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고등학교

나는 외고 출신이다. 당시 학교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외고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학교 중 하나여서인지 그 나름의 전통과 학풍은 충실히 경험하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전통과 학풍”이라 해서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교사를 봐도 그러려니 해야 하고 학생을 성추행하는 교사에 대해 학무보들이 단체로 항의해도 해당 교사를 같은 재단에 있는 다른 학교로 보내는 것 이상의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운영 방침,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8개, 혹은 9시의 수업이 이어지지만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야간 자율학습을 ‘자율’적으로 빠질 경우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나는 사제 관계, 고등학교 3학년 시간표에 미술과 체육 등 수능과 관계 없는 과목은 완전히 제거되며 전공어 수업 시간조차 ‘자율학습 시간’으로 변이되어 국어나 수학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신축적인(?) 수업 운용방식 등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그 학교의 오래된 전통이자 학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방식으로 운영된  학교가 매년 내세웠던 유일한 마케팅은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문대에 진학시킨 학생수였다. 물론 이들 대학교로 진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어문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을 선택했고, 학교는 심지어 “외고에도 이과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가지 했다. 이에 더해 일반적으로 어문계열보다 높은 수능 커트라인 점수를 기록하는 상경, 법학 계열에 진학한 학생수를 따로 추려내어 자랑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대학 잘 보내는 고등학교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언어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단’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에 외고 출신이 굳이 어문계열에만 지원해야 하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제대로 가르치지조차 못했다는 현실이 이러한 반론의 기본 가정부터 흔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외고는 처음부터 외국어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었고, 현재도 분명히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외고는 처음부터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 하나만을 대박내기 위해 짜여진 커리큘럼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이중 소수의 더 ‘나은’ 외국어고등학교는 SAT등 외국의 수능ish한 시험까지 정복하며 명문대 진학률을 극대화시켰다. 외고로 똑똑한 아이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들이 외국어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러한 욕망을 달성했고, 내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거나 자살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어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을 수능 점수를 받아들고 재수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외고 설립 정책은 과학고의 경우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과학’이라는 쉽게 특정할 수 없는 넓은 카테고리를 가질 수 있었던 과학고 정책은 이들이 의대에 가든 공대에 가든 자퇴를 해서 회사를 차리든 설립목적에 어긋난다는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외국어고는 그렇지 않다.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외국어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 자체가 모호할 뿐더러 외국어 교육의 페러다임은 언제든 시장에 빼앗길 수 있다. 외고에 입학하는 학생 중 상당수가 이미 영어에 능통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도 우스운 모순인 것이다. 더 나아가 백번 양보해 외국어 영재를 육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성장할지, 어떻게 쓰여질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운영되어 왔다면 사실상 교육의 성과를 측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 목표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지역에 관계 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명문고가 되어 버리는 한국의 현실에서 일반고에 앞서 학생을 선발할 특권이 있는 이들 외고가 수능점수와 명문대 진학률에 마케팅을 올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외고에서 외국어 교육은 뒷전이다. 엄연한 현실이다. 서울대 법대에 가장 많이 진학시키고 사시 합격을 가장 많이 시키는 출신학교 중 상당수가 외고라는 사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법조인으로 살 기 위해 외국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어의 극치라는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스페인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범인을 잡기 위해 어려운 문법의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가? 코메디가 따로 없다.

나는 물론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오래 공부했다. 하지만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영어로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지난 1월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에 갔는데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외고 프랑스어과 출신이다. 내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익힌 외국어기술은 모두 대학교 입학 이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외고에서의 경험 중 지금까지도 내게 도움을 주는 것들은 당구 실력과 스타크래프트 실력 정도다. 대체 거기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2 thoughts on “외국어고등학교

  1. 저는 외고 출신은 아닙니다. (빅토르 안이 제 선배님이십니다.) 허나 중학교 시절을 외고 진학에 매진한 입장에서 뭔가 남일같지 않아 댓글을 남깁니다. 당시에는 매우 절망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떨어진게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제 친구들과 지금 저의 진로를 생각하면 말이죠. 뭐, 모든 사람들이 저와 같지는 않겠지만요.

    P.S 주 종족이 어디신가요? 저는 테란입니다. 뭐, 강민의 영향으로 토스를 하던 시절도 있지만요.

    • 전 랜덤입니다. 고등학교 3년을 오롯이 스타에 바쳤다면 랜덤 정도는 선택해줘야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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