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힙스터의 지리적 고민

어제 한 대학교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뻔하고 재미없는 금융경제학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어버린 “흙수저” 2,30대 청년층의 서울 내집 마련의 꿈, 정책적으로 풀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두꺼운 가격 장벽이 드리워진 이 투기의 도시에 문화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는 일련의 청년층이 새로운 색깔의 주거 공간을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주거집단이 해방촌이나 문래동같은, 기존의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며, 경리단길이나 익선동과 같은 ‘골목길’이 한국형 힙스터들의 주요 소비처로 탈바꿈한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후 최근 몇년 간 ‘젠트리피케이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독립 자본가, 혹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가진 역량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을 나름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들의 서울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근본적으로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규모 자본에 밀려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로 설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잃는 것은 다양한 독립 문화 자본 정도가 될 것이고, 단기적인 승자는 창의적 소규모 문화 자본을 보다 정형화된 기업 자본 기반의 대규모 산업형 상품으로 변질시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며, 특정 문화 자본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 갖는 향취, 즉 도시환경이 주는 무형의 공공재를 더 강한 자본가 세력이 부당하게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힙스터 소비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소규모 문화 자본 형성에 참여하기 보다는 이 소규모 자본가들이 영업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과 비슷한 – CJ 따위의 – 소비재를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소비 성향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자본의 형성을 촉구한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니 해방촌으로 옮겨가고, 북촌에 이어 서촌까지 사람들로 붐비니 근처 익선동으로 옮겨간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인스타그램에 ‘힙’한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소규모 문화 자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소득 전문가부터 비정규직까지 아마도 다양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 해방촌이나 익선동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그곳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 관광지와 주거지를 구분하는 심리를 은연중에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들 역시 전통적인 서울의 ‘아파트 판타지아’에서 많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비록 쪽방촌 바로 옆에 생긴 예쁜 커피숍들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하더라도 이들의 꿈은 강남의 아파트로 향해있다. 이들에게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잠원동은 주거공간으로서 좋은 선택이지만, 비슷한 거리에 있는 보광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경제적 유전자이며, 솔직하고 이기적인 경제적 판단에 기인한다. 나는 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출산과 육아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신의 소비 패턴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 세대가 윗세대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점은 세대적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회전체적인 지출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욕망의 대체재를 찾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 아직까지 나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주거공간의 가능성 중 기꺼이 생산자와 밀착된 환경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못할 때 공간적 특수성은 담보될 수 있을까? 문래동에 새로운 문화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꾸리고 생산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정체 상태에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소비력을 갖춘 젊은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힙스터 문화 시장’에 한해, 소비자가 생산자의 근거지를 끊임없이 구축(crow out)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을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 독립적인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일부 힙스터에 국한되어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면, 즉 지방에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서울 안 임대료가 저렴한 골목길을 끊임없이 떠돌려 방황하는 예술가들, 혹은 독립 자본가들의 모습을 계속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step by step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이 곳에 기록해둔다. 이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아마도 논문 마감일이 거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갑자기 영어로 쓰인 소설책이 재미있어 지고 청소가 하고 싶어지며 인터넷 쇼핑이 즐거운, 그런 시기말이다.

지난 2월 전직장에서 인사상 불이익 비슷한 것을 받고 분기탱천한 마음에 그동안 컴퓨터에 쟁여 두었던 미완성 논문 네 편을 제출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각각 다른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 중 한 편은 수정 후 재투고 과정을 거쳐 얼마전 게재되었고, 어제 다른 한 편이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두 편은 전직장에서 쓴 소논문 두 개를 각색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수준이 깊지 않았다. 첫번째 논문도 KCI 등재 학술지가 아닌 곳에 투고했기에 아마 게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받은 원고료로 아내의 드레스를 사주었으니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다른 논문도 한국에 근거를 둔 국제학술지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건 지난해말 나름 열심히 썼던 정책보고서를 각색한 논문이었다. 이 것 역시 나름 참신했던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방법론적으로나 학문적인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직장에 썼던 수많은 보고서 중 나름 논문 형식으로 각색이 가능했던 것은 위의 세편이었는데, 셋 다 돌이켜보면 정책논문으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학자들이 좋아할만한 색깔은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중 한 편은 심사결과를 참고하여 수정한 다음 다른 등재학술지에 내볼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여름에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다음 코멘트를 받아서 수정 후 국제학술지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다음달 초까지 수정본을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 세 편중 한 편이다. 이건 지난해말부터 질질 끌어온 것이라 더이상 미룰 명분도 변명거리도 없다. 지난해 말 제출해놓고 신혼여행을 가버리는 바람에 결과를 제 시간에 듣지 못했고, 그 때부터 수정 후 재투고 기한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던 그 2월까지 미루어졌다. 여기서 한번 더 연기가 되고, 이후 이직이다 뭐다 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는데 해당 학술지 측에서 다음호 발간을 위한 원고 갯수가 부족했는지 다시 연락이 오는 바람에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 다른 한편은 국내 기반을 둔 다른 등재학술지에 2월 중 제출한 상태인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도 연락이 꽤 오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탈락할 것 같은데, 내 박사학위 논문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전직장에서 쓴 두 편의 논문들이 탈락했을 때에도 심리적인 위축이 크게 오지는 않았다. 그 보고서들의 수준을 아니까, 그리고 논문화과정에서 내가 투입한 시간의 한계를 잘 아니까 기대도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위와 같이 제출한 논문들이 한꺼번에 다 무사히 통과하여 게재가 확정되면 순식간에 “포인트”를 채우게 되어 기쁠 수는 있겠지만, “포인트를 채워 조교수직을 얻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는 순간 내 삶의 고귀함도 그정도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직업의 이름에 있다면 내 삶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게재 여부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내 학문적 수준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첫째고, 이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최대한 단단하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두번째이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취와 외부에서의 평가를 상식적으로 공평한 수준까지 획득하는 것이 세번째이다. 지금까지 논문 제출 과정을 통해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등재지에 게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려면 존나 노력해야 함!

