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고등학교

나는 외고 출신이다. 당시 학교 분위기가 좀 거시기하긴 했지만 외고 중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된 학교 중 하나여서인지 그 나름의 전통과 학풍은 충실히 경험하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전통과 학풍”이라 해서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교사를 봐도 그러려니 해야 하고 학생을 성추행하는 교사에 대해 학무보들이 단체로 항의해도 해당 교사를 같은 재단에 있는 다른 학교로 보내는 것 이상의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운영 방침, 아침 7시 30분부터 오후 늦은 시간까지 8개, 혹은 9시의 수업이 이어지지만 밤 10시까지 계속되는 야간 자율학습을 ‘자율’적으로 빠질 경우 다음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나는 사제 관계, 고등학교 3학년 시간표에 미술과 체육 등 수능과 관계 없는 과목은 완전히 제거되며 전공어 수업 시간조차 ‘자율학습 시간’으로 변이되어 국어나 수학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신축적인(?) 수업 운용방식 등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그 학교의 오래된 전통이자 학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방식으로 운영된  학교가 매년 내세웠던 유일한 마케팅은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문대에 진학시킨 학생수였다. 물론 이들 대학교로 진학한 학생들 대부분이 어문계열이 아닌 다른 계열을 선택했고, 학교는 심지어 “외고에도 이과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가지 했다. 이에 더해 일반적으로 어문계열보다 높은 수능 커트라인 점수를 기록하는 상경, 법학 계열에 진학한 학생수를 따로 추려내어 자랑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대학 잘 보내는 고등학교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언어는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수단’으로도 기능하기 때문에 외고 출신이 굳이 어문계열에만 지원해야 하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 교육을 제대로 가르치지조차 못했다는 현실이 이러한 반론의 기본 가정부터 흔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외고는 처음부터 외국어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었고, 현재도 분명히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외고는 처음부터 내신을 포기하고 수능 하나만을 대박내기 위해 짜여진 커리큘럼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이중 소수의 더 ‘나은’ 외국어고등학교는 SAT등 외국의 수능ish한 시험까지 정복하며 명문대 진학률을 극대화시켰다. 외고로 똑똑한 아이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들이 외국어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그러한 욕망을 달성했고, 내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은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거나 자살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어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을 수능 점수를 받아들고 재수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외고 설립 정책은 과학고의 경우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과학’이라는 쉽게 특정할 수 없는 넓은 카테고리를 가질 수 있었던 과학고 정책은 이들이 의대에 가든 공대에 가든 자퇴를 해서 회사를 차리든 설립목적에 어긋난다는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외국어고는 그렇지 않다.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외국어 인재 양성’이라는 목적 자체가 모호할 뿐더러 외국어 교육의 페러다임은 언제든 시장에 빼앗길 수 있다. 외고에 입학하는 학생 중 상당수가 이미 영어에 능통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도 우스운 모순인 것이다. 더 나아가 백번 양보해 외국어 영재를 육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성장할지, 어떻게 쓰여질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운영되어 왔다면 사실상 교육의 성과를 측정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교육 목표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지역에 관계 없이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곧 명문고가 되어 버리는 한국의 현실에서 일반고에 앞서 학생을 선발할 특권이 있는 이들 외고가 수능점수와 명문대 진학률에 마케팅을 올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외고에서 외국어 교육은 뒷전이다. 엄연한 현실이다. 서울대 법대에 가장 많이 진학시키고 사시 합격을 가장 많이 시키는 출신학교 중 상당수가 외고라는 사실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법조인으로 살 기 위해 외국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어의 극치라는 판결문을 작성하는데 스페인어가 얼마나 필요한가? 범인을 잡기 위해 어려운 문법의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가? 코메디가 따로 없다.

