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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비정규직, 남편, 아들.

Japanese Breakfast with ADOY at V-Hall in Seoul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첫번째 서울 공연에 대한 기억은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공연시간이 너무 짧아 채 달아오르기도 전에 끝나버린 느낌이 들었고 피드백 소음이 거의 매 곡마다 발생하는 등 사운드도 개판이었기 때문에(이 피드백때문에 무대 위 연주자들도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인상을 받았다)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한국 공연이 확정된 이후 공연을 준비한 당사자들부터 나를 비롯한 관객까지 우리 모두가 조금은 더 감정적이 되었던 것 같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잊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여운이 강하게 남아 있기에 어제 저녁의 기억을 꾹꾹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미쉘 ‘정미’ 자우너는 무대 위에서 많이 행복해보였다. 유난히 무대 위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아보였는데, 그녀가 여러번 밝혔듯 이 공연이 매우 감정적일 수 밖에 없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어제 서울 공연은 재패니즈 브렉퍼스트가 2017년 가진 120여 차례의 투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공연이었다. 미쉘 개인으로서는 며칠 뒤 파라솔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할 예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화려하고도 잊지 못할 2017년 투어는 어제부로 종료되었기에 조금은 감정적이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안도감같은 것이 그녀에게 찾아왔던 것 같다. 또한 이 공연은 그녀에게 매우 사적(personal)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어제가 (외)할머니의 10주기이기도 했고, 그녀의 큰이모와 작은이모가 공연장을 직접 찾아와 주었으며, 3년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국이자 미쉘 본인이 태어난 곳에서 갖는 첫번째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전하자 큰이모는 “어떤 회사에 다니길래 그런 지원을 해주니?”라고 물었고, 미쉘은 서울 공연장에 사람이 들어차지 않을 것을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다행히 어제 공연장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미쉘은 아마도 “최고의 회사 식구들”과 함께 퍽 안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연은 감정적인 부분을 떠나 약속에 의해 철저하게 맞추어진 여러 요소들을 결합시키며 진행되는 기술과 공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멤버들은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프로페셔널했다. 피드백이나 하울링 등 기술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두 음반의 대표곡들을 무리없이 연주해냈다. 여러 매체에서 상찬을 받은 두번째 음반 [Soft Sounds from Another Planet]의 시작을 알리는 “Diving Woman”으로 공연의 문을 연 이들이 두번째 곡으로 “In Heaven”을 선택했을 때, 공연의 절정을 장식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노래가 너무 빨리 나와서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Oh, do you believe in heaven? Like you believe in me”로 시작하는 후렴구가 미쉘 자우너 특유의 비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나올 때 그녀의 사생활과 전혀 관계없는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고, 그녀 역시 그 곡으로 무언가를 털어버린 듯 이후 곡들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무리 없이 노래와 연주를 소화해냈다. 공연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곡은 육중한 쇳소리를 내는 “Jane Cum”이었다. 음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자우너의 폭발적인 성량을 유감없이 경험할 수 있었고,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공연장을 압도해버리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함께 무대에 선 남편을 위한 노래 “The Woman That Loves You”, 긴 투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담았다는 “This House”도 인상깊었고, 오토튠을 입힌 보컬과 전자음악의 요소를 잔뜩 첨가한 이질적인 트랙인 “Machinist”로 공연을 마무리한 점도 흥미로웠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도 스튜디오형 밴드가 아닌 공연장형 밴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넘치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꽤 긴 커리어를 보낼 이들의 첫 발걸음을 목격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미쉘 자우너가 첫 곡을 끝내고 한 멘트가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첫번째 음반 [Psychopomp]를 만들 당시 아마도 이 음반을 끝으로 꽤 오랫동안 음악 프로젝트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올해에만 120번의 공연을 한 끝에 자신이 태어난 서울에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고, 단 한번도 자신을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진 않았지만 어디선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자신들을 지켜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는 그 말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오랫동안 응원하고 싶게 만들었다. 코아첼라나 파노라마같은 A급 페스티벌에 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이 떠오르는 신예 뮤지션을 서울의 작은 공연장에서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아 참, 오프닝 공연을 한 아도이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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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률이 낮아지는 이유가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서일까?

많은 이들이 최근 한국사회가 당면한 출산율 저하 문제의 원인을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증가에서 찾는다. 선진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연구결과가 그렇게 나왔고,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증가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러한 연구결과가 일관성있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는 두번째 출산을 막는 기제로 작용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까지는 나와있다.

우선 한가지 확실한 점은 출생률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변수는 혼인율이라는 것이고, 혼인율은 경제성장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인구 천명당 출생한 인구 비율을 추정한 조출생률은 1990년 15.2명에서 2016년 7.9명으로 거의 반토막 가까이 떨어졌다. 지속적인 하락추세 속에서 눈에 띄는 지점이 두군데 있는데, 하나는 2000년 13.3명에서 2001년 11.6명으로 급격하게 하락하던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2006년에서 2007년 잠시 반등하던 지점이다. 19987년 IMF 위기가 발생한 뒤 실직 및 임금하락이 충분이 발생한 시점이 2000년에서 2001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면 출생률의 급격한 하락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또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기가 반등하는 시점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고, 그러한 시기에 일시적으로 출생률이 회복될 수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어쨌든 출생률은 혼인율과 확실한 비례관계를 지닌다. 조출생률이 반토막나는 동안 조혼인율도 1990년 9.3명에서  2016년 5.5명으로 많이 떨어져다. 조이혼율은 1990년 1.1명에서 2016년 2.1명으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행복하지 않은 부부가 이혼을 하지 못하는 잠재적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 아마 자녀양육 문제일 것이다. 이혼의 증가가 출생률에 영향을 미쳤다기 보다는 출생률의 저하로 인해 이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편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출생률 이혼율

한국의 조출생률, 조혼인율, 조인혼율 추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명)이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부터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과 출생률 간 상관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채 1998년 경제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출생률은 약 1.8명에서 1.4명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경제위기가 한번씩 발생할 때마다 여성이 집으로 돌아갈 확률이 남성보다 높다. 이는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아무튼, IMF 위기가 마무리된 2000년 이후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꾸준히 증가해왔고 출생률은 꾸준히 감소해왔다.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꾸준히 73~74% 대를 나타내고 있다.