전직장에서 현직장으로 이직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대체 왜 이 연봉을 받고 이직을 했는가?”이다. 가장 많이 화를 냈던 사람은 아내였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이 “대접”을 받으며 이직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하는 것이 가장 열받았다고 한다. 이직 당시 나는 학자로서의, 연구자로서의 내 수준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전직장에서 주었던 높은 연봉은 학자인 내게 주는 돈이 아닌,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받으며 학문을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금융업에 종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직장에서 주는 돈은 유관연구기관보다 적은 수준이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 아마도 이정도 수준이 학자로서 내가 뒤늦게 출발하려고 할 때 좋은 기준점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전직장에서 3년을 허비했다면(허비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 당시 쓴 보고서들을 논문으로 재편집한 것이긴 하다), 이제 더이상 허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지금의 연봉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보다 DSGE를 잘 하는 한국인 학자가 한국에만도 수십명이 된다. 한국의 학교에 열리는 DSGE를 위한 조교수직 포지션은 몇년에 하나 될까말까한다. 내 현재 수준에서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초부터 천천히, 아주 낮은 단계부터 단단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6월 초에 걸려 있는 논문 하나 탈고하고, 6월 중순까지 학회에 논문 하나 제출하고, 7월이 다 가기 전에 탈락 논문들에 새로운 호흡도 좀 불어 넣고, 그 사이에 회사를 위해 일도 좀 하고, 그렇게 내 수준에서, 매우 낮은 수준에서 하나 하나 해 나가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집단 허리디스크에 걸린 한국사회

서울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95% 신뢰구간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허리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는 확신을 어렵지 않게 갖게 될 것이다. 혹은, 이들이 옆으로 걷는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하는 특수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구글 스콜라를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의학계열의 논문이 전무한 상태인데, 이 흥미로운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국의 엑스터 대학교 정도의 연구기관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이미 진행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더 놀라운 사실은, 통근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 혹은 버스의 복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주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백팩이나 핸드백을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백팩이나 핸드백을 어깨에서 내려서 손으로 들고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한국인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중교통수단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타인과의 접촉을 기꺼이 감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접촉면을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은 백팩과 핸드백을 몸에 장착하는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특수한 상태로 진화할 뿐 아니라 허리를 돌려 옆으로 걷는 방법을 망각하게 되는 특이한 퇴행현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이 사회 전체적으로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국사회는 만성적인 허리디스크에 집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보건복지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급한 상황이다.

백팩과 허리디스크, 또는 무통증과의 상관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혼잡스러운 대중교통수단 안에서 한국인은 왜 백팩을 벗어서 들고 타지 않는가, 혹은 그 혼잡스러운 곳을 굳이 걸어서 통과하려고 할 때 타인에 대한 비정상적 신체적 접촉행위에 대해 미안함을 대체 왜 표시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의 출발점은 정보의 미획득이다. 한국인은 혼잡한 공간에서 백팩을 벗었을 때 얼마나 추가적인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지, 몸을 옆으로 돌려 걸었을 때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얼마나 회피할 수 있는지, 혹은 미리 “실례합니다”와 같은 말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서로의 공간을 얼마나 더 양보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버스와 지하철이 공급되기 시작한지 이미 몇십년이 지났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타인에 의한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이 야기하는 불쾌함의 정도에 대한 학습은 이미 완료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비록 정장에 백팩을 메고 타는 ‘패션'(이걸 ‘패션’이라고 기꺼이 불러주는 나도 참 많이 약해지고 부드러워졌다)이 유행한지 몇년 되지 않았다 해도 그 패션을 고집하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대학교때 마자 플라바나 루카스, 혹은 최소한 이스트팩 등 다른 종류의 백팩을 메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본 경험이 최소한 한번 이상은 있었을 것이 분명한 바, 더 나아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습관처럼 말하라는 가르침을 담임선생님께 습관처럼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경험이 한번씩은 있었을 것이므로, ‘학습의 부재’ 가정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판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샘솟는다. 한국인이 얼마나 못되고 싸가지 없으면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접촉을 불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면 분명히 몸이 닿겠구나, 그러면 저 사람도 싫어하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말겠어!’

위와 같은 생각이 출퇴근길 한국사회를 허리디스크의 개미지옥 속으로 빠트리는 주된 명제란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도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관찰한 바 출퇴근길 한국인들은 대부분 생각 자체를 잘 하지 않는다. 저렇게 몇 문장으로 이어진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까지의 과정도 이미 너무 벅찬데, 사람으로 꽉 찬 그곳 안에서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심을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끄집어내는 마인드컨트롤을 할만큼 사고의 끈이 긴 한국인은 사실 몇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나마 영혼의 불씨가 어떻게 하다보니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휴대폰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소멸해버린다. 이들은 이미 이마 위에 제 3의 눈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시야를 휴대폰에 빼앗겨도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은 이미 확보해놓았다. 애초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즉,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없어보이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행동패턴을 일정하게 나타낸다면, 즉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면, 그 원인 역시 사회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들은 사회에 의해 등떠밀리는 삶을 살고 있다. 대도시라는 익명성 속에 숨어 불편함을 ‘모르는 타인’에게 전가한 채 찰나의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타인을 조금만 더 불편하게 만들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을 전가하는 타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죄책감은 덜어지고, 당장의 이익은 가시적이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는 것이고, 굳이 백팩을 벗거나 몸을 옆으로 돌려 걸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딱히 남을 해하려는 나쁜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지금 당장 저 눈앞의 자리가 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하차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옆의 칸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옆 사람의 불편함을 인위적으로 망각하는 것 뿐이다. 만약 어깨를 치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 회사 부장님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관계에 약하다. 한국사회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계급이다. 계급이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 간 관계 역시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관계는 연속적이다. 계급의 상층부에 있는 이의 영향력이 가장 말단의 사람에까지 미친다. 청와대에서 기침하면 동네 노점상이 타격을 받는 사회다. 그만큼 타인과 자신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폭력을 정당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억눌려 잇었기 때문에 풀 곳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심지어 공짜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은 그러한 억눌린 관계에서의 해방을 위한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다. 회사 복도에서는 임원이 지나갈때 마치 임금님이 지나가는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내가 왕이므로 모두의 어깨를 치면서 지나갈 수 있다. 관계와 계급에 많이 억눌릴수록 공공장소에서의 행동은 거칠게 발현될 확률이 높다.

무척 슬픈 사실은, 위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타고 빨리 내리면 대체 삶의 어떤 부분이 나아지는가?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저 땀이 조금 더 많이 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가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져버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공포심에 질려 남들보다 빨리 걸으려 하고 남들보다 오래 일하려 하며 남들보다 앞에 줄서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반칙은 정당화되고 거짓말은 별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들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많이, 조금만 더 잘 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다들’ 믿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이 걸린 병은 허리디스크가 아닌 정신병이다. 이들은 집단적인 히스테리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모두가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는 조금씩 더 나빠지고, 지하철과 버스는 조금씩 더 혼잡해진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2호선과 9호선 열차에는 선반이 없다고 한다. 백팩이나 다른 짐을 사람들이 올리지 않으니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것은 사회가 나빠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제 사람들은 백팩을 벗어 올리고 싶어도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더 등떠밀게 된다. 못되지라고, 나빠지라고 등떠밀게 된다.

