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

지난 봄 직장을 옮기면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고 월급을 잃었다. 전직장에서 인사상 원치 않는 곳으로 배치된 이후 매일 아침 출근길이 괴로웠다. 새로운 일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고 바뀐 업무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거의 없었다.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어차피 해야 할, 다른 누군가가 능히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업무였다. 괴로운 출근길의 한복판에는 미움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를 그 자리로 보낸 사람에 대한 미움, ‘나에게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한 미움의 감정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했고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을 미워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가장 최근 미워한 사람은 이명박이었다. 그 정도로 나의 삶에서 적당히 멀리 떨어진 사람을 사회 구성원의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미워하는 것과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을 개인적인 감정에 의지하여 미워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 미워함의 감정을 없애기 위해 이직을 선택했다. 적지 않은 금전적인 손해가 뒤따랐다. 그 손해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내가 지불한 비용이다. 한 사람을 인생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지불한 비용이 아니라 굳이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떤 누군가를 미워하는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기 위한 비용이다. 다음에 전과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결해보려 한다. 비용을 지불하고 마음을 정리하는 것도 충분히 자본주의적인 합리적인 접근방법이지만, 다음에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부터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후속조치다.

2017년 여름휴가 간단 정리

1. 우리의 여행은 대부분(프랑스 남부, 남해, 제주도, 그리고 짧은 창원행까지 ) 둘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본능적인 기대감, 혹은 신남(excitement)에 의존하여 행선지와 일정이 결정되어 왔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는 파노라마 페스티벌을 본다는 핑계로 뉴욕에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아내의 샌프란시스코 연수 일정이 갑자기 잡혀 버리는 바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서부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베가스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계획하면서 그랜드 캐년 일대를 돌아보려고 생각했지만 더운 여름 날씨때문에 포기했다. 결국 요즘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뜨는” 도시인 포틀랜드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선선할 것으로 예상된 미 북서부 일대를 돌아보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과정에서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아래와 같이 진행됐다.

“뉴욕에서 페스티벌 보고 윌리엄스버그 근처 구경할까?”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랜드 캐년 어때? 아름다운 자연..” “너무 좋을 것 같아!!”

“포틀랜드에서 힙스터들의 삶을 체험해볼까?” “너무 좋을 것 같아!!”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2. 베가스는 아내와 나 모두 두번째 방문이었다. 미국 각지에서 오는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다. 거의 항상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행기표와 호텔, 그리고 밤 늦게까지 즐길 수 있는 안정적인 요소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부담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관계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워낙 부족한 탓에 인생 전체를 통틀어 친구를 많이 두지 않은 편인데, 6년간의 미국생활에서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1년에 한두번씩 미국에 갈 때마다 버선발로 마중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친구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22살에 우리를 처음 만난 K는 어느새 서른살이 되었고, 20대 중반에 이들을 처음 만난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가장 저렴한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며 길거리 위에서 낄낄거렸다. 노는 방식은 늘 똑같다. 아내와 친구들을 서로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이번 여행의 첫번째 목적도 달성되었다.

아내는 지난 첫번째 방문 때 경험하지 못한 쇼를 하나 보고싶어 했다. 우리가 선택한 쇼는 [Le Réve], 프랑스어로 꿈이라는 뜻인데 원형의 무대를 중심으로 물 속과 물 위, 그리고 공중에서 펼쳐지는 서커스였다. 서사구조는 단순했지만 베가스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함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맞물려 들어갈 때 보여줄 수 있는 한 극단을 체험한 것 같다.

베가스는 매우 더웠다. 그리고 너무 미국적이었다.

