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의 애호박과 ‘당신들의’ 페미니즘

최근 유아인이 SNS 상에서 불특정 다수의 누리꾼들과 벌인 설전이 화제가 되었다.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이 없는 단순한 말다툼이었다면 가쉽란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사건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마무리까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은 더 거창한 모습으로 비추어져 버렸다. 트위터를 하지 않는 내가 다른 곳들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담배와 트위터는 끊는게 아니라 잠시 참을 뿐이라지만 어쨌든 그쪽 세상에 발길을 끊은지 1년이 넘었다)  유아인을 특정한 한 트위터 계정이 “애호박”에 빗대어 유아인을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은 사람으로 비유했고, 이를 유아인이 직접 인용한 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라고 발언한 것이 사건의 시초였다. 이후 그 트위터 계정이 여성의 소유로 밝혀지며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고, 유아인이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실 지저분하고 비논리적인 진흙탕 싸움이라 특별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지만, 딱 하나 중요한 사실을 꼽자면 유아인과 그 반대편에서 유아인을 공격한 불특정 다수의 집단 모두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판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말과 글로 먹고 사는 구경꾼들이 달라붙어 유아인의 정신질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의심하거나 “폭도”라는 단어 등 일부 표현에 천착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차원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그 한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균형잡힌 시선은 오히려 노동계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생각도 앞선 링크와 비슷한 맥락 위에 있다. 유아인을 여성혐오주의로 조리돌림하려는 시도는 부당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언어폭력행위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과오였다. 그렇다고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이번 사건에서 유아인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계층은 소위 남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누리꾼 집단이다. 그리고 유아인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계층은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트위터를 중심을 활동하거나 여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활동하는 분리된 누리꾼 집단이다. 양쪽 집단 모두 편협된 사고와 부족한 공감능력,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대화상대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경솔하게 무시해버려서도 안된다. 이해와 공감, 설득과 협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아인의 ‘애호박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양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직도 많이 상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갈등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에 대한 이해가 상이하다는 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이 여성중심주의, 혹은 여성우월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 ‘안에서’ 수정주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페미니즘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가치는 남성중심의 편향된 사회체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며, 이 핵심 가치 아래 다양한 의견과 입장을 이해와 협의, 논의와 양보를 통해 무리없이 추진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다양한 계층에 의해 상이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자신과 다르게 이해된 페미니즘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모습까지 보여지고 있다. 소수자 집단 간 연대의식을 거부한채 미러링이라는 방식을 왜곡되게 차용하여 언어폭력행위를 정당화한 일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의 과오를 억지로 껴안으려 한 여성운동권의 책임일 수도 있고, 그들의 일탈행위를 마치 페미니즘의 본질인양 호도하여 여성혐오주의로 맞받아친 남성중심 사회의 과오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양쪽 진영 모두 편협함과 자기중심주의라는 공통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르면 공부하라”는 엘리트주의도 배격해야 할 대상이며,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비난문구 역시 사라져야 할 논리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그 어떤 폭력행위도 정당화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의 자만심과 함께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소수자는 소수자와 함께 연대해야 하며, 지배세력에 속한 이들 역시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 연대의 선상에 함께 서야 한다. 운동은 반드시 전문적 지식의 습득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꼭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공감과 이해, 설득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입장과 직접경험을 초월하여 훨씬 더 폭넓고 영향력 있는 운동이 시작될 수도 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때 창의적인 생각이 샘솟는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말이 된다고 한다. 나의 경우, 샤워할 때 떠오르는 창의적인 생각 중 대부분은 논문의 아이디어와 관련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듣고 보고 겪은 다양한 사회현상을 잔뜩 얽힌 실타래처럼 집으로 가지고 오면 샤워를 하며 이 경험을 생각의 책장 속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분리해서 보관하는 셈이다. 요즘에는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향상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을 어떻게 계량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한다. 물론, 내가 샤워를 하며 떠오른 아이디어 정도라면 이미 몇십년전부터 도서관에 책이나 논문의 형태로 보관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헌할 정도의 지적 생산물이 나오는 과정은 번개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쌓아올린 공고한 지식의 탑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조금씩 기어올라가며 그 흔적을 손으로 더듬어 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식의 탑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아주 작은 돌덩어리 하나 정도 더 얹는 것으로 지식 생산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 확대, 혹은 양성평등의 제도적 확대가 거시경제변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은 놀랍게도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경제학계야 말로 남성중심의 편향된 체계가 공고하게 자리잡은 대표적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비로소 일부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자료를 사용하여 양성평등 문제를 경제학적 시선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다. 평생 먹거리로 삼을 만한 연구주제를 하나 큼지막하게 골라야 한다면, 박사학위 전공에서 살짝 벗어나 사회적 소수자의 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연구에 힘을 보태고 싶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 나는 남성이자 이성애자이자 비장애인이자 고학력자이자 서울출생이자 서울거주자이자 아파트거주자인, 소수자로서의 차별 경험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내가 어디까지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있는지 드러내는 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의미가 아예 없는 실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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