 빈곤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이는 또다른 부작용인 노동 시장에서의 공급 부족 사태로 이어진다.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여 은퇴 이후 제 2의 직업을 찾으려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영업으로 몰린다. 은퇴자금을 가지고 가게를 차린 영세자영업자는 이들 스스로 자초한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의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디폴트로 내몰린다. 많은 경험을 축적한 베이비부머가 치킨집과 같은 단순 노동 사업으로 몰리는 이유는 경직적인 한국의 사내 문화와 적극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술을 습득하려 하지 않는 보수적인 사회 문화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 부장까지 한 사람이 자동차 기름을 닦을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은퇴 시기에 다다른 기성 세대는 자신들이 자초한 함정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이를 하나만 낳다 보니 자신들을 부양할 젊은 세대가 극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부동산 시장에 올인하다 보니 그 거품때문에 은퇴 후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차라리 금융상품에 투자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올바른 투자는 기업의 자본을 확충시켰을 것이고 건전성을 확보한 기업은 더 나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는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아이를 조금 더 많이 낳았을 것이다. 경제가 떠받들어 주는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성 세대는 금융 지식이 무척 부족한 편이고, 높은 인구 밀도와 좁은 땅덩어리에서 인간의 노동력보다 땅과 건물의 존재 가치가 더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력을 귀하게 여기고 가족과 개인의 소중함을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했더라면 좁은 땅덩어리가 가지는 한계를 인간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직적인 사회 문화는 또다른 노동의 실질적 경직성을 불러온다. 바로 젊은 세대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이다. 이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 즉 사용자는 더 적은 임금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혹은 높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과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 중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의 수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직자, 혹은 노동 공급자가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경쟁자들보다 먼저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던가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 생활을 영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전자는 인적자본에의 투자이고, 자본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들은 “금수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인적자본을 확충하는 것에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러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노동자는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젊은이들은 차라리 실업 상태를 택해버리고 있다. 이 현상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아직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부모 세대에서 대학 졸업자가 갈 수 있었던 기업의 수준과 현재 젊은 세대가 동등한 학력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기업의 수준은 당연히 같지 않다. 7~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던 시대는 기회의 시대이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발전하고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다. 2~3%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시대는 정체의 시대다. 안정적으로 현실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 각광받는다. 7,9급 공무원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을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이 시대의 가치와 요구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성의 오류’가 발생할 여지 역시 존재한다. 개개인으로서는 안정적인 공무원에 지원하기 위해 집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 몰라도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경제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총명한 재능들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업 관점에서 봐도 비슷하다. 개별 기업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기 위해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를 줄인다. 신입사원 규모를 줄이고 희망퇴직을 실시하여 피고용인 규모를 줄이면 당장의 재무구조는 개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기침체를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줄여버리는 결과를 불러 오는 것이다. 결국, 젊은 세대는 시장에 신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실업률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지금 당장 중소기업에서 입에 풀칠할 정도로 다급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비용으로 저당잡아 버릴 수도 있다.

위의 두가지 사례는 모두 노동 공급의 실질적인 부분에서의 경직성, 혹은 ‘inertia’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대한 근거로 기능한다. 늙은 세대는 늙은 세대대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노동의 비신축적 공급, 혹은 전환 현상에 기여하고 있다. 이들의 선택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가치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선택을 매 기마다 한다고 가정한다면, 늙은 세대는 치킨집을 더이상 차리지 말아야 한다. 젊은 세대는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인정받는 기업으로 취직하던가 그와 동등한 대가가 예상되는 스타트업을 차려야 한다. 의도적 실업과 의도적 파산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되는 사회라면 그 나라 경제는 이미 마비 수준으로 치닫고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나요?

최저임금이 사상 최초로 시간당 6,000원을 돌파했다. 전년대비 8%대 상승률이다. 물가상승률보다는 당연히 높을 것이지만, 여전히 한시간 일해서 밥 한그릇 사먹기 빠듯하다. 당연히 노동계는 반발하고 나섰다. 너무 적다는거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자쪽도 잔뜩 뿔이 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최저임금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올라가면 고용을 감당 못한다는거다. 양쪽 모두 불만인 결과가 나왔다. 누가 맞는걸까? 해결책은 있는걸까?

우선, 최저임금이 제대로 변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다음의 그림은 최저임금의 전년대비 상승률을 식료품 및 비주류 물가지수(2010년=100 기준)및 전,월세 변화율과 비교한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하다. 때문에 식료품 값보다 최저임금이 더 적게 상승한다면 그만큼 배가 더 고파진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최저임금 노동자들은 자가주택이 아닌 전세 혹은 월세 형태의 주거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임대차비용이 최저임금보다 더 가파르게 상승할수록 이들의 삶은 더 궁핍해질 것이다.