조금씩 멋을 부리기 시작하는 금호동

결혼 후 삶에서 나아진 부분을 꼽으라면 많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 역시 가장 좋은 점 한가지를 꼽자면 ‘같이 놀러 다니는 사람’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싶고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사람, 어떤 것이든 가장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고 어떤 이야기든 가장 귀기울여 듣고 싶은 사람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축복이다. 어떤 연애든 연애 초기부터 “내 공간과 시간이 필요해”라고 딱 잘라 말했던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뜨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주말 내내 함께 붙어 있어도 딱히 피곤함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내가 변했다기 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환경과 장소에 민감한 동물인 내가 새로운 동네에 ‘정착’하는 과정은 삶에서 특별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경험을 가장 좋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인지 대단히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성동구는 결혼 전까지 단 한번도 주거지로 고려해본 적이 없는 도시다. 딱히 특별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인구가 적은 중구와 선거구가 합쳐졌다는 정도가 최근 내가 획득한 가장 유용한 정보였을 것이다. 아내와 나의 직장 위치와 출퇴근 동선을 고려해 최적점인 금호동을 선택한 것은 사랑하는 마포구를 떠나기 위해 생각해낸 가장 이성적인 이유였다. 둘 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기에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피곤하고 힘든 때다. 금호동으로 이사온 이후 아내는 아침밥을 여유있게 해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성산동 시절과 여전히 비슷한 시간에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출퇴근 시간만을 고려하여 선택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닌 금호동에서의 생활이 6개월차로 접어들면서 옥수동과 행당동, 신당동에 둘러싸인 이 동네가 갖는 독특한 매력과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3호선 금호역과 5호선 신금호역을 끼고 있고 도심, 강남, 용산 등 주요 지역과 빠르게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은 주거지역과 좁은 도로, 더이상 발전이 어려운 금남시장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부동산 가격이 주변만큼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몇년 간 재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우리와 같은 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거주층의 변화가 발생하면서 동네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재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곳에는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곳에는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몇십년 간 금호동을 지켜온 터줏대감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곳조차 멋을 부린 현관문과 멋을 부린 작은 자동차들이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젊은 세대가 조금씩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에는 고급 외제차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이들이 고소득 전문직인지, ‘카푸어’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들의 뿌리를 ‘압구정, 혹은 반포에 사는 부모님이 돈을 보태주어 독립한 젊은 부부’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아이를 맡길 수 있고 광화문이든 서래마을이든 30분 이내에 놀러갈 수 있으면서도 집값은 강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 곳이 이들에게는 최적의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유입된 새로운 주거집단은 기존의 금호동 거주자들과 완연히 다른 소비성향을 보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에 부모님 품에서 누리던 소비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고, 한남동-압구정-성수동 등 금호동을 둘러싸고 있는 ‘핫’한 강북 지역문화의 혜택도 누리고 싶을 것이다. 즉, 중산층의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강남의 비싼 부동산 가격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은 쁘띠 브르주아지 2세대 정도가 금호동의 새로운 주요 계층이라고 애둘러 표현할 수 잇을 것이다. 강남에는 문화가 없다.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강북에는 문화가 있다. 소비수준이 조금 낮을 뿐이다. 이들 신거주층에게는 아마도 옥수동의 외곽지역 쯤으로 정의내려질 금호동은 강북의 고유한 문화를 보다 저렴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부동산가격(=임대료), 문화적으로 단련된 새로운 주거집단, 지역문화의 특색을 간직한 주요 거점들과의 긴말한 연결성 등 금호동이 새로운 소비 중심지로 각광받을 수 있는 조건은 충분히 갖춰졌다. 물론 금호역과 신금호역 사이를 잇는 길이 가파른 오르막의 1차선 도로이고 성수역이나 행당역에서 금호역으로 이어지는 길도 복잡한 금남시장을 끼고 있는 1차선 도로라는 한계가 명확하긴 하지만, 연남동 골목길과 이태원 경리단길이 이처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해보자면 이정도 걸림돌은 사실 그리 커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도로적 특성이 금호동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줄지도 모른다!) 아직 금남시장 골목에는 도우미들이 나오는 노래방과 철지난 유행을 머금은 호프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 가게들 사이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겉으로 보면 참신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틈새를 노린 한 자본가의 전략적 요충지 확보 정도로 해석될 수준의 가게들이다.

먼저 금호역에서 나와 금남시장으로 향하는 장터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 길의 교통체증을 두 배로 심화시키는 주범인 회전식 원형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호산길이 나오고 이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넘다 보면 신금호역이 나온다. 이 삼거리가 어찌 보면 금남시장의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목화다방이 있다. 상호명에서조차 동네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 가게는 술과 가벼운 음식을 함께 내는 프렌치 비스트로다. 각종 와인과 칵테일을 구비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쌍화탕을 마실 수 있다 하니, ‘다방’의 컨셉을 유지하는 동시에 금호동의 지역성을 살리고자 하는 나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지역성’과 ‘차별성’이 요즘 서울의 힙스터를 정의내리는 두가지 키워드라면 목화다방은 그 키워드를 충실히 해석하는 수준에서 완성된 장소인 셈이다.

원형교차로를 지나쳐 조금 더 금남시장 안쪽으로 들어오면 금남시장의 실핏줄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장터5길로 올라가면 금남소공원 근처에 돼지미학이 있다. 이 곳은 금남시장에 있는 다른 고기집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기를 공수해오고 다른 방식으로 고기를 익혀 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밝고 화사한 커피숍 분위기의 깔끔한 인테리어로 시각적인 차별화를 시킨 다음 인덕션을 이용해 고기를 익혀 깔끔한 반찬과 함께 내어 나온다. 이 고기는 제주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이라고 한다. 불편한 자리에서 전투적으로 고기를 구워먹고 싶지 않은, 그러니까 ‘살이 찌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기에 대한 욕망도 해소하고 싶은’ 세대에게 어필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장터길에서 금남시장 교차로를 끼고 돌아 독서당로를 타고 한남동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금호대우아파트가 나온다. 이 아파트 상가에는 최근 문을 연 베르베르가 있다. 좁은 공간에 큰 사각 테이블 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주방은 오픈 형태로 열어두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과 요리를 하고 내어주는 사람이 공간과 동선을 공유한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유행하는 전형적인 ‘요즘’ 식당 인테리어다. 적당한 가격대의 와인과 어울리는 서양 음식을 제공하는데 양은  많지 않고 간은 적당히 슴슴하다. 소주를 마시기엔 부담스럽고 공격적인 안주를 먹는 것도 꺼려지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수다장소를 마련하려는 듯 보인다.