나는 물론 미국에 있는 학교에서 오래 공부했다. 하지만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영어로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지난 1월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에 갔는데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외고 프랑스어과 출신이다. 내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익힌 외국어기술은 모두 대학교 입학 이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외고에서의 경험 중 지금까지도 내게 도움을 주는 것들은 당구 실력과 스타크래프트 실력 정도다. 대체 거기서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Father John Misty: Pure Comedy

485011b6c7964ceeae8c1ef5060b30c9.1000x1000x1
조쉬 틸만의 프로젝트 파더 존 미스티의 세번째 정규작인 [Pure Comedy]는 그의 음악적 전성기가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을 알리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음반이다. 최근 몇년 간 힙합, 블루스, 소울 등 흑인음악쪽으로 무게추가 급격하게 기울고 있는 현대 대중음악계에서 록과 포크 기반의 음악에서도 여전히 선구적인 창의성이 탄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승전보와도 같은 음반이기도 하다.

조쉬 틸만이 전작들에서 보여준 뛰어난 가사전달능력은 그의 철학이 더 깊어지면서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로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현실의 모순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스스로 그 모순을 해부하고 파헤치는 ‘분석’의 깊이를 갖추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정치, 사회, 문화 등에서 퍼져있는 거시적인 문제점부터 인간 개인의 욕망 등 미시적인 부분까지 사정없이 건드리는 폭넓은 스펙트럼까지 갖추었으니, 이제 그를 ‘작가’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의 목표는 21세기의 밥 딜런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Pure Comedy]라는 음반명 뒤에는 그만의 반어법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더이상 뒤틀린 유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전달되는 그의 메시지는 음반 전체를 관통하며 코메디의 차원을 넘어선 진지함을 구축하고 있다.

사실 이번 음반에서 가사보다 더 크게 놀란 부분은 음악적 완성도가 기대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점이다. 우리가 팝음악에서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되 그 안에서 레퍼런스를 쉽게 떠올릴 수 없을 정도의 창의성을 부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파더 존 미스티는 그것을 해낸다. 그가 이 음반을 현대의 ‘고전’으로 만들고 싶어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과거의 고전들이 남긴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계승하여 현대의 감성으로 되살린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하거나 빈 구석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곡 구성능력과 곡 간 긴밀한 연결관계를 보여준다.

데뷔 음반 [Fear Fun]에서 보여준 그만의 그로테스크한 유머 감각은 이번 음반에서 많이 희미해졌다. 대신 전보다 훨씬 더 굵어진 그만의 ‘선’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번 음반을 통해 파더 존 미스티는 2010년대 인디음악계에 굵은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대가’라고 부르는 애니멀 컬렉티브, 그리즐리 비어, 윌코 등과 같은 위상을 갖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대로만 쭉 나아간다면 말이다.