전년대비변화율

98~99년, 09~11년을 제외하고, 최저임금의 전년대비 변화율은 식료품이나 전,월세 변화율보다 항상 더 높았다. (두번의 예외적인 시기는 모두 경제위기 상황이다. 경제위기시에는 임금이 동결 혹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으나 환율상승 및 수입원자재, 수입최종재 물가지수의 상승으로 전체 물가는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지수를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을 살펴보자. 이 값이 높을수록 최저임금으로 기본적인 음식을 사먹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식료품물가지수 식료품물가지수변화율

첫번째 그림은 물가지수를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을 시계열로 나타낸 것이고, 두번째 그림은 두 변수의 변화율로 다시 구한 것이다. 두번째 그림은 변화율이기 때문에 들쭉날쭉한 모양을 보이고 있는데, 검은색 점선인 추세선으로 보면 약간이나마 하락하고 있다. 두번째 그림에서 수치가 1보다 높으면 그해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의 변화율이 최저임금 변화율보다 높았다는 뜻이다. 94, 98~99, 2008~2011년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퍽퍽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최저임금 노동자들의 먹는 문제, 사는 문제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득불평등의 개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살만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못한다. 그저 시계열상에서 드러나는 ‘상대적인’ 삶의 질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소득재분배 효과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통계청에서는 전체가구를 10분위로 나누어 소득분위별 근로소득 및 소비지출을 집계한다. 월별 자료로 환산하기 위해 최저임금에 209를 곱하여 비교해 보았다.

최저임금대비가계소득및지출
파란색 선은 전체가구의 월별기준으로 근로소득을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이고, 빨간색 선은 가구당 소비지출액을 최저임금으로 나눈 값이다. 전체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가구 평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값이 높을수록 평균적인 가구의 근로소득 및 소비지출과 최저임금을 받는 가구의 소득 및 지출 사이에 차이가 크다는 의미다. 그만큼 최저임금 노동자 계층이 평균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이므로, 소득 불평등의 한 척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가 가용한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이 수치는 점차 감소해왔다. 즉, 평균적인 가구의 근로소득 및 소비지출 수준과 비교해 최저임금 노동자 가구의 소득 및 지출 수준이 점차 완화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 수치는 근로소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오차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위계층으로 갈수록 비근로소득(금융소득 등)의 비중이 커질 것이고, 최저임금 가구의 경우 근로소득의 비중이 클 것이다. 때문에 비근로소득까지 포함시키면 불평등의 정도는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음 그래프는 최저임금과 시간당 명목임금의 전년대비 변화율을 비교한 것이다.

시간당명목임금자료가 가용한 2000년부터 비교해보면, 2010년을 제외하고 최저임금의 상승률이 전체가구의 시간당 명목임금 상승률을 항상 상회하였다. 정부의 정책적인 노력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최저임금의 하방경직성을 확보한 결과는 불평등의 완화와 최저임금 계층의 상대적인 삶의 질 개선이다. 물론, 위의 결과들이 여전히 ‘최저임금으로 먹고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되지는 못한다. 여전히 최저임금 노동자가 한 달에 받는 월수입은 하위 2분위에서 3분위 사이다. 하위 1분위는 월 근로소득보다 소비지출이 더 많다. 즉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극빈층이라는 뜻이다. 그 바로 윗 레벨이 최저임금 노동자들이다. 정규직으로 편입되지 못한 계층이 ‘알바’만으로 은퇴시점까지 생존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다달이 월세를 내면서 음식을 사 먹으면서 ‘저축’을 할 수 있는가, 즉 노후를 대비할 여력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과연 하위 몇분위부터 안정적인 저축이 가능한가, 안정적인 노후대비가 가능한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물가수준이나 평균임금상승률보다 더 빠르게 최저임금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해야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나는 정작 중요한 것은 최저임금이 아니라는 주장을 일전에 이곳에서 펼친 적이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노동환경의 안정이다. 근로소득자 개개인이 자신의 미래 근로환경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획득하고 이에 대해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 한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전세계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하지만 미국보다 현격히 떨어지는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즉, 비정규직의 사회적 불안정성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최저임금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건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실질임금인상이 경기부양을 위한 최선의 정책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정작 경기부양을 위해 최저임금인상을 정치권이 일치단결하여 추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가진 불안함의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정작 중요한 것, 혹은 정작 다급한 것은 최저임금이 아니라 평균임금이다. 둘째, 최저임금인상이 경기부양 및 평균임금 인상에 미치는 효과, 혹은 영향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즉, 최저임금인상이 과연 이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경기부양책인가, 혹은 가장 적절한 실질임금인상 방안인가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일단 그래프부터 보자. 모든 자료는 OECD 홈페이지에서 받은 공식자료들이다. 모든 단위는 $US(PPP)로 통일했다.

