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울만: 동급생

동급생
내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 앤드루 포터는 아이오와 작가협회에서 퓰리처상 수상자인 메릴린 로빈슨(Marilynne Robinson)을 사사했다.  포터가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후 “소설의 첫 문장에 가장 많은 공을 들여라. 그 문장이 작품을 대변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항상 마음에 두고 집필활동을 한다고 밝힌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다(읽었는지 팟캐스트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거의 모든 픽션을 접할 때마다 작품의 첫 문장을 유심히 읽게 된다. 작품을 처음 접할 때의 첫 문장이 어떤 색을 띠는지,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첫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등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좋은 첫 문장을 가진 작품은 긴 시간동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게 되더라.

1971년 처음 출판된 이 짤막한 중편 소설(novella) [동급생]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 

이후 르누아르, 혹은 고갱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게 묘사되는 도시에서 그보다 더 아름답게 펼쳐지는 두 소년의 우정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위의 첫 문장이 그저 성인이 된 한 남자의 기억 속에 이쁘장하게 자리잡은 기억의 한 조각 정도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오니즘의 광기어린 유대인 사냥과 그로 인해 갈갈이 찣겨진 소설 속 화자의 가족 이야기를 담담히 전해오는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 다다랐을 때 이미 독자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급기야 마지막 문장에 다다르면 위의 첫 문장이 완전히 새롭게 읽히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작품의 마지막 문장과 첫 문장의 마술적인 호응에 의해 소설의 크기, 혹은 차원이 완전히 달라지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저 호감어린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어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십대 시절의 풋풋한 감정, 수채화처럼 묘사된 두 소년이 살아간 도시, 마냥 아름다울 것만 같던 서사를 헝클어 버리는 암울한 시대적 환경, 그리고 그 시대를 버티어 낼 수 있게 만든 두 소년의 우정.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문장을 손으로 한땀 한땀 더듬어가며 다시 읽게 된다. 소년은 소년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화자가 기록하지 않은 그 빈틈들 사이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의 삶 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떠나지 않음으로 인해 숭고한 인간성은 그렇게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일까. 책을 덮은 후 많은 것을 천천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동성애혐오의 경제적 비용

동성애혐오 문제는 전세계적으로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골치아픈 일이지만, 우리나라에 국한하여 동성애혐오자들의 정신세계를 탐구해보는 일은 나름의 독특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유교 근본주의, 불교 근본주의에 더해 개신교 근본주의까지 더해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가 상당한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고 한발 더 나아가 동성애자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위 등 실질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위험요인으로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내 일이 아니면 절대 나서지 않는다’는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과 정책 당국자의 개인적인 ‘입장'(개신교 신자라던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 동성애혐오자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강력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결국 연구자들이 앞장서서 한국식 동성애혐오론이 갖는 논리적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논파해나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심리학이나 사회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혐오로 인한 경제적 비용을 추산하는 작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미 캐나다에서 2001년 발간된 정책보고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The Cost of Homophobia: Literature Review of the Economic Impact of Homophobia on Canada], submitted by Christopher Banks, submitted to Gay and Lesbian Health Service, 2001.)

위의 보고서는 동성애혐오, 혹은 성적소수자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받는 피해를 경제학적으로 추산한 작업들을 모아놓은 서베이페이퍼다. 방법론은 간단하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인해 성적소수자들이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리지 못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만약 이들이 동등한 의료혜택을 누렸다면 얻게 되었을 효과를 추정함으로써 역산하는 과정을 거친다. 환경경제학이나 보건경제학처럼 어떤 정책, 혹은 집단적 행위의 경제적 효과를 직접적인 통계자료로 추산하기 어려운 경우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보고서는 성적소수자들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 혐오로 인해 “일반적인” 이성애자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사회적인 장벽으로 인해 성적소수자에게 필요한 의료행위가 적시에 제공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한 지표는 자살률, 흡연률, 기대수명, 우울증, 실업률, 범죄율, 에이즈 발생률 등 8가지 항목이다. 보고서는 만약 호모포비아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성적소수자들이 나타내는 위 8가지 지표의 수치와  “일반적” 이성애자들의 수치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에서 거의 동등하게 나타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추정한 호모포비아의 연간 경제적 비용은 다음과 같다.