출생률 경제활동참가율

성별 경제활동참가율과 조출생률 추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참가율은 (%), 출생률은 (명)이다. 

위의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두가지 중요한 지점이 있다. 첫째,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2000년 48.8%에서 2016년 52.1%로 약 3.3%p 증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의 경제활동참가율 73.9%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격차가 21.8%p에 달한다. 참고로 월드뱅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닮고 싶어하는 독일의 남녀간 경제활동참가율 격차는 약 11%p, 중국은 15%p, 우리의 우상 미국은 12%p다. OECD 국가 중 우리가 노동부문에서 유일하게 이기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인 멕시코의 경우 격차가 35%p에 달하며, 우리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칠레의 경우 24%p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의 올드버전 일본은 21%p로 우리와 같다. 둘째, 16년 간 3.3%p의 증가율만을 나타낸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추세가 절반 가까이 떨어진 출생률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라는 주장을 하려면 선진국 수준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임계치 이상을 지속적으로 기록하여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55~57% 수준에서 장기간 정체현상을 보여 왔고, 독일의 경우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경우 여성의 참가율이 50% 이상으로 올라온 시기가 4년밖에 되지 않는다. 출생율에 영향을 줄 만큼 충분한 증가율, 혹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만을 유의미한 설명변수처럼 이야기하려는 시도보다는, 조금 더 큰 그림, 혹은 조금 더 세밀한 그림을 함께 봐야 한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월평균가계수지 등락률과 조출생률은 추세적으로 비슷한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중간에 큰 경제위기를 겪는 통에 가계수지 곡선이 심한 변동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5년 단위로 끊어 보면 (IMF 위기가 있던 1996~2000년 기간을 제외하면) 1991~95년 기간에 연평균 7.94%, 2001~05년 기간에 연평균 6.5% 증가했던 월평균가계수지가 2006~2010년에는 1.54%, 2011~2016년 기간에는 1.5% 상승하는데 그쳤다. 1980년대부터로 기간을 연장해봐도 이러한 추세는 비슷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그러니까 약 20년 이상 지속적인 가계수지 등락률의 하락세를 경험한 사회라면 아이를 낳는 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추측을 상식 수준에서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이 더 바빠져서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아니라, 가구단위로 더 먹고살기 힘들어지니까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덜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출생률 가계수지

조출생률과 월평균가계수지를 연평균으로 환산한 수치의 추이. 자료는 통계청과 한국은행에서 구했고, 단위는 좌축이 모두 (명)과 (%)를 나타낸다.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 증가를 출생률 저하의 한 원인으로 해석하는 데 따르는 위험은 다음 자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래 그래프는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눈 것이다. 남성 임금근로자의 경우 2017년 3월 현재 약 26.4% 정도가 비정규직으로 등록되어 있다. 여성의 경우 그 비율은 41.1%에 달한다. 남성의 경우 2007년 3월 비정규직 비율이 32.6%에서 10년동안 약 6.2%p 그 비율이 하락했는데, 여성의 경우 2007년 3월 42.3%에서 단 1.2%p 하락하는데 그쳤다.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남성보다 약 10%p 이상 높을 뿐 아니라 그 비율이 장기적으로도 하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제활동참가율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 추이.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다. 

가임기 연령이라고 할 수 있는 20~29세, 30~39세 자료만을 따로 추려내었을 경우 조금 더 확실한 모양새를 확인할 수 있다. 20~29세 남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30~39세 남성의 경우 2017년 3월 현재 15.4%로 같은 연령대의 여성(28.8%)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의 비정규직 비율을 나타낸다. 30~39세 여성의 경우에도 지난 10년 간 비정규직 비율이 하락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동년배 남성에 비해 비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많이 높은 편이다. 30대 이후 남성의 경우 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다른 모든 연령대보다 높고, 같은 연령대의 여성보다도 월등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경제활동참가율_연령별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율 추이. 성별, 연령별로 쪼갰다. 자료는 통계청에서 구했고 단위는 (%)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근로자보다는 사용자 중심으로 이해하는 편이 빠르다. 즉, 언제든지 근로자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임금을 받고 옮길 수 있는 자유로운 계약조건을 보장하는 위치라는 의미보다는 사용자가 언제든지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불안정한 지위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7년 8월 현재 비정규직의 월평균임금은 156.5만원, 정규직은 284.3만원이다. 쉽게 잘릴 수 있으니 경력이 단절되기 쉽고, 경력이 자꾸 단절되다 보니 호봉제가 주류인 한국의 기업문화에서 임금이 정규직을 따라가지 못한다. 비정규직 임금근로자의 가장 큰 어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미래를 함부로 계획할 수 없다. 집을 마련할 수도, 세간살이를 마련할 수도 없는 형편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한국의 가임기 여성은 동년배 남성에 비해 비정규직에 속할 확률이 월등히 높으며, 더 낮은 임금과 더 불안정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출생률이 증가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처우를 남성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출생률의 제고를 바랄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는 중요한 시점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경력의 단절로 이어지지 않는 장치만 마련된다면 가임기 여성이 비정규직으로 전환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여성의 직업 안정성과 평균임금 역시 급격하게 떨어지는 위험에서도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을 더 남성 의존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출생률이 장기적으로 살아나지는 않는다. 남성이 고학력일수록, 고소득자일수록 여성의 직업안정성에 상관없이 출생률이 제고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유지될거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가장 중요한 잠재적 노동생산성을 희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성이 발휘하는 노동생산성이 남성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 현재와 같은 학력수준에서라면 말이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쓸데없이 야근하는 남성의 비율과 아이의 양육때문에 바삐 일을 하고 칼퇴근해야 하는 여성의 비율을 생각해보면 답이 바로 나올 것이다. 여성을 더 독립적으로 만드는 사회구조가 오히려 출생률을 제고할 수 있다. 결혼은 더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의 문제가 됐다. 싱글맘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 대안가정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 남편이 일을 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남성과 동등한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더 낮은 처우를 감수해야만 하는 현재의 여성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출생률은 낮추는 요인이라기 보다는 장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가계소득을 증진시키기 위한 변수로 고려되어야 하고, 그래서 현재 수준보다 더 높게 증가해야 한다. 이와 함께 여성의 정규직 비율도 남성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최근 들은 국내 음반들