먼저, 2000년 이후 한국의 최저임금은 주변국들에 비해 큰폭으로 상승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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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 변수는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가격 등 명목변수값의 변화로 인한 착시현상(illusion)을 잡아낸 결과값이다. 위의 그래프를 보면 한국은 같은 노동집약적 국가인 터키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최저임금 상승률을 보이고 있고, 결국 구매력 환산 실질변수값으로 볼때 일본과 비슷한 수준, 그리고 미국, 영국에 비해 약간 낮은 수준까지 실질 최저임금을 상승시켰다. 이는 IMF 이후 정권을 잡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정책 중 하나이며, 이 최저임금 상승률은 항상 물가상승률, 혹은 평균임금상승률을 앞질러 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최저임금상승률이 큰 폭으로 꺾이지 않은 것은 이러한 ‘추세’가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 평균 임금의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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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질 평균임금은 2000년 3만달러 부근에서 2013년 현재 3만5천달러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영국이나 미국, 호주 등 선진국과의 격차가 아직도 극심한 편이며, 그 상승률 또한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년동안 평균임금이 약 5천달러 상승하는 동안 최저임금은 약 6천달러 상승했다. 상승률로만 따지면 평균임금은 약 16.7%, 최저임금은 약 75% 상승한 셈이다. 대부분의 “full time” 노동자가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지난 십년동안 대부분의 노동자가 “왜 우린 점점 가난해질까”라고 느끼는 원인의 본질은 최저임금이 아닌 평균임금쪽에 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위의 두 그래프를 합쳐서 실질 평균임금 대비 실질 최저임금 비율을 구하면 다음의 그래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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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변수로 환산한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에서 한국은 지난 13년간 비약적인 상승세를 이뤘다. 같은 노동집약적 국가인 멕시코의 경우 최저임금을 방어해내지 못하며 오히려 하락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일본의 비율까지 추월하며 최저임금에 있어서는 그 어떤 나라보다 더 강한 보호정책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가진 자원이 노동력밖에 없는 나라다. 그리고 땅덩어리는 좁다. 결국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다수의 노동자가 극심한 경쟁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시장에서의 권력이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부는 정책적으로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아무런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비숙련 노동자(low-skilled labor)의 삶의 질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최저임금 상승률을 물가상승률보다 높게 책정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들어선 지난 세 정부는 그것을 무난하게 완수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이 과연 경기부양에 도움이 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가? 지금까지도 이미 충분히 최저임금은 물가상승률보다 높은 범위 내에서 인상되어져 왔다. 결국 더 큰 문제는 최저임금이 아닌, 평균임금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실질 변수로 환산한 평균임금의 상승률은 실질 GDP 상승률보다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단위 노동자당 비용과 단위 노동자당 생산성이 있을 것이다. 즉, 사용자측에서 고용해야 하는 단위 노동자에게 투입해야 하는 비용이 높을수록 실질 평균임금은 하락할 것이며, 단위 노동자가 사용자를 위해 뽑아주는 생산성이 높을수록 임금은 상승할 것이다. 다음의 두 그래프는 그러한 임금 결정 요소에 대한 근사치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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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일본이나 유로, OECD 평균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한국의 GDP가 반토막나면서 단위 노동자 한명이 보여주는 생산성에서 이미 성장동력을 상실한 최선진국들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수준으로 하락했다. 앞서 보인 실질 평균임금의 상승세가 2008년 이후 완연히 꺾여 나간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한국의 단위 노동자 생산성은 이제 더이상 ‘경쟁력’이 아니게 되었다. 기업 입장에서 더이상 임금을 상승시킬 여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대체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지금 고용되어 있는 숙련 노동자를 조금 더 싼 값에 부릴 수 있는 다른 노동자로 대체해도 그 비용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현행 법과 제도를 최대한 활용해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해고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크게 찾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정규직이다.

결국, 지금처럼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실질 평균임금의 상승 동력을 더이상 찾기 어려운 장기경기침체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한명이 지속적으로 미래 소득의 증가를 기대하게끔 만드는 정부의 정책이다. 이는 근속연수의 보장과 물가상승률을 하한선으로 보장하는 임금상승률로 기술될 수 있다. 비정규직이 지금 당장 돈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언제 잘려나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규직이 돈을 쓸 수 없는 이유는 물가는 오르는 것이 확실하지만 자신의 임금은 언제 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임금의 물가 연동제, 혹은 비정규직의 법적 지위 강화같은 정책이 지원되어야지만 실질적인 내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이보다 조금 더 불명확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 정책적 시행에 있어 훨씬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우선,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이들은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들일 것이다. 우리가 경제학원론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최저임금제의 경제적 효과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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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이 w0 에서 w1으로 상승하면 L1-L2 만큼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동일한 수의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상승분만큼 임금을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윤극대화 문제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임금비용 안에서 노동자 수를 조절함으로써 비용을 최소화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최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의 이윤이 확대되지 않으면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효과는 0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들을 고용하는 사용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피고용인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도 최저임금 상승분만큼 추가적으로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가?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결국 더이상 피고용인 수도 줄이지 못할 정도로 여력이 없는 영세사업자의 경우 문을 닫게 될 확률이 높으며, 이 경우 실업자 수는 더 증가할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비숙련 비정규직 노동자나 이들을 고용하는 영세 사업자 모두,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정작 가장 강하게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최저임금제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추가적인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이 경기부양 및 내수증진에 큰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평균임금 상승을 위한 정책을 내놓아야 비로소 소비 여력이 생길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맬서스