homiphobia costy

예를 들어 자살률의 경우, 2001년 캐나다 기준으로 호모포비아가 발생하는 경제적 비용이 약 8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호모포비아가 없었다면 더 적은 성적소수자가 자살했을 것이고, 이들이 만약 살아서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영위했을 경우 발생하는 경제적 순효과가 연간 8억 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결과를 두고 “동성애혐오자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라고 주장해도 사실 그리 크게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회에 발생시키는 경제적 비용은 정확히 추산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다. 성적소수자가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다는 통계도 없고, 더 열등한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도 없다. 오히려 동성애결혼 합법화 등이 발생시키는 경제적 순효과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성적소수자들을 ‘양성화’시킬 때 그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일부 종교인의 심리적 ‘불편함’ 정도일 것이다. 이건 거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무시되어야 한다) 이에 반해 성적소수자들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이들에게 동등한 사회적, 의료적 혜택을 부여할 때 돌아오는 경제적 효과는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상당한 수준이다. 더 나아가, 성적소수자와 같은 극단적으로 소외받는 계층을 사회적 장치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환경에서는 대부분의 소수자, 약자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에게 사회적 혜택을 적극적으로 베푸는 사회가 빈민층이나 장애인에게 인색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즉, 사회복지의 전체적인 ‘bar’ 자체가 한단계 높아지는 효과도 추가적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dbpia나 kiss, kipris 등 국내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동성애 혐오를 경제적 효과와 연결짓는 논문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분명 누군가는 관심을 가지고 있을텐데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것이라고 믿고 싶다.

ESPN 30 For 30 Podcasts: A Queen Of Sorts

포커플레이를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필 아이비(Phil Ivey)의 이름을 한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포커 월드시리즈(World Series of Poker, WSOP) 등 굵직한 대회에서 거의 매년 결승 테이블까지 올라가는 그는 카드놀이 하나로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은 이 바닥의 수퍼스타다. 백인 너드가 주류인 포커게임계에서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을 날리는 흑인 플레이어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상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커 게임계의 타이거 우즈 쯤 되는 위치로 보인다.

그런 그가 2012년 제법 큰 송사에 휘말렸다. 미국 아틀란틱 시티에 위치한 보가타(Borgata) 호텔과 영국 크락포즈(Crockfords) 호텔이 그가 부정행위를 통해 카지노에서 부당이득을 취했다며 소를 제기한 것이다. 두 호텔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아이비는 소위 ‘edge sorting’이라고 불리우는 기술을 이용하여  수백만달러를 획득했으며, 이 기술이 부정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금의 지급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 아이비 측은 물론 강하게 반발했다. 자신은 카드에 손을 대지도 않았고 부정한 정보를 취득하지도 않았으며 다른 플레이어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게임을 즐겼을 뿐이라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을 가를 핵심은 이 edge sorting이라는 기술이 부정행위인지에 대한 판단여부였다.

edge sorting은 카드의 뒷면에 있는 무늬가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다는 점을 파고든 카드 분별법이다. 즉, 특정 카드 제조자의 제품의 경우 카드 뒷면에 배치된 문양의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다를 수 있다. 이 뒷면의 미세한 차이를 순간적으로 캐치해낼 수 있다면 앞면을 확인한 카드를 임의로 분류해낼 수 있다. 즉, 자신이 원하는 카드를 180도 뒤집어 놓는다면, 다음에 그 카드가 다시 나왔을 때 카드의 뒷면만으로 판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영상은 이 트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필 아이비가 두 카지노에서 했던 게임은 ‘바카라’였다.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카지노측 딜러와 플레이어가 대결하는데 두 장의 카드를 받아 그 합이 9에 가까운 사람이 승리한다. 승률은 당연히 50%에 가깝다. 아무런 ‘행위’가 없다면 말이다. 필 아이비는 이 단순한 게임에 도전해 카지노를 상대로 수백만달러를 따냈다. 처음 몇 판을 이기고 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카드를 뒤집어 제출하기만 하면 다음에 그 카드가 나왔을 때 자신이 이길지 질지 거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당시 필 아이비가 카지노측에 요구했던 조건이 몇가지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아이비는 특정 제조사의 카드만을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아이비 정도 되는 거물급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사항이다. edge sorting이 가능한 카드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기계를 이용하여 카드를 섞어주기를 요청했다. 아이비가 타겟으로 설정한 카드의 ‘방향’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이 또한 카지노측은 수용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인 딜러를 요청했다. CBS의 유명 시사 프로그램인 [The 60 Minutes]에서 필 아이비를 인터뷰하며 바로 이 부분-중국인 딜러 요청-에 대해 물었을때 그 때까지 당당하고 유창하게 말하던 아이비의 눈동자가 갑자기 흔들리며 말을 더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당 부분은 12분 경부터 나온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아이비가 “my companion”이라고 표현한 사람, 즉 당시 아이비와 함께 두 카지노에서 수백만달러를 획득한 동행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켈리(Kelly Cheung Yin Sun),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다. 보가타 호텔이 소속되어 있는 MGM에 의해 카지노 대금을 다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 3주 간 교도소 생활을 하고 나온 그녀는 끔찍한 경험을 선사한 대형 호텔에 대한 복수극을 준비한다. 그녀는 edge sorting의 대가였다. 몇달 간의 준비로 더 완벽한 기술을 연마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로부터 필 아이비를 소개받고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주모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커 스타 필 아이비가 아니라, 얼굴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중국인 여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필 아이비를 ‘이용’하여 카지노의 가장 큰 판에 자리잡을 수 있었고, 앞서 이야기한 조건들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중국인 딜러는 영어에 서툰 켈리가 편하게 이런 저런 요구사항들을 전달할 수 있는 창구였던 셈이다. 물론 중국인 딜러는 철저하게 카지노의 규칙에 맞게 일했다. 카지노의 검색관들은 아이비와 켈리가 앉은 판을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모니터링했다. 카지노측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비와 켈리는 수백만달러를 며칠만에 따내고 유유히 사라졌다.