시간이 흐를수록 블로그에서 국내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국내 음악과의 ‘거리’ 설정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 아주 최소한의 정보라고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쓴다. 단순히 ‘존나좋군’ 정도에서 끝날 이야기라면 굳이 언어를 통해 정리된 글을 공개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보통 정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할 것인데, 국내 음악에 대해 글 을 쓸 때 바로 이 부분에서 자신감을 갖기 어렵다. 해외 음악의 경우 나의 물리적 위치가 외부자적 시선에 머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를 완전히 체득하기 어렵다는 한계와 함께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객관성을 확보하게 되는 반면, 한국에 살면서 한국에서 발매되는 한국 음악을 듣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머리나 귀보다 마음으로 먼저 듣게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블로그에 우리나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가 지우고, 썼다가 또 지우기를 반복하게 된다. 하지만 그냥 마음으로만 즐기며 살기에는 최근 국내에서 좋은 음반들이 많이 나온지라 이를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다른 말로 하면 마음부터 먼저 움직이게 되는 음악들이다.

 

김사월


김사월: 7102

김사월은 첫 음반을 발매한 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마치 한국에서 독립 음악인이 음악으로만 먹고 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절망에 담대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많은 공연장에서 노래를 불러왔다. 이건 마치 한국에서 여성으로, 또 여성 음악인으로 사는 것이 참 많이 피곤하고 불편하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적극적으로 정공법적인 대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달지만은 않은 현실을 삼켜야 했을 것이다. 김사월의 새음반은 기족의 곡들에 더해 새로운 노래들이 라이브 공연 실황녹음 형태로 담겨 있다. 김사월의 현재,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한국의 현재를 담아내기 위한 가장 좋은 형태의 음반 구성이다. 또한 포크음악 장르의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절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녀의 음악은 약간 변했다. 대중음악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무반주 독백처럼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쏟아내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도 서울을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벌써 멈추어 서서 정착하기엔 조금 더 살펴봐주었으면 싶은 마음의 구석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새소년 여름깃

새소년: 여름깃

많은 이들이 칭찬한 바로 그 새소년, 듣던대로 역시 좋은 요소들이 듬뿍 들어가 있는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실리카겔의 김한주와 함께 작업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몽실몽실한 드림팝의 색깔도 느낄 수 있어서 더 반가웠다. 내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이들의 음악을 들을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은 장르 안에서의 문법을 확실히 익히고 있는지의 여부보다는 개별 노래 안에서 확실한 훅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유전자에 가까워서 가르칠 수 없는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노력을 게을리하다가는 평생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재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새소년의 [여름깃]에서는 살짝 미소짓게 하는 좋은 훅들이 많이 보인다. 이게 소속사와 프로듀서가 가진 좋은 상업적 감각덕분인지(마이 캐미컬 로맨스가 그렇게 끌려가다 망했지..) 뮤지션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에 기인한 것인지는 다음 음반에서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자양 던전

전자양: 던전

사실 전자양의 음악을 습관적으로 많이 듣는 편은 아니다. 우선 보컬의 톤에 대한 호불호에서 나는 불호에 가까운 편이고, 이들이 내세우는 사운드의 핵심 색깔이 ‘반드시 전자양이어야만 한다’처럼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자양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그와 비슷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좋은 음악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던전]은 조금 더 전자양만이 낼 수 있는 음악에 집중한 듯한 느낌이 들어 반가웠다. 조금 덜 불편하면서도 조금 더 확실해졌다. 그래서 전자양쪽으로 조금 더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몇몇 곡들은 눈이 확 떠질 만큼 정말 좋다.

 

아도이

아도이: Catnip

아도이의 [Catnip]은 최근 가장 좋게 들은 음반 중 하나다. 리얼 에스테이트(Real Estate)의 음악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청량감 넘치는 드림팝 사운드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적절한 수준의 고민과 적절한 수준의 깊이, 적절한 수준의 정체성 등을 야무지게 뭉쳐서 적절한 수준의 대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장치를 잘 고안해낸 것 같다. 국내 음반을 들을 때 종종 느꼈던 공통적인 아쉬움이 “너무 레퍼런스가 뻔히 보인다”는 것이다. 아도이의 이번 음반은 나의 그러한 불평을 마치 꿰뚫고 있었다는 듯 정면돌파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했어. 좋으면 됐잖아.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동의하게 된다.

 

실리카겔

실리카겔: SiO2.nH2O

실리카겔의 정규 1집은 지난해 가장 인상깊게 들었던 음반 중 하나였다. 남자 멤버들의 군 입대 전 마지막으로 내놓은 EP [SiO2.nH2O]는 1집에서 정돈이 다 된 것처럼 느껴졌던 이들의 사운드가 다시 자유롭게 날뛰기 시작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들의 음악을 듣다보면 익살맞음과 서정성이 묘한 방식으로 얽혀 드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번 EP에서는 이들만의 그런 화학작용이 100% 잘 발휘되는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통일성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듣기도 힘들다. 하지만 실리카겔은 우리나라 인디씬을 말할 때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룹이고, 이 음반은 이들이 잠시 활동을 멈추기 전 내놓은 마지막 기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하면 콩쿠르같은 과정을 통해 군면제를 받을 수 있는데 왜 대중음악은 그런게 없는지 모르겠다.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아인의 애호박과 ‘당신들의’ 페미니즘