3. 베가스에서 2박을 하고 포틀랜드로 날아가 3박 4일을 보냈다. 포틀랜드에서 우리는 최대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침은 늦잠을 자느라 대부분 건너 뛰었고, 좋은 커피와 건강한 음식, 맛있는 맥주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포틀랜드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캐넌 비치(Cannon Beach)였다. 지금까지 가 본 그 어떤 해변가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Coava Coffe의 맛도 잊을 수 없는데, 지금까지 한국에서 마셔본 그 어떤 좋은 커피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에 와서 원두 한봉지 정도는 사와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짦은 기간 포틀랜드에 머물며 받은 첫 인상은 주류 백인사회 안에서 다양성이 최대한 보장된 곳이라는 것이다. 이 곳에는 다인종이 만드는 다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흑인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고 스패니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애틀과 엘에이의 영향 탓인지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듯 보이는 아시아인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 문화가 동등하게 대접받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로지 주류 백인사회 안에서 조금 더 극단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는 개방적인 사회적 공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진보적인 백인이 점령하고 지배하는 도시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아마 미국의 다른 대부분 도시들보다 훨씬 살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인에게 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외부인을 쉽게 이웃으로 받아들여줄지는 의문이다. 포틀랜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훨씬 더 극단적인 백인-진보 세력의 집결지인 볼더에서 몇년 간 살면서 느꼈던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볼더와 포틀랜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회적 공기 안에서 느껴지는지 여부라고 본다. 볼더는 상대적으로 훨씬 순박하다. 히피적인 여유로움이 도시를 지배한다. 이에 반해 포틀랜드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 비슷한 공기를 가진 도시가 서울이다.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동산시장 버블과 젠트리피케이션이 포틀랜드에서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나눈 주요 대화주제 중 하나가 ‘미국에 살기’였다. 미국에서의 거주 경험이 있는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다. 물론, 이제 우리는 더이상 어리지 않기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그리 나쁘지 않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 인정할 정도로 등과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 모국을 떠나 미국에 거주하려 한다면 지금까지 누렸던 수많은 ‘디폴트’ 혜택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갖는 불리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에서 살고자 하는 확고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내는 이번 여행에서 그러한 부분을 정리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포틀랜드가 적지 않은 힌트를 준 것 같았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오리지널’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도시가 주는 매력은 분명해보였고 그녀는 이 도시가 보여주는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우리가 미국에서 살고자 한다면 아마도 이와 비슷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포틀랜드 시내에 위치한 포틀랜드 주립 대학은 비주류 경제학의 요람이다) 여유로운 문화를 원하는 나에게는 너무 빠르고 거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미국에서 이정도의 관용을 보여주는 도시도 흔치 않겠다 싶었다.

Heathman Hotel에 묵었는데 작은 방을 잡아서 그런지 지나치게 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4. 포틀랜드에서 차를 몰아 네시간 쯤 걸려 도착한 곳은 이번 여행의 최종 종착지인 시애틀이었다. 나는 몇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곳에 한번 와본 적이 있다. 당시 크리스마스 당일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발을 동동 구르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두시간 쯤 걸려 교외에 있는 한인마트에 가서 끼니를 때웠던 경험이 있는 도시다. 첫 방문인 아내를 위해 수산시장(Pike Place Market) 옆에 호텔을 잡았고, 이틀의 시간만 주어졌기 때문에 수산시장과 스페이스 니들, 팝문화 박물관 등 주요 관광지 위주로 다녔다.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도착한 첫째 날 저녁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부랴부랴 뛰쳐나와 달려가서 본 말리 출신 뮤지션 Amadou & Mariam 의 공연이었다. 저녁식사를 먹으며 볼 수 있었던 일종의 디너쇼였는데, 서버가 우리의 주문을 잊어버려 식사가 한시간이나 늦게 나왔고 그렇게 나온 식사마저도 맛이 별로 없어서 공연 전체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뻔 했으나 이 할아버지 할머니 듀오의 공연이 너무 흥겹고 좋아서 아내와 함께 신나게 춤을 추며 놀 수 있었다. 나름 잔잔한 영혼의 흐름을 유지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아내의 ‘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이번 여행에서도 그녀에게 건강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많이 넘겨 받을 수 있었다.