맬서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에서 인구의 증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이 인구를 먹여살릴 기술과 자원은 선형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어느 시점 이후에는 그 사회가 공멸할 것이라는, ‘dismal science’의 초석이 되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그 사회의 하층 계급으로부터 두가지의 ‘checks’가 자동으로 발동된다고 보았다. 하나는 positive check으로, 사망률(death rate)을 높이는 것이다. 그는 이 positive check이 기아, 질병, 전쟁 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발동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의 기제는 preventive check으로, 출생률을 낮추는 것이다. 그는 이 방식이 낙태, 매춘, 결혼시기 연기, birth control 등의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즉, 자원이 인구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을 수준이 되리라는 공포감이 한 사회에 깔리게 되면, 그 사회는 하층 계급부터 순차적으로 시작되는 이 두가지 check을 통해 인구증가를 억제하게 된다는 논리다. 물론 맬서스는 틀렸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한정된 자원으로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감당해낼 수 있는 기술력은 더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영향 탓이다. 생산성이 급속하게 상승하면서 잉여생산물이 풍부하게 쌓여가기 시작했고, 거기서부터 경제적인 의미의 계급의 분화가 심화되어 자본가/노동자 계급의 고착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이다.

이미 오래전에 사장된 이 맬러스의 주장이 21세기 한국에서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고 있는듯 보인다. 현재 한국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사회로 진입중이다. 2030년이 넘어가면 생산가능인구 한명이 고령인구 한명을 먹여살리는 꼴이 된다. 0세부터 100세까지를 수평면 위에 일렬로 세워 놓았을때 가운데가 가장 높은 정규분포의 형태를 지니는 인구구조는 2000 이후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점차 평탄하게 바뀌어가고 있다. 분포의 꼬리가 두꺼워지는 셈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의 고령화 과정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저출산과 산업구조의 변화다. 무엇이 결과고 무엇이 원인인지는 아직 모른다. 저출산은 한국이 풍족한 경제성장을 누릴때부터 진행되어 왔다. 산업구조는 IMF이후 빠른 속도로 재편되어 왔다. 철밥통같았던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고 노동시장은 점점 더 유연해지고 있다.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과거의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사장되어가고 있다. 65세 이상의 노년층도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일을 하게 되는 ‘active aging’ 현상이 청년실업을 가중시켰다.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고용불안정성 심화가 저출산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한국의 초저출산 경향을 맬서스가 이야기하는 ‘preventive check’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 즉, 한국 여성의 가임기간이 30세 이후로 확 늦춰지는 현상,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람의 비중이 큰폭으로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분명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었다기 보다는 개개인의 ‘optimal’한 선택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는,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자원은 대부분 인적자원이다. 인적자원이 고갈되어간다고 느낀다면, 그래서 개개인이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사회적으로 축적되었을때 우리는 거시적인 preventive check이 발생하고 있다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맬서스가 걱정할만큼 ‘dismal’할까? 이것이 핵심이 되어야 할 질문이다. 여기저기서 성장동력을 상실했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경직적인 조직 구조 속에서 창의성은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과거 제조업 위주의 성장 전략은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 잠재성장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새로운 투자요인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고용불안정성은 커지는데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하락중이다. 저축이 증가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기업저축일뿐이고, 가계저축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결국 최소한의 소비를 하기 위해 빚을 더 낼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는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부분 집을 저당잡혀 빚을 낸다. 혹은, 부동산이라는 자산에 올인한 투자성향을 보인다. 인구가 줄어든다. 부동산 수요는 늘지 않는다. 부동산은 공급과 수요 모두 대단히 비탄력적이다. 집값은 장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을 보유한 각 가계의 자산가치가 일제히 하락한다. 자산가치가 줄어드니 소비는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초저금리 시대에 부동산 수익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투자처를 찾기도 힘들다. 해외로 눈을 돌리자니 쉽게 보이지 않는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렵다. 악순환이다.