과연 켈리와 아이비가 벌어들인 이 큰 돈이 부정행위에 의한 것인가, 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이비측은 ‘명예’가 커리어의 거의 전부인 그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부정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다. 더 나아가 아이비와 켈리가 요구한 사항들을 카지노측이 흔쾌히 수용했다는 점도 판결을 어렵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그들은 카지노 측이 정한 환경 하에서 온전히 켈리의 ‘눈’만을 이용해 수백만달러를 가져가는 대승을 거뒀다. 그들은 게임 과정 중 딜러에게 “순전히 미신적인 이유로” 특정 카드를 180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법원은 이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즉, 카드를 180도 돌리고 나면 edge sorting 등에 의해 더이상 바카라의 기본 규칙이 지켜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켈리는 자신이 “완벽하게 게임을 컨트롤할 능력이 없다”며 당시 몇분만에 수백만달러를 잃은 적도 있음을 그 증거로 제시했지만, 2016년 12월 뉴저지 법원은 필 아이비에게 보가타 호텔로부터 획득한 상금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재 아이비측은 항소를 한 상태다.

켈리는 MGM 계열 호텔로부터 영구 진입금지 처분을 받았지만 지금도 이곳 저곳을 다니며 카드게임을 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한차례 공개된 적이 있지만 너무나 평범한 외모이기에 여전히 많은 호텔의 입구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만약 필 아이비가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면 켈리의 복수극은 헤피 엔딩으로 끝맺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녀의 복수극은 카지노 산업의 ‘확률 싸움’에 한 개인이 가진 초인적 능력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측정하는 실험 정도로 기억될 것이다.

Cheng_yin_sun

ESPN 30 For 30 Podcasts: The Fighter Inside

ESPN에서 방영하는 [30 for 30] 시리즈는 현대 스포츠 역사의 굵직한 순간들, 혹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목할만한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미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어서 DVD나 블루레이 형태로도 발매가 되었고 여러 형태의 컬렉션 아이템도 발매되었다. (정작 이 시리즈를 기획한 사람 중 한명인 빌 시먼즈는 HBO로 쫓겨난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이번에 ESPN의 자회사(?)격인 538의 조디 애버간(Jody Avirgan)이 주축이 되어 팟캐스트 형태로 다섯편이 제작되어 첫번째 시즌을 마쳤다. [The Fighter Inside]는 그 중 마지막 편이다.

