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jongheuk

고학력 비정규직, 남편, 아들.

Mac DeMarco: This Old D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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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드마르코는 음악을 무척 잘 알고, 또 잘 하는 아티스트다. 인디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전작 [Salad Days]가 씬에서의 드마르코의 위상을 정립해준 작품이라면, 이번 신작 [This Old Dog]은 조금 더 개인적으로 침잠해들어간 드마르코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발가벗고 찍은 뮤직비디오처럼, 혹은 팬티 한장만 걸치고 노래한 프리마 베라 무대처럼, 드마르코는 이번 작품에서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타고난 송라이터이자 뛰어난 스토리텔러이기도 한 그의 모습에 반한 일반 인디팬들이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그는 술술 자신과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근 조근 풀어놓는다.(그의 유쾌한 엄마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아마도 확실히 그의 성장배경을 궁금해하게 될 것이다) 다만, 팬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내용, 때론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드마르코다운 기분좋은 배신으로 다가온다. 살짝 늘어난 테이프의 소리를 그대로 차용한 짦은 소품 “Sister”처럼 드마르코는 기억 저편으로 숨겨버리고 싶은 과거의 이야기들을 날것 그대로 꺼내놓고 그가 지금까지 축적한 아름다운 그만의 음악세계에서 달콤하게 요리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음반은 수프얀 스티븐스의 기념비적인 음반 [Carrie & Lowell]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티븐스가 그만의 조용한 장광설을 개인사에 투영시키며 한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정점을 만들어냈듯, 드마르코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개인사를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며 음악적 커리어의 극초반기를 정리하려는 듯 보인다.

맥 드마르코는 이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진정한 크루너 중 한 명이다. 크루닝의 본질은 스토리텔링에 있다. 그때문인지 전작에 비해 자칫 심심해보일 수도 있는 음반 내 곡구성이 오히려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시키는 순기능으로 다가온다. “A Wolf Who Wears Sheeps Clothes”와 같은 경쾌한 노래가 “One More Love Song”, “On the Level” 등이 가진 멜랑꼴리한 정서와 무리없이 섞여 들 수 있고, “My Old Man”이 “This Old Dog”과 같은 음반의 타이틀곡 격인 노래를 소개하는 충실한 오프닝송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음반은 조금 더 차분해졌지만 지루하거나 뻔하지 않다. 여전히 그의 세계를 단단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음악을 잘 알고 있었고, 여전히 음악을 잘 하고 있다. 이제 그의 팬들은 그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맥 드마르코 월드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Slowdive: Slowd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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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e, My Bloody Valentine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슈게이즈-인디록 밴드 Slowdive가 22년만에 셀프타이플 4집 음반을 들고 돌아왔다. 22년만에 새음반을 발매한 것도 놀랍지만 1991년 메이저 데뷔 후 지금까지 단 네 장의 정규 음반만을 기록한 심플한 디스코그래피가 더 놀랍다. 그만큼 슬로우다이브는 ‘듣기 쉽지 않은’ 밴드였다. 1993년작 [Souvlaki]와 1995년작 [Pygmalion]은 슈게이징, 혹은 브릿팝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봣을 명작이었지만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아 비싼 수입반으로 챙겨두어야 했던 빘한 “필수템” 이었다.

2013년 돌아오기 전까지 단 세 장의 단촐한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하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 복귀작이자 네번째 음반 [m b v]를 통해 탄탄한 ‘기본기’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듯, 슬로우다이브의 복귀작 [Slowdive] 역시 왜 이들이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슈게이즈/드림 계열에서 전설로 통하는지, 왜 이들의 음악이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인구에 회자되며 즐겨 플레이되고 있는지 명확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첫 곡 “Slomo”의 처음 30초에서 이미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서늘한 감동이 밀려오는데 이와 비슷한 높이의 감정적 파고가 음반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90년대 해왔던 그 방식 그대로 노래를 제조하는데 그 안에 담긴 깊이는 22년동안 훨씬 성숙되었다. 똑같은 그릇을 만들어도, 똑같은 커피를 한잔 내려도 그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 결과물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 사람의 손길에 영향을 미치는 ‘숨결’, 혹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깊이에 따라 손길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처럼 슬로우다이브의 새음반은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요즘 음악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순간들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건가 싶다. 시대를 억지로 무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대의 눈치를 보지도 않는 초연함이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일관된 정서 중 하나다. 이 초연함은 아마도 시간을 정직하게 흘려보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강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노래가 5분에 육박하고 8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곡이 있을 정도로 구성이 단순하지 않지만 매 곡을 소화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하다. 서늘한 긴장감과 아름다운 포만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명반이다. “Star Roving,” “Everyone Knows,” “No Longer Making Time”과 같은 명곡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어느 한 곡 버릴 것이 없다.

