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름휴가 간단 정리

1. 우리의 여행은 대부분(프랑스 남부, 남해, 제주도, 그리고 짧은 창원행까지 ) 둘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본능적인 기대감, 혹은 신남(excitement)에 의존하여 행선지와 일정이 결정되어 왔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는 파노라마 페스티벌을 본다는 핑계로 뉴욕에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아내의 샌프란시스코 연수 일정이 갑자기 잡혀 버리는 바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서부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베가스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계획하면서 그랜드 캐년 일대를 돌아보려고 생각했지만 더운 여름 날씨때문에 포기했다. 결국 요즘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뜨는” 도시인 포틀랜드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선선할 것으로 예상된 미 북서부 일대를 돌아보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과정에서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아래와 같이 진행됐다.

“뉴욕에서 페스티벌 보고 윌리엄스버그 근처 구경할까?” “너무 좋을 것 같아!!”

“그랜드 캐년 어때? 아름다운 자연..” “너무 좋을 것 같아!!”

“포틀랜드에서 힙스터들의 삶을 체험해볼까?” “너무 좋을 것 같아!!”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2. 베가스는 아내와 나 모두 두번째 방문이었다. 미국 각지에서 오는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다. 거의 항상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행기표와 호텔, 그리고 밤 늦게까지 즐길 수 있는 안정적인 요소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부담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관계를 유지하는 에너지가 워낙 부족한 탓에 인생 전체를 통틀어 친구를 많이 두지 않은 편인데, 6년간의 미국생활에서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1년에 한두번씩 미국에 갈 때마다 버선발로 마중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친구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 뿐이다. 22살에 우리를 처음 만난 K는 어느새 서른살이 되었고, 20대 중반에 이들을 처음 만난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가장 저렴한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며 길거리 위에서 낄낄거렸다. 노는 방식은 늘 똑같다. 아내와 친구들을 서로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이번 여행의 첫번째 목적도 달성되었다.

아내는 지난 첫번째 방문 때 경험하지 못한 쇼를 하나 보고싶어 했다. 우리가 선택한 쇼는 [Le Réve], 프랑스어로 꿈이라는 뜻인데 원형의 무대를 중심으로 물 속과 물 위, 그리고 공중에서 펼쳐지는 서커스였다. 서사구조는 단순했지만 베가스에서만 볼 수 있는 화려함의 극치를 맛볼 수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맞물려 들어갈 때 보여줄 수 있는 한 극단을 체험한 것 같다.

베가스는 매우 더웠다. 그리고 너무 미국적이었다.

3. 베가스에서 2박을 하고 포틀랜드로 날아가 3박 4일을 보냈다. 포틀랜드에서 우리는 최대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침은 늦잠을 자느라 대부분 건너 뛰었고, 좋은 커피와 건강한 음식, 맛있는 맥주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포틀랜드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캐넌 비치(Cannon Beach)였다. 지금까지 가 본 그 어떤 해변가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Coava Coffe의 맛도 잊을 수 없는데, 지금까지 한국에서 마셔본 그 어떤 좋은 커피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에 와서 원두 한봉지 정도는 사와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짦은 기간 포틀랜드에 머물며 받은 첫 인상은 주류 백인사회 안에서 다양성이 최대한 보장된 곳이라는 것이다. 이 곳에는 다인종이 만드는 다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흑인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고 스패니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시애틀과 엘에이의 영향 탓인지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듯 보이는 아시아인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 문화가 동등하게 대접받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오로지 주류 백인사회 안에서 조금 더 극단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어렵지 않게 정착할 수 있는 개방적인 사회적 공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물론, 진보적인 백인이 점령하고 지배하는 도시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아마 미국의 다른 대부분 도시들보다 훨씬 살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인에게 친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외부인을 쉽게 이웃으로 받아들여줄지는 의문이다. 포틀랜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훨씬 더 극단적인 백인-진보 세력의 집결지인 볼더에서 몇년 간 살면서 느꼈던 감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볼더와 포틀랜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회적 공기 안에서 느껴지는지 여부라고 본다. 볼더는 상대적으로 훨씬 순박하다. 히피적인 여유로움이 도시를 지배한다. 이에 반해 포틀랜드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 비슷한 공기를 가진 도시가 서울이다.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동산시장 버블과 젠트리피케이션이 포틀랜드에서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나눈 주요 대화주제 중 하나가 ‘미국에 살기’였다. 미국에서의 거주 경험이 있는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적지 않다. 물론, 이제 우리는 더이상 어리지 않기에 미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에 비해 그리 나쁘지 않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 인정할 정도로 등과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 모국을 떠나 미국에 거주하려 한다면 지금까지 누렸던 수많은 ‘디폴트’ 혜택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갖는 불리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에서 살고자 하는 확고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내는 이번 여행에서 그러한 부분을 정리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포틀랜드가 적지 않은 힌트를 준 것 같았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오리지널’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도시가 주는 매력은 분명해보였고 그녀는 이 도시가 보여주는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우리가 미국에서 살고자 한다면 아마도 이와 비슷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포틀랜드 시내에 위치한 포틀랜드 주립 대학은 비주류 경제학의 요람이다) 여유로운 문화를 원하는 나에게는 너무 빠르고 거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미국에서 이정도의 관용을 보여주는 도시도 흔치 않겠다 싶었다.

