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편: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개념이 일상화되고 상식화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 서구적 개념이 한국의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전치(displace) 현상의 지역적 특수성을 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해당 개념의 전파속도와 동등한 수준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신현준을 비롯해 기성 학계 내,외부에서 활동 중인 젊은 학자 집단이 일반 대중 독자들도 관심을 가질 법한 이 주제에 대해, 서울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고무적이다.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는 서양 학계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젠트리피케이션 이론을 홍대, 서촌, 한남동 등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 법한’ 서울 내 특정 지역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기존 학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현장연구를 더함으로써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서구사회에서 기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과 서울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전치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나름대로 정리한 뒤 저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그곳에 존재하는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문헌 중심의 연구가 놓칠 수 있는 미시적 실제성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3장은 도시재생 등 정책적 관점에서 특정 지역의 변화양상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 도시계획 및 도시재생 등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도 흥미로운 지점으로까지 논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언론에서 피상적으로 다루어지며 특정 이익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차원에 머물렀던 젠트리피케이션 개념을 부족하나마 학술연구의 형식으로 담아낸 것은 이 책이 가지는 최고의 공헌이다.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지역(홍대 등)부터 현재 막 시작단계를 밟고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해방촌 등)을 넓게 아우르며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쉽게 지나쳤을 오류들을 세심하게 정정해주는 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위와 같이 현재 한국 지역사회의 정신머리없는 발전 일변도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등 이 책이 공헌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아쉬운 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첫째, 이 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드러내고 있듯, 서구 학계에서 이야기하는 노동계급-힙스터-고소득 전문직-대기업자본 순으로 이어지는 특정 지역의 점유 구도가 서울의 주요 특정지역에서 그대로 발현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의 지역학, 혹은 부동산 시장은 단순히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경제주체의 욕망, 혹은 목적함수를 동시에 실현시키는 아전투구의 장이다. 서양의 일반적인 대도시들처럼 도심과 주변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종 및 수입에 의해 거주지역이 철저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현대 한국사회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의 문화’, 혹은 ‘한국의 철학’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조금만 “힙”해보여도, 즉 조금만 돈이 될 것 같아 보여도 바로 개발이 들어간다. 그곳에 원래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화적, 철학적 중심 없이 단기적 수입 창출에 의해 정신없이 흔들리는 ‘자본’ – 이것이 “문화자본”이든 “경제자본”이든 돈의 냄새를 맡아 움직이는 본질적 특성은 돌일하다 –  에 의해 거주의 불안정성을 심화되고 난개발은 가속화된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대안적 이론, 혹은 우리 사회에 특화된 이론적 틀이 필요한데 이 책은 그러한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서구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는 사실은 저자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현장연구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는 수준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논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시도가 대부분의 챕터에서 발견된다.

둘째, 성공회대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어 학술연구로서의 객관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어진다. 물론 모든 학술연구가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받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모든 학술연구는 저자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자본”을 “경제자본”과 확실히 다르다고 가정하고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가 발생시키는 전치현상의 시작을 지나치게 옹호하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은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이러한 표혀닝나 생각 자체에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튼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소규모 생산자들이 임대료가 싸면서도 문화적 창의성을 위협받지 않는 ‘적절한’ 곳에 자리를 틀고 문화적으로 창의적인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다. 그 이후 상권이 확대되면서 임대료가 상승하고,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대규모 상업자본이 돈냄새를 맡고 이들을 몰아내며 문화적 창의성은 획일성으로 상쇄된다. 이후 더 큰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거나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로 인해 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방식도 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판 젠트리피케이션의 첫번째 단계에서 ‘소외’당하는 원 거주민들의 입장이 이 책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거나 문화자본을 소유한 생산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준에서 이용당하고 희생당한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큰 결점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원 거주자들이 이룩한 거주문화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선에서 들어왔다” “이 곳이 갖는 매력에 이끌려 들어왔다”와 같은 뻔한 변명으로 원거주자들의 피해를 뭉뚱그리려는 시도가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쨌든 상권은 확대되었고 임대료는 올랐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삶은 파괴되었다. 문화자본 생산자들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싸이 이전에 테이크아웃드로잉이 있었다면 테이크아웃드로잉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테이크아웃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왜 소규모 문화자본 생산자들을 이토록 옹호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이 주어져 있어도 지금과 같은 성격과 규모의 생산활동을 했을지 증명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호의 근거를 찾기 힘들다.

셋째, 경제학적인 전문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종종 경제학의 기본원리를 무시하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 신현준은 자신이 부동산 시장에 대한 공부도 꽤 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서울의 부동상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경제학적인 접근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인터뷰와 현장 답사 등의 형식을 통해 인류학적 접근, 혹은 사회학적 접근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시장과 노동 시장, 그리고 경제정책 등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임대료 문제는 서비스업의 임금 문제, 더 나아가 경제정책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권이 형성되는 지역의 공급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건물주, 고용주, 피고용자. 건물주는 불로소득자다. 고용주의 자본은 한계적이다. 피고용자는 최저임금 언저리에서 위태롭게 노동을 공급한다. 결국 부의 재분배 문제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고, (굳이 “문화” 운운하지 않아도 다 설명이 가능한 부분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조세정책과 도시개발 정책, 서민주거안정 정책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 문제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책이 절반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부분에 대한 고찰이 극도로 제한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분명하고 독보적이다. 이 책의 편집자는 다른 책에서 아시아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짓고 넘어가는 것은 왠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앞으로 더 깊은 논의를 통해 이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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