preventive check의 또다른 발현 형태는,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지만, 자살률의 증가다. 10대, 20대, 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자살한다. 한국사람이 유난히 나약하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억척스럽게 잘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이 너무 많다. 자살하는 사람 개인의 문제로 더이상 돌릴 수 없어보인다. 왜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 귀중한 목숨을 끊어야만 했는지, 구조적, 사회적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 이 한국이라는 사회가 왜 생명을 잉태하지 않고 남아있는 생명마저 억지로 죽여가면서까지 사회구성원 숫자를 낮추려고 하는지, 조금 더 무거운 책임감으로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memo: macro-related or general topic SSCI journal list

AMERICAN ECONOMIC JOURNAL-MACROECONOMICS

AMERICAN ECONOMIC REVIEW

ASIAN ECONOMIC JOURNAL (0.211)

ASIAN ECONOMIC POLICY REVIEW (0.28)

ASIAN-PACIFIC ECONOMIC LITERATURE (0.333)

B E JOURNAL OF MACROECONOMICS (0.244)

BROOKINGS PAPERS ON ECONOMIC ACTIVITY

CANADIAN JOURNAL OF ECONOMICS

CESIFO ECONOMIC STUDIES (0.561)

ECONOMETRICA (3.823)

ECONOMIC MODELLING (0.557)

ECONOMIC POLICY (2.688)

ECONOMIC THEORY

EMERGING MARKETS FINANCE AND TRADE (1.190)

EMERGING MARKETS REVIEW (1.167)

EUROPEAN ECONOMIC REVIEW (1.331)

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 REVIEW

IMF ECONOMIC REVIEW

INTERNATIONAL ECONOMIC REVIEW (1.162)

INTERNATIONAL FINANCE (0.6)

JOURNAL OF BANKING & FINANCE (1.287)

JOURNAL OF DEVELOPMENT ECONOMICS (2.253)

JOURNAL OF ECONOMIC DYNAMICS & CONTROL (0.807)

JOURNAL OF ECONOMIC THEORY (1.069)

JOURNAL OF FINANCE

JOURNAL OF FINANCIAL ECONOMICS

JOURNAL OF FINANCIAL STABILITY  (1.463)

JOURNAL OF INTERNATIONAL ECONOMICS (2.086)

JOURNAL OF MACROECONOMICS (0.589)

JOURNAL OF MONETARY ECONOMICS (1.649)

JOURNAL OF MONEY CREDIT AND BANKING (1.104)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JOURNAL OF THE ASIA PACIFIC ECONOMY

JOURNAL OF THE EUROPEAN ECONOMIC ASSOCIATION (2.049)

KOREAN ECONOMIC REVIEW

MACROECONOMIC DYNAMICS (0.420)

OPEN ECONOMIES REVIEW

PACIFIC ECONOMIC REVIEW (0.722)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5.278)

REVIEW OF ECONOMIC DYNAMICS (1.625)

REVIEW OF ECONOMIC STUDIES

REVIEW OF INTERNATIONAL ECONOMICS (0.708)

SCANDINAVIAN JOURNAL OF ECONOMICS

SCANDINAVIAN JOURNAL OF ECONOMICS

SOUTHERN ECONOMIC JOURNAL (0.480)

WORLD ECONOMY (0.872)

 

1.069

버블, 버스트, 실질, 명목 가치.

조금 나이브하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전세계 경제의 가장 큰 문제가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가격 왜곡 현상이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맑스는 여전히 옳다. 이러한 왜곡 현상의 기저에는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저평가된 노동가치가 있다.

http://bit.ly/12ex9fO

예가체프 커피 한잔이 미국이나 한국의 카페 테이블에 도착하는 동안 이 커피를 실질적으로 재배하고 수확해서 다음 유통업자에게 건네는 1차 생산자는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다.

http://bit.ly/18nuamF

박근혜 대통령은 “시간제 일자리도 좋은 일자리” 라며 사회적 편견을 거두어내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니클로나 자라같은 브랜드들의 옷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 현대 IT 기술이 집약된 아이패드나 아이폰을 단 몇백불에 구입할 수 있는 것은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원자재 생산비 절감때문이 아니다. 원단이나 원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임금히 형편없이 낮기 때문이다. 생산 원가를 낮추는 일등공신은 턱없이 낮은 노동 가치 지불에 있다. <Poor Economics> 에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잘 밝혀내고 있는 것처럼 제3세계 국가에서 하루 $10 를 벌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이들의 노동가치는 정말 이토록 낮은 것일까? 이들에게 하루 세끼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쥐어주지도 못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그들의 임원들에게는 몇백만달러의 보너스를 쥐어주는 것을 보면 이들의 재정상태가 썩 나빠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

대기업들은 다수의 소비자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너희들과 아무 상관없는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의 노동자가 굶어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너희들이 먹고 써야 하는 이 상품에 대한 가격을 두배 더 지불해야 해, 라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이기심을 극단적으로 이용해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냥 눈 딱 감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달에 이, 삼만원씩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꽤 쿨해 보이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고서는 자신의 할일을 다 했다는 식의 표정을 짓곤 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쿨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교보문고에 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따위의 쓸데없는 책을 읽고는 비분강개해 하는 척을 하겠지. 책 제목이 살짝 보이게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은 덤.)