최근 유아인이 SNS 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누리꾼들과 벌인 설전이 화제가 되었다.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이 없는 단순한 말다툼이었다면 가쉽란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마무리까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은 더 거창한 모습으로 비추어져 버렸다. 트위터를 하지 않는 내가 다른 곳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담배와 트위터는 끊는게 아니라 잠시 참을 뿐이라지만 어쨌든 그쪽 세상에 발길을 끊은지 1년이 넘었다)  유아인을 특정한 한 트위터 계정이 “애호박”에 빗대어 유아인을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은 사람으로 비유했고, 이를 유아인이 직접 인용한 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고 발언한 것이 사건의 시초였다. 이후 그 트위터 계정이 여성의 소유로 밝혀지며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유아인이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실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인 진흙탕 싸움이라 특별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지만, 딱 하나 중요한 사실을 꼽자면 유아인과 그 반대편에서 유아인을 공격한 불특정 다수의 집단 모두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판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구경꾼들이 달라붙어 유아인의 정신질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의심하거나 “폭도”라는 단어 등 일부 표현에 천착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그 한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은 오히려 노동계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앞선 링크와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유아인을 여성혐오주의로 조리돌림하려는 시도는 부당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언어폭력행위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과오였다. 그렇다고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에서 유아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계층은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누리꾼 집단이다. 그리고 유아인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계층은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트위터를 중심을 활동하거나 여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분리된 누리꾼 집단이다. 양쪽 집단 모두 편협된 사고와 부족한 공감능력,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대화상대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경솔하게 무시해버려서도 안된다. 이해와 공감, 설득과 협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아인의 ‘애호박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양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이 상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다는 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여성중심주의, 혹은 여성우월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 ‘안에서’ 수정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가치는 남성중심의 편향된 사회체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며, 이 핵심 가치 아래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이해와 협의, 논의와 양보를 통해 무리없이 추진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다양한 계층에 의해 상이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르게 이해된 페미니즘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여지고 있다. 소수자 집단 간 연대의식을 거부한채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왜곡되게 차용하여 언어폭력행위를 정당화한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과오를 억지로 껴안으려 한 여성운동권의 책임일 수도 있고, 그들의 일탈행위를 마치 페미니즘의 본질인양 호도하여 여성혐오주의로 맞받아친 남성중심 사회의 과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양쪽 진영 모두 편협함과 자기중심주의라는 공통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면 공부하라”는 엘리트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며,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비난문구 역시 사라져야 할 논리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어떤 폭력행위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자만심과 함께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소수자는 소수자와 함께 연대해야 하며, 지배세력에 속한 이들 역시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 연대의 선상에 함께 서야 한다. 운동은 반드시 전문적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꼭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공감과 이해, 설득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입장과 직접경험을 초월하여 훨씬 더 폭넓고 영향력 있는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때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말이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 샤워할 때 떠오르는 창의적인 생각 중 대부분은 논문의 아이디어와 관련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듣고 보고 겪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잔뜩 얽힌 실타래처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샤워를 하며 이 경험을 생각의 책장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분리해서 보관하는 셈이다. 요즘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향상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물론, 내가 샤워를 하며 떠오른 아이디어 정도라면 이미 몇십년전부터 도서관에 책이나 논문의 형태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헌할 정도의 지적 생산물이 나오는 과정은 번개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쌓아올린 공고한 지식의 탑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기어올라가며 그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식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아주 작은 돌덩어리 하나 정도 더 얹는 것으로 지식 생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 확대, 혹은 양성평등의 제도적 확대가 거시경제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놀랍게도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경제학계야 말로 남성중심의 편향된 체계가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표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비로소 일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료를 사용하여 양성평등 문제를 경제학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다. 평생 먹거리로 삼을 만한 연구주제를 하나 큼지막하게 골라야 한다면, 박사학위 전공에서 살짝 벗어나 사회적 소수자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연구에 힘을 보태고 싶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남성이자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고학력자이자 서울출생이자 서울거주자이자 아파트거주자인, 소수자로서의 차별 경험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내가 어디까지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지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가 아예 없는 실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피스톤스의 예상치 못한 선전

