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필레: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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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은 명민한 영화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 감독 조던 필레는 특유의 B급 감성과 독립영화의 자유로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흑백 갈등과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를 미시적인 시선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냈다. 미국사회를 떠받드는 핵심은 ‘가족’과 ‘이웃’이다. 3억이 머는 인구, 다양한 인종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잠재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은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조되는 ‘커뮤니티’의 중요성에 기인한다. 개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지만 가족의 위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학교, 군대, 이웃 등 그룹화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개념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주입한다. 그 결과 미국 시민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 덕에 국가적 위기상활을 극복해낼 수 있었다. 이 견고한 국가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은 문제는 시민 개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한다. 1%와 99%가 서로를 경멸하고, 여성의 어려움을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자의 기본권을 다수자가 지지하지 못할 때 사회는 갈라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요인은 아마도 모두가 알고 있듯 백인과 흑인 간 갈등일 것이다. <겟 아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갈등의 미묘한 시작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또한, 인디 공포-코메디 영화 장르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장르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관객은 충분한 몰입도와 함께 영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며,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식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같은 유색인종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장치들에서 현실적인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오거나 서스펜스적 장치가 들어가 있어서 공포 영화로 인정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 지금 길거리에 실재하는  공포의 조각을 영화적 언어로 잘 옮겨 놓았으며, 그 결과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관 밖에서도 그 공포가 지속된다는 생각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이 영화의 숨은 장치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면, 단순히 이 영화를 ‘재미있는 공포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불편함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아마도 그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와 예의를 숙지하지 못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들에게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인종이 서울에서 공존해야 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내어줄 의사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혹은,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썩 괜찮은 도시에 사는 선진국 출신 백인들의 문화에 동참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어떠한지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이다. 잠재성장률이 3% 이하로 내려가고 물가상승률이 2%가 채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은 침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돈을 벌기에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이 되는 셈이고,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타문화 배경의 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국처럼 극도로 예민한 신경질적인 국가에서 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겟 아웃>은 굉장히 심각한 경고의 메세지로 읽혀야 한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천구와 안산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스러운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드니 빌뇌브: 컨택트(Ar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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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홍보팀의 멍청한 제목 바꾸기 행위로 인해 영화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전체적인 의미가 완전히 왜곡될 위험에 처한 <컨택트>는 굉장히 잘 가공된 깔끔한 SF 영화다. 누군가는 지구 밖 생명체와의 ‘접선’에 초점을 맞추어 동명(..)의 영화 <콘택트>를 떠올렸을 것이고, 다른 어떤 이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과학 이론에 흥미를 느껴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를 비교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연식이 좀 된 관객이라면 <미지와의 조우> 등을 떠올리며 이 영화가 반드시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계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인류를 구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SF 장르의 일반적인 소재를 제외하면 감독과 배우의 역량에 의해 오롯이 자기 색깔을 지키며 독보적인 위치를 획득하고 있다.

사실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사고체계가 지배당한다”는 한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윤회적 구성을 가지는 외계인의 언어를 인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외계인과 한 언어학자의 사투(?)를 자연스럽고 적절한 서사구조라고 받아들이긴 힘들다. 먼저 작품의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위의 가설이 옳다고 해도 천재적인 한 언어학자에 의해 해독된 새로운 차원의 언어가 강대국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의해 전세계로 뻗어 나가고 그 결과 인류가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3천년이 지난 뒤 그 언어를 창시한 외계 생명체를 돕게 된다, 는 ‘미래’를 관객들도 먼저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간극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원형으로 보여지는 외계인의 문자가 해독되는 과정에서 관객이 참여할 틈을 전혀 주지 않고, 그 구조적 ‘비밀’은 등장인물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자체로 간직된 채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들과 동떨어진 차원에 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인류의 미래가 수정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약간 전체주의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정을 비롯해 영화 곳곳에서 논리적 비약,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이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첫째, 드니 빌뇌브 감독의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기대를 접고 그러려니 하며 보게 되는 것이고, 둘째, 빌뇌브 감독이 이러한 오류들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부분에서 극복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비극적 미래를 뻔히 보면서도 그 미래를 향해 담담히 걸어 나가야 하는 언어학자를 연기한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가 영화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빌뇌브 감독은 그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을린 사랑> 이후 <시카리오>와 <컨택트>를 거치며 온전히 자기만의 리듬,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분위기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누가 봐도 빌뇌브의 영화다, 라는 인장을 처음부터 찍고 들어가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보기 좋다. 아마도 최근 10년 간 가장 자기성찰적이며 내성적인 SF 영화일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여전히 확고한 ‘입장’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그가 SF 쪽으로 빠져서 <블레이드 러너> 속편을 만들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이 잘 못하는 것을 최소화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천재가 아닌 범인의 재능을 가진 작가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에이미 아담스는 빌뇌브의 전작들에서 그저 소모되다시피 한 여배우들의 위치를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그녀는 이 영화가 빌뇌브의 영화가 아닌 아담스의 영화로 기억되게 만드는데, 감정의 아주 미묘한 부분까지 표정의 작은 일그러짐만으로 표현해내는 연기가 매우 탁월했다.