경제 활동의 원칙이 무시당하는 상황이다.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태양 에너지에서부터 시작되듯, 현대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들은 인간의 노동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모든 가격 결정의 첫번째 원칙은 한 상품이 판매 완료되는 시점까지 모든 과정에 개입한 모든 노동력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측정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가 달라지게 되고 부의 올바른 재분배가 실현되지 못하게 된다. 권력 관계 (요즘은 갑질이라고들 표현하던데..) 가 이 가격 결정 과정에서 작용한다. 갑중 갑인 다국적 기업은 치열한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원가를 어떻게든 낮추어야 한다. 손해를 보고 팔 수는 없는데 (아마존같은 경우 컨텐츠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킨들을 원가보다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하기도 했다)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기술 혁신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대부분의 최종 판매 시장은 과점 이상의 경쟁성이 있으므로 한 기업이 시장 가격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결국 힘없는 공장 노동자들만 쥐어짜게 되는 것이다. 이들 가난한 노동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힘있는 단체도 없고 언론의 파워도 없으며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관뒀을때 쉽게 그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도 딱히 없다.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인 그런 상황의 노동자들을 요리조리 구워 삶으며 임금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다국적 기업들의 흔한 갑질이다. (이건 한국 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은 더 적은 수입을 가져가게 되고, 다국적 기업은 결국 그토록 원하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더 많은 수입을 가져가며, 이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을 구매하는 다수의 소비자들도 치열한 가격 경쟁이 혜택을 보는 수혜자가 된다. 즉 다수의 소비자들만 그들이 소비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무시해 버리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소비자들도 혜택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던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폰을 구입하는 대다수의 소비자들, 예가체프 커피를 먹는 다수의 소비자들 역시 한낱 임금 노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받는 임금 역시 그들이 제공하는 노동 가치에 비해 현격하게 낮게 평가되고 있다. 결국 자신들도 누군가에게 피를 빨아 먹히는 것을 모른채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먹음으로써 생산해낸 상품을 맛있게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과 일부 수퍼갑들에게 돌아가는 부의 불공평한 재분배의 최종 희생양이 자신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박근혜가 이야기하는 시간제 일자리의 장점은 유연한 노동시장이 기업들에게 주는 리스크 감소에 근거하고 있다. 쉽게 말해 임금 계약이 초단기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뉴 케인지안쪽에서 말하는 임금의 경직성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 조금 더 완전한 노동 시장에 가까워지다 보면 기업쪽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쉬워진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짜르기 쉬운” 노동 시장 구조가 기업들에게는 조금 더 구미가 당기는 쪽인 셈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시간당 임금이 턱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 한시간에 오천원씩 벌어서는 서울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음식이나 기름값, 의류 따위의 생활 물가는 몇년 사이 엄청나게 치솟았는데 그에 반해 시간당 최저 임금은 더딘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주장대로 시간제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이냐, 하면 그건 전적으로 기업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나이브한 의견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최저 임금을 현재의 두배 이상으로 책정해야 뭔가 나댈수 있는 껀덕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부동산도 그렇고 물가가 상승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한국의 경제 상황은 버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그 땅과 집이 가지는 가치보다 부동산 유리 벽면에 붙은 가격표는 턱없이 높은 액수를 제시하고 있다. 간장 게장 세마리에 6만원을 넘는 장바구니 물가는 사실상 한국 은행이나 정부가 물가 조절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은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실질적인 부동산 거래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주식 시장은 개미들의 무덤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속에서 암덩어리처럼 점점 제 살집을 키워 나가고 있는데 만약 한국의 경제 건전성이 외부 충격을 더이상 견뎌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에는 일본처럼 20년짜리 장기 불황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버스트다. 청년 실업은 50% 를 넘나들게 될 것이고 대기업들은 연쇄 부도속에서 외국의 기업들에게 팔려 나갈 것이다. 환율은 치솟을 것이고 하루 두끼만 먹자는 캠페인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당장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칠 것이고 은행들은 소위 요구되는 인출 금액을 마련하지 못하는 뱅크런 상황에 놓여 붕괴될 것이다. 극우파들은 활개를 칠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매일 폭력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범죄율은 치솟고 자살율은 압도적으로 세계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올때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세계 경제는 이미 노동 가치를 지난 수십년동안 무시해 오며 끊임없이 가격을 교란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도 그중 하나이 톱니바퀴로 들어간지 오래이고, 때문에 지금 현재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최선을 다해 외부 충격에 버티어낼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 밖에는 없다.

