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by step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이 곳에 기록해둔다. 이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아마도 논문 마감일이 거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갑자기 영어로 쓰인 소설책이 재미있어 지고 청소가 하고 싶어지며 인터넷 쇼핑이 즐거운, 그런 시기말이다.

지난 2월 전직장에서 인사상 불이익 비슷한 것을 받고 분기탱천한 마음에 그동안 컴퓨터에 쟁여 두었던 미완성 논문 네 편을 제출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각각 다른 학술지에 투고했다. 그 중 한 편은 수정 후 재투고 과정을 거쳐 얼마전 게재되었고, 어제 다른 한 편이 최종 탈락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두 편은 전직장에서 쓴 소논문 두 개를 각색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수준이 깊지 않았다. 첫번째 논문도 KCI 등재 학술지가 아닌 곳에 투고했기에 아마 게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받은 원고료로 아내의 드레스를 사주었으니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다른 논문도 한국에 근거를 둔 국제학술지에서 물을 먹었는데, 이건 지난해말 나름 열심히 썼던 정책보고서를 각색한 논문이었다. 이 것 역시 나름 참신했던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방법론적으로나 학문적인 측면에서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직장에 썼던 수많은 보고서 중 나름 논문 형식으로 각색이 가능했던 것은 위의 세편이었는데, 셋 다 돌이켜보면 정책논문으로서의 가치는 있을지언정 학자들이 좋아할만한 색깔은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중 한 편은 심사결과를 참고하여 수정한 다음 다른 등재학술지에 내볼 것이고, 다른 한 편은 여름에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에서 발표한 다음 코멘트를 받아서 수정 후 국제학술지에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

다음달 초까지 수정본을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박사학위 논문 세 편중 한 편이다. 이건 지난해말부터 질질 끌어온 것이라 더이상 미룰 명분도 변명거리도 없다. 지난해 말 제출해놓고 신혼여행을 가버리는 바람에 결과를 제 시간에 듣지 못했고, 그 때부터 수정 후 재투고 기한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해 결국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던 그 2월까지 미루어졌다. 여기서 한번 더 연기가 되고, 이후 이직이다 뭐다 해서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는데 해당 학술지 측에서 다음호 발간을 위한 원고 갯수가 부족했는지 다시 연락이 오는 바람에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박사학위 논문 중 다른 한편은 국내 기반을 둔 다른 등재학술지에 2월 중 제출한 상태인데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도 연락이 꽤 오래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탈락할 것 같은데, 내 박사학위 논문의 수준을 잘 알고 있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앞서 전직장에서 쓴 두 편의 논문들이 탈락했을 때에도 심리적인 위축이 크게 오지는 않았다. 그 보고서들의 수준을 아니까, 그리고 논문화과정에서 내가 투입한 시간의 한계를 잘 아니까 기대도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위와 같이 제출한 논문들이 한꺼번에 다 무사히 통과하여 게재가 확정되면 순식간에 “포인트”를 채우게 되어 기쁠 수는 있겠지만, “포인트를 채워 조교수직을 얻는 것”이 인생이 목표가 되는 순간 내 삶의 고귀함도 그정도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생의 목적이 직업의 이름에 있다면 내 삶도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게재 여부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려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내 학문적 수준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첫째고, 이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최대한 단단하게,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두번째이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성취와 외부에서의 평가를 상식적으로 공평한 수준까지 획득하는 것이 세번째이다. 지금까지 논문 제출 과정을 통해 첫번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등재지에 게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려면 존나 노력해야 함!