1947년 뉴저지 뉴아크에서 태어난 제임스 스캇(James Scott)은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노출된 삶을 살았고 13세 때부터 교도소를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19세때 처음으로 복싱을 접했지만, 진지하게 복싱에 임한 것은 강도 혐의로 Rahway State Prison에 수감되고 나서부터였다. 뉴저지 교도소는 수감자의 재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감옥 내에서 복싱을 가르치고 있었다. 제임스 스캇은 자신의 방에서 하루 천번의 푸쉬업과 첫번의 싯업을 하며 체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1974년 가석방되어 마이애미에서 정식으로 프로 복싱 세계에 입문한다. 그곳에서 열 번을 이겼고 한 번을 비겼다. 하지만 강도혐의가 확정되고 추가로 살인혐의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스캇은 다시 뉴저지 교도소로 돌아오게 된다. 세간의 그에 대한 관심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라이트헤비급의 강자로 떠오르던 그가 다시 수감자의 신분이 되면서 WBO는 고민에 빠졌다. 그는 엄연한 프로 복서였고 다른 선수들이 그와 경기를 갖기를 원했다. 하지만 수감자가 프로 복싱 경기를 가졌던 전례 역시 없었다. 대중은 비난과 지지 양쪽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결국 제임스 스캇의 경기는 라웨이 교도소에서 벌어지게 된다. 그 곳에서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에디 그레고리(Eddie Gregory)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이겼고, 멕시코 출신 절대강자였던 야키 로페즈(Yaqui Lopez) 역시 판정승으로 제압했다. 하지만 WBO는 그의 랭킹을 없애버렸고, 스캇에게 지급되어야 할 대전료를 한푼도 주지 않았다. 이는 WBO가 죄수의 신분으로 챔피언이 되고 돈을 버는 모습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감옥에서 가진 모든 경기는 NBC와 CBS, HBO 등에서 생중계되었지만,  ABC는 WBO와 마찬가지 이유로 중계를 거부했다. 스캇은 이러한 불리한 여건에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제임스 스캇은 그가 ‘무패’의 전적을 계속 유지한다면 WBO도 결국 그에게 챔피언 결정전 기회를 허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아직 건재하고 여전히 복싱을 하고 싶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당시 무명이었던 제리 마틴(Jerry Martin)에게 업셋 패배를 당하며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해 9월 한 때 라웨이 교도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드와잇 브랙스턴(Dwight Braxton)에게 한번 더 패배하면서 대중의 관심은 차갑게 식어갔다. 1981년 3월, 살인혐의가 확정되어 제임스 스캇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드와잇 브랙스턴과의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제임스 스캇은 수감생활을 시작한지 28년이 지난 2005년 석방되었다. 이후 2012년 뉴저지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현재 여동생과 함께 뉴저지 근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당시 그는 치매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인터뷰가 불가능했다. 다만,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스캇은 자신의 복싱 경기 영상을 여러번 돌려 보았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의 목소리를 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어떤 단어를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거친 쇳소리 외에는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정확하게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당시 인터뷰를 진행한 나레이터나 함께 살고 있는 누이도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I never lost”가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제임스 스캇이 경기 장면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좋은 화질은 아니지만 당시 공중파에서 생중계되었기 때문에 경기 전 인터뷰를 포함한 모든 라운드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위 영상은 에디 그레고리와의 경기 영상인데, 라스 베가스의 화려한 특설링과는 달리 어둡고 좁은 공간에 링이 설치되어 있는 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의 초창기 경기는 라웨이 교도소 수감자들도 관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엄청난 환호와 야유가 쏟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x9788934972204
일전에 ㅈㅎ씨와 “몹시 덥고 습기로 가득한 일본의 여름날씨를 마치 뽀송뽀송하고 상쾌한 것처럼 포장하는” 일본영화의 특성에 대해 농담조로 성토한 적이 있다. 한국보다 미세먼지가 적게 배출되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속 일본의 여름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맑아보인다. 강한 햇살을 받아내는 거리와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위에 찌들어 지친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10년 전 GRE 시험을 치루기 위해 함께 도쿄를 찾은 당시 스터디 멤버는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며 차분히 가라앉은 일본의 도시풍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뜻 보이는 일본의 거리는 조용하게 정리되어 있다. 사람들은 말 없이 빠르게 서로를 스쳐지나간다. 상대방에게 어떻게든 영역표시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시선에서 일본사회의 풍경은 솔직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많은 한국인 독자들의 평처럼 담백하고 잔잔하다. 존경하는 건축가가 운영하는 건축사무소에 들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사무소의 일상을 함께 체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작가의 풍부한 배경지식과 꼼꼼한 묘사에 힘입어 마지막까지 일정한 호흡을 유지한다. 마치 나오코 오기가미의 영화들, 예컨대 [카모메 식당]이나 [안경], 혹은 오모리 미카의 [수영장]과 같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여름 일본의 풍경이 선선하거나 담백할리 없지만,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단단한 내공에 의존한 유려한 문체덕분일 것이다. 담담하지만 끈기있게 이어지는 만연체의 문장들 속에서 독자들은 어쩌면 잠시 공기좋은 산자락 어딘가로 피서를 떠난 듯한 느낌을 받았을런지도 모르겠다.