Jesca Hoop: Memories are Now

Jesca_Hoop_-_Memories_Are_Now
Jesca Hoop의 커리어는 상당히 독특하다. 사실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까지 전해질 정도의 뮤지션이 독특하지 않은 커리어를 갖기도 힘들지만, 훕이 걸어온 여정은 그녀의 음악 스타일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의 따사로운 해변가에 위치한 독실한 몰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걸”로 유복하게 자라던 그녀는 십대 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와이오밍 등지를 떠돌며 몇년동안 그야말로 야생생활을 했는데, 여름에는 나무 밑에서 자고 겨울에는 닭장 속에서 닭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그 경력(?)을 인정받아 애리조나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생존 프로그램의 강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녀의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해준 탐 웨이츠를 만나게 된다. 당시 탐 웨이츠 가족은 보모(nanny)로 제스카 훕을 고용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그녀에게 음악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음악적 커리어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도움 중 하나가 훕의 음악작업이 공개될 수 있도록 음반회사 사람들과 훕을 직접 연결해준 것이다. 그 결과 훕은 2008년 Elbow의 투어 매니저인 Top Piper의 권유로 잉글랜드 맨체스터로 근거지를 옮기게 되고, 이후 엘보우, 아이언 앤 와인 등의 투어에 오프닝으로 참여하며 경력을 쌓은 뒤 2007년부터 뱅가드, 서브팝 등 유명 인디 레이블과 계약을 체결하여 지금까지 다섯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탐 웨이츠는 제스카 훕의 음악을 동전의 양면도 아닌, 동전의 네 면(“four sides of coins”)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어느 하나의 장르로 정의내릴 수 없는 그녀의 음악은 “늦은 밤 조용한 호수에서 홀로 수영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웨이츠의 표현대로 침묵과 고요 속에서 격정적인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마녀, 혹은 요정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Memories are Now]는 아마도 미국 네오포크씬의 가장 진화한 형태를 체험하기 원한다면 가장 좋은 샘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소울, 일렉트로닉, 컨트리 등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이는데 거침이 없는 그녀의 음악은 전통적인 미국식 포크음악의 형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지루함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운 사운드를 음반 전체에 가득 채워놓는다. 첫 곡이자 타이틀곡인 “Memories are Now”는 그래서인지 매우 선언적인 사운드를 보여준다. 이 음반을 듣기 시작하면 이 정도 긴장감은 각오하라는 듯한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곡 외에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노마드의 삶을 살아온 그녀답게  모든 곡에서 어느 한 장르에 천착하지 않고 다양한 악기와 다양한 리듬, 다양한 사운드를 뒤섞으로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기분 나쁘지 않다. 그래서 “Pagasi”나 “Simon Says”같은 곡들이 “The Lost Sky”나 “Cut Connection”과 연결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녀는 평범하지 않은 살아왔고, 평범하지 않은 음악을 만든다. 제스카 훕만이 창조할 수 있는 칼날과 같은 서늘함, 혹은 섬세함이 잘 살아있는 음반이다.

nine to six and monthly paid life

일주일 중 5일을 희생하여 번 돈으로 카드값을 내고 월세를 내고 대출 이자도 갚고 약간의 저축도 할 수 있는 삶에 감사하고 있다. 시간외근무를 자주 해야 몇십만원이라도 더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빠듯하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빡빡한 생활 리듬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시대와 나라를 잘못 만나 훨씬 더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이런 불만조차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사회적으로 안착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윗세대에게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젊은 세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다면, 현재 자리잡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현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그런 개인적인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많은 ‘정규직’ 월급쟁이들이 일확천금과 조기은퇴를 꿈꾼다. 아마도 오너가 있는 큰 회사에서 부속품처럼 사용되는 현재의 위치가 성취감을 제한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것이다. “취집”이라는 말도 어쩌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부속품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그렇게 완성된 시스템이 다시 개개인에게 혜택을 주는 순환구조를 이해한다면 부속품으로서의 가치가 결코 작다고 이야기하기도 애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루에 여덟시간을 오롯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다달이 예상되는 돈이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삶은 실패에 대한 사회적 보험장치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한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안전한 보호막일 것이다. 한국사회에 창의성이 부족한 것은 한국인 개개인이 창의성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개인의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윗세대의 책임이고 숙제로 남겨져 있다. 창의성을 희생하는 대신 안정적인 미래를 담보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트레이드오프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 등가교환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세대가 존재한다. 일부 계층도 아니고 한 세대가 통째로 그런 위기에 처해있다.