<컨택트>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contact)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들이 지구에 내려와(arrival) 주고간 선물(“gift”)이 과거를 미래로 연결시키고 미래를 현재로 내려오게 하여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내딛게(arrival) 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베리 젠킨스: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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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완벽한 영화다. 영화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영화’ 자체가 되어 그 단어를 정의내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누가 “영화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문라이트>가 영화입니다”라고 답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이 허언같이 느껴진다면 질문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도 좋을 것이다. “2010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이 10년을 꿰뚫는 단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할겁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더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 영화를 맨 앞에 세우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영화는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리더가 바뀌는 나라, 동성애 커플에 대한 법적 지위가 인정되는 나라에서 이민자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나라로 넘어가는 나라, 수백만 달러를 하루 아침에 벌어들이는 헤지펀드 매니저와 십대 시절부터 마약과 폭력에 노출되고 쿠폰 한 장으로 사나흘을 버텨야 하는 흑인이 30분 거리에 사는 나라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다. <문라이트>는 뉴스가 밝은 조명으로 비추어도 시원찮을 현실을 파란 달빛으로 비추는 영화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한 남자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인데 영롱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게 슬픈 그 남자의 눈동자 속에 달빛을 머금은 파도가 일렁인다. 미칠 듯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로 빈틈이 없으며,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강직하다. 벨기에의 작은 공업도시를 다르덴 형제가 지키고 있다면 미국 마이애미의 빈민가엔 베리 젠킨스가 발길을 거두지 않고 있을 것이다. 희곡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눈부시게 만드는 것은 촬영, 연기(와 디렉션), 음악, 편집과 같은 순수한 영화적인 요소들이다. 까에따노 벨로주의 음악이 나오는 와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에서 회상 장면을 거쳐 식당으로 넘어가는 씬을 비롯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하는 마지막 씬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영화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흑인 사회 내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폭력적 시선, 교육 시스템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같은 묵직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무거움을 온 몸으로 표현해 낸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의 공일 것이다.리틀, 샤이런, 블랙을 연기한 미천한 경력의 세 배우는 나오미 해리스나 자넬 모네처럼 카메라에 많이 노출된 배우들의 틀에 잡힌 연기를 압도하다 못해 깔아뭉개 버린다. 영화가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현실을 비추는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나 <엘리펀트>를 떠올렸을 것이다. 다른 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해피투게더>가 연상되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탠져린>이나 <발라스트>를 되짚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 영화는 괴물처럼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켜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재창조해냈다. 아마도 영화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를 제시한 작품일 것이고, 영화가 앞으로도 사랑받아야 한다면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한 작품일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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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성장 중이다. 두번째 장편 영화라고는 하지만 <언어의 정원>이 45분 남짓한 중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너의 이름은>이 사실상 본격적인 장편 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그가 갈 길이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두시간 분량의 영화를 꽉 채울 정도의 짜임새 있는 서사구조는 발견하기 힘들고, 여전히 <초속 5cm>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학생 남자아이 감수성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도 답답하다. 동시대 감독으로 자주 비교되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특유의 서사구조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을 보면 신카이 마코토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그 발전 속도가 아직 매우 더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성장 중”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과거 작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공간과 시간에 의한 ‘단절’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의 미묘한 어긋남에 집중해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연결’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비록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말이다. 거기에 더해 감독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자연재해 문제를 로맨스와 함께 풀어내는 기민함도 보여준다. ‘노력’과 ‘의지’에 의해 혜성과 같은 천재지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을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고 빨간 실을 부여잡은 채 결국 만남을 이루어낸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치밀한 장면 구성과 혀를 내두르게 하는 표현력은 기대 이상이다. 두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를 꼽자면 그가 창조한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뮤직비디오식 구성은 여전히 감독이 속해 있는 세계를 되새김질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이 역시 일본산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이니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그 음악들이 좋은 것은 덤이다. 감독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다음 작품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니,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 역시 그리 무겁지 않았다.