팝문화 박물관(Museum of Pop Culture)에서는 데이빗 보위가 72~73년 지기 스타더스트로 분하던 당시 전담 사진기사였던 믹 롹(Mick Rock)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보위의 사진들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5. 어른이 된 후에도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깨고 나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재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위기가 찾아오려 하던 즈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요즘 내 에너지의 원천이다. 전에 목도하는 못한 새로운 성질의 에너지를 매일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다. 그 과정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번 여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떨어져 있던 한달동안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지쳐버렸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녀를 통해 새로운 동기를 부여받았다. 그것이 우리가 장기적으로 꿈꾸는 미국행이든, 단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또다른 즐거운 여행이든 상관없다.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게끔 하는 에너지가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Rose garden

장미공원(Rose Garden)

Coava

코아바 커피(Coava Coffee Rosters)

cannon beach

캐넌 해변(Cannon Beach)

bowie1

데이빗 보위 특별전(David Bowie by Mick Rock Exhibition)

아내와 떨어져 보낸 한 달

이번 주 토요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아내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간다. 캘리포니아에서 7월초부터 계속된 원치 않던 솔로 생활을 마무리하는 셈이다. 아내의 장기 출장이 결정된 후 많은 주변인들이 이를 “자유”에 비유하며 축하(?)를 건넸지만, 나는 이 한달이 몹시 무료하고 외로웠다. 고백하자면 아내가 출국한 그 날 딱 하루 약간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아마 넓은 침대 위를 혼자 뒹굴거릴 때 느껴진 상대적인 -그리고 곧 사라질- 광활함과 팬티만 입고 돌아다녀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저급한 자유로움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결코 즐겁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거치며 나의 삶은 참 많이 달라졌는데, 친구, 술, 그 밖의 외부활동에 대한 관심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요즘 아내가 없을 때 누릴 수 있는 이점은 사실상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혼 이후 나의 삶의 대부분은 나와 아내만을 위해 존재해왔다. 이 둘은 각자 독립적인 존재이기도 했지만,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하나의 ‘팀’으로 존재할 때가 더 많았다. 때문에 아내가 없는 금호동 아파트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참 힘들었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아내가 돌아왔을 때 그녀가 떠나기 전과 비슷한, 혹은 더 나은 환경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정도였다. 매주 화요일에 하던 분리수거를 여전히 혼자 하고 빨래도 밀리지 않고 꼬박 꼬박 해두었다. 전에는 아내와 나누어서 하던 일을 혼자 할 뿐 집에서의 루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말동무가 사라져서 훨씬 더 재미가 없었을 뿐이다. 대신 아내가 꼬박 꼬박 챙겨 사오던 빵을 사오지 않게 되어 아침을 거를 때가 많아졌고 저녁식사도 유학시절로 돌아가 간단한 원디쉬 스타일로 때우게 되었다. 피곤한 하루를 끝내고 침대에 서로 몸을 포개고 누워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자동차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는데도 삶의 질이 훨씬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아내가 없는 동안 만났던 친구들은 아내가 있어도 충분히 만날 수 있던 친구들이었다. 아내는 내가 친구를 만나고 늦게 들어오는 것에 인색하지 않다. 내가 친구가 너무 없어서 오히려 걱정을 하는 편이다. 지난 한달동안 친구를 만난 횟수는 약 다섯번, 모두 ‘더이상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절박함’이 작용해 만난 사람들이었다. 친구와 우정을 쌓는 행위에 대해 가치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쩌다 친해지면 그 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지, ‘만나기 위해 만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다섯번의 만남조차 모두 자정 이전에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왔다. 주말을 세번 쯤 보내자 혼자 살던 시절의 공기가 떠올라 더 우울해졌다. 그 당시 느꼈던 자유로움보다 혼자 살 것을 각오하던 무렵 마주해야 했던 외로움이 더 크게 떠올랐다.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준비를 하면서 비로소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먼저 베가스에서 스캇과 크리스, 캐런을 만나 2박 3일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사실 샌프란시스코나 그 주변이 훨씬 좋지만(베가스에서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르는 1인) 한푼이라도 더 싼 항공편이 있다고 하는 베가스에서 만나는 것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미국에 온다고 하니 동부에서, 남부에서 날라와주는 친구들이 고마울 뿐이다. 이후 우리는 포틀랜드로 날아가 자동차를 대여해서 포틀랜드 주변을 좀 구경할 계획이다. 그곳에서 3박 4일을 머문다. 여행계획을 들은 어머니가 “킨포크의 향기를 느끼고 와라”고 했는데 누나도 똑같은 말을 했다. 한국인에게 킨포크란 무엇인가. 내가 아내에게 제시한 여행 테마는 아웃도어 활동과 커피 투어다. 포틀랜드까지 갔으니 폭포도 보고 장미꽃도 보며 조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포틀랜드의 커피문화도 체험하고 싶어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가며 약 열 곳 정도의 커피숍을 구글맵에 찍어두었다. 하루에 세잔씩만 마시면 다 맛볼 수 있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3일은 시애틀에서 보낼 계획인데, 두번의 밤은 각각 공연(Amadou & Miriam)과 야구경기(Angels at Mariners)로 채워질 예정이다. 시애틀은 언제 들려도 좋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커피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람들의 표정에서 카페인과 같은 약간의 흥분감을 느낄 수 있다.