Heathman Hotel에 묵었는데 작은 방을 잡아서 그런지 지나치게 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4. 포틀랜드에서 차를 몰아 네시간 쯤 걸려 도착한 곳은 이번 여행의 최종 종착지인 시애틀이었다. 나는 몇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곳에 한번 와본 적이 있다. 당시 크리스마스 당일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아 발을 동동 구르다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두시간 쯤 걸려 교외에 있는 한인마트에 가서 끼니를 때웠던 경험이 있는 도시다. 첫 방문인 아내를 위해 수산시장(Pike Place Market) 옆에 호텔을 잡았고, 이틀의 시간만 주어졌기 때문에 수산시장과 스페이스 니들, 팝문화 박물관 등 주요 관광지 위주로 다녔다.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도착한 첫째 날 저녁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부랴부랴 뛰쳐나와 달려가서 본 말리 출신 뮤지션 Amadou & Mariam 의 공연이었다. 저녁식사를 먹으며 볼 수 있었던 일종의 디너쇼였는데, 서버가 우리의 주문을 잊어버려 식사가 한시간이나 늦게 나왔고 그렇게 나온 식사마저도 맛이 별로 없어서 공연 전체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뻔 했으나 이 할아버지 할머니 듀오의 공연이 너무 흥겹고 좋아서 아내와 함께 신나게 춤을 추며 놀 수 있었다. 나름 잔잔한 영혼의 흐름을 유지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에게 아내의 ‘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이번 여행에서도 그녀에게 건강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많이 넘겨 받을 수 있었다.

팝문화 박물관(Museum of Pop Culture)에서는 데이빗 보위가 72~73년 지기 스타더스트로 분하던 당시 전담 사진기사였던 믹 롹(Mick Rock)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가장 화려했던 시절의 보위의 사진들을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5. 어른이 된 후에도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깨고 나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재적으로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위기가 찾아오려 하던 즈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요즘 내 에너지의 원천이다. 전에 목도하는 못한 새로운 성질의 에너지를 매일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다. 그 과정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이번 여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떨어져 있던 한달동안 몸과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지쳐버렸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녀를 통해 새로운 동기를 부여받았다. 그것이 우리가 장기적으로 꿈꾸는 미국행이든, 단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또다른 즐거운 여행이든 상관없다.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게끔 하는 에너지가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Rose garden

장미공원(Rose Garden)

Coava

코아바 커피(Coava Coffee Rosters)

cannon beach

캐넌 해변(Cannon Beach)

bowie1

데이빗 보위 특별전(David Bowie by Mick Rock Exhibition)

2 thoughts on “2017년 여름휴가 간단 정리

    • 덕분에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여유롭고 편안 여행을 가보고 싶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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