Mac DeMarco: This Old Dog

a2812895157_10
맥 드마르코는 음악을 무척 잘 알고, 또 잘 하는 아티스트다. 인디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전작 [Salad Days]가 씬에서의 드마르코의 위상을 정립해준 작품이라면, 이번 신작 [This Old Dog]은 조금 더 개인적으로 침잠해들어간 드마르코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발가벗고 찍은 뮤직비디오처럼, 혹은 팬티 한장만 걸치고 노래한 프리마 베라 무대처럼, 드마르코는 이번 작품에서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타고난 송라이터이자 뛰어난 스토리텔러이기도 한 그의 모습에 반한 일반 인디팬들이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그는 술술 자신과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근 조근 풀어놓는다.(그의 유쾌한 엄마에 대해 알게 된다면 아마도 확실히 그의 성장배경을 궁금해하게 될 것이다) 다만, 팬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내용, 때론 불편할 수도 있는 내용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드마르코다운 기분좋은 배신으로 다가온다. 살짝 늘어난 테이프의 소리를 그대로 차용한 짦은 소품 “Sister”처럼 드마르코는 기억 저편으로 숨겨버리고 싶은 과거의 이야기들을 날것 그대로 꺼내놓고 그가 지금까지 축적한 아름다운 그만의 음악세계에서 달콤하게 요리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음반은 수프얀 스티븐스의 기념비적인 음반 [Carrie & Lowell]과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티븐스가 그만의 조용한 장광설을 개인사에 투영시키며 한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정점을 만들어냈듯, 드마르코는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개인사를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풀어내며 음악적 커리어의 극초반기를 정리하려는 듯 보인다.

맥 드마르코는 이 시대에 몇 남지 않은 진정한 크루너 중 한 명이다. 크루닝의 본질은 스토리텔링에 있다. 그때문인지 전작에 비해 자칫 심심해보일 수도 있는 음반 내 곡구성이 오히려 그의 음악적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시키는 순기능으로 다가온다. “A Wolf Who Wears Sheeps Clothes”와 같은 경쾌한 노래가 “One More Love Song”, “On the Level” 등이 가진 멜랑꼴리한 정서와 무리없이 섞여 들 수 있고, “My Old Man”이 “This Old Dog”과 같은 음반의 타이틀곡 격인 노래를 소개하는 충실한 오프닝송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음반은 조금 더 차분해졌지만 지루하거나 뻔하지 않다. 여전히 그의 세계를 단단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미 음악을 잘 알고 있었고, 여전히 음악을 잘 하고 있다. 이제 그의 팬들은 그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맥 드마르코 월드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Slowdive: Slowdive

61de16ab
Ride, My Bloody Valentine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슈게이즈-인디록 밴드 Slowdive가 22년만에 셀프타이플 4집 음반을 들고 돌아왔다. 22년만에 새음반을 발매한 것도 놀랍지만 1991년 메이저 데뷔 후 지금까지 단 네 장의 정규 음반만을 기록한 심플한 디스코그래피가 더 놀랍다. 그만큼 슬로우다이브는 ‘듣기 쉽지 않은’ 밴드였다. 1993년작 [Souvlaki]와 1995년작 [Pygmalion]은 슈게이징, 혹은 브릿팝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봣을 명작이었지만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아 비싼 수입반으로 챙겨두어야 했던 빘한 “필수템” 이었다.

2013년 돌아오기 전까지 단 세 장의 단촐한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하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이 복귀작이자 네번째 음반 [m b v]를 통해 탄탄한 ‘기본기’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듯, 슬로우다이브의 복귀작 [Slowdive] 역시 왜 이들이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슈게이즈/드림 계열에서 전설로 통하는지, 왜 이들의 음악이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인구에 회자되며 즐겨 플레이되고 있는지 명확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첫 곡 “Slomo”의 처음 30초에서 이미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의 서늘한 감동이 밀려오는데 이와 비슷한 높이의 감정적 파고가 음반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90년대 해왔던 그 방식 그대로 노래를 제조하는데 그 안에 담긴 깊이는 22년동안 훨씬 성숙되었다. 똑같은 그릇을 만들어도, 똑같은 커피를 한잔 내려도 그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 결과물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 사람의 손길에 영향을 미치는 ‘숨결’, 혹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깊이에 따라 손길의 차원이 달라지는 것처럼 슬로우다이브의 새음반은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요즘 음악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순간들이 짙게 드리워져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건가 싶다. 시대를 억지로 무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대의 눈치를 보지도 않는 초연함이 음반의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일관된 정서 중 하나다. 이 초연함은 아마도 시간을 정직하게 흘려보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강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노래가 5분에 육박하고 8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곡이 있을 정도로 구성이 단순하지 않지만 매 곡을 소화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하다. 서늘한 긴장감과 아름다운 포만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명반이다. “Star Roving,” “Everyone Knows,” “No Longer Making Time”과 같은 명곡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어느 한 곡 버릴 것이 없다.