재미있게도 위의 세 음식점은 모두 장진우로부터 출발한 곳들이다. 금남시장이 간직하고 있던 전통적인 위치를 가볍게 전복시키려는 이 시도들이 모두 한 명의 자본가의 머리와 뱃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백종원류의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 다 준비해봤어’ 식 브랜딩보다는 조금 더 파인 튜닝된 타게팅을 원하지만 매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갈 주머니 사정도 갖추지 못한 중산층-wannabe 집단이 장진우가 노리는 시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금호동보다 더 좋은 터는 없을 것이다. 이미 옥수동은 “옆구정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구정의 소비문화에 잠식당했다. 그만큼 부동산 가격도 많이 올랐다. 래미안 옥수리버젠과 옥수삼성아파트를 끼고 있는 독서당로에는 이미 셰프찬부터 초록마을까지 젊은 세대를 위한 소비패턴을 고려한 가게들이 다수 들어와 있다. 동호대교에서 올라와 터널을 두개나 통과해야 하는 약수, 혹은 신당동은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다. 그곳은 이미 ‘너무 강북’이다. 성수동으로 다리 하나, 압구정으로도 다리 하나, 한남동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의 금호동은 주차시설만 갖추어져 있다면 적당한 자본을 투하하여 차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다.

정작 금호동의 정체성을 지키는 맛집은 은성보쌈이나 원조칼국수보쌈과 같은 금남시장이 품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이다.  혹은 이미 서울숲을 끼고 들어와 나름의 위치를 확보한 고메트리가 있다. 재래시장이 품은 오래된 식당과 장진우식 신식 다이너들과의 격차는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인다. 금호동에서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완전히 다른 두 주거집단의 색깔만큼이나 온도차가 심하다. 중요한 점 하나는 기존의 주거집단이 베르베르에 가서 식사를 할 일은 없지만 새로운 주거집단은 얼마든지 은성보쌈에서 한끼를 해결하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소비력과 문화적 확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요미식회에 한번 나오기만 하면 그곳은 힙스터들의 성지가 될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금호동은 신 주거집단의 문화적 정복이 멀지 않은 곳이다. 금호산길이 새로운 경리단길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금남시장이 재래시장으로서 갖는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금호동은 이제 막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멋부림 속에 어느 정도의 정체성이 담보될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이미 우리 아파트 앞에도 해외 맥주 보틀샵이 하나 생겼다. 그 가게에서 몇십미터만 내려오면 직접 원두를 볶아서 판매하는 커피숍과 콘크리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인테리어를 뽐내는 듯한 커피숍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금호동 안에 위치한 이 새로운 형태의 가게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들쑥날쑥한 셀링 포인트와 특별하게 기억에 남지도 않는 맛들(고메트리는 맛있다, 고메트리는!). 하지만 최소한 어떤 시도의 흐름은 읽히고 있다. 그 흐름이 자본의 어깨에 올라 타서 특정 소비계층의 취향과 만나게 될 때 이 ‘동네’는 타지인들이 시간을 내어 방문하게 되는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게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 현재 한 지역의 어떤 태동기를 목격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dignity

나는 노빠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 몇 년 전 어설픈 일기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이후 그를 ‘정치적으로 죽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그가 한 때 몸담으며 꿈을 키웠던 곳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직 국회의원실과 직접적인 업무를 주고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오며가며 그들의 호흡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가 그토록 물리치려고 애썼던 망령의 딸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은 문재인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 없이 누군가의 후광에 기대어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라는 그 친구 나름대로의 판단을 들었다. 박근혜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친구가 당시 지지했던 안철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등 이룬 것이 많기 때문에 믿을만 하다는 논리였다. 그 친구의 논리대로라면 전자와 같은 “후광에 기대려는 사람”의 대표격이 박근혜라면, 후자의 경우 이명박을 안철수와 비슷한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친구처럼 문재인을 노무현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아 대통령직에 오르려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닌,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유명한 말은 노무현 그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작가이자 문재인 대선캠프의 영상팀장이기도 했던 정철영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아!”와 “아~”로 구분했다. 만나는 즉시 이미지와 색깔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오는 사람이 노무현이었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의중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는 사람이 문재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 먼저 세상에 발견되었고, 문재인은 그의 친구가 저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까지 배웅한 뒤에야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세상이 “아~”하며 문재인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에게 ‘자격’과 ‘경력’이 필요하고 그 것들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면, 거대 정당을 이끌고 몇차례의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보다 더 화려한 경력과 더 단단한 자격을 갖춘 이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철저하게 이용한 그녀의 몸에는 동물적인 정치적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수성가의 표상이었던 이명박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국가의 재산을 사유화시키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라는 또다른 기업인 출신 정치인에게 몰표를 주고 대통령 후보로 성장시킨 호남의 심리 역시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레주메가 일천한 그에게 하나의 정당을 ‘창업’시켰다는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우리도 대안을 가져보자”는 열망을 실현시켰으니 말이다. 문재인은 다른 방식으로 자격을 획득했다. 노무현 정부 내내 민정수석과 사회수석 등 청와대 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경험을 쌓았지만 그는 여전히  노무현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색깔과 그만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을 일궈나갔다. 그의 성품에 매료된 인재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촛불이 켜진 광화문으로 뛰쳐나간 수많은 정치인들 중 문재인이 ‘선택’된 것 역시 필연적이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색깔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색깔은 노무현과 다르지만 노무현만큼 깊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결과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다. 세상을 바꿀 기회. 노무현이 꿈꾸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세상. 노무현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이제 문재인은 스스로 운명의 다음 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이상 노무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 “친문세력”에 대한 비토로 상대방의 비난의 물결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노무현을 죽인 두 개의 망령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박정희로 상징되는 친일반공주의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십자가라는 불가해한 조합의 상징물에 의지하며 과거에 천착하려는 천박한 종교적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어지러운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괴물처럼 약자를 잡아 먹으며 성장한 천민 자본주의 세력이다. 재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이 괴물이 낳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씨앗이었다.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전자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면 그보다 조금 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후자는 선거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죽은 노무현과 살아남은 문재인을 괴롭혔다. 그 망령 중 일부는 안철수에게 붙었다. 성공한 기업인, 한국사회에 몇 안되는 올바른 소리를 하는 오피니언 리더, 기업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한 이해도 밝은 해결사 이미지. 안철수는 이 시대의 좋은 대안이었다. 망령의 일부는 홍준표에게 붙었다. 죽어도 문재인은 싫다는 사람들은 박근혜가 속한 정당에서 배출한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정당이 매 선거마다 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잘못을 많이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이번에 내세우는 후보는 과거의 잘못과 상관이 없다” 라는 논리로 무장하여 무지한 노년층과 이기적인 부유층을 자극한다. 이게 정확하게 먹히는 지역이 바로 대구와 경북, 그리고 서울 강남구다. 대구와 경북에 사는 그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매번 스스로를 기만한 결과 모든 나쁜 경제지표에서 순위권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대구는 망해가고 있지만 이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우한 현실은 남탓을 하면 그만이다.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는 아마 5년 뒤에도 유효할 것이다.