지난 10년동안 디트로이트 피스톤스(Detroit Pistons)는 ‘세상 재미없는 팀’의 전형이었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고 수퍼스타를 길러내지도, 영입하지도 못했다. 구단의 소유주는 바뀌었지만 구단 운영진의 열정이 되살아난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시건 지역의 농구팬들은 경기장을 떠나 풋볼이나 하키 경기장으로 떠났고, 그 어떤 경기도 매진되지 않았다. 텅텅 빈 경기장과 4쿼터에 곧잘 따라잡히고 마는 의욕없는 경기력이 지난 10여년 피스톤스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스탠 밴 건디(Stan Van Gundy)가 새로운 단장이자 감독으로서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ESPN 트레이드 머쉰에 중독되었나 의심이 될 정도로 선수단을 빠르게 갈아엎었다. 수많은 트레이드가 행해진 결과 단기간만에 선수단은 밴 건디가 원하는 선수들로만 채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높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지난 시즌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된 선수는 팀의 주축인 안드레 드러먼드(Andre Drummond)와 레지 잭슨(Reggie Jackson)이었다. 이 둘은 부상과 불화로 팀의 근본을 흔들어놓았다. 지난 시즌이 마무리된 후 이 두 선수가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는 루머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피스톤스는 다시 무너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예상 외로(?) 드러먼드와 잭슨은 팀에 남았고, 건강하게 트레이닝 캠프를 소화했다. 밴 건디는 드래프트에서 듀크(Duke) 대학의 백인 슈터 루크 케나드(Luke Kennard)를 뽑았다. 팀이 애지중지 키웠던 3-and-D의 전형 캔타비우스 칼드웰-폽(Kentavious Calwell-Pope)을 FA로 떠나보낸 대신 또다른 젊은 육성 선수 스탠리 존슨(Stanley Johnson)과 포지션이 중첩되었던 베테랑  마커스 모리스(Marcus Morris)를 보스턴 셀틱스의 가드 에이브리 브래들리(Avery Bradley)와의 트레이드로 떠나보냈다. 드래프트에서 2번을 뽑고 트레이드로 또 2번을 영입한 행동이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차라리 모리스와 레지 잭슨을 묶어서 더 좋은 1번을 영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밴 건디는 FA로 랭스턴 갤러웨이(Langston Galloway)를 영입했다(!). 샐러리 캡을 장기간 잡아먹는 평범한 선수의 영입은 밴 건디가 보여주는 특기 중 하나다. 이미 팀에는 이쉬 스미스(Ish Smith)가 백업 가드로 자리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갤러웨이는 2번으로는 너무 작았고 1번으로는 운영능력이 부족했다. 이렇게 또 망하나 보다 싶었다. 요즘 리그가 아무리 가드의 세상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피스톤스는 시즌을 잭슨-브래들리-존슨-토비아스 해리스(Tobias Harris)-드러먼드의 주전 라인업으로 출발했다.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존슨은 슛을 쏘지 못하는 3-and-D, 그러니까 오클라호마 시티(Oklahoma City)의 안드레 로버슨(Andre Roberson)과 비슷한 타입의 선수였다. 0-and-D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했다. 브래들리 역시 3점이 없었다. 잭슨은 지난 시즌 이기적인 모습으로 팀의 화합을 해쳤다. 해리스는 3번에서는 느리고 4번에서는 약한 트위너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드러먼드는 30%대 자유투 성공률로 인해 4쿼터에 코트위에 있을 수 없음을 지난 5년 간 증명한, 반쪽짜리 선수였다. 4쿼터에 뛰지 못하는 드러먼드를 대신해주었던 애런 베인스(Aron Baynes)는 보스턴으로 떠났다. 백업가드 이쉬 스미스는 경기운영만큼 따라주지 않는 슛이 문제였다. 아무리 동부지구가 약해졌다지만 이런 라인업으로는 10,11위 쯤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팀당 약 20경기 정도를 치룬 현재 피스톤스는 13승 6패로 동부지구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정도면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어제 있었던 동부지구 1위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 원정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꽤 인상적이었다. 이 팀이 우연한 성공(fluke)을 거두고 있지 않음을, 생각 외로 단단한 경기력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음을 증명한 경기였다. 시즌 초반에는 지난 시즌 우승팀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Golden State Warriors)를 원정에서 잡아내기도 했다. 시즌 전 수퍼스타들이 한 팀에 모이는 합종연횡이 만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도깨비팀들이 많이 등장하고 팀간 격차가 해소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미스테리한 시즌이긴 하지만, 피스톤스가 보여주는 시즌 초반의 성공은 근본적인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먼저 변화의 중심에는 드러먼드가 있다. 그의 자유투 성공률은 현재 60%를 상회한다. 폼이 극단적으로 변했다. 가상현실(VR) 장치를 착용하는 등 별의별 우스꽝스러운 시도를 했던 드러먼드는 시즌 전 기간 트레이너 아이단 라빈(Idan Ravine)과의 훈련을 통해 자유투 성공률을 극적으로 상승시키는데 성공했다. 30%대에서 60%대로의 자유투 성공률 진화는 상대팀으로 하여금 더이상 드러먼드에게 고의파울을 범할 수 없게 만들었다. 4쿼터에도 코트 위에서 페인트존을 장악하며 리바운드를 걷어낼 수 있게 되었고, 효율성은 증대됐다. 드러먼드가 코트 위에 더 오래 있을 수 있게 됨에 따라 밴 건디는 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자유투 라인 바깥에서 공을 잡은 뒤 컷인해 들어가는 스윙맨들에게 공을 공급하는 패서로서의 역할이 그것이다. 덕분에 그의 경기당 어시스트 수치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새롭게 영입된 브래들리의 빠른 움직임 덕분이다. 공을 만져야만 움직이는 게으른 레지 잭슨과 달리 브래들리는 리그에서 가장 빠르게 수비수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선수이고, 이 점이 드러먼드의 볼핸들링 재능과 합쳐져 좋은 작전 몇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브래들리의 이러한 움직임은 리그에 존재하는 빅포워드 중 공없는 움직임(off the ball move)이 가장 좋은 선수 중 하나인 토비아스 해리스와 융합되어 상승작용을 더 크게 불러일으킨다. 마치 2000년대 초중반 피스톤스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던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이 재림한 듯한 모습이다.

브래들리가 팀에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은 공격 뿐 아니라 그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수비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단순히 패싱 레인을 차단하고 대인 방어를 성실히 수행하는 차원의 ‘좋은(good)’ 수비수 정도에 머물렀던 칼드웰-폽에 비해 브래들리는 통계수치로 확인되지 않는 ‘훌륭한(great)’ 수비수로서의 모습을 경기 내내 보여주고 있다. 수비면에서의 그의 리더쉽은 역시 ‘좋은’ 수비수 정도로 평가받았던 스탠리 존슨의 수비적 재능을 최대한 이끌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최종 방어선을 담당하는 드러먼드의 부담도 줄여주었다. 결국 전체적인 팀 수비능력 자체가 브래들리로 인해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애런 베인스를 대체하기 위해 영입된 에릭 모어랜드(Eric Moreland)가 리바운드와 허슬에서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해주고 있는 점도 수비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다.

공격면에서는 해리스의 성장과 이쉬 스미스의 에너지가 눈에 띈다. 해리스는 데뷔 후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몸은 한결 가벼워 보이고 3점 라인 바깥에서 충분히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번과 매치업되면 몸으로 밀어 버리고 4번과 매치업되면 가볍게 제쳐버린다. 공 없는 움직임이 워낙 좋다보니 수비가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도 자주 연출된다. 단순히 올시즌 몸상태가 좋아서 반짝한다고 하기엔 3점슛의 정확성이나 골밑에서의 마무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 눈으로 확인된다. 더 좋은 선수가 된 것이다. 그는 아직 25세에 불과하다. ESPN의 잭 로우(Zach Lowe)가 최근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했듯 때때로 젊은 선수의 성장곡선은 신인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도 급격하게 상승하기도 한다. 해리스가 좋은 예이다. 이쉬 스미스는 벤치에서 힘을 충분히 보태고 있다. 올시즌 슈팅능력이 많이 좋아지면서 여전히 비효율적인 레지 잭슨을 적절히 코트 밖으로 밀어내고 충분한 출전시간을 확보하였다. 현재 피스톤스가 10점차 이상 뒤쳐졌을 때 이를 따라잡고 역전시킨 경기가 리그에서 가장 많은데, ‘추격조’의 선봉에 서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역할을 수행하는 선수가 바로 이쉬 스미스다. 정적인 공격에 특화된 레지 잭슨의 적절한 대체재로 기능하는 셈이다.