항공권과 호텔 바우처, 공연과 렌트카 영수증 등을 출력해 가지런히 챙겨 보니 이번 여행도 결국 내 뜻대로 준비된 것 같아 아내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무엇을 해도 함께 하는 것이 더 나은 관계가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함께 있다가 가끔 혼자 있는 것과 늘 혼자 있다가 가끔 함께 하는 것에는 심리적으로 큰 간극이 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이 결코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나 자신을 더 높고 넓은 사람으로 만드는 지름길임을 이번 결혼을 통해 배우고 있다. 이제 사흘만 더 보내면 아내를 볼 수 있다.

부동산 지옥, 서울.

경제학자로서 서울의 부동산시장을 분석하는 일과 별개로 이 거대한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생 중 하나의 입장에서 주거 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최근 옥수-금호 지역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평수와 관계 없이 1억원 가까이 올랐다. 근 몇개월만에 벌어진 일이다. 정권 교체로 인한 부동산시장 규제 강화 등 향후 집값 하락이 예상되는 요인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호가가 껑충 뛰었다.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3% 아래를 밑돌 것으로 예상되고 근원물가상승률은 1.5%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데 집값만 뛰고 있다. 저금리 기조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풀린 대규모의 신용이 기업으로 가지 않고 가계, 부동산  돈이 몰린 까닭이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었는데 금리가 낮다 보니 투자해도 수익성이 좋지 않고, 경기가 나쁘다 보니 기업들이 살아날 구멍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의 기대감 하나도 버블을 일으켜 자산을 불려 나가는 부동산 시장으로만 돈이 몰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합법적인 투기장인 셈이다. 요즘은 갭투자와 분양권 전매가 버블의 주요 채널인 것 같다. 갭투자의 경우 매우 높은 레버리지 투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규제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몇천만원의 여윳돈만 있어도 전세를 낀 매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만약 매매가격이 하락할 경우 손실 규모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진입이 가능하다. 분양권 전매 시장의 경우 중도금 집단대출 등 차주의 상환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든 제도의 헛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역시 리스크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진다면 아마도 이 두 투자방식이 트리거로 작동할 것이다.

와이프의 직장은 도곡, 나의 직장은 여의도이기 때문에 적당한 살 곳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지금 살고 있는 금호동이 그나마 가장 나은 타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압구정발 부동산 버블이 옥수동을 덮치고 그 근처인 금호나 약수까지 그 여파가 밀려오고 있다. 압구정 대형평수 아파트들의 재개발 호재로 그곳 집주인들의 미래 기대자산이 상승하면서 그들의 아들딸들이 주로 거주하는 옥수동 아파트 가격도 같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금호동의 경우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서고 있는데 대부분의 도로는 여전히 2차선이고 주차장을 구비한 대규모 그로서리 마켓 하나 없는 재래시장 중심인 이곳이 과연 최근 가격과 같은 시장가치를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곳의 가격은 대부분 근미래에 명목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또다른 상승요인을 낳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차익을 남기고 팔겠다는 투기 심리가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금호동의 경우 공급충격만 있고 수요측면의 기대감은 사실상 쉽게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동네의 가격상승에 힘입어 함께 버블이 발생하기를 맹목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셈이다. 나와 와이프가 맞벌이로 열심히 벌어도 아파트 가격의 상승속도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는 기껏 1년에 몇천만원 모을 수 있지만, 같은 평수의 아파트 가격은 감가상각도 안되고 1억원이 넘게 퍽퍽 치고 나간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지금 우리가 모은 돈으로 중형 평수의 신축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돈의 두배만큼의 돈으로도 서울 시내 역세권의 소형평수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 힘들다. 여러모로 살기 쉽지 않은 도시다. 우리 가족이 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이 도시를 탈출하는 것이다. 서울 근교에서 출퇴근해도 괜찮을 정도로 여유롭게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첫번째 숙제다.