Bobo Yéyé: Belle Époque In Upper Vo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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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유들로 동시대에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한채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 숨은 명반을 찾아내 재발매하는 시카고 기반의 인디 레이블 누메로의 작업들은 명시적인 시대적 공헌 뿐 아니라 음반 자체의 높은 퀄리티로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나 역시 이들이 발매하는 음반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어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한 장씩 구입한다.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오래된 음반들이 대부분이기에 정보나 지식이 현저히 부족한 나는 음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반드시 읽는 편인데, 누메로가 밝히는 기본적인 정보들에서 음반의 주인공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기는 음반들에 먼저 손이 가게 된다.

말리 음악에 대한 서구(및 우리나라) 음악팬의 관심은 지난 10,20년 간 부쩍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말리와 접경해 있는 브루키나파소의 음악이 가진 세계적인 명성은 그보다는 조금 낮은 편인 것 같다. 이번에 누메로에서 내놓은 [Bobo Yéyé: Belle Époque In Upper Volta]는 1983년 군부 쿠데타에 의해 브루키나파소가 건립되기 전 동지역에 존재했던 오트볼타(Republic of Upper Volta)시절 음악들을 세장의 음반에 모아놓았다. 이웃나라 말리와 마찬가지로 볼타는 20세기초부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1958년 독립했다.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동안 서구의 음악문화가  자연스럽게 많이 유입되었을 것이고, 독립 이후 Bobo-Dioulasso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클럽, 밴드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음반의 첫번째 장은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Orchestre Volta-Jazz)의 노래들 중 대표곡들을 엄선해서 뽑았다. 당시 오트볼타의 음악은 프랑스 식민지배세력 뿐 아니라 말리 음악씬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의 초기 주축 멤버였던 Tiemoko Traoré 와 Tidiani Coulibaly 역시 말리에서 음악을 배워 와서 보보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보보 지역에서 첫번째 운전면허학원을 차려 재정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던 Idrissa Koné가 매니지먼트를 총괄하기 시작하면서 밴드는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다.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Senufo와 Mandingo라고 불리우는 지역 민속음악에 쿠바 리듬과 일렉트로닉 기타사운드를 뒤섞은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가끔 신중현과 김정미같은 한국의 선구적인 록음악과 비슷한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서구 음악의 유산을 짧은 식민지시대로부터 물려 받아 지역 전통음악(우리나라는 민요, 혹은 엔카-ish가 되려나)과 교배를 이룬, 완전히 독립적인 두 지역의 음악이  비슷한 결과물을 보여준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소위 말하는 식민지 정서, 혹은 한이라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존재했는지, 그것이 음악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밴드의 전성기는 멤버 간 불협화음과 새로운 트렌드를 적극 받아들인 신진 세력들에 의한 위상 하락 등이 겹치면서 짧은 시간동안만 지속되었다. 1977년 Koné가 밴드의 이름으로 음반을 냈지만 사실상 혼자 제작하면서 밴드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고, 1983년 쿠데타에 의해 사회주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음반의 두번째 장은 볼타 재즈의 주축 멤버였던 Tidiani Coulibaly의 개인 작품들을 모았다. 말리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티디아니 쿨리발리는 아이보리 코스트 지역에서 철도노동자로 일하다 1962년 볼타 재즈에 합류했다. 약 10년간의 볼타 재즈 활동을 정리하는 그는 이후 Dafra Star 앙삼블로 활동했다. 이 시기가 쿨리발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번째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보보에서 5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여행을 가야 했을 정도로 당시 볼타 음악가들의 사정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쿨리발리는 아름다운 음악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누메로가 그 유산을 발견하여 말끔한 음반으로 재탄생시켰다. 쿨리발리의 음악은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유연한 보컬 중심의 세련된 팝음악을 구사한다. 역시 만딩고 음악을 주된 뿌리로 삼지만 민속음악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샹송과 아프로팝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쿨리발리는 80년대 초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면서 음악계에서 은퇴를 선언했고 그로 인해 Djoliba National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National Treasure”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번째 장은 Echo-Del-Africa와 Les Imbattables Léopards의 음악이 섞여 있다. Echo-Del-Africa는 Dynamic Jazz로 활동했던 Yaya Konaté와 볼타 재즈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한 Antoine D’Albin이 주축이 되어 1974년 결성한 밴드다. Les Imbattables Léopards는 10대 시절부터 보보 지역 클럽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Idrissa Ouédraogo가 중심이 되어 1970년 결성된 빅밴드였다. 두 밴드는 보보 지역의 문화적 전성기였던 1970년대가 품었던 에너지의 수혜를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이 두 밴드는 재즈와 팝, 만딩고와 세누포, 샹송과 아메리칸 록음악이 뒤섞여 볼타만의 독특한 음악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 지역의 문화적 융성기는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권이 브루키나파소를 건립하고 프랑스 문화와의 단절을 선포하면서 빠르게 식어갔다. 이후 경제정책 실패와 끊임없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경제와 함께 볼타, 혹은 브루키나파소의 음악은 다른 아프리칸 음악들에 비해 더 빠르게 잊혀지게 되었다.