Bobo Yéyé: Belle Époque In Upper Volta

bobo yeye
이런 저런 이유들로 동시대에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한채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진 숨은 명반을 찾아내 재발매하는 시카고 기반의 인디 레이블 누메로의 작업들은 명시적인 시대적 공헌 뿐 아니라 음반 자체의 높은 퀄리티로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나 역시 이들이 발매하는 음반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어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한 장씩 구입한다.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오래된 음반들이 대부분이기에 정보나 지식이 현저히 부족한 나는 음반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반드시 읽는 편인데, 누메로가 밝히는 기본적인 정보들에서 음반의 주인공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부쩍 생기는 음반들에 먼저 손이 가게 된다.

말리 음악에 대한 서구(및 우리나라) 음악팬의 관심은 지난 10,20년 간 부쩍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말리와 접경해 있는 브루키나파소의 음악이 가진 세계적인 명성은 그보다는 조금 낮은 편인 것 같다. 이번에 누메로에서 내놓은 [Bobo Yéyé: Belle Époque In Upper Volta]는 1983년 군부 쿠데타에 의해 브루키나파소가 건립되기 전 동지역에 존재했던 오트볼타(Republic of Upper Volta)시절 음악들을 세장의 음반에 모아놓았다. 이웃나라 말리와 마찬가지로 볼타는 20세기초부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1958년 독립했다.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동안 서구의 음악문화가  자연스럽게 많이 유입되었을 것이고, 독립 이후 Bobo-Dioulasso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클럽, 밴드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음반의 첫번째 장은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Orchestre Volta-Jazz)의 노래들 중 대표곡들을 엄선해서 뽑았다. 당시 오트볼타의 음악은 프랑스 식민지배세력 뿐 아니라 말리 음악씬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의 초기 주축 멤버였던 Tiemoko Traoré 와 Tidiani Coulibaly 역시 말리에서 음악을 배워 와서 보보에서 음악을 시작했다. 보보 지역에서 첫번째 운전면허학원을 차려 재정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던 Idrissa Koné가 매니지먼트를 총괄하기 시작하면서 밴드는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다.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Senufo와 Mandingo라고 불리우는 지역 민속음악에 쿠바 리듬과 일렉트로닉 기타사운드를 뒤섞은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가끔 신중현과 김정미같은 한국의 선구적인 록음악과 비슷한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서구 음악의 유산을 짧은 식민지시대로부터 물려 받아 지역 전통음악(우리나라는 민요, 혹은 엔카-ish가 되려나)과 교배를 이룬, 완전히 독립적인 두 지역의 음악이  비슷한 결과물을 보여준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소위 말하는 식민지 정서, 혹은 한이라는 정서가 공통적으로 존재했는지, 그것이 음악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밴드의 전성기는 멤버 간 불협화음과 새로운 트렌드를 적극 받아들인 신진 세력들에 의한 위상 하락 등이 겹치면서 짧은 시간동안만 지속되었다. 1977년 Koné가 밴드의 이름으로 음반을 냈지만 사실상 혼자 제작하면서 밴드의 명맥은 끊기게 되었고, 1983년 쿠데타에 의해 사회주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완전히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음반의 두번째 장은 볼타 재즈의 주축 멤버였던 Tidiani Coulibaly의 개인 작품들을 모았다. 말리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티디아니 쿨리발리는 아이보리 코스트 지역에서 철도노동자로 일하다 1962년 볼타 재즈에 합류했다. 약 10년간의 볼타 재즈 활동을 정리하는 그는 이후 Dafra Star 앙삼블로 활동했다. 이 시기가 쿨리발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번째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보보에서 500마일 떨어진 곳까지 여행을 가야 했을 정도로 당시 볼타 음악가들의 사정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쿨리발리는 아름다운 음악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누메로가 그 유산을 발견하여 말끔한 음반으로 재탄생시켰다. 쿨리발리의 음악은 볼타 재즈 오케스트라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유연한 보컬 중심의 세련된 팝음악을 구사한다. 역시 만딩고 음악을 주된 뿌리로 삼지만 민속음악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샹송과 아프로팝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쿨리발리는 80년대 초 정권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면서 음악계에서 은퇴를 선언했고 그로 인해 Djoliba National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National Treasure”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번째 장은 Echo-Del-Africa와 Les Imbattables Léopards의 음악이 섞여 있다. Echo-Del-Africa는 Dynamic Jazz로 활동했던 Yaya Konaté와 볼타 재즈에서 보컬리스트로 활동한 Antoine D’Albin이 주축이 되어 1974년 결성한 밴드다. Les Imbattables Léopards는 10대 시절부터 보보 지역 클럽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Idrissa Ouédraogo가 중심이 되어 1970년 결성된 빅밴드였다. 두 밴드는 보보 지역의 문화적 전성기였던 1970년대가 품었던 에너지의 수혜를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이 두 밴드는 재즈와 팝, 만딩고와 세누포, 샹송과 아메리칸 록음악이 뒤섞여 볼타만의 독특한 음악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이 지역의 문화적 융성기는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사회주의 정권이 브루키나파소를 건립하고 프랑스 문화와의 단절을 선포하면서 빠르게 식어갔다. 이후 경제정책 실패와 끊임없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국가경제와 함께 볼타, 혹은 브루키나파소의 음악은 다른 아프리칸 음악들에 비해 더 빠르게 잊혀지게 되었다.