요즘 날씨가 더워서 차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고 있는데 오늘에서야 올림픽대로를 이용하면 출근 시간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보다 약 20분 가량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강변북로를 이용해서 다녔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와 시간상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겪어야 하는 예상치 못한 불쾌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오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보다 훨씬 나은 출근길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현재 사는 곳에 다시 한번 애정을 붙여보도록 노력해야 겠다. 그리고 금호동 아파트 가격이 더 오르기 전 서둘러 매매를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봐야 겠다.

좌우명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주 나와 누나를 앉혀놓고 가정교육을 실시하셨다.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평생의 업이었던 당신에게는 마치 강의와도 같았던 그런 방식의 교육방식이 더 편했을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지구의를 앞에 두고 세계여행을 다녔고, 조금 더 커서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주로 역사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아버지에게 ‘진인사대천명’을 모토로 삼으라는 말을 듣고 난 후 꽤 오랫동안 그 말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어려운 시기가 올 때마다 좌절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용도로 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누구나 변명거리가 하나씩 필요하다. 대체로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쪽으로 정당화를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는 부족함이 없이 노력했으니까, 내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니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 두려웠다.

동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서쪽으로 가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을 들은건 유학을 온 뒤에서였다. 한국인 선배에게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버드에 가야만 경제학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AER에 논문을 게재해야만 경제학을 공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대외적인’ 최소한의 자격 정도가 물리적으로 필요했을 뿐, 그 외에는 모두 내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이 무척 편하다. 좌우명도 바뀌었다. 도전을 즐기는 쪽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쪽으로, 조금 난이도가 있는 도전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은 반드시 있을 것이므로 무언가를 배움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스스로를 더이상 위로할 필요가 없다. 실패에 대한 변명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원래 실패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므로, 실패를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므로, 그 현실 위에서 내적으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가시적인 성취가 있다면 기뻐하면 되고, 그 와중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을 곱씹어 보며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물론 인간관계는 위와 같은 좌우명에 의해 움직이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아직 많이 서투른 부분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허둥지둥거릴 것이다. 아직도 깜빡이를 켜지 않고 불쑥 끼어드는 차를 보면 마음이 상하고 붐비는 버스 안에서 백팩을 매고 있는 남자를 보면 답답해진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은 아내의 언행을 접할 때 마음이 좁아지고, 아직도 가르치려 들고 통제하려 드는 부모님의 언행을 접할 때마다 속이 상한다. 인격수양은 끊임없이 해야하는 것 같다. 이건 생각으로 정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in this way, or like that way

아내가 내일 미국으로 떠난다. 약 한달 간 회사에서 보내주는 교육에 참가하기 위해서인데, 지난 4월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일주일 이상 떨어져본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공짜로 미국으로 보내주는 교육이니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고자 교육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내가 그곳으로 날아가 일주일 정도 휴가를 보낸 뒤 함께 귀국할 예정이다. 고맙게도 스캇과 크리스 등 내 미국 친구들도 모여 잠시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모이는 장소는 클래식하게도 라스 베가스. 몇년 전 닐의 총각파티때 베가스에서 거나하게 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이틀 정도를 친구들과 함께 보낸 후 아내와 나는 포틀랜드로 날아가 킨포크적 삶을 체험해볼 계획이다. 차를 끌고 올라가 시애틀을 잠깐 맛본 뒤 귀국하는 일정.