여행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에서 태어나 서아프리카 연안 국가에 장기간 체류하며 그 나라의 음악을 깊이있게 들을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메로의 복각 작업은 흥미로움을 넘어선 고마움까지 느끼게 만든다. 앞으로 여기에 곧 기록하게 될 Wee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생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30년 째 복역중인 Norman Whiteside가 만든 Wee의 [You can Fly on My Aeroplane]은 소울의 정수를 담아낸 명반이다. 최근 그가 살해사건이 발생할 당시 사건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방아쇠도 당기지 않았다는 조사결과가 밝혀지며 구명운동이 한참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음악가들의 음악을, 비록 3,40년이 지났지만 어쨌든 동아시아 끝단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Vagabon: Infinite Wor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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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룬 태생으로 십대 시절을 미국 뉴욕 근방에서 보낸 이민자 가정 출신의 Laetitia Tamko의 무대이름 Vagabon의 데뷔 음반 [Infinite Worlds]는 20분이 조금 넘을 정도로 아주 짧다. 2,3분 내외의 짦은 곡이 딱 8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임팩트는 결코 작지 않다. 아마도 올해 들어 제대로 된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최초의 음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음악적 완성도는 기본이다. 헤비한 인디록부터 인디포크까지 다양한 장르를 본인의 바탕 위에 무리 없이 풀어내고 있다. 악기 연주부터 녹음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본인 혼자의 힘으로 해낸, 요즘 보기 드문 DIY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사운드의 품질은 결코 로파이하지 않다. 음악의 결이 성긴 것과 사운드의 질이 거친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인데, 배가본은 그 둘을 절묘하게 분리하며 각각의 지점에서 제대로 된 성취를 해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사인데, 단순히 이민자의 눈으로 바라본 미국사회, 혹은 디아스포라 예술 계열로 분리해버리기에는 그녀가 가진 섬세한 시선이 너무나 곱고 아름답다. 너무나 가볍게 스쳐지나치기 때문에 차마 가벼운 시선조차 주기 힘든 일상의 사소한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그녀의 감성은 이 시대의 인디음악이 파고들어야 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음악의 형식부터 완성도, 음악 제작 과정, 그리고 메시지까지 한 색깔 위에서 가지런하게 공유하는 지점이 존재하며, 이 지점이 오직 배가본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그녀만의 오리지널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녀의 음악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사명감을 지니게 된다. 대단히 뛰어난 데뷔 음반이자 올해의 음반 목록에서도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는 명반이다.

Charly Bliss: Gu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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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디록 밴드 Charly Bliss의 데뷔음반 [Guppy]를 듣고 있다 보면 좋은 음악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비단 개인의 재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러니까 음악의 장르를 결정짓는 지역성, 문화적 인프라와 같은 잘 알려진 환경요소 뿐 아니라 무형의 문화적 배경이 개인의 재능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코네티컷의 한 동네에서 좀 특이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로 유명했던 Eva Hendricks는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밴드를 만들고 싶어 사람을 찾던 중 한 인디밴드 공연장에서 Spencer Fox라는 사람을 만나 함께 합주를 시작한다. 마침 에바의 전 애인이었던 Dan Shure가 베이스를 칠 줄 안다고 해서 무작정 합류시켰고 드럼은 에바의 오빠인 Sam Hendricks에게 맡겼다. 그러다가 에바가 NYU에 진학하면서 밴드는 근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2013년부터 줄기차게 공연을 하면서 명성도 쌓고 EP도 내다가 슬리터-키니, 도쿄 폴리스 클럽 등의 오프닝을 맡으면서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 음반도 냈다는, 그렇게 좋은 평를 받은 그 음반과 함께 지금 열심히 본인들만의 투어를 돌고 있다는, 전형적인 인디밴드 성공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다. 어쩌면 미국에서는 아주 평범한, 1년에 수십 차례 가까이 등장하는 고만고만한 인디밴드의 성공적인 데뷔 뒷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만약 이들이 서울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에바의 경우 아마도 공부를 하느라 밴드를 해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아니 그 전에 음악은 무슨 음악이냐며 부모님께 혼나면서 풀이 많이 죽었을 것이다. 코네티컷과 뉴욕이라는 배경이 이들에게 어떤 기회를 준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것이 재능으로 발전되는 ‘채널’이 한국보다 훨씬 잘 뚫려 있다는게 부러울 따름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려 있는’ 사회구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밴드를 하고자 마음먹으면 밴드를 할 수 있는 ‘단단한’ 사회적 뒷받침이 부러운 것이다.

이들의 음악에는 둔탁한 그런지 사운드와 밝은 팝 멜로디가 공존하고 있다. 에바 헨드릭스는 아마도 이 두 요소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본인의 목소리가 달콤한 멜로디라인에 잘 쓰일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블 기타가 육중하게 내리찍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에서 물려받은 유산을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그 해결책으로 속도를 택한 듯 보인다. 모든 곡은 빠르게 시작해서 빠르게 끝난다. 좋은 훅을 가지고 있는 멜로딕한 후렴구와 시원하게 내지르는 두꺼운 기타사운드가 쉴새없이 몰아친다. 30분 정도에 불과한 짧은 러닝타임은 그래서 큰 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아쉽지만, 더 길게 끌었다면 자칫 지겨울 뻔 했다. 시원하게 시작해서 깔끔하게 끝나는 좋은 구성의 음반이다. 그래서 두번째 음반에서 조금 더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숙제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밖에 없다.