레지 잭슨은 여전히 레지 잭슨이다. ‘건강한’ 잭슨이라는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잭슨의 스타일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플레이오프 진출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와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공격에서 리그 최정상급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수비에서 구멍과도 같은 짐이 되고 있다. 그의 클러치 능력은 과대평가되었다. 경기 내내 말아먹어서 따라잡히다가 막판에 빅샷 한두개 터뜨린 뒤 좋아하는 모습에 속에서 열불이 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밴 건디에게 잭슨은 올랜도 매직(Orlando Magic) 시절 자미어 넬슨(Jameer Nelson)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슈터에게 적절한 시점에 공을 공급하고 빅맨과의 투맨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우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그의 흐름은 그 당시와 달리 코트의 각 구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포지션의 구분 역시 급격하게 파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포인트 가드는 공을 운반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난 대신 적극적으로 골밑을 공략하고 빅맨과 스위치되어도 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는 임무를 새롭게 부여받게 되었다. 잭슨은 최근 흐름과 상반되게 지나치게 공을 오래 소유하고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고, 힘이 그리 센 편도 아니다. 이런 유형의 선수로 리그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워싱턴(Washinton Wizards)의 존 월(John Wall)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잭슨의 이러한 성향은 슈터들의 움직임을 최대치로 살려내지 못하고 빈 공간을 적절하게 찾아내지 못하게 만든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잭슨은 피스톤스의 가장 큰 불안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시즌의 중반을 통과한 지점에서 피스톤스가 여전히 동부지구 상위권에 위치할 수 있을까? 드러먼드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자유투 성공률 60% 이상을 기록할 수 있을까? 레지 잭슨의 무릎은 언제쯤 다시 주저앉을까? 루크 케나드와 스탠리 존슨은 언제쯤 효율적인 슈터로 발전할 수 있을까? 언제쯤 우리는 헨리 엘렌슨(Henry Ellenson)이 앤소니 톨리버(Anthony Tolliver)를 제치고 벤치에서 처음 나오는 포워드가 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까(언제적 톨리버냐 대체 언제적!)? 이 팀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현재와 같은 팀의 선전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며, 이러한 팀의 발전이 우연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4쿼터까지 끈끈하게 달라붙는 모습을 시즌 마지막까지 보여준다면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관건은 드러먼드를 얼마나 코트 위에 오래 세워둘 수 있을 것이냐, 3점 라인 밖에서의 효율적인 슈팅 관리가 지속적으로 가능할 것이냐, 이쉬 스미스 외에 벤치에서 나와 흐름을 바꾸어줄 디퍼런스 메이커(difference maker)가 존재하느냐 정도로 보인다. 어쨌거나 이 팀이 예전보다 훨씬 재미있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세상 재미없는 팀’에서 꽤 주목해서 보아야할 팀 정도로 성장한 느낌이 들어 뿌듯하다.

면접에서 깨달은 것들

어제 개인 사정으로 잠시 반차를 내고 일을 본 뒤 짬을 내어 면접을 하나 봤다. 민간그룹 산하 연구소였다. 발표를 잘 하지는 못했다. 많이 더듬거렸고, 중간에 내용을 까먹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 것도 많았다. 어제 집으로 돌아와서 잠들 때에도, 오늘 아침에도 계속 어제 면접에서 실수한 것들이 떠올라 스스로를 자책했다. 면접 당사자가 이렇게 명확하게 인지할 정도면 심사위원들은 바닥까지 훑어 내려갔을 것이다. 이미 떨어진 것은 기정사실처럼 느껴진다.

면접의 실패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왜 실패했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우선 어제 와이프가 정확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절실함이 없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당시 첫직장은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곳에 취직하지 못하면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었고, 타는 듯한 절실함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올해 초 첫직장에서 나올 때에도 그에 못지 않게 절실했다. 연구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는 환경에서 마치 생명줄이 끊어진 듯한 비참함을 느꼈고, 지금의 직장에서 뜻밖의 오퍼가 왔을 때 하나의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한번의 취직과 한번의 이직과정에서 ‘플랜B’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직장에 들어가거나 더 나빠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번에는 케이스가 조금 달랐다. 우선 현 직장이 나를 죽일 듯이 괴롭히지는 않는다. 이 직장이 보여주는 비전이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고 고용도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당장 어디론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적당한 업무량 사이를 비집고 열심히 짬을 내면 개인연구도 어느정도 할 수 있다.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봉급과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마음 한켠에 늘 불안감을 갖게 하지만, 어차피 평생직장은 아니라는 생각에 미래를 위해 꾸준히 연구성과를 쌓는다면 어디로든지 갈 곳이 없겠냐는 낙관적인 생각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말 내가 원하는 직장에서 면접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는 어제와 같이 안일한 자세로 임하면 안되겠다고 느꼈다. 왜 면접을 보는지, 왜 이직을 원하는지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 어제의 면접은 생명력을 잃은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심사위원들에게 절실함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어필은 없을 것 같다.

이와 함께 아직 나의 내공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느꼈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은 내 발표를 듣다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식 수준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한 나머지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제 밤 샤워를 하면서 그 질문들이 다시 떠올랐고 충분히 괜찮은 답변도 함께 떠올랐다. 좋은 답변을 그 자리에서 즉시 할 수 없었던 것은 단순히 순발력 부족에 따른 불운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에 충분히 학문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인 참사였다. 책장 한켠에는 아직도 배달되어 온 학술지들이 포장도 뜯겨지지 않은채 쌓여 있다. 공부를 게을리 하는 학자는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곡학아세를 하던가 룸펜이 되던가 해야 한다. 나는 둘 다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을 조리있게 하되 그 말이 세상에 인정을 받고 선의를 의해 쓰이는 모습을 경험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공을 더 많이 쌓아야 한다. 그 내공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좋은 논문을 써야 한다. 퇴근 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아이돌 방송을 보고 있을 게으름 따위는 아직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 그 사이 또 많이 나태해진 것이다. 이번 면접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다잡아야겠다. 2018년 이맘때에 똑같은 후회를 다시 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정말 더이상 발전이 없다는 절망감을 현실로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켄지 요시노: 커버링