아내는 여행 에너지가 좋은 사람이고 ‘캘리포니아 걸’로서의 잠재력도 충분한만큼 북가주의 뜨거운 햇살을 행복하게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곳에서의 생활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우리가 지난 1년동안 서로를 강하게 의지하며, 서로만을 바라보며 지내왔기에 한달동안 과연 잘 떨어져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조금 있는 편이다. 한달이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굉장히 짧다. 일상에 치여 허우적거리다보면 금방 지나간다. 아내가 따사로운 햇빛을 만끽하며 버터냄새 가득한 음식들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밀려 있는 논문들을 정리해 다시 투고하는 과정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국내 출장과 학회 참석 일정까지 잡혀 있어 주중 야근에 더해 주말도 빨리 지나가버릴 것 같다. 아내가 없는 기간동안 잡힌 약속은 지금까지 네 개 정도다. 주말 중 하루를 이용해 그동안 궁금했던 골목을 탐방하고 사진을 찍는 정도가 나머지 계획의 전부다. 금호동 동네 골목이나 처남 방을 구할 당시 인상적이었던 성남시 태평동 일대를 조금 걸어보고 싶다.

막상 아내와 떨어져지낼 생각을 하니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였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기 전까지 살아온 삶과 그 이후의 삶은 많이 달라졌다. 불을 켜고 들어와 불을 끄고 나가는 일상에서 함께 불을 켜고 들어와서 불을 끄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삶을 살게 되었다. 내 목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텅빈 공간을 음악이나 텔레비전 소리로 채우던 삶을 지나 서로의 조잘거림에 행복하게 귀를 쫑긋 세우는 생활이 익숙해졌다. 결혼 전에는, 혹은 이 연애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삶을 살고 있다. ‘개인의 공간과 시간’과 같은 개념은 이제 더이상 삶에서 중요한 가치가 아니게 되었다. 그 가치를 희생했다는 말은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그것이 더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내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다 해도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게 되었다. 아내를 위해 해야할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고, 우리 ‘가족’을 위해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면의 깊이가 얕아지는 것도 아니다. 아내에게 배우는 것이 너무 많고 너무 값지다. 나 혼자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혹은 주변을 접하며 배우는 것보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배우는 것이 훨씬 더 깊고 더 가치있다. 한 사람의 삶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그 사람의 영향력 안에서 사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삶의 레슨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면 그 레슨은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게 결혼생활같다.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과 책장

책을 전시용으로 사용하는 순간부터 그 책은 시체로서 존재한다. 만약 당신 지금까지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책을 책장에 꽂아두었다면 그것은 시체가 썩어가는 모습을 음미하는 그릇된 도축장 주인의 심리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외국서적을 관상용으로 구입한다”는 농담을 여러 사람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들을 때마다 웃어 넘겼다. 그 정도의 허영심을 비난할 정도로 마음이 못되진 않았으니까. 다만 코엑스 별마당도서관과 한남동 북파크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을 사진으로 접할 때마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전시가 아니라 박제에 가까운 형태다. 책들을 이렇게 손에 닿지 않는 멀고 높은 곳에 박제한 이들이 타게팅했을 법한 고객층의 마음, 혹은 그 소비욕구의 색깔을 헤아릴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책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하는, 기표와 기의 간 관계가 온전히 성립하지 못하는 사물에 가깝다. 책 안에 들어 있는 활자들이 여러 사람에 의해 ‘읽혀짐’으로써 비로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책은 아름다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못생긴 책은 못생긴 내용을 품고 있는 책이다. 책의 표지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것은 책에 대한 탐미가 아니라 책의 표지라는 디자인의 작은 분야에 대한 탐미다. 책의 내용을제대로  접하지 못하게 만든 공간이 “도서관”과 같은 이름을 차용할 때 느껴지는 절망스러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소비의 본질 중 한 부분을 상징하는 현상이라면 조금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할 듯 하다.