한국형 힙스터의 지리적 고민

어제 한 대학교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뻔하고 재미없는 금융경제학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어버린 “흙수저” 2,30대 청년층의 서울 내집 마련의 꿈, 정책적으로 풀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두꺼운 가격 장벽이 드리워진 이 투기의 도시에 문화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는 일련의 청년층이 새로운 색깔의 주거 공간을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주거집단이 해방촌이나 문래동같은, 기존의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며, 경리단길이나 익선동과 같은 ‘골목길’이 한국형 힙스터들의 주요 소비처로 탈바꿈한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후 최근 몇년 간 ‘젠트리피케이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독립 자본가, 혹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가진 역량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을 나름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들의 서울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근본적으로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규모 자본에 밀려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로 설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잃는 것은 다양한 독립 문화 자본 정도가 될 것이고, 단기적인 승자는 창의적 소규모 문화 자본을 보다 정형화된 기업 자본 기반의 대규모 산업형 상품으로 변질시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며, 특정 문화 자본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 갖는 향취, 즉 도시환경이 주는 무형의 공공재를 더 강한 자본가 세력이 부당하게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힙스터 소비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소규모 문화 자본 형성에 참여하기 보다는 이 소규모 자본가들이 영업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과 비슷한 – CJ 따위의 – 소비재를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소비 성향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자본의 형성을 촉구한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니 해방촌으로 옮겨가고, 북촌에 이어 서촌까지 사람들로 붐비니 근처 익선동으로 옮겨간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인스타그램에 ‘힙’한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소규모 문화 자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소득 전문가부터 비정규직까지 아마도 다양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 해방촌이나 익선동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그곳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 관광지와 주거지를 구분하는 심리를 은연중에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들 역시 전통적인 서울의 ‘아파트 판타지아’에서 많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비록 쪽방촌 바로 옆에 생긴 예쁜 커피숍들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하더라도 이들의 꿈은 강남의 아파트로 향해있다. 이들에게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잠원동은 주거공간으로서 좋은 선택이지만, 비슷한 거리에 있는 보광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경제적 유전자이며, 솔직하고 이기적인 경제적 판단에 기인한다. 나는 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출산과 육아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신의 소비 패턴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 세대가 윗세대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점은 세대적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회전체적인 지출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욕망의 대체재를 찾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 아직까지 나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주거공간의 가능성 중 기꺼이 생산자와 밀착된 환경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못할 때 공간적 특수성은 담보될 수 있을까? 문래동에 새로운 문화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꾸리고 생산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정체 상태에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소비력을 갖춘 젊은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힙스터 문화 시장’에 한해, 소비자가 생산자의 근거지를 끊임없이 구축(crow out)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을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 독립적인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일부 힙스터에 국한되어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면, 즉 지방에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서울 안 임대료가 저렴한 골목길을 끊임없이 떠돌려 방황하는 예술가들, 혹은 독립 자본가들의 모습을 계속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Julie Byrne: Not Even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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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장의 음반만으로 조니 미첼과 바쉬티 번얀의 재림이라는 찬사를 받는 줄리 번은 미국 뉴욕버팔로 출신의 포크 싱어송라이터다. 기타를 즐겨 치던 아버지에게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웠고, 그 아버지가 동맥경화로 더이상 음악을 부를 수 없게 되자 집을 떠나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생활했다고 한다. 시카고에서 마트 점원으로 일하던 중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했고, 여기서 2014년 첫번째 음반 [Rooms with Walls and Windows]를 홈레코딩 방식으로 (테이프에!) 제작하여 시카고 인근 인디 레코드샵에 소량 배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매체에서 그해 최고의 음반으로 선정되었다. 두번째 음반이자 레이블과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발매한 첫번째 음반 [Not Even Happiness]는 뉴올리언스로 건너와 만난 음악인들과 만들었는데, 이 음반 역시 그녀가 어렸을 때 살았던 버팔로의 부모님댁에서 홈레코딩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30분 남짓한 이 짧은 음반에서 그녀는 통기타와 바이올린 등 최소한의 악기 위에 깊고 그윽한 보컬을 얹어 정통 미국 포크 음악의 진수를 느끼게 만든다. 이제 막 데뷔한 그녀가 시적인 가사와 아름다운 멜로디를 매 노래마다 써내려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삶에 대한 애착과 관찰력이 아닐까 싶다. 짧은 뉴올리언스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센트럴 파크에서 공원 관리원(ranger)으로 일했다고 한다. 학위를 받지 못했지만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도 환경과학(Environmental Science). 2017년 스테레오검과의 인터뷰에서 이미 “(공원은) 뉴요커에게 자연과의 연결점을 확보하는 지점일 뿐 아니라 동물들에게 삶의 피난처로 기능하기 때문에 이 자원봉사 활동을 좋아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자연과 인간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관조적 시선은 노래 곳곳에 잘 녹아들어있다. 음반을 듣는 내내 팽팽한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step by step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이 곳에 기록해둔다. 이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아마도 논문 마감일이 거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갑자기 영어로 쓰인 소설책이 재미있어 지고 청소가 하고 싶어지며 인터넷 쇼핑이 즐거운, 그런 시기말이다.