전직장에서 현직장으로 이직했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대체 왜 이 연봉을 받고 이직을 했는가?”이다. 가장 많이 화를 냈던 사람은 아내였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이 “대접”을 받으며 이직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하는 것이 가장 열받았다고 한다. 이직 당시 나는 학자로서의, 연구자로서의 내 수준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래서 전직장에서 주었던 높은 연봉은 학자인 내게 주는 돈이 아닌,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주는 돈이라고 생각했다. 그 돈을 받으며 학문을 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금융업에 종사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직장에서 주는 돈은 유관연구기관보다 적은 수준이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된다. 아마도 이정도 수준이 학자로서 내가 뒤늦게 출발하려고 할 때 좋은 기준점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전직장에서 3년을 허비했다면(허비하지 않았다고 증명하기 위해 당시 쓴 보고서들을 논문으로 재편집한 것이긴 하다), 이제 더이상 허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지금의 연봉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보다 DSGE를 잘 하는 한국인 학자가 한국에만도 수십명이 된다. 한국의 학교에 열리는 DSGE를 위한 조교수직 포지션은 몇년에 하나 될까말까한다. 내 현재 수준에서 그들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기초부터 천천히, 아주 낮은 단계부터 단단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선 6월 초에 걸려 있는 논문 하나 탈고하고, 6월 중순까지 학회에 논문 하나 제출하고, 7월이 다 가기 전에 탈락 논문들에 새로운 호흡도 좀 불어 넣고, 그 사이에 회사를 위해 일도 좀 하고, 그렇게 내 수준에서, 매우 낮은 수준에서 하나 하나 해 나가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집단 허리디스크에 걸린 한국사회

서울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95% 신뢰구간에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허리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다는 확신을 어렵지 않게 갖게 될 것이다. 혹은, 이들이 옆으로 걷는 행위를 전혀 하지 못하는 특수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구글 스콜라를 검색한 결과 이에 대한 의학계열의 논문이 전무한 상태인데, 이 흥미로운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의학계의 관심이 지나치게 낮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영국의 엑스터 대학교 정도의 연구기관에서 이에 대한 연구를 이미 진행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더 놀라운 사실은, 통근자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 혹은 버스의 복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주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백팩이나 핸드백을 몸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백팩이나 핸드백을 어깨에서 내려서 손으로 들고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한국인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중교통수단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타인과의 접촉을 기꺼이 감수하는 가운데 자신의 접촉면을 줄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결과를 바탕으로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은 백팩과 핸드백을 몸에 장착하는 순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특수한 상태로 진화할 뿐 아니라 허리를 돌려 옆으로 걷는 방법을 망각하게 되는 특이한 퇴행현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이 사회 전체적으로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한국사회는 만성적인 허리디스크에 집단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보건복지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급한 상황이다.

백팩과 허리디스크, 또는 무통증과의 상관관계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앞서, 혼잡스러운 대중교통수단 안에서 한국인은 왜 백팩을 벗어서 들고 타지 않는가, 혹은 그 혼잡스러운 곳을 굳이 걸어서 통과하려고 할 때 타인에 대한 비정상적 신체적 접촉행위에 대해 미안함을 대체 왜 표시하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의 출발점은 정보의 미획득이다. 한국인은 혼잡한 공간에서 백팩을 벗었을 때 얼마나 추가적인 공간이 확보될 수 있는지, 몸을 옆으로 돌려 걸었을 때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얼마나 회피할 수 있는지, 혹은 미리 “실례합니다”와 같은 말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서로의 공간을 얼마나 더 양보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버스와 지하철이 공급되기 시작한지 이미 몇십년이 지났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타인에 의한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이 야기하는 불쾌함의 정도에 대한 학습은 이미 완료되었을 확률이 높으며, 비록 정장에 백팩을 메고 타는 ‘패션'(이걸 ‘패션’이라고 기꺼이 불러주는 나도 참 많이 약해지고 부드러워졌다)이 유행한지 몇년 되지 않았다 해도 그 패션을 고집하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대학교때 마자 플라바나 루카스, 혹은 최소한 이스트팩 등 다른 종류의 백팩을 메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본 경험이 최소한 한번 이상은 있었을 것이 분명한 바, 더 나아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부터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습관처럼 말하라는 가르침을 담임선생님께 습관처럼 두들겨 맞으며 배웠던 경험이 한번씩은 있었을 것이므로, ‘학습의 부재’ 가정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판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샘솟는다. 한국인이 얼마나 못되고 싸가지 없으면 그러한 행동이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접촉을 불사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내가 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면 분명히 몸이 닿겠구나, 그러면 저 사람도 싫어하겠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말겠어!’