다만, 주변의 많은 호평과 달리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이 작품이 태생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보수성이 불편했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영화적인 이 작품의 성격에서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높은 습기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듯한 일본영화의 화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다. 주인공 역시 수동적인 것은 마찬가지이긴 하다. 대부분의 캐릭터가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일본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보수성이 삶의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뭍어나온다. 소설은 두시간짜리 영화로 만들면 딱 좋은 서사구조와 규모를 가지고 있다.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은 풍부한 건축 배경지식 설명 정도일텐데, 이 부분은 픽션이라기 보다는 논픽션에 가까운 영역이라 이조차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이 썩 매끄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중 화자인 주인공의 독백 부분에서 습관적으로 구어체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현재형과 과거형 어미를 한 문단에서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원문이 정말 이런 표현들을 사용한 것인지, 반드시 필요한 표현이었는지 궁금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딱히 필요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없다.

Ken Loach: I, Daniel Blake

i-daniel-blake-poster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 모두 영화의 서사적 특성을 십분 발휘하여 영화만이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이다. 다르덴 형제가 영화의 윤리적 기능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철학가라면 켄 로치는 영화의 사회적 기능을 담대히 활용하는 사회운동가에 가깝다. 즉,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고민을 강요한다면 켄 로치의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작가의 영화가 미학적으로 훌륭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모든 영화에서, 화면이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그 내용에서부터 우러나온다는, 기의를 부여받은 새로운 기표의 탄생을 확인할 수 있는 호사 역시 누릴 수 있다.

[I, Daniel Blake]는 캐릭터의 이름 앞에 “I”라는 1인칭 주어를 다시 한번 강조하여 새겨넣음으로써 주체성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한다. 이 주체성은 캐릭터의 것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이기도 하며, 영화를 본 관객에게 전달되는 어떤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영국의 형편없는 사회보장제도를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가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현 사회체계의 전복을 꿈꾸기 보다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받고자 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사회주의 영화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켄 로치 특유의 노동자 사회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은 여전히 살아있다. 또한, 연대하는 노동자 집단과 억압하려 드는 기존 지배구조를 대립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운동가적 기질이 여전히 영화 속에 짙게 배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또다른 축인 미혼모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감이 없지 않지만, 그녀가 다니엘 블레이크의 탄원서를 대신 낭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연대의 연속성을 확장적으로 보여주는 점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 오랜만에 거장의 단단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백: 뷰티인사이드

뷰티인사이드
예술작품에 대한 나의 기호는 대체로 평론가들의 그것과 일치하는 편이다. 어쩌면 평론가의 시선으로 예술작품을 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대하는 나의 감정이나 입장보다는 작품을 만든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작품이 사회, 문화, 공간 따위의 환경과 어떻게 어우러지는 지에 집중한다. 그런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작품을 접할 당시 내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일 수 있고,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의 역사’ 중 유난히 민감한 지점을 강하게 건드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평론가들의 평이나 대중의 관심과 상관없이 그저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생기게 된다.

최근에는 [뷰티인사이드]가 그랬다. 아마도 절대 주머니에서 내 돈을 꺼내지 않게 만든 포스터와 시놉시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감독, 딱히 챙겨보지 않는 주연배우들.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반복적으로 상영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 않았을 작품이다. 케이블 영화채널을 통해 보게 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러하듯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집중해서 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영화의 후반부부터 보기 시작했고, 몇개월 뒤 영화의 중간 부분을 볼 수 있었고, 또 몇개월 뒤에는 영화의 초반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한 호흡으로 확인한 것은 네번째로 이 영화를 접한 어제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영화는 사실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매일 신체가 변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창조한 고유한 세계도 아니다. 시종일관 어떻게 하면 이뻐보일까를 고민하는 화면과 머나먼(그리고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는!) 체코까지 가서 결국 이어지고야 마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이 영화가 추구하는 방향이 그리 깊은 철학적 담론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때때로 지루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얻어 걸린’ 듯한 장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대부분 한효주가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에너지 과잉이 알파요 오메가인 한국 영화 판에서 절제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그녀의 연기만이 이 영화가 차별화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점이자 이 영화가 가진 거의 유일한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서 한효주의 연기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전 작품인 [동이], [광해], [반창꼬], 혹은 이후 작품인 [해어화]에서 보여준 모습이 기존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너지 과잉의 일차원적 캐릭터라는 점에서 어쩌면 [뷰티인사이드]에서 감독의 디렉션이 꽤나 훌륭한 것은 아니었는지 추측해보게 된다. (혹은, 그만큼 여성 캐릭터를 다층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힘이 한국영화계에 부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한효주가 연기한 이수라는 캐릭터는 다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성장해나가는 유일한 캐릭터이자 영화의 감정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는 점에서 영화의 정체성 자체가 현현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나레이션은 거의 대부분 남자 주인공 우진이 맡고 있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매일 신체구조가 변하는 애인을 눈 앞에 둔 이수의 복잡한 심정이 부각되면서 우진은 관찰자적 시선으로 한발 물러선다. 애인이 가진 비밀을 받아들이기 위해 겪었던 혼란,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당찬 모습, 이후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서 떠나고 다시 돌아와 용기를 내는 모습까지, 영화는 이수의 심리적 변화를 통해 “있을 때 잘해라”라는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이 메시지가 매우 통속적이긴 해도 그만큼 강렬하기도 한 것이어서, 빠르게 떠나보내야 하는 상대방의 ‘어제’에 집착한 나머지 ‘오늘’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전해진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롯이 한효주의 연기 덕분이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효주의 이런 모습은 다시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더욱 희귀한 경험으로 남게 될 영화다.