수출과 수탈 사이

일제침략기간동안 한국이 일본에게 수탈을 당했는지, 아니면 일본의 도움으로 한국이 근대화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닦게 되었는지는 현재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되는 주제이다. 수탈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컨트롤 아래에서 한국에서 생산된 것들에 대한 이익이 일본인과 그들에게 협력했던 소수의 한국인들에게만 집중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36년동안 일본이 건설한 수많은 인프라스트럭쳐와 그들이 전수한 기술들이 후에 한국이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뿐더러, 그 일제 기간동안에도 한국의 생산성을 큰폭으로 향상되었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쌀 생산량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팩트다. 문제는 이렇게 향상된 쌀 생산량의 benefit 이 어디로 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 외국으로 수출된 쌀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향했다. 이때 일본으로 수출된 쌀의 평균 가격을 구할 수 있다면, 그 가격과 당시 국제 거래되던 동아시아 쌀 시장의 평균 가격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형편없이 낮은 가격에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수탈이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은 일본이 아닌 다른 국가로 쌀을 더 높은 가격에 수출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회를 일본의 강압적인 지배하에서 박탈당했기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일본으로 쌀을 보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제무역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효율성을 크게 위배하는 행위이고, 올바른 시장 질서라고 할 수 없다. 즉 일제에 의해 시장이 교란된 것이다. 만약 일본으로의 쌀 수출 가격이 국제 시장과 큰 차이가 없는 상태라면 이 쌀 수출 시장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렇게 쌀 수출로 벌어들인 수익이 어떻게 재분배되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첫번째 단계보다 약간 더 복잡할 수 있다. 유통과정에서 마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통의 어느 단계부터 일제에 협력한 한국인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는가를 따지는 일은 상당히 지난하고 까다로운 연구 과정이 요구될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역시 한국 근처 식민지 국가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가능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만이나 만주의 자료를 구할 수 있다면, 당시 소작농들의 평균 임금 상승률을 따져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다른 변수를 확실하게 통제한다는 가정하에 당시 제국주의 식민지들의 소작농 형태를 비교 분석해 한국의 수탈 수준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가톨릭 교회와 정치, 경제

미국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6~70% 정도가 “정기적” 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미국에는 꽤 많은 추기경과 주교들이 있는데 이는 전체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많은 돈이 미국 가톨릭 교회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 교황청 재정의 상당 부분은 미국 교회쪽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 가톨릭 교회의 한해 예산은 GE 의 1년 매출액을 능가하고,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와 병원은 미국의 모든 학교와 병원중 10% 가 넘는다. 이들 기관에서 교회가 고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월마트의 -파트 타임을 포함한- 모든 피고용인 숫자보다 많다. 즉 미국 가톨릭 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큰 조직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미국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한계가 현실과 충돌할 때 발생한다. 최근 오바마 정부는 미국 가톨릭 교회와 한차례 충돌을 겪었다. 오바마는 모든 학교와 병원에 콘돔등의 피임 도구를 의무적으로 배치하고 이 기관에 속한 사람들에게 피임에 대한 도움을 의무적으로 제공할 것을 강제했다. 문제는 위에 기술한 것처럼 전체의 10% 가 넘는 가톨릭계 학교와 병원에서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은 피임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리에 따라 잉태된 모든 생명은 반드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피임도 일종의 낙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충돌은 결국 가톨릭계 학교와 병원에 보험을 제공하는 보험 회사들이 간접적으로 피임에 대한 도움을 주는 것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후 오바마는 동성애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역대 미국 대통령중 최초로 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 가톨릭 주교 회의 의장이자 전체 수장인 티모시 돌란 추기경이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마침 기도를 해주기로 결정했다. 돌란 추기경은 만약 민주당에서 비슷한 제의를 해온다면 당연히 응하겠다고 말했지만 민주당에서 그에게 그러한 부탁을 할지는 미지수다.