여행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에서 태어나 서아프리카 연안 국가에 장기간 체류하며 그 나라의 음악을 깊이있게 들을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누메로의 복각 작업은 흥미로움을 넘어선 고마움까지 느끼게 만든다. 앞으로 여기에 곧 기록하게 될 Wee의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생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30년 째 복역중인 Norman Whiteside가 만든 Wee의 [You can Fly on My Aeroplane]은 소울의 정수를 담아낸 명반이다. 최근 그가 살해사건이 발생할 당시 사건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방아쇠도 당기지 않았다는 조사결과가 밝혀지며 구명운동이 한참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음악가들의 음악을, 비록 3,40년이 지났지만 어쨌든 동아시아 끝단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Vagabon: Infinite Worlds

a2667129990_10
카메룬 태생으로 십대 시절을 미국 뉴욕 근방에서 보낸 이민자 가정 출신의 Laetitia Tamko의 무대이름 Vagabon의 데뷔 음반 [Infinite Worlds]는 20분이 조금 넘을 정도로 아주 짧다. 2,3분 내외의 짦은 곡이 딱 8개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임팩트는 결코 작지 않다. 아마도 올해 들어 제대로 된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최초의 음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음악적 완성도는 기본이다. 헤비한 인디록부터 인디포크까지 다양한 장르를 본인의 바탕 위에 무리 없이 풀어내고 있다. 악기 연주부터 녹음까지 거의 모든 부분을 본인 혼자의 힘으로 해낸, 요즘 보기 드문 DIY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사운드의 품질은 결코 로파이하지 않다. 음악의 결이 성긴 것과 사운드의 질이 거친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인데, 배가본은 그 둘을 절묘하게 분리하며 각각의 지점에서 제대로 된 성취를 해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가사인데, 단순히 이민자의 눈으로 바라본 미국사회, 혹은 디아스포라 예술 계열로 분리해버리기에는 그녀가 가진 섬세한 시선이 너무나 곱고 아름답다. 너무나 가볍게 스쳐지나치기 때문에 차마 가벼운 시선조차 주기 힘든 일상의 사소한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그녀의 감성은 이 시대의 인디음악이 파고들어야 하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음악의 형식부터 완성도, 음악 제작 과정, 그리고 메시지까지 한 색깔 위에서 가지런하게 공유하는 지점이 존재하며, 이 지점이 오직 배가본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그녀만의 오리지널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녀의 음악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사명감을 지니게 된다. 대단히 뛰어난 데뷔 음반이자 올해의 음반 목록에서도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는 명반이다.

