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 요시이에: 신(神)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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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헬조선”이라는 말이 공중파 뉴스에 버젓이 등장하는 세상, 서로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도 절대 하지 않는 타자들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공공장소를 품은 세상, 을을 옥죄는 갑과 그 갑을 다시 옥죄는 수퍼갑이 겹겹이 세상을 나누어 가지는 초열지옥과도 같은 세상,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며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이 더이상 흉이 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얼마전 친구 한 명이 지하철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술을 마셨는지, 혹은 정신이 원래 이상한지 모를 한 중년의 남자가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고, 그 칸에 타고 있는 누구도 그 사람을 저지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직접 나서 그 중년의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와보니, 그 행패를 부리던 중년 남자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있던 여성 한 명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더란다. 당연히 그 누구에게서도 고맙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축약해 놓은 것 같은 이야기였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부모님께, 책에서 배웠던 ‘선(善)’의 개념이 흔들리고 있는 요즘이다. ‘착함’이 ‘어리석음’과 동의어로 사용된 지 꽤 된 것 같다.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말도 어느 정도 정설로 자리잡았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선행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남을 밟고 올라서도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독하고, 자신이 얻을 것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이고, 이러한 가치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미덕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맞는 사회인가? 멍청할 정도로 착하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누어 주고,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아무런 보상 없이 용서하고, 자신만큼 타인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잘못된 사람인가, 옳지 않은 사람인가? 혹은, 이런 사람이 ‘잘’ 살 수 없는 사회가 옳은 사회인가?

고다 요시이에의 <신 이야기>는 이토록 혼란스러운 요즘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조금 많이 이상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신이 있다. 가만 보아하니 가끔씩 지구로 놀러오는 것 같다. 지구 뿐 아니라 전 우주를 관장하는 신인 것 같은데 뭔가 허술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돈가스 덮밥을 먹기 위해 노가다판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장기를 좋아한다(하지만 잘 두지 못한다). 신을 알아보는 착한 여성 루나의 도움이 없다면 아마 길바닥 어디선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신은 착하다. 자신의 음식을 뺏어 먹는 사람에게 남은 음식까지 다 내어주고 따뜻하라고 꼭 껴안아준다.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고 기다리며, 절망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찾아와준 루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관계맺는 것”과 “용서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인간과 인간은 이어져 있으며, 그 관계 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 혹여나 침범당한다면, 끊임없이 용서해주는 것, 이것이 지구를 착하게 만든다고 믿는 신이다. 신은 지구에서 많은 것을 얻고 간다.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천사들에게 증언한다. 하지만 그건 그가 그만큼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련하고 멍청해 보이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방식은, 오늘 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내일 잘릴지도 모르는데, 눈 앞에 있는 지하철의 자리가 몇 초 뒤에는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여유롭게 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다 요시이에는 노숙자라는, 이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계층으로 현현한 신의 모습을 부담스럽지 않게 보여준다. 오늘 먹을 것이 없어도, 오늘 밤 잠들 곳이 없어도, 충분히 웃을 수 있고, 베풀 수 있으며,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많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지만 강력한 표현의 힘으로 증명한다. 나는 이 작가의 의견에 반대할 그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전몽각: 윤미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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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의 첫번째 문단을 읽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는 중간중간 코가 시큰거리는 것을 참아야 했으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기 전에는 이미 울고 있었다. 각 사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책의 맨 뒷편으로 숨겨 버리고 아무말 없이 그저 가족들의 모습만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참 벅차게 다가왔다. 책을 덮은 다음에는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윤미를, 당신의 가족을 이토록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서 감사하고, 그것을 기록해주어서 감사하고, 또 소수만이 접할 수 있었던 기적적인 결과물을 복간해준 것도 감사하다.