데이미언 셔젤: 라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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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를 굉장히 나쁘게 봤다. 영화팬과 평론가들을 혹하게 만들만한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는 흥미로운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를 ‘좋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책임하게 마무리된 서사와 그로 인해 더 모호해진 영화의 윤리성때문이었다. 감독은 <라라랜드>에서 자신이 잘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자신없어 하는 것은 과감히 생략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서사구조는 아무런 논란이 있을 수 없는 매우 통속적이고 단순한 뼈대만을 취한다. 무산계급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힘겨운 현실은 한발 늦게 찾아오고, 꿈을 포기한 채 살아가다 결국 각자의 꿈을 향해 제 갈 길을 간다는 줄거리는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안에 불편한 윤리적 시선이 들어갈 여지도 거의 없다. 영화의 중반부에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스틸컷처럼 짧게 보여주는 순간 이미 씁쓸한 결말은 예상되어졌다.

중요한 것은 감독의 시선이 두 주인공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일종의 메타 필름으로 읽었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통속적인 삶을 바탕으로 뮤지컬이라는 전통적인 장르에 기대어 영화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기발한 오프닝씬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헐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각종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인용한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를 그대로 모방한 플라잉 댄스 씬은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차라리 뮤지컬 영화라고 하기 보다는 음악 영화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남자 주인공 세바스챤의 뮤지션으로서의 삶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쇠락해가는 전통적인 재즈를 지키고 싶어하고 그 고전적인 재즈를 연주할 펍을 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연인을 위해 크로스오버 재즈 밴드에 들어가 돈을 번다. 여자 주인공 미아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연인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거듭되는 실패에 배우로서의 정체성마져 흔들린다. 결국 남자의 도움으로 여자는 캐스팅 기회를 얻어 배우로서 성공하고, 남자는 자신의 곁을 떠난 여자를 기다리며 약속한대로 펍을 열어 작은 성공을 이룬다. 그가 펍에서 연주하는 곡은 당연히 전통적인 프리 재즈 기반의 음악이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감독이 재즈를 빗대어 영화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서는 영화의 마지막씬, 여자, 혹은 남자의 상상 장면이다. 5년만에 다시 만난 남자는 여자와 함께 나누었던 음악을 연주하며 ‘만약 그 때 우리가 조금 더 행복했다면’이라는 상상을 시작한다. 영화의 주요 장면들은 조금씩 뒤틀리고 영화는 이 커플의 완전히 다른 미래를 보여준다. 이들이 매 순간 조금 더 나은 결정을 내렸다면,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고 이 남자의 곁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마치 <파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두번째 이야기”처럼 <라라랜드>는 영화의 마지막에 서사구조의 완전히 다른 면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파크웨이에서 춤을 추는 영화의 오프닝씬부터 이미 이 영화는 ‘판타지’라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제 이 커플의 ‘조금 더 행복한 인생’을 보여주었으니 영화 내내 보여준 ‘조금 더 현실적인’ 서사를 굳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의 삶 자체가 거대한 맥거핀처럼 느껴졌다. 감독이 정말 진지하게 이 둘의 사랑 이야기에 집중했다면 이렇게 허술하고 진부한 서사구조를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아의 룸메이트 세 명은 곡 하나를 함께 부른 이후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채 거의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감독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영화는 이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저 단순한 뮤지컬 로맨스 영화로 읽어도 충분히 흥미롭다. 배우들의 연기를 훌륭하고 음악은 아름답다. 통속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고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니, 그것이 반드시 재미가 없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완전히 같은 서사구조를 가진 우디 앨런의 <카페 소사이어티>가 보여준 처참한 실패는 <라라랜드>가 얼마나 교묘하게 예상된 함정들을 잘 피해왔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나의 연애가 시작되고 그 연애가 현실과 부딪히고, 그래서 연애가 끝난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 있었고, 슬픔은 조금 더 오래 남아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흔하고 또 가장 중요한 이 감정의 심연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독의 재능에 대해 의심할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Robert Budreau: Born to be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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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가 1960년대 초반 약물중독과 폭행사고 등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생명에 심대한 위협을 느끼던 시절을 다룬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전기영화라기 보다는 감독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진 뮤지션의 상상도에 가깝다. <레이>보다는 <아임 낫 데어>에 가까운 뮤지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약물에 찌들고 폭행사고로 인해 틀니를 끼우고 트럼펫을 불어야 했던 것, 특정 약물의 도움을 받아 마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등은 사실로 알려져 있다. 감독은 여기에 살을 붙여 쳇 베이커가 어떻게 바닥을 찍고 다시 본 궤도로 올라가려고 하는지,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자 노력한다. 가상의 영화촬영 장면이 나오고, 가상의 여인이 등장하고,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가상의 대화가 등장한다. 데이비스는 베이커를 억누르고 여인은 그를 보살피며 다시 끌어올린다. 데이비스를 이기기 위해 다시 마약을 손에 댈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깨끗한 정신으로 트럼펫을 불 것인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면 감독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베이커의 모습만이 남는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채 실존인물을 그려나가기 위해서는 서사구조의 개연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분명히 실패하고 있다. 서사는 툭툭 잘려 나가며 사건은 우연에 의해 연결된다. 관객이 힘겹게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은 베이커의 여리고 아픈 내면 정도다. 이조차 실제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혹은 다를 것이라는 암묵적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영화는 한 인간이 바닥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감성에 기대어 전시한다. 그 모습이 애틋하고 안되어 보였다면, 그리고 에단 호크가 절정의 연기를 통해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면, 남은 것은 쳇 베이커가 남긴 아름다운 노래들이다. 그의 음악은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소프트하지만, 그만큼 감정적으로 사람을 뒤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직접 노래를 부르며 한땀 한땀 쌓아 올리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가 에단 호크의 눈동자와 교차되는 그 지점에서 묘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3/5