커버링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소수자 집단 중 대표성을 가지는 집단을 꼽아보자면 여성, 장애인, 소수인종, 성적소수자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어느 나라에나 반드시 존재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히 평등한 대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되고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금지법이 강화되는 등 국가에 따라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가 선진화되는 흐름을 엿볼 수 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사회에서 이들 소수자 그룹은 아직도 다양한 차원의 차별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차별’의 개념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억압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화, 또는 진화해왔는지 관찰하는 작업은 소수자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켄지 요시노는 일본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아시아인이었던 요시노는 미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았지만 부모의 방침에 따라 방학마다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문화도 익혀야 했다. 다문화 사회에서 소수인종이 받는 차별보다 요시노에게 개인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성적 정체성 문제였다. 남들과 다른 성정체성을 부모를 포함하여 그가 속한 사회에 고백하는 과정에서 그는 집단 내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후 하버드, 옥스퍼드, 예일 등에서 수학한 뒤 성공한 법학 교수이자 유명 소수자인권 활동가로 살아오며 요시노는 소수자의 민권을 억압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폭력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 고민의 결과를 일반 대중을 위해 쉽게 풀어쓴 첫번째 저작이 바로 [커버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커버링(covering)’은 비주류, 혹은 소수로 낙인찍힌 개인에게 사회가 가하는 억압의 세번째 단계다. 첫번째 단계는 ‘전환(conversion)’의 요구다. 비교적 최근까지 동성애는 의학계에서 정신질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동성애가 치료 가능한 대상이라는 의미였기에 당시 많은 동성애자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성애자로 전환되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동성애 행위는 불법으로 인식되었고 동성애자들은 공개적으로 처벌받았다. 이후 의학계를 중심으로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사회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존재의 인식’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억압의 두번째 단계는 그래서 ‘패싱(passing)’이다. 최근까지 논란이 되었던 미군내 규율인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규정이 대표적인 패싱 사례다. 이는 군내 동성애자를 식별하기 위한 공식적 조사행위를 금지하되,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군인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규정이다. 패싱은 주변에 소수집단이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욕망의 그릇된 발현인 셈이다. 이 패싱으로 인해 많은 소수자들이 명시적인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법은 최근까지 이 패싱을 옹호해 왔다. 이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거세지고 소수자들의 집단적 행동과 이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더해져 소수자들이 다수자들과 명시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태어난 세번째 억압의 단계가 바로 커버링이다.

커버링은 조금 더 교모한 형태로 행해진다. 소수자를 명시적으로 차별하지 않지만, 소수자로 하여금 그가 속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되기를 강요한다. 노멀(normal) 동성애자와 퀴어(queer) 동성애자 집단 간 논쟁이 좋은 예다. 노멀 동성애자는 동성애자 간 결혼의 합법화를 지지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차별없이 동등하게 누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쪽이다. 퀴어 동성애자는 역사적으로 결혼은 이성애자 간 결합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편향된 사회적 장치로 기능해왔으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자만의 사회적 표현이 존재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쪽이다. “너는 참 여성스럽게 행동하는구나. 자연스러워”와 같은 말도 커버링을 강요하는 폭력의 한 형태가 된다. ‘여성스러움’을 은연중에 강조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고정관념을 떠안기를 강요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커버링의 사회적 결과는 조직 내 관리자급 이상의 직위를 획득한 여성 중 상당 비율이 출산 경험이 없다는 통계 자료에서 잘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출산을 포기해야 하며, 이렇게 출산(‘여성의 고유한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낮은 단계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주장 역시 그래서 커버링의 한 형태가 된다. 아이를 낳고 낳지 않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영역에서 결정될 사안이다. 그리고 그 결정과정에서 사회적 억압이 존재하면 아니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소수자 개인과 그가 속한 다수자가 지배하는 사회 사이에 맺어지는 불평등 계약관계를 조망하며 다양한 판례를 예시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 판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아주 가끔 일본의 판례도 등장하긴 한다) 우리나라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현재 더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정에 법적장치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긴장관계를 완화해야 한다는 저자의 의지는 확실히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방식을 통해 논리전개과정을 보다 쉽게 전달한다. 그의 경험과 판례를 번갈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전환-패싱-커버링으로 이어지는 억압의 세 단계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빈약하다. 2006년에 처음 발표된 이 책에 이어 요시노는 2016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세번째 책인 [Speak Now: Marriage Equality on Trial]을 발표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젠더 이슈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나 싶다. [커버링]은 소수자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다수자를 위한 책이다. 체험하지 않았기에, 체득하지도 못한 다수자는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이러한 폭력행위에 대해 최소한 글을 통해서라도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 소수인종에 대한 멸시, 여성에 대한 억압, 장애인에 대한 무시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는, 소수자 민권의 사각지대와 같은 나라다. 다수자들의 반성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버링]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지적으로 아주 잘 쓰인 책이다.

Mogwai: Every Country’s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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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한번이라도 들어본 모과이(Mogwai)의 음반을 세어보았다. 대충 짐작해보아도 8,9장 정도는 넉넉히 들어본 느낌이다. 모과이는 단 한번도 나의 ‘최애’ 뮤지션이었던 적이 없다. 포스트록으로 장르를 국한지어도 항상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이나 익스플로전스 인 더 스카이(Explosions in the Sky)의 이름이 이들 앞에 먼저 나왔다. 심지어 모노(Mono)의 음반 몇 장을 더 인상깊게 들었다고까지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과이보다 더 많은 수의 음반을 내 선반에 꽂게 만든 동시대 뮤지션은 찾기 힘들다. 상 중 으뜸상이 개근상이라고 했던가. 모과이는 내가 음악을 처음 듣기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었다. 내 음악듣기 인생의 개근상같은 밴드다.

