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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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빌뇌브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그을린 사랑] 이후 흥미로운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프리즈너스]를 거쳐 [시카리오]와 [컨택트]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다양한 장르에서 균일한 완성도로 발현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그 결과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감독 대열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자 리들리 스콧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고 원작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해리슨 포드가 데커드 역으로 돌아온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쩌면 빌뇌브의 영화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는 원작 [블레이드 러너]의 말끔한 속편이자 빌뇌브의 필모그래피가 첫번째 절정에 도달했음을 선언하는 과시적인 작품이다.

우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시각적, 청각적으로 경쾌하고 유려하다. 원작의 이미지를 스토리 진행에 맞춰 계승, 발전시켰음은 물론 원작이 가지고 있는 느린 템포의 호흡까지 그대로 가져와 이 영화가 전작의 완벽한 속편임을 여러 측면에서 증명하고 있다. 주인공 K역을 맡은 라이언 고슬링의 표정과 의상은 원작의 데커드와 로이를 반반 섞은 캐릭터의 설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고, 주된 배경이 되는 LA나 월러스사 내부의 경우도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따르는 범위에서 빌뇌브의 취향을 적절히 반영한 세련되고 정제된 형태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청각효과 및 배경음악 역시 무난한 수준으로, 반젤리스의 음악처럼 압도적인 느낌은 없지만 원작의 분위기를 ‘복사’하는 과정에서 충실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이러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통해 원작의 느낌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 과정에서 빌뇌브 특유의 미니멀한 이미지 구현 역시 꽤 근사하게 성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갖는 미덕은 여기까지다. 빌뇌브는 자신이 구축한 필모그래피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을린 사랑]부터 시작된 반전에 대한 강박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되어 아마도 그의 근작들 중 가장 한심한 형태의 반전을 가진 얄팍한 서사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원작의 주제의식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온다는 점은 최근 블록버스터 속편 영화들의 수준과 비교하면 충분히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원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중심 주제의식은 빌뇌브가 얼마나 주변적이고 기술적인 감독인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는 레플리컨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중심 줄거리는 사실 뻔하지만 그만큼 묵직할 수 있다. 다만 빌뇌브는 이 중심 서사구조에 ‘출생의 비밀’과 ‘(충분히 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억지로 하게 되는) 착각’, ‘(전통적인 혈연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가치를 설파하는) 가족의 사랑’같은 질나쁜 양념을 첨가함으로써 그 무게감을 확연히 떨어뜨리고 있다. 그의 서사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컨택트] 감상평에서도 한 바 있는데, 빌뇌브가 가진 좋은 장점들, 예컨대 유려한 이미지 구현이라던가 탁월한 긴장감 조성, 흥미로운 캐릭터의 구축과 같은 감독으로서 가지는 소중한 재능들이 억지스러운 서사의 진행과 이미지의 과잉 전시에 따른 지루한 이야기 진행에 막혀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건 긴장감이 시종일관 팽팽하게 이어지는 [시카리오]나 주인공 역할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의 호연에 정신이 팔려 쉴 틈이 없었던 [컨택트]에서는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은 빌뇌브의 단점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2시간 40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고 이 중 상당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질나쁜 양념들을 위해 할애되고 있다.

영화 내내 일관되게 이어지는 이미지와 분위기는 앞으로도 SF영화 장르를 이야기할 때 계속 언급되어야 할 정도로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예술 장르다. 굳이 기승전결이 분명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말이 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빌뇌브는 이야기에서 실패하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실패하고 있다. 라이언 고슬링은 영화 내내 멋짐을 폭발시키지만 영화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빌뇌브의 영화를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떠오른다. 두 감독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감독으로 떠오르며 나름의 공고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올리는 중이다. 그리고 그 한계 역시 분명한 감독들이다. 이 둘이 종이 아닌 횡으로만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관찰되어 흥미롭다. 아마도 이들이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일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전통적인 장르 위에 자신이 발전시킨 독보적인 색깔을 입힘으로써 감독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속한 장르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 이 작업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2 thoughts on “드니 빌뇌브: 블레이드 러너 2049

    • 감사합니다 ^^; 많은 분들이 좋게 보셨고 저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큰 감동을 받을 수 없어 고민을 좀 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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