지난 2월 전직장에서 인사상 불이익 비슷한 것을 받고 분기탱천한 마음에 그동안 컴퓨터에 쟁여 두었던 미완성 논문 네 편을 제출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각각 다른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 중 한 편은 수정 후 재투고 과정을 거쳐 얼마전 게재되었고, 어제 다른 한 편이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두 편은 전직장에서 쓴 소논문 두 개를 각색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수준이 깊지 않았다. 첫번째 논문도 KCI 등재 학술지가 아닌 곳에 투고했기에 아마 게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받은 원고료로 아내의 드레스를 사주었으니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다른 논문도 한국에 근거를 둔 국제학술지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건 지난해말 나름 열심히 썼던 정책보고서를 각색한 논문이었다. 이 것 역시 나름 참신했던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방법론적으로나 학문적인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직장에 썼던 수많은 보고서 중 나름 논문 형식으로 각색이 가능했던 것은 위의 세편이었는데, 셋 다 돌이켜보면 정책논문으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학자들이 좋아할만한 색깔은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중 한 편은 심사결과를 참고하여 수정한 다음 다른 등재학술지에 내볼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여름에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다음 코멘트를 받아서 수정 후 국제학술지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다음달 초까지 수정본을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 세 편중 한 편이다. 이건 지난해말부터 질질 끌어온 것이라 더이상 미룰 명분도 변명거리도 없다. 지난해 말 제출해놓고 신혼여행을 가버리는 바람에 결과를 제 시간에 듣지 못했고, 그 때부터 수정 후 재투고 기한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던 그 2월까지 미루어졌다. 여기서 한번 더 연기가 되고, 이후 이직이다 뭐다 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는데 해당 학술지 측에서 다음호 발간을 위한 원고 갯수가 부족했는지 다시 연락이 오는 바람에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 다른 한편은 국내 기반을 둔 다른 등재학술지에 2월 중 제출한 상태인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도 연락이 꽤 오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탈락할 것 같은데, 내 박사학위 논문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전직장에서 쓴 두 편의 논문들이 탈락했을 때에도 심리적인 위축이 크게 오지는 않았다. 그 보고서들의 수준을 아니까, 그리고 논문화과정에서 내가 투입한 시간의 한계를 잘 아니까 기대도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위와 같이 제출한 논문들이 한꺼번에 다 무사히 통과하여 게재가 확정되면 순식간에 “포인트”를 채우게 되어 기쁠 수는 있겠지만, “포인트를 채워 조교수직을 얻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는 순간 내 삶의 고귀함도 그정도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직업의 이름에 있다면 내 삶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게재 여부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내 학문적 수준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첫째고, 이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최대한 단단하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두번째이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취와 외부에서의 평가를 상식적으로 공평한 수준까지 획득하는 것이 세번째이다. 지금까지 논문 제출 과정을 통해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등재지에 게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려면 존나 노력해야 함!

전직장에서 현직장으로 이직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대체 왜 이 연봉을 받고 이직을 했는가?”이다. 가장 많이 화를 냈던 사람은 아내였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이 “대접”을 받으며 이직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하는 것이 가장 열받았다고 한다. 이직 당시 나는 학자로서의, 연구자로서의 내 수준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전직장에서 주었던 높은 연봉은 학자인 내게 주는 돈이 아닌,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받으며 학문을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금융업에 종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직장에서 주는 돈은 유관연구기관보다 적은 수준이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 아마도 이정도 수준이 학자로서 내가 뒤늦게 출발하려고 할 때 좋은 기준점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전직장에서 3년을 허비했다면(허비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 당시 쓴 보고서들을 논문으로 재편집한 것이긴 하다), 이제 더이상 허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지금의 연봉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보다 DSGE를 잘 하는 한국인 학자가 한국에만도 수십명이 된다. 한국의 학교에 열리는 DSGE를 위한 조교수직 포지션은 몇년에 하나 될까말까한다. 내 현재 수준에서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초부터 천천히, 아주 낮은 단계부터 단단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6월 초에 걸려 있는 논문 하나 탈고하고, 6월 중순까지 학회에 논문 하나 제출하고, 7월이 다 가기 전에 탈락 논문들에 새로운 호흡도 좀 불어 넣고, 그 사이에 회사를 위해 일도 좀 하고, 그렇게 내 수준에서, 매우 낮은 수준에서 하나 하나 해 나가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집단 허리디스크에 걸린 한국사회

서울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95% 신뢰구간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허리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는 확신을 어렵지 않게 갖게 될 것이다. 혹은, 이들이 옆으로 걷는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하는 특수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구글 스콜라를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의학계열의 논문이 전무한 상태인데, 이 흥미로운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국의 엑스터 대학교 정도의 연구기관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이미 진행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더 놀라운 사실은, 통근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 혹은 버스의 복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주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백팩이나 핸드백을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백팩이나 핸드백을 어깨에서 내려서 손으로 들고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한국인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중교통수단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타인과의 접촉을 기꺼이 감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접촉면을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은 백팩과 핸드백을 몸에 장착하는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특수한 상태로 진화할 뿐 아니라 허리를 돌려 옆으로 걷는 방법을 망각하게 되는 특이한 퇴행현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이 사회 전체적으로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국사회는 만성적인 허리디스크에 집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보건복지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급한 상황이다.