이들은 4,5년에 한 장씩 음반을 발표하는 천년기념물같은 밴드가 아니다. 2년, 아니 어쩌면 1년에 한장씩 새로운 음반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첫번째 정규음반 [Young Team]을 1997년에 발표한 뒤 20년 가까이 활동을 한 이 스코틀랜드 출신 밴드의 모든 정규음반 수는 (라이브 음반과 영화음악까지 합치면) 16장에 이른다. 보통 음반을 준비해서 발표하고 투어를 돌면 2,3년의 시간은 훌쩍 지나기 마련이다. 거기에 개별적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개인활동을 하게 되면 음반과 음반 사이 간격이 4,5년씩 벌어지는 것도 그리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모과이는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근면성실하게 음악을 만들어왔다. 정말 놀라운 점은 그렇게 정력적으로 많은 음악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모과이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음반을 매년 발표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구매목록에서 쉽게 삭제되지도 않는다. 늘 구미를 당기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또 실제로 지갑을 열어 이들의 새 음반을 구매하게 만든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정도 수준의 창작력을 꾸준히 보여주었던 뮤지션이 얼마나 있나 세어본다면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모과이는 최근 새음반 [Every Country’s Sun]을 발표했다. 영화음악을 제외하면 2014년작 [Rave Tapes]이후 3년만이다. 밴드의 첫 출발부터 함께 했던 기타리스트이자 주축 멤버였던 존 커밍스(John Commings)가 탈퇴한 이후 발표하는 첫번째 음반이기도 하다. 무언가 큰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과이의 열렬한 팬이 아닐 것이다. 20년동안 모과이는 늘 모과이의 음악을 해왔다. 슈게이징의 끝물이 세상을 휩쓸 때에도, 핌프록같은 선정적인 음악이 세상을 지배할 때에도, 말랑말랑한 기타팝이 인디씬을 휩쓸 때에도 모과이는 모과이의 음악을 해왔고, 모과이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해왔다. 이번 음반에서도 마찬가지다. [Hardcore Will Never Die, But You Will] 이후 조금씩 감지되어 온 새로운 ‘리듬’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모과이 음악이 주축으로 자리잡은 것 정도가 표면적으로 느껴지는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1997년 데뷔 음반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트랙이 발견될 정도로 이들이 유지해온 고유한 감정, 혹은 음악적 공간감은 일정한 수준 안에서 잘 간직되어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꾸준함이 정체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음반은 ‘올해의 음반’ 목록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파괴력은 없다. 하지만 모과이의 오랜 팬들의 귀를 즐겁게 할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도 별다른 고민없이 지갑을 열었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얻었다.

Joshua Redman & Brad Mehldau: Near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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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먼(Joshua Redman)과 피아니스트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의 협연은 90년대 초반 레드먼 쿼탯 투어에 멜다우가 참여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이 두 명의 음악가는 우정을 나누어오며 서로에 대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2011년 본격적으로 하나의 팀을 이루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들의 음악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Nearness]는 두 재즈 음악가의 유럽 투어 실황을 녹음은 라이브 음반이다. 스페인, 스위스, 독일, 노르웨이, 네덜란드에서 가진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이 실려있다.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곡들도 들어있고 두 음악가가 직접 작곡한 현대적인 노래들도 들어있다. 재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조차 이 두 음악가가 공연에서 성취한 경지가 매우 높은 수준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음반을 듣다 보면 레드먼과 멜다우가 연주를 통해 매우 재미있고 치열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멜다우가 리드미컬한 피아노 연주를 트랙을 열면 레드먼이 격렬한 섹소폰 연주로 회답한다던지, 레드먼이 작곡한 섹소폰 위주의 트랙에 멜다우가 자신만의 색깔로 피아노 소리를 덧칠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연주는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몇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지겹지 않고, 거기에 더해 몇번을 더 반복해서 듣고 싶게 만든다.

마이크 밀스: 우리들의 20세기

우리들의 20세기
[비기너스] 이후 마이크 밀스가 내놓은 새로운 영화 [우리들의 20세기]는 [비기너스]에서  단단하게 구축된 밀스의 영화적 세계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1979년 산타바바라를 배경으로 세명의 여성과 두명의 남성이 한 집의 공간을 나누어 쓰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노산으로 늦게 출산한 아들을 홀로 키우는 중년여성의 집에 세들어 사는 젊은 사진작가, 늙은 자동차 수리공,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짝사랑하는 소녀가 만들어내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웃기지만 어쩌면 슬프기도 한 에피소드를 어렵지 않은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독백을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나가거나 서사가 흘러가는 와중 몽타주 기법의 사진 활용법 등 감독 특유의 영화적 언어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눈부시도록 쨍한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온화하게 담아내는 따뜻한 화면과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서 어깨가 약간 처진 등장인물의 뒷모습을 세심하게 포착해내는 감독의 마음씀씀이도 여전하다. 3,40년대 재즈음악에 대한 감독의 여전한 애정에 더해 이번 작품에서는 70년대말 펑크씬에 대한 감독의 취향까지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블랙 플랙보다는 토킹 헤즈다!)

앞서 말했듯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세계는 전작에 비해 조금 더 넓어졌다. [비기너스]를 관심있게 본 사람이라면 마이크 밀스가 가지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놓치지 않았을텐데, [우리들의 20세기]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여성성과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전작에서 게이 아버지를 둔 주인공의 회상씬에 잠깐씩 등장하며 묵직한 여운을 남긴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번 작품에서는 진짜 주인공으로 큰 비중을 부여받아 활약하는 느낌이다. 전작이 마이크 밀스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의 20세기]는 밀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그가 겪은 여성의 다양한 이미지를 20세기라는 특정 시대에 투영하여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영화는 포스터에 등장하는 세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녀들을 경험한 어린 남자가 여성을 알아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한때 히피로 살며 자유주의를 만끽했지만 여성과의 진실된 교감에 실패하여 결코 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늙은 남자가 인생을 정리해가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독백에 참여한다. 과거회상임을 전제로 다양한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화자는 마이크 밀스 한명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남성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아마도 영화의 개별요소를 차별하지 않는 솔로몬적 공평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본인의 이야기를 여러 인물들의 여러 상황에 맞게 변주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에 따라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어린 남자아이의 성장기로도 읽힐 수 있으며 20세기 미국사회를 관통하는 시대극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로 흥미롭다.

아네트 베닝, 그레타 거윅, 엘르 페닝 등 배우들의 연기도 무척 뛰어나다. 배우와 늘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데 능한 감독이니만큼 이번 영화에서도 배우의 연기는 발군이다. 글을 적다 보니 감독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감독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드는 것이 사실인데, 최근 몇년 간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가 [비기너스]여서 그런지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들의 20세기]도 무척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