위와 같은 생각이 출퇴근길 한국사회를 허리디스크의 개미지옥 속으로 빠트리는 주된 명제란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이 생각도 근거가 미약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관찰한 바 출퇴근길 한국인들은 대부분 생각 자체를 잘 하지 않는다. 저렇게 몇 문장으로 이어진 생각을 할 여유가 있다면 주변을 차분하게 돌아볼 여유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집 밖으로 나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 까지의 과정도 이미 너무 벅찬데, 사람으로 꽉 찬 그곳 안에서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심을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끄집어내는 마인드컨트롤을 할만큼 사고의 끈이 긴 한국인은 사실 몇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그나마 영혼의 불씨가 어떻게 하다보니 남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의 나머지 부분은 휴대폰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내 소멸해버린다. 이들은 이미 이마 위에 제 3의 눈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시야를 휴대폰에 빼앗겨도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민첩함은 이미 확보해놓았다. 애초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다. 즉,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아무 생각없어보이는 이들이 모두 동일한 행동패턴을 일정하게 나타낸다면, 즉 이들의 행동에 일정한 규칙성이 있다면, 그 원인 역시 사회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결론은 이러하다. 이들은 사회에 의해 등떠밀리는 삶을 살고 있다. 대도시라는 익명성 속에 숨어 불편함을 ‘모르는 타인’에게 전가한 채 찰나의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다. 타인을 조금만 더 불편하게 만들면 내가 조금 더 나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불편함을 전가하는 타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죄책감은 덜어지고, 당장의 이익은 가시적이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을 밀치고 지나가는 것이고, 굳이 백팩을 벗거나 몸을 옆으로 돌려 걸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딱히 남을 해하려는 나쁜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지금 당장 저 눈앞의 자리가 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하차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옆의 칸으로 이동해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옆 사람의 불편함을 인위적으로 망각하는 것 뿐이다. 만약 어깨를 치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이 회사 부장님이라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관계에 약하다. 한국사회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계급이다. 계급이 없다고 여겨지는 친구 간 관계 역시 책임과 의무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서 관계는 연속적이다. 계급의 상층부에 있는 이의 영향력이 가장 말단의 사람에까지 미친다. 청와대에서 기침하면 동네 노점상이 타격을 받는 사회다. 그만큼 타인과 자신 사이에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면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폭력을 정당화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억눌려 잇었기 때문에 풀 곳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심지어 공짜로 탈 수 있는 지하철은 그러한 억눌린 관계에서의 해방을 위한 열린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다. 회사 복도에서는 임원이 지나갈때 마치 임금님이 지나가는 것처럼 옆으로 몸을 돌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하지만 지하철에서는 내가 왕이므로 모두의 어깨를 치면서 지나갈 수 있다. 관계와 계급에 많이 억눌릴수록 공공장소에서의 행동은 거칠게 발현될 확률이 높다.

무척 슬픈 사실은, 위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타고 빨리 내리면 대체 삶의 어떤 부분이 나아지는가? 거의 없다. 정말 거의 없다. 그저 땀이 조금 더 많이 날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가 등을 떠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쳐져버릴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딱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공포심에 질려 남들보다 빨리 걸으려 하고 남들보다 오래 일하려 하며 남들보다 앞에 줄서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반칙은 정당화되고 거짓말은 별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들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많이, 조금만 더 잘 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다들’ 믿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인이 걸린 병은 허리디스크가 아닌 정신병이다. 이들은 집단적인 히스테리 증세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모두가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결과 사회는 조금씩 더 나빠지고, 지하철과 버스는 조금씩 더 혼잡해진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2호선과 9호선 열차에는 선반이 없다고 한다. 백팩이나 다른 짐을 사람들이 올리지 않으니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것은 사회가 나빠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제 사람들은 백팩을 벗어 올리고 싶어도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개인을 더 등떠밀게 된다. 못되지라고, 나빠지라고 등떠밀게 된다.