Charly Bliss: Guppy

a3208327090_10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디록 밴드 Charly Bliss의 데뷔음반 [Guppy]를 듣고 있다 보면 좋은 음악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비단 개인의 재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러니까 음악의 장르를 결정짓는 지역성, 문화적 인프라와 같은 잘 알려진 환경요소 뿐 아니라 무형의 문화적 배경이 개인의 재능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코네티컷의 한 동네에서 좀 특이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로 유명했던 Eva Hendricks는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밴드를 만들고 싶어 사람을 찾던 중 한 인디밴드 공연장에서 Spencer Fox라는 사람을 만나 함께 합주를 시작한다. 마침 에바의 전 애인이었던 Dan Shure가 베이스를 칠 줄 안다고 해서 무작정 합류시켰고 드럼은 에바의 오빠인 Sam Hendricks에게 맡겼다. 그러다가 에바가 NYU에 진학하면서 밴드는 근거지를 뉴욕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2013년부터 줄기차게 공연을 하면서 명성도 쌓고 EP도 내다가 슬리터-키니, 도쿄 폴리스 클럽 등의 오프닝을 맡으면서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 음반도 냈다는, 그렇게 좋은 평를 받은 그 음반과 함께 지금 열심히 본인들만의 투어를 돌고 있다는, 전형적인 인디밴드 성공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다. 어쩌면 미국에서는 아주 평범한, 1년에 수십 차례 가까이 등장하는 고만고만한 인디밴드의 성공적인 데뷔 뒷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만약 이들이 서울에 태어났다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에바의 경우 아마도 공부를 하느라 밴드를 해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아니 그 전에 음악은 무슨 음악이냐며 부모님께 혼나면서 풀이 많이 죽었을 것이다. 코네티컷과 뉴욕이라는 배경이 이들에게 어떤 기회를 준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이것이 재능으로 발전되는 ‘채널’이 한국보다 훨씬 잘 뚫려 있다는게 부러울 따름이다. 이것은 단순히 ‘열려 있는’ 사회구조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밴드를 하고자 마음먹으면 밴드를 할 수 있는 ‘단단한’ 사회적 뒷받침이 부러운 것이다.

이들의 음악에는 둔탁한 그런지 사운드와 밝은 팝 멜로디가 공존하고 있다. 에바 헨드릭스는 아마도 이 두 요소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본인의 목소리가 달콤한 멜로디라인에 잘 쓰일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블 기타가 육중하게 내리찍는 얼터너티브 사운드에서 물려받은 유산을 거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그 해결책으로 속도를 택한 듯 보인다. 모든 곡은 빠르게 시작해서 빠르게 끝난다. 좋은 훅을 가지고 있는 멜로딕한 후렴구와 시원하게 내지르는 두꺼운 기타사운드가 쉴새없이 몰아친다. 30분 정도에 불과한 짧은 러닝타임은 그래서 큰 흉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아쉽지만, 더 길게 끌었다면 자칫 지겨울 뻔 했다. 시원하게 시작해서 깔끔하게 끝나는 좋은 구성의 음반이다. 그래서 두번째 음반에서 조금 더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숙제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 밖에 없다.

