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by step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이 곳에 기록해둔다. 이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아마도 논문 마감일이 거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갑자기 영어로 쓰인 소설책이 재미있어 지고 청소가 하고 싶어지며 인터넷 쇼핑이 즐거운, 그런 시기말이다.

지난 2월 전직장에서 인사상 불이익 비슷한 것을 받고 분기탱천한 마음에 그동안 컴퓨터에 쟁여 두었던 미완성 논문 네 편을 제출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각각 다른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 중 한 편은 수정 후 재투고 과정을 거쳐 얼마전 게재되었고, 어제 다른 한 편이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두 편은 전직장에서 쓴 소논문 두 개를 각색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수준이 깊지 않았다. 첫번째 논문도 KCI 등재 학술지가 아닌 곳에 투고했기에 아마 게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받은 원고료로 아내의 드레스를 사주었으니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다른 논문도 한국에 근거를 둔 국제학술지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건 지난해말 나름 열심히 썼던 정책보고서를 각색한 논문이었다. 이 것 역시 나름 참신했던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방법론적으로나 학문적인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직장에 썼던 수많은 보고서 중 나름 논문 형식으로 각색이 가능했던 것은 위의 세편이었는데, 셋 다 돌이켜보면 정책논문으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학자들이 좋아할만한 색깔은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중 한 편은 심사결과를 참고하여 수정한 다음 다른 등재학술지에 내볼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여름에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다음 코멘트를 받아서 수정 후 국제학술지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다음달 초까지 수정본을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 세 편중 한 편이다. 이건 지난해말부터 질질 끌어온 것이라 더이상 미룰 명분도 변명거리도 없다. 지난해 말 제출해놓고 신혼여행을 가버리는 바람에 결과를 제 시간에 듣지 못했고, 그 때부터 수정 후 재투고 기한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던 그 2월까지 미루어졌다. 여기서 한번 더 연기가 되고, 이후 이직이다 뭐다 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는데 해당 학술지 측에서 다음호 발간을 위한 원고 갯수가 부족했는지 다시 연락이 오는 바람에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 다른 한편은 국내 기반을 둔 다른 등재학술지에 2월 중 제출한 상태인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도 연락이 꽤 오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탈락할 것 같은데, 내 박사학위 논문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전직장에서 쓴 두 편의 논문들이 탈락했을 때에도 심리적인 위축이 크게 오지는 않았다. 그 보고서들의 수준을 아니까, 그리고 논문화과정에서 내가 투입한 시간의 한계를 잘 아니까 기대도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위와 같이 제출한 논문들이 한꺼번에 다 무사히 통과하여 게재가 확정되면 순식간에 “포인트”를 채우게 되어 기쁠 수는 있겠지만, “포인트를 채워 조교수직을 얻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는 순간 내 삶의 고귀함도 그정도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직업의 이름에 있다면 내 삶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게재 여부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내 학문적 수준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첫째고, 이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최대한 단단하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두번째이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취와 외부에서의 평가를 상식적으로 공평한 수준까지 획득하는 것이 세번째이다. 지금까지 논문 제출 과정을 통해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등재지에 게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려면 존나 노력해야 함!

전직장에서 현직장으로 이직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대체 왜 이 연봉을 받고 이직을 했는가?”이다. 가장 많이 화를 냈던 사람은 아내였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이 “대접”을 받으며 이직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하는 것이 가장 열받았다고 한다. 이직 당시 나는 학자로서의, 연구자로서의 내 수준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전직장에서 주었던 높은 연봉은 학자인 내게 주는 돈이 아닌,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받으며 학문을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금융업에 종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직장에서 주는 돈은 유관연구기관보다 적은 수준이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 아마도 이정도 수준이 학자로서 내가 뒤늦게 출발하려고 할 때 좋은 기준점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전직장에서 3년을 허비했다면(허비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 당시 쓴 보고서들을 논문으로 재편집한 것이긴 하다), 이제 더이상 허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지금의 연봉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보다 DSGE를 잘 하는 한국인 학자가 한국에만도 수십명이 된다. 한국의 학교에 열리는 DSGE를 위한 조교수직 포지션은 몇년에 하나 될까말까한다. 내 현재 수준에서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초부터 천천히, 아주 낮은 단계부터 단단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6월 초에 걸려 있는 논문 하나 탈고하고, 6월 중순까지 학회에 논문 하나 제출하고, 7월이 다 가기 전에 탈락 논문들에 새로운 호흡도 좀 불어 넣고, 그 사이에 회사를 위해 일도 좀 하고, 그렇게 내 수준에서, 매우 낮은 수준에서 하나 하나 해 나가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2 thoughts on “step by step

  1. 화이팅입니다 종혁님 ㅎㅎ 뭔가 저도 제 마음을 다잡게되네요. 6월초 논문 탈고하시면 부부동반으로 맛있는거 먹으러 같이가요-! 저는 6월 10일 이후에 언제든 좋습니다 ㅎㅎ

    • 다같이 화이팅입니다~ 부족한 재능과 나약한 마인드, 게으른 인성까지 결합되어 늘 2% 채워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노력해봐야져.. 곧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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