공화당 티파티 단체들은 줄기차게 pro-life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여전히 낙태 문제가 선거에서 중요한 이슈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가 경제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과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인 롬니, 라이언 모두 비지니스와 조세쪽에 특화된 인물이라는 사실조차 무색할 정도로 공화당내 극보수 세력은 끊임없이 가족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 파이낸셜 타임즈의 오피니언란에 나온 것처럼 롬니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가 속한 정당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는 꽤 괜찮은 대통령 후보이지만, 그가 속한 정당의 극단적인 세력의 압박에 계속해서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폴 라이언의 부통령 후보 임명은 아주 단적인 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내 가톨릭 신자들의 투표 성향은 정확히 50 대 50으로 갈리고 있다는 것이고, 지역별/성별/나이별로 쪼개 봐도 아주 일반적인 미국인들으 투표 성향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가톨릭 교회의 교리라던가 미국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사실상 가톨릭 신자 개개인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난 2008년 대선에서 미국 가톨릭 신자들은 – 다른 전체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보다는 약간 더 공화당쪽으로 기울고 있다. 다른 모든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황청은 낙태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결코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교리를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하는 미국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 역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리버럴한” 가톨릭 신자들이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스패니쉬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 계층에 속한다. 감세같은 공화당의 정책에는 동조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에 조금 더 친화적인 민주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 애리조나에서 공화당이 통과시킨 이민자들에 대한 불심검문에 대한 스패니쉬 이민자들의 반대는 대표적인 사례다. 대부분의 스패니쉬 이민자들은 맥시코에서 넘어 온다. 맥시코는 인구의 95% 가 가톨릭 신자일 정도로 국교 자체가 가톨릭이다. 즉 로마 교황청과 미국 가톨릭 주교 회의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점점 그들의 신자들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들이 단기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동성애나 낙태가 정치 선거에서 이슈가 되는 상황을 막는다던지 하는 식의 기술적인 대처가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주 이코노미스트지에 나온 것처럼 미국 가톨릭 교회도 점점 재정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해 헌금을 내는 신자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요즘과 같은 경기 침체에 학교나 병원에서 나오는 돈을 굴려서 적자를 해소하는 방법도 시원치 않다. 지난해 미국 가톨릭 교회 전체 예산이 130억불이었는데 이중 30억불이 신자들의 헌금에서 나왔다. 작지 않은 비율이다.

Barry Eichengreen: Globalizing Capital

Barry Eichengreen, Globalizing Capital: A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Princeton University Press, Second Edition, 2008.

이 책의 저자 베리 아이켄그린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경제학과의 석좌 교수다.  학자가 출간을 목적으로 책을 집필할 때에는 독자층을 미리 상정해 놓기 마련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쓸 것인지 이 책의 저자와 같이 상아탑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업자”들을 대상으로 쓸 것인지에 따라 책의 성격이 많이 변하게 된다. 아이켄그린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이 “거시 경제학과 국제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들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싶어하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이라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국제 금융 시스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조금 더 깊은 레벨에서 알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층” 도 이 책에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얻어가기를 “희망”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목적하고자 하는 바는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그 과정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고, 이 책의 대상 독자들에 일반 대중들도 포함되므로 수학적인 수식이나 엄밀한 증명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경제학적 배경 지식없이 도전할 만큼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19세기 말 등장한 금본위제도부터 200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까지 약 130여년간의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거나 무너져 갔는지 각 시대별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단순히 역사적 사실들만을 나열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미덕, 혹은 관련 학계에 기여하는 바는 전적으로 후자의 ‘해설’이 제공하는 경제학적 통찰력에 기반하고 있고, 때문에 거시경제학과 국제 무역, 국제 금융에 대한 학부 수준의 지식은 있어야 이책을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이 넘는 현대 국제 금융 시장에 대한 역사를 한권의 책에 담고 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서구 학자들의 책들에서 흔히 느끼는 그런 감정이긴 하지만, 이 책 역시 서구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 무역처럼 국제 금융 시장도 미국-유럽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일본-중국 중심의 동양 사회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기까지 (1차 세계 대전이 지나서야 일본이 비로소 등장하고, 197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과 중국등 동아시아 시장에 대한 언급이 간략하게 나마 등장한다) 동양 사회의 금융 시장 발전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는건 그 중요성과 국제적 위치를 차치하고서라도 너무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던 90년대말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한 서술도 마지막장에 단 몇페이지만으로 성급하게 마무리지어버린다. 둘째, 국제 금융 시장에 집중한 책의 목적때문이겠지만, 국제 금융 정책이 각국의 정치적 입장과 다른 정책들과의 이해 관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점에 기초해 볼때 각 시대에 여러 국가들이 맺고 있던 정치적인 함의들을 단지 외부적인 충격으로 치환해 분석하는 이론적인 한계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저자는 정치적인 변화가 어떻게 금융 시장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근간이 경제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반드시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1990년대까지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서구 사회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경제학적 이론을 약간 포기하더라도 정치/사회학적인 접근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겐 굉장한 책이다. 나는 현시대에 존재하는 경제 주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현재에 발현되는 현상들도 일정 부분 분명 통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사학자인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이 주는 ‘넓은’ 시선은 내가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하는 데에 엄청난 힌트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에 대한 헌사중 더글라스 어윈이 상찬한 것처럼 “미래의 클래식” 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지근거리에 놓고 수시로 펼쳐보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