문재인이 기적적으로 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김대중도 하지 못했고 노무현도 하지 못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고 삼성도 지금까지 쌓아온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들며 버틸 것이다. 대구와 경북에는 아직도 수백만의 사람이 살고 있다.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부유층은 더 집요하게 재산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검찰과 같이 영원한 권력을 가진 집단은 다시 한번 대통령을 모욕주려 할 것이다. 이 모든 장애물을 문재인 혼자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번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입을 것이며 어쩌면 영구히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른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 자체로는 아무런 성취도 얻을 수 없다. 무수히 공격받고 무수히 넘어질 그의 옆과 뒤와 앞에서 그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노무현이 세상을 등질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집단적 부채의식이 ‘미안하다’라는 말을 기어코 한국인의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렇게 아주 큰 씨앗 하나를 한국사회에 심어 놓았다. 문재인이라는 큰 나무 주변에는 그 씨앗으로부터 솟아난 작은 풀잎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서 땅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비가 와도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 내가 앞으로 5년동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노빠다. 빠는 빠답게 해야 할 일이 있다.

지난 주말 여행: 창원, 대구, 서울.

지난 주말에는 창원과 대구에 다녀왔다. 결혼 이후 매 7일마다 한 번씩 주어지는 주말의 상당 부분이 ‘가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아내의 가족으로까지 가족의 범위가 확대된 셈인데, 원래 익숙한 나의 가족에게 새로운 멤버를 소개시켜주고 친해질 시간을 마련해주는 작업이 필요한지라 기존의 가족에게 할애하는 시간 역시 비례해서 증가하게 되었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 입장라 ‘우리’의 가족에게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이 몇곱절은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결혼을 통해 서로의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와 법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가정을 생성하게 된 것이 오히려 ‘예전’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창원은 결혼 전에는 한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는 도시다. 군대 시절 바로 윗 고참이 창원 출신이었는데 힘이 무척 세고 단순 무식한 문제 해결방식을 선호하는 성격 탓에 “황소개구리”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양반과 잡담을 할 때 항상 나오던 단어가 “상남동”이었다. 아시아 최고의 유흥가, 외국인 노동자의 천국, 빌딩 하나에서 모든 욕망을 해결할 수 있다, 등등의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으로 보아 창원 시민으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창원의 이미지는 딱 그정도였다. 그 당시 현재 아내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장인 장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가 바로 그 상남동 한복판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뿐더러, 더 나아가 지난 주말 그 가게에서 장인 장모님을 도와 일을 거들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현재 창원은 예전 도시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마산과 계획도시 창원, 그리고 신/구시가지가 섞여 있는 진해 등 세 도시가 통합되어 있다. 도시 간 거리가 존재하는데다 분위기도 많이 달라 하나의 완전한 도시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깔끔하게 구획된 도로와 공공기관들이 대규모 공단과 함께 자리잡은 창원은 쾌적하고 평화롭다. 그 요란스럽다는 상남동조차 서울의 명동이나 강남역과 비교하면 한적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사람들은 많이 사납지 않으나 경상도 사람 특유의 서두름과 퉁명스러움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도시의 분위기 자체는 우리나라에서 ‘지방’이 갖는 여러 편견에서는 꽤나 자유로운 편이다. 낙후되었다는 인상은 쉽게 가질 수 없으나 이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 역시 찾기 힘들다.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점령한 유흥가 틈새로 가끔 보이는 동네 상점들 역시 홍대나 성수 어딘가에 있는 흔적을 그대로 베낀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이건 아마 전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홍대나 성수 등 ‘핫’한 동네 역시 특유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그들 역시 윌리엄스버그나 포틀랜드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를 훔쳤을 가능성이 높다.

대구에는 태어날 때부터 줄기차게 오르내렸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조부모님 등 친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1년에 최소한 두 번은 왕래했던 것 같다. 중공업 도시인 창원과 달리 대구는 제조업 위주로 발달했다. 산 속에 갇힌 분지 지형이 주는 폐쇄적인 문화에 더해 생활의 호흡조차 조금 더 빨라질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은 전국에서 발전이 가장 더딘 도시라는 오명을 안게 만들었다. 뻥 뚫린 도로와 높게 솟은 빌딩, 모노레일과 같은 눈요깃거리들은 기간산업의 침체 속에서 부동산 시장 버블 붕괴 등의 위험요인으로 쉽게 연결될 수 있다. 도시는 덥고 답답하다. 사람들은 성마르고 공동체의식은 결여되어 있다. 공동체의식의 탈을 뒤집어 쓴 집단 이기주의만이 여러 곳에서 감지될 뿐이다. “세월호는 교통사고일 뿐”, “친손자와 외손자는 다르다”, “문재인은 무조건 싫다” 등의 표현을 아주 최근에 그곳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서울에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뿌리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 줄기 어딘가에는 대구라는 지명이 반드시 출현할 수 밖에 없다. 거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틀간의 고된 여정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돌아와 집으로 가는 길에 서울의 밤 풍경이 조금 달리 보이는 것을 느꼈다. 창원과 대구에 걸려 있는 수많은 네온사인과 간판들은 서울의 몇년 전, 혹은 몇십년 전 걸려있던 것들을 가져다 놓은 느낌이다. 서울과 창원, 대구는 같은 2017년을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을 ‘후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서울이 조금 더 빠르게 베낄 뿐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항상 서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 교육때문에, 집값 상승폭때문에, 벌이가 괜찮은 직장때문에, 문화적 혜택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등 이유는 다양하다. 사람들이 서울에서 떠나지 못하니 자본도 서울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자본은 ‘더 새롭게’가 아닌 ‘더 빠르게’에 집중되어 소모된다. 누가 더 빠르게 베낄 수 있는가의 싸움을, 현대 한국사회는 여전히 하고 있는 셈이다. 창원과 대구라는 지방에서도 꽤 좋은 도시들이 고유성을 상실한채 서울을 쫓아만 가고 있는 것도,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순간의 차익만을 노리며 현재의 위상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것도 결국 나라의 고유한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성북동에서 곤지암으로 가게를 옮긴 단골 미용실 사장님께 “영어 공용화”에 대해 말씀드렸다. 언어적 장벽이라도 허물어버리면 더 많은 노동인구, 그것도 젊은 층에 집중된 사람들 사이에서 왕래가 더 빈번해질 것이고,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문화적 장벽마저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 내 생각에 한국은 현재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섬나라다. 사실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토플시험 만점 받는 것이 일도 아니라고 한다.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문화적 고립성이다. 미국에서, 혹은 다른 영어권 국가에서 그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면 한국사회의 꽤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름’을 경험하고 와야만 한국에서 ‘다름’이 인정받을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는 다름을 인정받기 힘든 구조다. 역설적으로 더 큰 격차의 다른 문화를 경험한 자만이 한국 사회에서 그 다름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창원부터 대구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지난 주말 여행동안 내가 고민한 부분이다.