박찬욱: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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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은 항상 별 세 개 반짜리 영화를 만든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해내지만, 그의 영화에는 전에 없던 새로움도 없고 깊은 성찰도 없다. 시네필로서 가진 풍부한 레퍼런스를 영화 여기저기에 명석하게 배치하고, B급, 혹은 마이너 문화에 대한 애정을 뒤틀린 유머와 함께 성공적으로 영화 속에 녹여낸다. 그의 모든 영화가 그러했다. <아가씨>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감독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지난 몇 년동안 한국에서 꾸준히 LGBT 영화들이 제작되지 않았다면 <아가씨>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작이 없었다면 서사구조는 출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양한 층위의 문화영역에서 상상되어지고 각색되어지며 발전해온 식민지 시대 조선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없었다면 배경부터 미장센까지 기댈 언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박찬욱의 영화이다. 누가 봐도 그렇다. 박찬욱은 그렇게 다른 레퍼런스에 기대어 자신의 인장을 박아넣는 데에 아주 능숙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만화처럼 재미있다. 누가 봐도 그의 필체가 느껴지고, 누가 봐도 그가 짠 스토리같다. 부족한 창의성을 꼼꼼한 디테일로 매워내는 재주도 대단하지만 육중한 메세지 하나 없이 본인의 색깔을 관객에게 완전히 각인시키는 능력 또한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쓸데 없이 여배우들 벗기는 악취미도 여전하고.