백팩과 허리디스크, 또는 무통증과의 상관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혼잡스러운 대중교통수단 안에서 한국인은 왜 백팩을 벗어서 들고 타지 않는가, 혹은 그 혼잡스러운 곳을 굳이 걸어서 통과하려고 할 때 타인에 대한 비정상적 신체적 접촉행위에 대해 미안함을 대체 왜 표시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의 출발점은 정보의 미획득이다. 한국인은 혼잡한 공간에서 백팩을 벗었을 때 얼마나 추가적인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지, 몸을 옆으로 돌려 걸었을 때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얼마나 회피할 수 있는지, 혹은 미리 “실례합니다”와 같은 말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서로의 공간을 얼마나 더 양보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버스와 지하철이 공급되기 시작한지 이미 몇십년이 지났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타인에 의한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이 야기하는 불쾌함의 정도에 대한 학습은 이미 완료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비록 정장에 백팩을 메고 타는 ‘패션'(이걸 ‘패션’이라고 기꺼이 불러주는 나도 참 많이 약해지고 부드러워졌다)이 유행한지 몇년 되지 않았다 해도 그 패션을 고집하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대학교때 마자 플라바나 루카스, 혹은 최소한 이스트팩 등 다른 종류의 백팩을 메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본 경험이 최소한 한번 이상은 있었을 것이 분명한 바, 더 나아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습관처럼 말하라는 가르침을 담임선생님께 습관처럼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경험이 한번씩은 있었을 것이므로, ‘학습의 부재’ 가정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판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샘솟는다. 한국인이 얼마나 못되고 싸가지 없으면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접촉을 불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면 분명히 몸이 닿겠구나, 그러면 저 사람도 싫어하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말겠어!’

위와 같은 생각이 출퇴근길 한국사회를 허리디스크의 개미지옥 속으로 빠트리는 주된 명제란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도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관찰한 바 출퇴근길 한국인들은 대부분 생각 자체를 잘 하지 않는다. 저렇게 몇 문장으로 이어진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까지의 과정도 이미 너무 벅찬데, 사람으로 꽉 찬 그곳 안에서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심을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끄집어내는 마인드컨트롤을 할만큼 사고의 끈이 긴 한국인은 사실 몇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나마 영혼의 불씨가 어떻게 하다보니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휴대폰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소멸해버린다. 이들은 이미 이마 위에 제 3의 눈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시야를 휴대폰에 빼앗겨도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은 이미 확보해놓았다. 애초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즉,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없어보이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행동패턴을 일정하게 나타낸다면, 즉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면, 그 원인 역시 사회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들은 사회에 의해 등떠밀리는 삶을 살고 있다. 대도시라는 익명성 속에 숨어 불편함을 ‘모르는 타인’에게 전가한 채 찰나의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타인을 조금만 더 불편하게 만들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을 전가하는 타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죄책감은 덜어지고, 당장의 이익은 가시적이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는 것이고, 굳이 백팩을 벗거나 몸을 옆으로 돌려 걸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딱히 남을 해하려는 나쁜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지금 당장 저 눈앞의 자리가 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하차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옆의 칸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옆 사람의 불편함을 인위적으로 망각하는 것 뿐이다. 만약 어깨를 치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 회사 부장님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관계에 약하다. 한국사회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계급이다. 계급이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 간 관계 역시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관계는 연속적이다. 계급의 상층부에 있는 이의 영향력이 가장 말단의 사람에까지 미친다. 청와대에서 기침하면 동네 노점상이 타격을 받는 사회다. 그만큼 타인과 자신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폭력을 정당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억눌려 잇었기 때문에 풀 곳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심지어 공짜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은 그러한 억눌린 관계에서의 해방을 위한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다. 회사 복도에서는 임원이 지나갈때 마치 임금님이 지나가는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내가 왕이므로 모두의 어깨를 치면서 지나갈 수 있다. 관계와 계급에 많이 억눌릴수록 공공장소에서의 행동은 거칠게 발현될 확률이 높다.

무척 슬픈 사실은, 위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타고 빨리 내리면 대체 삶의 어떤 부분이 나아지는가?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저 땀이 조금 더 많이 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가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져버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공포심에 질려 남들보다 빨리 걸으려 하고 남들보다 오래 일하려 하며 남들보다 앞에 줄서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반칙은 정당화되고 거짓말은 별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들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많이, 조금만 더 잘 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다들’ 믿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이 걸린 병은 허리디스크가 아닌 정신병이다. 이들은 집단적인 히스테리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모두가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는 조금씩 더 나빠지고, 지하철과 버스는 조금씩 더 혼잡해진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2호선과 9호선 열차에는 선반이 없다고 한다. 백팩이나 다른 짐을 사람들이 올리지 않으니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것은 사회가 나빠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제 사람들은 백팩을 벗어 올리고 싶어도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더 등떠밀게 된다. 못되지라고, 나빠지라고 등떠밀게 된다.