Jlin: Black Origami

jlin
데뷔 음반 [Dark Energy]로 시카고 풋워크씬의 판도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디애나 출신 프로듀서 Jlin의 두번째 음반 [Black Origami]는 시카고, 혹은 풋워크, 혹은 하우스라는 특정 지역과 특정 장르 안에 그녀의 음악을 묶어 두기에는 그녀 자신이 이미 너무 커져버렸음을 선언하는 하나의 징표로 읽힌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퍼듀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음악을 업으로 삼기 전까지 철강정제소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로 지낸 그녀의 독특한 경력이 어쩌면 흑인, 여성, 노동자라는 계급적 자아를 음악 속에 충실히 녹여낼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Black Origami]는 음악 그 이상의 강렬한 어떤 하나의 생명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극소수의 테마를 변주해가며 완벽한 음반의 구성을 유지해 내는 것도 신기한데 정신없이 몰아치는 리듬과 그 사이로 툭툭 뛰어드는 보컬(이라고 하기엔 하나의 외침, 혹은 중얼거림)만으로 음악이 줄 수 있는 극한의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세계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한다. 아마도 제일린은 현대 음악이 갈 수 있는 최전선을 개척하고 있는 혁명가이자 음악 안에서 음악 그 이상의 세계를 펼쳐내고 있는 궁극의 멀티 아티스트일 것이다. 그녀가 선사하는 ‘불편함’은 우리가 얼마나 공고히 구축된 보수적인 세계에 길들여져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선물일 수 있다. 이건 예술이 사회에 공헌하는 가장 훌륭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경제학자 수백명이 달라붙어도 하지 못할 ‘느낌의 전달’을 음반 한장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몇십년 뒤 우리가 2017년 음악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고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음반이다.

최저임금 인상 재원 마련을 위한 부자증세

평균임금상승률보다 월등히 높은 최저임금상승률을 정부 주도하에 인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그 효과를 고려할 때 정책적으로 많은 부담이 따른다. 우선 최저임금을 적용받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하는 고용주의 수익현황을 참고해야 한다. 사용자가 충분한 이익을 내고 있음에도 근로자에게 최저임금에 상응하는 수준의 임금만을 지불하고 있는지, 혹은 이들 기업의 최적임금이 최저임금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즉, 지금 이 정책의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이 정책이 사실상 한계기업을 다수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한다고 정치권이 인정하는 셈이다. 만약 노동비용을 과소하게 지불하는 노동시장이 넓게 존재한다면, 대부분의 기업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큰 손실이 발생할 이유가 없으며, 최저임금을 큰 폭으로 인상하는 것은 지금까지 왜곡되어 왔던 최저임금을 정상화시키는 좋은 정책이 될 수 있다. 만약 영세업자가 근로자에게 최저임금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 혹은 두명이 나누어서 해야 할 일을 한명에게 과도하게 몰아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영세업자는 최저임금의 직격탄을 맞게 되어 부도위험, 즉 shut-down point 아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경우 한계기업이 부도가 나지 않는 수준까지 기업의 수익을 인위적으로 높여주거나 손실을 보전해주어야 한다. 즉 실제 기업의 재정건전성을 shut-down point 이상으로 올리기 위해 정부의 세금이 지원되어야 한다. 현 정부는 이를 위한 재원을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마련하겠다고 한다. 조세에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과세 대상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조세정의, 혹은 조세의 목적이 달성되기에 부적절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부자에게 세금을 더 떼어서 최저임금의 인상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영세한’ 자영업자를 도와준다는 것이니 평등을 강조하는 정부의 철학이 이 정책 안에서 대체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다. 우리나라 자영업자가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비용 두가지는 임대비용과 노동비용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비용은 지나치게 낮고 임대비용은 지나치게 높다고들 이야기한다. 노동비용이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인구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언제든지 쉽게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비숙련 노동자의 경우 특히 더 그렇다. 건물임대비용이 높은 이유는 좁은 면적에 많은 사람이 살기 때문에 건물이 사람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땅, 혹은 건물을 보유하는 기회비용이 거의 무한대로 올라간다. 요즘같은 저금리, 저성장 시대에 흑사병 등에 의해 수천만명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임대수익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투자처를 찾기란 쉽지 않다. 건물의 소유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수익은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해 더 안정적인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다.