조금씩 멋을 부리기 시작하는 금호동

결혼 후 삶에서 나아진 부분을 꼽으라면 많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중 역시 가장 좋은 점 한가지를 꼽자면 ‘같이 놀러 다니는 사람’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입히고 싶고 가장 좋은 것을 먹이고 싶은 사람, 어떤 것이든 가장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고 어떤 이야기든 가장 귀기울여 듣고 싶은 사람이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축복이다. 어떤 연애든 연애 초기부터 “내 공간과 시간이 필요해”라고 딱 잘라 말했던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뜨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주말 내내 함께 붙어 있어도 딱히 피곤함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은, 내가 변했다기 보다는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환경과 장소에 민감한 동물인 내가 새로운 동네에 ‘정착’하는 과정은 삶에서 특별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경험을 가장 좋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래서인지 대단히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성동구는 결혼 전까지 단 한번도 주거지로 고려해본 적이 없는 도시다. 딱히 특별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인구가 적은 중구와 선거구가 합쳐졌다는 정도가 최근 내가 획득한 가장 유용한 정보였을 것이다. 아내와 나의 직장 위치와 출퇴근 동선을 고려해 최적점인 금호동을 선택한 것은 사랑하는 마포구를 떠나기 위해 생각해낸 가장 이성적인 이유였다. 둘 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기에 바쁘고 정신없는 아침 시간은 하루 중 가장 피곤하고 힘든 때다. 금호동으로 이사온 이후 아내는 아침밥을 여유있게 해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나는 성산동 시절과 여전히 비슷한 시간에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출퇴근 시간만을 고려하여 선택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닌 금호동에서의 생활이 6개월차로 접어들면서 옥수동과 행당동, 신당동에 둘러싸인 이 동네가 갖는 독특한 매력과 가능성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3호선 금호역과 5호선 신금호역을 끼고 있고 도심, 강남, 용산 등 주요 지역과 빠르게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은 주거지역과 좁은 도로, 더이상 발전이 어려운 금남시장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부동산 가격이 주변만큼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몇년 간 재개발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우리와 같은 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거주층의 변화가 발생하면서 동네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재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곳에는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이곳에는 금남시장을 중심으로 몇십년 간 금호동을 지켜온 터줏대감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곳조차 멋을 부린 현관문과 멋을 부린 작은 자동차들이 좁은 골목 사이사이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젊은 세대가 조금씩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에는 고급 외제차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이들이 고소득 전문직인지, ‘카푸어’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들의 뿌리를 ‘압구정, 혹은 반포에 사는 부모님이 돈을 보태주어 독립한 젊은 부부’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아이를 맡길 수 있고 광화문이든 서래마을이든 30분 이내에 놀러갈 수 있으면서도 집값은 강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 곳이 이들에게는 최적의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유입된 새로운 주거집단은 기존의 금호동 거주자들과 완연히 다른 소비성향을 보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존에 부모님 품에서 누리던 소비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고, 한남동-압구정-성수동 등 금호동을 둘러싸고 있는 ‘핫’한 강북 지역문화의 혜택도 누리고 싶을 것이다. 즉, 중산층의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면서 강남의 비싼 부동산 가격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은 쁘띠 브르주아지 2세대 정도가 금호동의 새로운 주요 계층이라고 애둘러 표현할 수 잇을 것이다. 강남에는 문화가 없다.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강북에는 문화가 있다. 소비수준이 조금 낮을 뿐이다. 이들 신거주층에게는 아마도 옥수동의 외곽지역 쯤으로 정의내려질 금호동은 강북의 고유한 문화를 보다 저렴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진 장소로 여겨졌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부동산가격(=임대료), 문화적으로 단련된 새로운 주거집단, 지역문화의 특색을 간직한 주요 거점들과의 긴말한 연결성 등 금호동이 새로운 소비 중심지로 각광받을 수 있는 조건은 충분히 갖춰졌다. 물론 금호역과 신금호역 사이를 잇는 길이 가파른 오르막의 1차선 도로이고 성수역이나 행당역에서 금호역으로 이어지는 길도 복잡한 금남시장을 끼고 있는 1차선 도로라는 한계가 명확하긴 하지만, 연남동 골목길과 이태원 경리단길이 이처럼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해보자면 이정도 걸림돌은 사실 그리 커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도로적 특성이 금호동을 더 매력적으로 느끼게 해줄지도 모른다!) 아직 금남시장 골목에는 도우미들이 나오는 노래방과 철지난 유행을 머금은 호프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 가게들 사이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겉으로 보면 참신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들여다 보면 틈새를 노린 한 자본가의 전략적 요충지 확보 정도로 해석될 수준의 가게들이다.