송충이가 되어 솔잎을 먹게 되었다.

출근 첫 주가 끝났다. 출근 첫날이었던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엔 이 곳 사람들과 섞여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연찬회에 다녀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몇시간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세끼를 함께 먹고 술까지 마시며 인사를 나누었다. 정장 차림으로 만나도 어색할텐데 평소 보기 힘든 사복 차림으로 이틀 밤과 낮을 함께 보내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introvert계의 교과서인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과 몇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술까지 나누어 마시고 잠까지 같이 자다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본격적인 첫 출근은 수요일부터였고, 임명장을 받고 인사를 다니고 자리 세팅을 하는 등 절차 상 필요한 일들을 다 끝낸 목요일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오늘 간부 보고를 들어가고 부서 내 회의까지 참석하니 대략적인 프로세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는 일은 전에 다니던 곳과 매우 비슷하다. 한 달에 한 번 거시경제와 관련된 시의성 높은 주제를 선정하여 개조식 보고서를 쓴다.  1년에 두 번 경제성장률을 예측한다. 초안을 쓴 뒤 1차 관리자의 검토를 받고 2차 관리자의 승인을 받으면 최종 결재자의 결재까지 득하여 출판 등의 방법으로 외부로 공개한다. 혹은, 내부 보고 수요가 있을 경우 같은 절차를 수행하되 외부로 공개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보고한 뒤 마무리한다. 그 과정에서 이 바닥 특유의 형식에 구속당하는 경직성이 있을 것이고, 외부의 시선을 고려하여 글의 톤을 ‘조절’하는 절차도 있을 것이다. 업무의 형식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글을 ‘어떻게’ 쓰는지가 약간 다른 것 같다.

우선 실무를 위한 보조 역할이 아닌, 거시경제 전반에 걸쳐 시의성 있는 이슈라면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는 저자의 재량권이 어느정도 확보되는 듯 보인다. 기관의 입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저자의 주관을 글에 담을 수 있는 여지도 어느정도는 존재하는 것 같고. 초안을 완성한 뒤 관리자의 ‘수정’이 어느 수준까지 개입하는지 한번 겪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띄어쓰기까지 꼼꼼하게 수정하기 보다는 기관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 뒤 코멘트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는 것 같다. 그정도만 되어도 “글을 빼앗긴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글자 크기가 15p 에서 11p 로 확 줄어 들었다! <- 가장 큰 기쁨

개인적으로 금융감독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것, 특히 금융산업의 본질적인 greedy한 속성과 시장 중심의 사고방식에 더이상 구속당하지 않는 것이 기쁘다.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정책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게도 전 직장과 유사하지만 거시경제 전반에 걸쳐 신속하게 현상을 분석하는 업무를 연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분명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금융감독, 특히 은행감독에 한정하여 지식을 축적하였던 과거 3년과 달리 이제는 살펴봐야 할 부문이 경제 전반으로 확대되다 보니 깊이는 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시경제를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실물경제를 직접 대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흥분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떤 이는 “같은 일을 더 적은 돈을 받으면서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낮게 평가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나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송충이와도 같다. 금융산업에서 정책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특히 금융정책과 금융감독을 함께 총괄하는 기관의 감독을 받는 회사에 속해 있다 보니 시장에서 권력이 거의 없는 개별 소비자를 위한 정책적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업무 환경이라면 직접적으로 정책적 제언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시선을 담아낼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시경제를 공부하는 사람, 특히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처럼 뭉툭하고 광범위한 거시경제정책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 정책이 개별 경제주체 개개인에게 미치는 실질적 효과에 대해 고민하고 그 결과에 대한 입장이 어떠한지 밝힐 수 있는 책임감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관의 입장에 의해, 혹은 시장의 입장에 의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기 힘들게 감추는 행위는 보고서를 “예쁘게 잘 쓰는” 좋은 부하직원으로 비추어질 수는 있어도 거시경제의 올바른 순환을 돕는 정책가의 모습은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그 결과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것이 학자의 사회적 책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낮은 임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 머무는 동안 어떤 글을 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목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번째 선택

어제 만난 ㅎㅇ씨에게 “내 유학시절은 실패였다”라는 말을 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유학 과정을 목격하고 말 없이 응원한 그와 같은 사람들의 고마운 마음 덕분에 나는 그 시간을 무사히 ‘버텨’ 낼 수 있었지만, 박사 과정에서 확인 가능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너는 항상 2% 부족한 삶을 살았다.”

라는 누나의 지적(군대 훈련소에서 누나에게 받은 첫번째 편지에 적혀 있었다)은 여전히 유효했다. 스무살 중반까지 꾸준하게 쌓여온 나태함의 흔적은 6년의 짧은 시간으로는 극복이 되지 않는 진득한 찌꺼기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저 그런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고, 그저 그런 졸업 논문을 썼다.