조금씩 멋을 부리기 시작하는 금호동

결혼 후 삶에서 나아진 부분을 꼽으라면 많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 역시 가장 좋은 점 한가지를 꼽자면 ‘같이 놀러 다니는 사람’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싶고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사람, 어떤 것이든 가장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고 어떤 이야기든 가장 귀기울여 듣고 싶은 사람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축복이다. 어떤 연애든 연애 초기부터 “내 공간과 시간이 필요해”라고 딱 잘라 말했던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뜨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주말 내내 함께 붙어 있어도 딱히 피곤함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내가 변했다기 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환경과 장소에 민감한 동물인 내가 새로운 동네에 ‘정착’하는 과정은 삶에서 특별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경험을 가장 좋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인지 대단히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성동구는 결혼 전까지 단 한번도 주거지로 고려해본 적이 없는 도시다. 딱히 특별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인구가 적은 중구와 선거구가 합쳐졌다는 정도가 최근 내가 획득한 가장 유용한 정보였을 것이다. 아내와 나의 직장 위치와 출퇴근 동선을 고려해 최적점인 금호동을 선택한 것은 사랑하는 마포구를 떠나기 위해 생각해낸 가장 이성적인 이유였다. 둘 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기에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피곤하고 힘든 때다. 금호동으로 이사온 이후 아내는 아침밥을 여유있게 해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성산동 시절과 여전히 비슷한 시간에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출퇴근 시간만을 고려하여 선택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닌 금호동에서의 생활이 6개월차로 접어들면서 옥수동과 행당동, 신당동에 둘러싸인 이 동네가 갖는 독특한 매력과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3호선 금호역과 5호선 신금호역을 끼고 있고 도심, 강남, 용산 등 주요 지역과 빠르게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은 주거지역과 좁은 도로, 더이상 발전이 어려운 금남시장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부동산 가격이 주변만큼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몇년 간 재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우리와 같은 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거주층의 변화가 발생하면서 동네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재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곳에는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곳에는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몇십년 간 금호동을 지켜온 터줏대감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곳조차 멋을 부린 현관문과 멋을 부린 작은 자동차들이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젊은 세대가 조금씩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에는 고급 외제차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이들이 고소득 전문직인지, ‘카푸어’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들의 뿌리를 ‘압구정, 혹은 반포에 사는 부모님이 돈을 보태주어 독립한 젊은 부부’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아이를 맡길 수 있고 광화문이든 서래마을이든 30분 이내에 놀러갈 수 있으면서도 집값은 강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 곳이 이들에게는 최적의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유입된 새로운 주거집단은 기존의 금호동 거주자들과 완연히 다른 소비성향을 보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에 부모님 품에서 누리던 소비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고, 한남동-압구정-성수동 등 금호동을 둘러싸고 있는 ‘핫’한 강북 지역문화의 혜택도 누리고 싶을 것이다. 즉, 중산층의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강남의 비싼 부동산 가격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은 쁘띠 브르주아지 2세대 정도가 금호동의 새로운 주요 계층이라고 애둘러 표현할 수 잇을 것이다. 강남에는 문화가 없다.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강북에는 문화가 있다. 소비수준이 조금 낮을 뿐이다. 이들 신거주층에게는 아마도 옥수동의 외곽지역 쯤으로 정의내려질 금호동은 강북의 고유한 문화를 보다 저렴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부동산가격(=임대료), 문화적으로 단련된 새로운 주거집단, 지역문화의 특색을 간직한 주요 거점들과의 긴말한 연결성 등 금호동이 새로운 소비 중심지로 각광받을 수 있는 조건은 충분히 갖춰졌다. 물론 금호역과 신금호역 사이를 잇는 길이 가파른 오르막의 1차선 도로이고 성수역이나 행당역에서 금호역으로 이어지는 길도 복잡한 금남시장을 끼고 있는 1차선 도로라는 한계가 명확하긴 하지만, 연남동 골목길과 이태원 경리단길이 이처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해보자면 이정도 걸림돌은 사실 그리 커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도로적 특성이 금호동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줄지도 모른다!) 아직 금남시장 골목에는 도우미들이 나오는 노래방과 철지난 유행을 머금은 호프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 가게들 사이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겉으로 보면 참신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틈새를 노린 한 자본가의 전략적 요충지 확보 정도로 해석될 수준의 가게들이다.