한국형 힙스터의 지리적 고민

어제 한 대학교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뻔하고 재미없는 금융경제학의 작은 부분이었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쓸데없는 말들로 시간을 때우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생각이 꽂히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어버린 “흙수저” 2,30대 청년층의 서울 내집 마련의 꿈, 정책적으로 풀 방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두꺼운 가격 장벽이 드리워진 이 투기의 도시에 문화적 감각이 상대적으로 발달해 있는 일련의 청년층이 새로운 색깔의 주거 공간을 집단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문화적 공통분모를 지닌 주거집단이 해방촌이나 문래동같은, 기존의 부동산 시장에서 각광받지 못한 지역에 뿌리를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며, 경리단길이나 익선동과 같은 ‘골목길’이 한국형 힙스터들의 주요 소비처로 탈바꿈한 것도 우연이 아니며, 이후 최근 몇년 간 ‘젠트리피케이션’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문화적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문화적 자본을 상업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독립 자본가, 혹은 소규모 자본가들이 가진 역량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금수저”가 아닌 마당에 말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그곳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전통’을 나름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들의 서울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근본적으로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규모 자본에 밀려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로 설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잃는 것은 다양한 독립 문화 자본 정도가 될 것이고, 단기적인 승자는 창의적 소규모 문화 자본을 보다 정형화된 기업 자본 기반의 대규모 산업형 상품으로 변질시켜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며, 특정 문화 자본 집단에 의해 형성된 ‘공간’이 갖는 향취, 즉 도시환경이 주는 무형의 공공재를 더 강한 자본가 세력이 부당하게 취득하는 과정에 대한 불만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목격자로서 지켜보고 있는 ‘힙스터 소비자’들이 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독립적인 소규모 문화 자본 형성에 참여하기 보다는 이 소규모 자본가들이 영업 행위를 이어갈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존재하는 것에 만족한다. 남들과 비슷한 – CJ 따위의 – 소비재를 구입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의 소비 성향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문화 자본의 형성을 촉구한다. 경리단길이 유명해지니 해방촌으로 옮겨가고, 북촌에 이어 서촌까지 사람들로 붐비니 근처 익선동으로 옮겨간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인스타그램에 ‘힙’한 공간을 문화적으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존감을 획득하려 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은 소규모 문화 자본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추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 속도를 촉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고소득 전문가부터 비정규직까지 아마도 다양한 소득 분포를 가지고 있을 이들이 해방촌이나 익선동에 놀러가고는 싶지만 그곳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 관광지와 주거지를 구분하는 심리를 은연중에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들 역시 전통적인 서울의 ‘아파트 판타지아’에서 많이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비록 쪽방촌 바로 옆에 생긴 예쁜 커피숍들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를 즐긴다 하더라도 이들의 꿈은 강남의 아파트로 향해있다. 이들에게 이태원이나 가로수길에서 가까운 한남동이나  잠원동은 주거공간으로서 좋은 선택이지만, 비슷한 거리에 있는 보광동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이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은 윗세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경제적 유전자이며, 솔직하고 이기적인 경제적 판단에 기인한다. 나는 현 세대 중 많은 이들이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출산과 육아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신의 소비 패턴을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 세대가 윗세대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점은 세대적 개인주의적 성향이 사회전체적인 지출 구조를 결정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강남의 아파트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한편 그 욕망의 대체재를 찾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중요한 점은 개인적으로 관찰한 결과 아직까지 나름의 다양성을 담보하는 다양한 주거공간의 가능성 중 기꺼이 생산자와 밀착된 환경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현상이 대규모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물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못할 때 공간적 특수성은 담보될 수 있을까? 문래동에 새로운 문화 자본가들이 집단적으로 촌락을 꾸리고 생산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그곳의 부동산 가격이 정체 상태에 있다면 일정 수준 이상이 소비력을 갖춘 젊은 세대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 ‘힙스터 문화 시장’에 한해, 소비자가 생산자의 근거지를 끊임없이 구축(crow out)하는 현상이 지속되지 않을까? 문화적 다양성이 담보된 독립적인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상품에 대한 수요가 일부 힙스터에 국한되어 더이상 확장되지 못한다면, 즉 지방에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서울 안 임대료가 저렴한 골목길을 끊임없이 떠돌려 방황하는 예술가들, 혹은 독립 자본가들의 모습을 계속 목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