“네 재정적 문제가 아니었다면 졸업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지도 교수님의 지적은 그래서 더 뼈아팠다. 결국 바뀐 것이 없는 상태에서 졸업을 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한국에서의 취업은 하나의 기회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 졸업 논문의 허점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사람이 그 곳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이 회사에 취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지시로 연구조직을 갑자기 신설하게 되었고, 그래서 젊은 박사급 인력이 급하게 ‘다수’ 필요한 당시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곳에 취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 두명의 후보군 중 나는 처음 세 명 안에 들지 못했다. 처음 오퍼를 받은 우수한 인재들이 다른 곳을 선택한 뒤에야 중간 쯤의 순번표를 들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러한 시작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잘 활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까라면 까야 한다”는 뻑뻑하고 보수적인 조직의 문화 역시 잘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술을 마시라면 마시고, 연구와 상관없는 일을 하라면 했다. 같은 팀 세 명의 박사들 중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점도 궂은 일을 떠맡아 하기에 좋은 이유였다. 생전 처음 해보는 회사 생활이었지만 매일 출근하고 퇴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점에 감사하며 다녔다. 동년배 친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독립된 연구실과 성능 좋은 컴퓨터까지 제공받은 업무 환경 역시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우리 ‘연구팀’은 연구를 하라고 만든 신설 조직이었지만, 그 규모가 너무 작아 다른 부서 아래 속한다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실무 인력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회사의 빠듯한 사정이 우리팀을 편안하게 계속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독립된 연구실은 부서내 공간 한 쪽으로 줄어들었고 상부에서의 지시는 조금 더 빠른 호흡으로 내려왔다. 성과를 뽑아내라는 독촉은 더 심해졌고 장기적인 연구계획은 승인받지 못했다. 팀원들처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팀장님은 부서와 우리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다. 위에서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것에는 상처가 뒤따랐다. 논리로만 무장하기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정치 논리’가 너무 강하게 작용했다.

결국 팀장님은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실무팀으로 파견을 갔다. 팀장님은 강릉에서 그 지역 민원을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나는 실무팀에서 아주 빠른 호흡의 보고서를 생산해내는 일을 해야 했다. 어느날 아침 출근길, 문득 회사에 가기 싫어졌다. 연구팀에서 일할 때에는 단 한번도 느껴보지 않은 감정이었다.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연구결과를 뽑아낼지 두근거렸다. 야근을 해도 즐거웠고 주말에 출근해도 즐거웠다. 실무팀에서는 그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때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유학시절을 함께 보낸 한 형님에게 자문을 구했다.

“결국 종혁씨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그 말을 듣고, 와이프의 깊은 이해가 없었다면 진행하기 힘들었을 일을 시작했다. 몇군데 원서를 넣었고 대부분 낙방했다. 이 곳에서 꾹 참고 논문을 열심히 써서 내년 쯤 학교로 바로 가야 하나, 하고 마음 먹을 무렵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신경써서 입사원서를 준비했던 곳이었다. 역시 신경써서 면접을 준비했고,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던 그 곳에서 좋은 연락이 왔다. 박봉-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에 개인 연구실도 없지만 금리와 물가 등 내 박사학위 전공과 관련이 깊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연구원 개인에 대한 자유도도 상대적으로 높고 개인적으로 노력만 하면 논문 발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국가를 위해 공식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영광이었다. 잠재 경제성장률을 예측하는 모형을 내부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 역시 꽤 커보였다. 지도교수님이 계신 곳과 정확히 같은 일을 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내 인생의 흥미로운 변곡점을 맞이한 것만 같아 재미있게 느껴졌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와이프에게 이야기했고, 그녀 역시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유학, 첫번째 직장, 그리고 두번째 직장. 너무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오로지 내 의지로 선택한 세 번의 순간이 있었다. 모두가 가지 말라는 유학을 혼자 결심했고 준비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첫번째 직장을 다니며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그리고 이제 그녀와 함께 세번째 선택을 했다. 이 선택이 올바른지에 대한 확신은 당연히 없다. 아직도 학자로서의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 물론 이전보다 조금 더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드디어 첫번째 논문 게재가 확정되었고, 전에 발표한 정책보고서에 대한 언론 및 유관기관의 관심도 지속되고 있다. 개조식 보고서를 쓰는 법을 배웠고, 조직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내 생각을 담아낸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요령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개인의 생각을 담은 논문을 쓰는 일도 계속 하고 있다. 나는 QJE나 AER에 논문을 게재하고 전세계를 공짜로 여행하며 세미나를 하는, 그런 삶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정도 높은 수준에서 세상에 공헌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이제 잘 깨달았다. 하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낮은 수준에서,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지향하는 지점으로 계속 가고는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된 것 같다.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내 유학시절은 실패였고, 첫번째 직장생활에서도 우리팀이 이룩하고자 했던 바를 결국 완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 인생이 실패를 향해 가고 있다고는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마이클 조던은 성공한 슛보다 실패한 슛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의 인생은 성공으로 기억된다. 나 역시 연속된 작은 실패을 겪으며 조금씩 단련되고 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거창한 것을 이룩하고자 하는 욕심은 없다. 그저 내 그릇에 맞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근거없는 오기인지 확실한 자신감인지는 앞으로 몇년이 지나면 조금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퇴근길. 

가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난해져 작은 것도 커 보일 때가 있다. 예컨대 매일 반복하는 출근과 퇴근이 가끔은 무척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퇴근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출근, 그 출근을 하기 위해 하고 싶어지는 퇴근, 그리고 다시 출근. 이 루틴의 반복은 정기적인 월급을 받아내기 위한 기본적인 의무이기도 하지만,  통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겐 매일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축복의 신호일 수도 있다. 

노동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사회를 사회로서 존재하게 해주는 사회적 약속의 가장 작은 단위다. 노동을 함으로써 생산물이 축적되고 그 축적된 생산물을 나눔으로써 인류는 사회라는 단위로서 진화할 힘을 얻는다. 사회로부터 받은 교육을 통해 잉여 노동력을 획득한 개인은 그 노동력을 사회에 제공함으로써 살아갈 여유를 얻고 사회는 그 노동력을 자양분으로 삼아 발전을 꾀한다. 노동력의 질이 차별화될수록 여유의 크기는 커지게 되고 어떤 뛰어난 이들은 노동가에서 자본가로 신분을 바꾸기도 하며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도 한다는, 뭐 그런 뻔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유는 오늘 나의 마음이 약간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금호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는데 개찰구 밖에서 어린 소녀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겉옷도 입지 않은 그 소녀는 내 뒤에 있던 그녀의 엄마에게 뛰어가 품에 안기며 말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이제 집으로 가요.” 

나는 그녀의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다.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여인일 수도 있고 대기업의 중견 간부일 수도 있다. 그냥 지인의 일을 며칠 도와주는 전업주부일수도 있고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일수도 있다. 어쨌든 그 순간의 나는 고작 열시간 정도 책상머리에 앉아 그래프를 끄적거리며 인생 참 고단하네, 라고 불평하다 막 튀어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던 참이었고, 그 소녀의 “고생했다”는 한마디가 나를 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오늘도 고생한 사람”의 하루는 값진 것이다. 그것이 원치 않는 출근과 퇴근의 굴레바퀴에 갇혀 있다 해도 말이다. 네이버 부동산을 보며 세상에 돈 많은 이가 이리도 많구나, 탄식하다가도 반짝반짝 빛나는 삶의 작은 파편을 발견하는 이런 순간은 그저 마음이 가난해지며 어깨를 낮추게 되는 것이다. 