3/5

Sean Baker: Tange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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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gerine>은 LA를 배경으로 하루 반나절동안 펼쳐지는 작은 소동극이다. LA라고 하면 흔히 비버리힐스나 산타모니카같은 부촌, 혹은 축복받은 날씨와 함께 하는 여유로운 해변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영화는 화려함을 디폴트 이미지로 가지는 이 세계적인 대도시의 가장 어두운 곳을 비춘다. 주인공은 LA의 한 허름한 구역에서 매춘을 하는 트렌스젠더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급, 거기서도 한번 더 차별받는 성정체성을 가진 이 주인공은 포주이자 남자친구인 이를 대신해 한 달의 형을 막 살고 나왔다. 출소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찾지만, 또다른 트렌스젠더 매춘부인 친구로부터 그가 바람을 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친구를 찾아 나선다. 그 와중에 저녁에 예정된 작은 공연도 성공적으로 치뤄야 한다. 물론 그 공연은 가수의 꿈을 꾸는 주인공이 허름한 레스토랑에 돈을 ‘내고’ 갖는 공연이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인 택시기사는 트렌스젠더만 찾아서 매춘을 하는 취미를 가진 동유럽 이민자 출신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화려함의 이면에는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초라한 모습이 있다. 소수 계층으로의 부의 집중은 광범위한 다수의 계층의 희생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다. LA는 ‘골드러쉬’로 상징되는 미국 특유의 공격적인 자본주의의 최종 완성판 격인 도시이고, 겉으로 보이는 이 도시의 화려함은 분명 누군가의 머리와 어깨를 짓이기며 세운 무거운 쇠기둥일 것이다. 이 영화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코메디로 다룬다. 영화는 100% 아이폰으로 촬영되었지만, 영화의 서사구조는 아주 전통적인 셰익스피어식 희극이다. 주인공 신디는 단돈 몇 달러를 위해 길에서 마주친 남자의 무례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함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친한 친구들만이 관객인 작은 공연에서 영혼을 담아 노래 부르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실제 트렌스젠더이자 LA에서 매춘으로 삶을 이어나간 경험이 있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한 이 영화의 리얼리티가 세련된 전통적 문법으로 스크린에 새겨질 때, 관객은 영화의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설득된다. 정신없는 소동이 LA의 어두컴컴한 밤 속으로 섞여 들어가 잠잠해질 때 쯤, 나는 어느새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앞이 보이지 않는 그 골목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4/5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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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버지가 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이 영화를 추천해 주었더니, 영화 하나를 본다고 해서 아버지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무한한 기쁨이 있고 그 과정을 직접 겪어야만 인간으로서 한단계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영화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책과 비슷하다. 나쁘게 말하면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 듣는 것 정도다. 그래서 영화가 주는 가르침의 한계도 명확하다. 다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나는 그 친구가 지금 막 세상으로 나온 자신의 아이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육아의 기초적인 단계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아이와의 관계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룩하는 ‘성장’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성취라는 것을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일본의 다르덴 형제가 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그러한 심증은 더 굳어졌다. 히로카즈는 윤리에 대해 조금씩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관객에게 특정 수준의 윤리적 판단을 요구한다. “특정 수준”이라고 표현한 것은 감독이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아들이 뒤바뀐 상황을 던져놓고 “당신이라면 친자와 함께 살 것인가”와 같은 예상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대신 “당신은 친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고 묻는다. 두 질문은 모두 윤리적이지만 후자가 조금 더 사색적이고 개인적이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오고 간다. 아내와 아들을 잃게 된 처지에 놓인 망나니 아저씨를 답답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관객에게 “가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묻지 않고 “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를 요구한다. 히로카즈에게 현실의 많은 문제들은 단순한 상식 수준에서 이해 가능하다고 받아들여진다. 그의 관심사는 현상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이 지점에서 히로카즈는 다르덴 형제와 결을 조금 달리 한다. 사회 속의 개인이 아닌, 개인이 또다른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뻔해보이는 결말은 감독의 이런 고민들 덕분에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누구나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고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아버지, 혹은 멋진 어른이 되지 못한다. 히로카즈의 최근 영화들은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한 사려깊은 송가다.

4/5

나홍진: 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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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을 본 후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홍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얄팍한 주제의식을 그나마 현란한 테크닉과 개연성 있는 탄탄한 시나리오로 잘 가리며 버텨 왔던 그였지만, <곡성>에서는 오리지널리티라고는 전혀 없이 여기저기서 빌려 쓴 클리셰들로 떡칠이 되어 개연성을 잃고 마구 흔들리는 서사구조를 편집이라는 교묘한 속임수로 간신히 감춘 모양새다. 속임수에도 클래스가 있다. 모든 속임수가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독자는 주인공의 시선과 인식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건을 이해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을 보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 트릭은 인식론적 주제의식을 부각시킬 때 주로 사용된다. 이처럼 ‘왜곡된 시선’은 잘만 사용하면 특정 장르에서 훌륭한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곡성>에서 사용한 속임수는 아주 단순하고 저열한 방식이다. 개연성 없는 두 사건을 교차편집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거나 특정 인물에 대한 거짓된 단서를 복수의 등장인물로 하여금 발화하게 하여 영화 내에서 ‘소문’을 만들어내는 등의 방식은 사실 속임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유치한 방법들이다.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 놓고 포스터에는 자랑스럽게 “미끼를 물었다”라고 써 놓았다. 뭘 하자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동서양 샤머니즘의 결합, 믿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등등 무언가 있어 보이려는 시도는 중학생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에게 오리지널리티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홍진은 원래 이정도 수준의 감독이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필모그래피는 점점 퇴화하고 있다. 다음 작품 쯤에서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