높은 임대비용과 낮은 노동비용 중 낮은 노동비용이 정부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상승할 수 밖에 없다면 임대비용은 낮아질 것인가? 대체로 그렇지 않다. 정부의 바램대로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 전체의 소비 활성화로 이어진다면, 자영업자의 수익도 늘어나서 결국 임대료도 함께 상승하게 될 것이다. 최저임금이 소비촉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경기가 극단적으로 나빠지고  특정 지역의 소비가 급감하는 현상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그 지역의 평균 임대료가 낮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과 같은 대도시 시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임대업자는 공실을 감수하고 임대료의 하방경직성을 견디어낸다. 한두달 건물을 비우더라도 임대료를 낮춰서 신규 세입자를 유치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기업이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고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은퇴를 강요당한 중장년층이 새로운 근로소득자로 재취업하지 못하고 자영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이 바닥의 경쟁은 극심하고, 누군가 망한다면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빠르게 치고들어갈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건물주 입장에서 공실을 걱정할 이유도 사실 별로 없다. 임금이 경기변동에 받는 영향보다 임대료가 받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대도시가 갖는 특수성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이 대도시와 그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국 거의 모든 경우의 수에서 최저임금 상승의 최종 수혜자는 건물주, 혹은 임대사업자가 된다. 영세업자는 중간에서 정부의 지원을 건물주에게 전달하는 채널로만 기능할 것이고,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높은 월세를 지불하며 생존을 위한 삶을 지속할 것이다. 거주지 임대료 역시 상업지 임대료 상승과 발맞추어 함께 상승할 것이므로. 최저임금의 경우 임금 전체평균보다 빠르게 상승하고는 있지만, 이들의 삶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중위소득자에 비해 월등히 높다. 즉 300만원 벌어서 50만원을 월세로 지출하는 사람이 느끼는 고통보다 150만원 벌어서 35만원 월세로 지출하는 사람이 받는 고통이 훨씬 클 것이다.