하루가 의미를 가지려면

사람들은 해의 뜨고 짐에 따라 하루, 라는 단위를 만들었고 그 하루를 잘게 쪼개어 시간과 분, 초를 만들어 이를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이라는 개념은 자연의 섭리를 참고하여 창조되었지만 철저히 인간적이고 기계적인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언젠가 반드시 죽고 마는 인간에게 처음과 끝이 보이지는 않는 무한성을 가지는 시간은 굉장히 무겁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몇 시에 보자, 몇 시까지 끝내야 할텐데, 와 같은 아주 세속적이고 주변적인, 혹은 한계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잠에서 일어나 다시 잠들기 까지의 ‘하루’는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순환의 약속이다. 이 하루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깨지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행복해도, 혹은 아무 생각이 없어도 이 하루는 반드시 시작되고 반드시 끝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하루 스무시간씩 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해가 뜨고 짐에 따라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 시침의 규칙성을 막지 못한다.

그 한정된, 하지만 연속된 단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신체의 각 기관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먹어야 하니 음식이 필요하고, 충분히 쉬어야 하니 몸을 기대거나 누일 곳이 필요하다. 다른 인간과 교류하며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옷가지나 화장품 따위도 필요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최소한의 신체 활동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론 인류 전체의 활동이 굼떠지는 요즘에는 이 노동의 지분도 조금씩 낮아지고 있지만. 노동을 하지 않을 때 인간은 주로 쉬거나 잔다. 힘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쉬거나 자기 위해서 일을 한다. 제대로 쉬거나, 제대로 자기 위해서. 혹은 제대로 먹기 위해서. 이것이 주가 되는 삶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가장 본질적이고 본능적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활동이 바로 먹고, 자고, 싸고,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는 인간도 있다. 혹은, 노동이 단순히 신체 활동을 유지시키기 위해 돈을 비롯한 온갖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업화가 극도로 진행되고 모든 가치의 단위가 화폐로 통일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목적과 삶의 목적이 완전히 일치하는 하루를 완성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정을 꾸리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다 못해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24시간 중 얼마나 많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봄직 하다.

소비 그 자체로 의미를 찾는 사람이 있고, 소비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다른 무언가가 자기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철저히 계획되어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일 수도 있다. 소비의 반대말로 흔히 생산을 떠올린다. 밥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음악을 듣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행위를 우리는 흔히 소비생활이라고 표현한다. 돈을 써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산활동은 수익을 창출해야만 하는 것일까? 팔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집에서 그리는 행위는 생산이 아니라 치료나 자위로 분류되어야 할까? 그것으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여성 뿐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아주 작아도 좋으니 창문이 있는, 그런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개인적인 공간에서 인간은 24시간 중 일정 부분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해도 좋다. 가족과 함께 보던 드라마를 이어서 봐도 좋고, 글을 써도 좋다. 그림을 그려도 좋고, 그 안에서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어도 좋다. 그 방 안에서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나는 그 행위가 하루 24시간이 의미를 갖게 만드는 첫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무언가 공허함을 느낀다면 자신이 들은 음악을 한번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고, 단순히 음악을 들은 날짜와 시간, 그 당시의 날씨, 혹은 음반의 가격같은 정보를 적어보아도 좋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소비생활을 정리해서 제공해주지 않는다. 소비의 여력이 허락하는 한 무작위로 주어진 정보와 감정적 충동, 계획에 대한 믿음 등이 뒤엉켜 한 단위 한 단위의 소비가 축적되어 간다. 소비생활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역사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정의내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표절이 아닌 이상 지금 적어내려가는 한 줄의 글귀는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지금 긋는 선 하나, 지금 누르는 버튼 하나 역시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행위의 끝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공기 중에 사라져버리는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요즘 읽는 책은 뭐야?”

라는 질문에 즉각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어제 뭐 먹었어?”, “최근에 본 영화 어땠어?”, “오늘 입은 옷은 뭐야?”같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루를 구성하는 어떤 것을 충분히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의미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조금 더 확고한 의미를 지니는 단계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쓴 글 보여줄 수 있어?”

라는 질문은 “요즘 무슨 생각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소한 인간에게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이것이 그림이든, 요리든, 최근에 산 옷들의 조합이든, 뭐든 좋다. 현대사회는 소비로부터 출발해 생산으로 끝맺음될 때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답다. 관건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아로새길 수 있느냐일 것이고, 그 과정의 시작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 즉 자기 자신만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부터 발현될 수 있다. 똑같은 유니클로 티셔츠라고 할지라도, 그 옷이 누군가의 옷으로 기억될 수도 있고 그저 작년에 입었던 옷으로 기억될 수도 있으며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공산품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 공산품을 구매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무한한 시간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확실하게 말이다.

요즘 나의 하루는 몹시 규칙적이다. 아침 일곱시 쯤 일어나 씻고 옷을 입으면 아내가 밥을 차려준다. 아침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면 정해진 시간에 버스와 지하철이 온다. 좁은 지하철을 타고가는 30분 정도의 시간에 책을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회사에서는 주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회사를 위한 글이 아닌, 나를 위한 글도 쓴다. 시간을 잘 분배해야 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위한 글쓰기는 주로 보고서의 형식을 지니며, 그 안에 나의 소신과 믿음을 담아내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보고서들로 인해 나는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으며 아내와 함께 따뜻한 곳에서 편히 잠들 수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주로 논문의 형식을 지닌다. 아직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미완성 글들이 전부다. 이 글들을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끝내지기를, 즉 논문 형식의 글이 ‘완결’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에의 기고 및 학회 발표 등의 과정을 통해 내 손을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몹시 중요한 일인데, 왜냐하면 내 삶의 하루 중 이 글을 쓰기 위해 바치는 시간이 가장 의미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나와 전혀 상관없을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쓰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헛된 바람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여섯시 즈음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책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약속이 있다면 약속을 소화하고, 그렇지 않다면 집으로 돌아오 아내와 밥을 지어 먹고 집을 청소한다. 그러다 서로 몸을 포개고 누워 방송 프로그램을 돌려보다 열두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살기 위해 쓰인다. 자고, 먹고, 싸고, 청소하고, 일한다. 나를 위해,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하루에 많아야 서너시간 남짓이다. 이 시간이 나머지 모든 시간을 떠받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나는 상당히 위태로운 하루를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하루가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조금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