사진이란게 참 그렇다. 예술의 한 장르이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고자 하는 욕망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보도 혹은 기록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쪽에서 오는 본질적인 가치들도 무시할 수 없다.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로서 기능한다. 하지만 나는 사진이 갖는 가장 큰 미덕, 혹은 아름다움은 ‘기억’과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사진가는 프레임 안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셔터를 누름으로써 그 순간의 시선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한다. 누구나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댈 수 있고, 누구나 셔터를 누를 수 있다. 요즘처럼 거의 대부분이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에서는 그들 각자가 사진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바라볼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진은 다른 사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설 수 있다. <윤미네 집>은 참 아름답다. 단순히 저자가 사진을 잘 찍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아내를,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필사적으로 기억하려고 하는 욕망이 사진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저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잘 팔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피사체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사진 속에서 가족들을 기억함으로써, 언젠가 영원히 헤어지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가족들을 잊어버리지, 혹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그 사진들을 봄으로써 현실이 된다. 우리가 사진 속에서 윤미의 성장하는 모습에 웃고 울면서, 작가의 아내가 늙어가는 모습에 따스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사진들에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작가와 그의 가족을 기억한다. 나는 이런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족의 역사를 공유하게 되어 영광스럽다. 기적에 동참하게 되어 감사하다. 책을 읽으면서 울어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마누엘레 피오르: 초속 5000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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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기본적으로 노마디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이 책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작가의 짧지만 확실한 설명처럼, 이 책은 노마디즘이 사랑과 우정을 어떻게 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한 남자가 있고, 그 남자가 사랑한 여자가 있으며,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불알친구가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일한 화폐를 사용하는 유럽이라는 대륙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지며, 청소년기의 풋풋한 감정에서 머리가 벗겨지고 뱃살이 구겨지는 나른한 중년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람때문에 가슴이 설레이며, 아주 유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중요해지는, 하지만 그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생의 다른 부분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버거운 존재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온다.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의 시기를 거치며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다시 헤어진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통과한 시점에서 관계는 한번 더 뒤틀린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포기하며, 삶으로 돌아간다. 이 책은 이러한 아주 보통의 삶, 아주 일반적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터전’과 ‘이주’라는 개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비단 유럽뿐이겠는가. 미국도 마찬가지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먼 곳으로 대학을 가고, 그곳을 다시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고 가는 이방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한번 이방인은 영원히 이방인’이라는 한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전 오하이오 출신이예요” 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는건, 새롭게 정착하는 곳에서 최대한 다다를 수 있는 지점이 ‘경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상징적 제스쳐이기도 하다.

노마디즘은 떠나온 고향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 내가 떠나온 고향은 이미 이전의 고향이 아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감정적인 거리로 쉽게 치환된다. 롱디가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낯설다. 이미 예전에 나를 반갑게 안아주었던 그 고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나는 아까 이야기했듯 영원한 경계인일 뿐이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쉽게 정착할 수 없는 노마드의 삶. 이것은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우리 한국인에게 아주 낯선 주제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들은 어린 나이부터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들은 서툰 한국말과 김치를 잘 먹지 못하는 식성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을 듣고 또래 한국인 아이들과 어울린다. 현지에서는 유리벽을 실감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와도 특유의 딱딱한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을 따스하게 품어주지 못하는 한국을 야속하다고 할 수 없고, 이들을 완전히 받아주지 못하는 새로운 땅의 사람들을 차갑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노마드의 숙명같은 것이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아주 단순한 서사구조 안에서 감정적인 풍요로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풍경들 덕분이다. 그림체는 등장인물의 심정을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때로는 어두워졌다가, 때로는 화사해지고, 때로는 마구 휘갈기는 듯 하다가, 때로는 아주 섬세하게 입술의 떨림까지 잡아낸다. 장소에 따라 빛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북유럽의 드라이한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고, 이집트의 습하고 눅눅한 공기는 또 다른 북터치로 그려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른 공간들이 인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림을 통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물의 뒷모습에서, 발걸음에서, 손가락 끝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것. 마누엘레 피오르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최소한 섬세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이바라 리에코: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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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바라 리에코가 <우리집>에 깔아놓은 판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먼저 등장인물들을 최악의 환경으로 보내버린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지옥도로 주인공들을 보내버린 뒤,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그래서 리에코의 작품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와 무척 비슷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다르덴 형제가 극도의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현실을 환기시키는 쪽이라면, 리에코는 비현실성을 극대화시키며 풍자와 왜곡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실을 극적으로 불러낸다. 방법은 다르지만 이들이 가진 철학과 공기는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인젛은 상황에 부딪혔을때 우리는 편하게 웃을 수 있는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 다르덴 형제는 희미하게 그럴수도, 라고 말하고 있고, 리에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예스, 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에코가 조금 더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고 한다. 리에코의 세계에 등장하는 일본의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하지만, 그녀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절망에 익숙해진 자들과 이제 막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른 속도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수긍과 극복, 혹은 적극적인 부정 사이의 간극 말이다.

사이바라 리에코의 이름은 최근에 내가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으로부터 처음 전해 들었다. 그녀는 몇명의 작가들을 나에게 알려준 뒤 내 곁을 떠나서 외국으로 가버렸다. 나는 여기에 남아 그녀의 흔적들을 하나둘씩 되새김질하고,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그녀가 남긴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흘렸던 말들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녀가 추천한 영화를 보며, 그녀가 추천한 책들을 읽는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결코 의미없이 흘려보내는 사람이 아닐 것이기에, 그녀가 추천한, 정말 좋다고 이야기한 책들에서 그녀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사이바라 리에코는 그렇게 접하게 된 첫번째 작가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지금의 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이유를 리에코의 작품에서 어렴풋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세상을 마주 볼 정도의 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세상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갈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만화가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