먼저 금호역에서 나와 금남시장으로 향하는 장터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 길의 교통체증을 두 배로 심화시키는 주범인 회전식 원형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호산길이 나오고 이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넘다 보면 신금호역이 나온다. 이 삼거리가 어찌 보면 금남시장의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목화다방이 있다. 상호명에서조차 동네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 가게는 술과 가벼운 음식을 함께 내는 프렌치 비스트로다. 각종 와인과 칵테일을 구비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쌍화탕을 마실 수 있다 하니, ‘다방’의 컨셉을 유지하는 동시에 금호동의 지역성을 살리고자 하는 나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지역성’과 ‘차별성’이 요즘 서울의 힙스터를 정의내리는 두가지 키워드라면 목화다방은 그 키워드를 충실히 해석하는 수준에서 완성된 장소인 셈이다.

원형교차로를 지나쳐 조금 더 금남시장 안쪽으로 들어오면 금남시장의 실핏줄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장터5길로 올라가면 금남소공원 근처에 돼지미학이 있다. 이 곳은 금남시장에 있는 다른 고기집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기를 공수해오고 다른 방식으로 고기를 익혀 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밝고 화사한 커피숍 분위기의 깔끔한 인테리어로 시각적인 차별화를 시킨 다음 인덕션을 이용해 고기를 익혀 깔끔한 반찬과 함께 내어 나온다. 이 고기는 제주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이라고 한다. 불편한 자리에서 전투적으로 고기를 구워먹고 싶지 않은, 그러니까 ‘살이 찌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기에 대한 욕망도 해소하고 싶은’ 세대에게 어필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장터길에서 금남시장 교차로를 끼고 돌아 독서당로를 타고 한남동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금호대우아파트가 나온다. 이 아파트 상가에는 최근 문을 연 베르베르가 있다. 좁은 공간에 큰 사각 테이블 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주방은 오픈 형태로 열어두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과 요리를 하고 내어주는 사람이 공간과 동선을 공유한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유행하는 전형적인 ‘요즘’ 식당 인테리어다. 적당한 가격대의 와인과 어울리는 서양 음식을 제공하는데 양은  많지 않고 간은 적당히 슴슴하다. 소주를 마시기엔 부담스럽고 공격적인 안주를 먹는 것도 꺼려지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수다장소를 마련하려는 듯 보인다.

재미있게도 위의 세 음식점은 모두 장진우로부터 출발한 곳들이다. 금남시장이 간직하고 있던 전통적인 위치를 가볍게 전복시키려는 이 시도들이 모두 한 명의 자본가의 머리와 뱃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백종원류의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 다 준비해봤어’ 식 브랜딩보다는 조금 더 파인 튜닝된 타게팅을 원하지만 매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갈 주머니 사정도 갖추지 못한 중산층-wannabe 집단이 장진우가 노리는 시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금호동보다 더 좋은 터는 없을 것이다. 이미 옥수동은 “옆구정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구정의 소비문화에 잠식당했다. 그만큼 부동산 가격도 많이 올랐다. 래미안 옥수리버젠과 옥수삼성아파트를 끼고 있는 독서당로에는 이미 셰프찬부터 초록마을까지 젊은 세대를 위한 소비패턴을 고려한 가게들이 다수 들어와 있다. 동호대교에서 올라와 터널을 두개나 통과해야 하는 약수, 혹은 신당동은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다. 그곳은 이미 ‘너무 강북’이다. 성수동으로 다리 하나, 압구정으로도 다리 하나, 한남동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의 금호동은 주차시설만 갖추어져 있다면 적당한 자본을 투하하여 차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다.

정작 금호동의 정체성을 지키는 맛집은 은성보쌈이나 원조칼국수보쌈과 같은 금남시장이 품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이다.  혹은 이미 서울숲을 끼고 들어와 나름의 위치를 확보한 고메트리가 있다. 재래시장이 품은 오래된 식당과 장진우식 신식 다이너들과의 격차는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인다. 금호동에서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완전히 다른 두 주거집단의 색깔만큼이나 온도차가 심하다. 중요한 점 하나는 기존의 주거집단이 베르베르에 가서 식사를 할 일은 없지만 새로운 주거집단은 얼마든지 은성보쌈에서 한끼를 해결하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소비력과 문화적 확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요미식회에 한번 나오기만 하면 그곳은 힙스터들의 성지가 될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금호동은 신 주거집단의 문화적 정복이 멀지 않은 곳이다. 금호산길이 새로운 경리단길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금남시장이 재래시장으로서 갖는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금호동은 이제 막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멋부림 속에 어느 정도의 정체성이 담보될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이미 우리 아파트 앞에도 해외 맥주 보틀샵이 하나 생겼다. 그 가게에서 몇십미터만 내려오면 직접 원두를 볶아서 판매하는 커피숍과 콘크리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인테리어를 뽐내는 듯한 커피숍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금호동 안에 위치한 이 새로운 형태의 가게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들쑥날쑥한 셀링 포인트와 특별하게 기억에 남지도 않는 맛들(고메트리는 맛있다, 고메트리는!). 하지만 최소한 어떤 시도의 흐름은 읽히고 있다. 그 흐름이 자본의 어깨에 올라 타서 특정 소비계층의 취향과 만나게 될 때 이 ‘동네’는 타지인들이 시간을 내어 방문하게 되는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게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 현재 한 지역의 어떤 태동기를 목격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