그렇다고 최저임금 인상이 나쁜 정책은 아니다. 최저임금은 분명 더 올라야 한다. 최저임금은 근로소득자가 영위해야 하는 최소한의 삶의 질을 정의하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적 합의문이다. 이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를 약속하는지 명시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사회의 경제적 철학을 나타내는 중심 지표로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없다. 결국 최저임금의 인위적 인상을 버티어내는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인데, 이를 위해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부자’의 정의를 조금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으며, ‘최저임금’의 정의도 조금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 ‘부자’보다는 ‘전문 임대소득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임대수익률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것이 최저임금을 높이는 것보다 경제적 평등을 위한 더 좋은 수단일 것이다. 임대수익에 대한 과세를 큰 폭으로 인상하여 부동산 시장을 위축시켜 버리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다. 시중에 신용이 너무 많이 풀려 있고 이것이 부동산시장에 쏠려 있기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이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 (이쯤에서 깨알 홍보..) 조심해야 할 부분은 임대소득자에게 과세되는 세금이 그대로 임대료에 반영되어 결국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임대료의 상승률을 인위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근원물가상승률, 혹은 최저임금의 상승률의 일정 범위 내에서 임대료 상승률을 묶을 수 있다면 임대사업자에 대한 증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투기적 임대사업으로 인한 리스크를 막는 목적을 위해서라도 대출 공급을 제한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금융기관이 ‘건물주 꿈나무’에 공급하는 신용에 한해 추가적인 자본을 요구하는 방식 등으로 감독이 가능하다. 즉, 건물주가 되고 싶으면 자기 돈으로 하라는 소리다. 중앙은행이 부동산시장을 띄우기 위해 금리를 낮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중앙은행의 설립목적에도 맞지 않는다. 투기적 임대사업자에게만 더 강한 LTV, DSR 등을 적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사적으로 LTV, DTI 등이 강하게 적용될 때마다 부동산 시장은 빠르게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투기적 임대사업자’를 어떻게 식별해내느냐다. 이는 시중은행에 대한 강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금융당국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은행이 보유한 방대한 신용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최저임금을 지역별, 업종별로 차등화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서울의 임대료는 아산의 임대료보다 비싸다.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자영업자의 상황도 판이하게 다르다. 교촌치킨 금호점 박사장님 고용하는 배달 알바생과 서부지검 근처 김변호사님이 고용하는 알바생은 겹치지 않을 것이다. 그 지역의 부동산시장 및 노동시장의 특성에 맞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젊은이가 고시원에 묵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천안에 사는 알바생이 지불하는 투룸 가격보다 비쌀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이 최저임금 노동자에게 보다 많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핀포인트로 운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최저임금 노동자의 생활패턴과 소비패턴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느끼는 거주비용 부담감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중위소득자의 그것에 비해 더 높다. 장기적으로는 임대주택을 다량 공급하거나 정부 주도로 임대사업을 실시하여 거품을 뺀 가격으로 주거공간을 마련해주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최저임금에 더해 현물로 교통카드나 식품권을 추가로 공급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인이 최소한 섭취해야 하는 쌀과 김치, 우유와 빵 등을 공급하여 식비를 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단기 계약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대출 등을 통해 레버리지를 할 수도 없다. 미래가 없는 이들에게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을 짜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저축을 할 수 있을까? 저축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어떻게든 만들어주어야 한다. 하다 못해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는 증빙서류를 가져오면 담배를 공짜로 준다던지 하는 식으로  이들의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높여 주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해외 취업이라도 알선해 주던가!

김애란: 바깥은 여름

김애란 바깥은여름
김애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녀는 장난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다른 목적을 위해 글을 희생하지도 않는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진짜 글을 쓴다는 확신이 든다. 그것은 그녀의 시선이 소설 속 인물들에 계속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이 그러하듯, 김애란도 작품 속 인물의 삶 중 한 부분만을 떼어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이지만 그 인물이 그 전에 살아온 삶,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해서도 시선을 쉽게 거두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지려 한다. 이것이 그녀의 소설을 단지 기교나 표현의 영역에 한정하여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바깥은 여름]은 사랑하는 어떤 것, 혹은 강하게 존재했던 어떤 것과 멀어지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아이를 잃은 부부, 남편을 잃은 아내, 언어를 잃은 영혼, 개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 아들의 순결함을 의심하게 되는 엄마, 오랜 애인을 떠나야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어 상실로 끝나기도 하고, 외로움으로 시작되어 낙담으로 끝나기도 한다. 모든 작품의 마지막에 남는 감정은 공통적으로 쓸쓸하다. 김애란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유머가 한결 줄어들었다. [침이 고인다], [달려라, 아비] 시절 알면서도 뻔뻔하게 모른척하며 지었던 한줌의 미소조차 사라졌다. 한결 어두워졌다. 어쩌면 많은 매체에서 주목하듯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려다 함께 죽은 교사의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문학적인 반응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간의 유머조차 죄책감으로 되돌아오는 참담한 상황에서 김애란 역시 웃음을 의도적으로 거두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펄떡펄떡 뛰는 인물들의 생생한 숨소리는 여전하다. 우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비행운]의 “그 곳에 밤 여기에 노래”에 등장하는 ‘용대’와 비슷한 존재감을 뽐내는 “노찬성과 에반”의 찬성이가 있다. 이 가난한 소년은 늙은 개를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현실의 벽과 유혹 속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단 돈 몇천원의 들락날락거림에 갈등하는 그의 영혼은 사랑하는 개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

김애란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결코 에둘러 표현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시선에 조미료를 첨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음직한 상황을 설정한 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담히 기술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이 건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녀의 시선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그 낮은 자리를 비추고 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므로, 그 인물들의 삶 역시 계속 지속되고 있을 것이므로, 비록 피곤한 오늘을 사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그들에게 따뜻한 안부를 물어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을 수 있기에 더더욱, 김애란 그 자신이 조금 더 지긋한 시선으로 조용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