nine to six and monthly paid life

일주일 중 5일을 희생하여 번 돈으로 카드값을 내고 월세를 내고 대출 이자도 갚고 약간의 저축도 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고 있다. 시간외근무를 자주 해야 몇십만원이라도 더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빠듯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빡빡한 생활 리듬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대와 나라를 잘못 만나 훨씬 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이런 불만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사회적으로 안착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윗세대에게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면, 현재 자리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그런 개인적인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규직’ 월급쟁이들이 일확천금과 조기은퇴를 꿈꾼다. 아마도 오너가 있는 큰 회사에서 부속품처럼 사용되는 현재의 위치가 성취감을 제한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것이다. “취집”이라는 말도 어쩌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속품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그렇게 완성된 시스템이 다시 개개인에게 혜택을 주는 순환구조를 이해한다면 부속품으로서의 가치가 결코 작다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루에 여덟시간을 오롯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다달이 예상되는 돈이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삶은 실패에 대한 사회적 보험장치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안전한 보호막일 것이다. 한국사회에 창의성이 부족한 것은 한국인 개개인이 창의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개인의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윗세대의 책임이고 숙제로 남겨져 있다. 창의성을 희생하는 대신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트레이드오프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 등가교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세대가 존재한다. 일부 계층도 아니고 한 세대가 통째로 그런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형 힙스터의 지리적 고민

어제 한 대학교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뻔하고 재미없는 금융경제학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어버린 “흙수저” 2,30대 청년층의 서울 내집 마련의 꿈, 정책적으로 풀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두꺼운 가격 장벽이 드리워진 이 투기의 도시에 문화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는 일련의 청년층이 새로운 색깔의 주거 공간을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주거집단이 해방촌이나 문래동같은, 기존의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며, 경리단길이나 익선동과 같은 ‘골목길’이 한국형 힙스터들의 주요 소비처로 탈바꿈한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후 최근 몇년 간 ‘젠트리피케이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독립 자본가, 혹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가진 역량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을 나름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들의 서울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근본적으로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규모 자본에 밀려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로 설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잃는 것은 다양한 독립 문화 자본 정도가 될 것이고, 단기적인 승자는 창의적 소규모 문화 자본을 보다 정형화된 기업 자본 기반의 대규모 산업형 상품으로 변질시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며, 특정 문화 자본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 갖는 향취, 즉 도시환경이 주는 무형의 공공재를 더 강한 자본가 세력이 부당하게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힙스터 소비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소규모 문화 자본 형성에 참여하기 보다는 이 소규모 자본가들이 영업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과 비슷한 – CJ 따위의 – 소비재를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소비 성향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자본의 형성을 촉구한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니 해방촌으로 옮겨가고, 북촌에 이어 서촌까지 사람들로 붐비니 근처 익선동으로 옮겨간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인스타그램에 ‘힙’한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소규모 문화 자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소득 전문가부터 비정규직까지 아마도 다양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 해방촌이나 익선동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그곳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 관광지와 주거지를 구분하는 심리를 은연중에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들 역시 전통적인 서울의 ‘아파트 판타지아’에서 많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비록 쪽방촌 바로 옆에 생긴 예쁜 커피숍들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하더라도 이들의 꿈은 강남의 아파트로 향해있다. 이들에게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잠원동은 주거공간으로서 좋은 선택이지만, 비슷한 거리에 있는 보광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경제적 유전자이며, 솔직하고 이기적인 경제적 판단에 기인한다. 나는 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출산과 육아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신의 소비 패턴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 세대가 윗세대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점은 세대적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회전체적인 지출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욕망의 대체재를 찾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 아직까지 나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주거공간의 가능성 중 기꺼이 생산자와 밀착된 환경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못할 때 공간적 특수성은 담보될 수 있을까? 문래동에 새로운 문화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꾸리고 생산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정체 상태에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소비력을 갖춘 젊은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힙스터 문화 시장’에 한해, 소비자가 생산자의 근거지를 끊임없이 구축(crow out)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을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 독립적인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일부 힙스터에 국한되어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면, 즉 지방에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서울 안 임대료가 저렴한 골목길을 끊임없이 떠돌려 방황하는 예술가들, 혹은 독립 자본가들의 모습을 계속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step by step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이 곳에 기록해둔다. 이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아마도 논문 마감일이 거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갑자기 영어로 쓰인 소설책이 재미있어 지고 청소가 하고 싶어지며 인터넷 쇼핑이 즐거운, 그런 시기말이다.

지난 2월 전직장에서 인사상 불이익 비슷한 것을 받고 분기탱천한 마음에 그동안 컴퓨터에 쟁여 두었던 미완성 논문 네 편을 제출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각각 다른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 중 한 편은 수정 후 재투고 과정을 거쳐 얼마전 게재되었고, 어제 다른 한 편이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두 편은 전직장에서 쓴 소논문 두 개를 각색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수준이 깊지 않았다. 첫번째 논문도 KCI 등재 학술지가 아닌 곳에 투고했기에 아마 게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받은 원고료로 아내의 드레스를 사주었으니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다른 논문도 한국에 근거를 둔 국제학술지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건 지난해말 나름 열심히 썼던 정책보고서를 각색한 논문이었다. 이 것 역시 나름 참신했던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방법론적으로나 학문적인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직장에 썼던 수많은 보고서 중 나름 논문 형식으로 각색이 가능했던 것은 위의 세편이었는데, 셋 다 돌이켜보면 정책논문으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학자들이 좋아할만한 색깔은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중 한 편은 심사결과를 참고하여 수정한 다음 다른 등재학술지에 내볼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여름에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다음 코멘트를 받아서 수정 후 국제학술지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다음달 초까지 수정본을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 세 편중 한 편이다. 이건 지난해말부터 질질 끌어온 것이라 더이상 미룰 명분도 변명거리도 없다. 지난해 말 제출해놓고 신혼여행을 가버리는 바람에 결과를 제 시간에 듣지 못했고, 그 때부터 수정 후 재투고 기한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던 그 2월까지 미루어졌다. 여기서 한번 더 연기가 되고, 이후 이직이다 뭐다 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는데 해당 학술지 측에서 다음호 발간을 위한 원고 갯수가 부족했는지 다시 연락이 오는 바람에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 다른 한편은 국내 기반을 둔 다른 등재학술지에 2월 중 제출한 상태인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도 연락이 꽤 오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탈락할 것 같은데, 내 박사학위 논문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전직장에서 쓴 두 편의 논문들이 탈락했을 때에도 심리적인 위축이 크게 오지는 않았다. 그 보고서들의 수준을 아니까, 그리고 논문화과정에서 내가 투입한 시간의 한계를 잘 아니까 기대도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위와 같이 제출한 논문들이 한꺼번에 다 무사히 통과하여 게재가 확정되면 순식간에 “포인트”를 채우게 되어 기쁠 수는 있겠지만, “포인트를 채워 조교수직을 얻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는 순간 내 삶의 고귀함도 그정도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직업의 이름에 있다면 내 삶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게재 여부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내 학문적 수준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첫째고, 이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최대한 단단하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두번째이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취와 외부에서의 평가를 상식적으로 공평한 수준까지 획득하는 것이 세번째이다. 지금까지 논문 제출 과정을 통해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등재지에 게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려면 존나 노력해야 함!

전직장에서 현직장으로 이직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대체 왜 이 연봉을 받고 이직을 했는가?”이다. 가장 많이 화를 냈던 사람은 아내였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이 “대접”을 받으며 이직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하는 것이 가장 열받았다고 한다. 이직 당시 나는 학자로서의, 연구자로서의 내 수준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전직장에서 주었던 높은 연봉은 학자인 내게 주는 돈이 아닌,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받으며 학문을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금융업에 종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직장에서 주는 돈은 유관연구기관보다 적은 수준이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 아마도 이정도 수준이 학자로서 내가 뒤늦게 출발하려고 할 때 좋은 기준점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전직장에서 3년을 허비했다면(허비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 당시 쓴 보고서들을 논문으로 재편집한 것이긴 하다), 이제 더이상 허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지금의 연봉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보다 DSGE를 잘 하는 한국인 학자가 한국에만도 수십명이 된다. 한국의 학교에 열리는 DSGE를 위한 조교수직 포지션은 몇년에 하나 될까말까한다. 내 현재 수준에서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초부터 천천히, 아주 낮은 단계부터 단단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6월 초에 걸려 있는 논문 하나 탈고하고, 6월 중순까지 학회에 논문 하나 제출하고, 7월이 다 가기 전에 탈락 논문들에 새로운 호흡도 좀 불어 넣고, 그 사이에 회사를 위해 일도 좀 하고, 그렇게 내 수준에서, 매우 낮은 수준에서 하나 하나 해 나가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