먼저 금호역에서 나와 금남시장으로 향하는 장터길을 따라 걷다보면 이 길의 교통체증을 두 배로 심화시키는 주범인 회전식 원형교차로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호산길이 나오고 이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을 넘다 보면 신금호역이 나온다. 이 삼거리가 어찌 보면 금남시장의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목화다방이 있다. 상호명에서조차 동네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 가게는 술과 가벼운 음식을 함께 내는 프렌치 비스트로다. 각종 와인과 칵테일을 구비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쌍화탕을 마실 수 있다 하니, ‘다방’의 컨셉을 유지하는 동시에 금호동의 지역성을 살리고자 하는 나름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지역성’과 ‘차별성’이 요즘 서울의 힙스터를 정의내리는 두가지 키워드라면 목화다방은 그 키워드를 충실히 해석하는 수준에서 완성된 장소인 셈이다.

원형교차로를 지나쳐 조금 더 금남시장 안쪽으로 들어오면 금남시장의 실핏줄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 하나인 장터5길로 올라가면 금남소공원 근처에 돼지미학이 있다. 이 곳은 금남시장에 있는 다른 고기집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기를 공수해오고 다른 방식으로 고기를 익혀 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밝고 화사한 커피숍 분위기의 깔끔한 인테리어로 시각적인 차별화를 시킨 다음 인덕션을 이용해 고기를 익혀 깔끔한 반찬과 함께 내어 나온다. 이 고기는 제주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이라고 한다. 불편한 자리에서 전투적으로 고기를 구워먹고 싶지 않은, 그러니까 ‘살이 찌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기에 대한 욕망도 해소하고 싶은’ 세대에게 어필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장터길에서 금남시장 교차로를 끼고 돌아 독서당로를 타고 한남동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금호대우아파트가 나온다. 이 아파트 상가에는 최근 문을 연 베르베르가 있다. 좁은 공간에 큰 사각 테이블 하나를 덩그러니 놓고 주방은 오픈 형태로 열어두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과 요리를 하고 내어주는 사람이 공간과 동선을 공유한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유행하는 전형적인 ‘요즘’ 식당 인테리어다. 적당한 가격대의 와인과 어울리는 서양 음식을 제공하는데 양은  많지 않고 간은 적당히 슴슴하다. 소주를 마시기엔 부담스럽고 공격적인 안주를 먹는 것도 꺼려지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수다장소를 마련하려는 듯 보인다.

재미있게도 위의 세 음식점은 모두 장진우로부터 출발한 곳들이다. 금남시장이 간직하고 있던 전통적인 위치를 가볍게 전복시키려는 이 시도들이 모두 한 명의 자본가의 머리와 뱃살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백종원류의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 다 준비해봤어’ 식 브랜딩보다는 조금 더 파인 튜닝된 타게팅을 원하지만 매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갈 주머니 사정도 갖추지 못한 중산층-wannabe 집단이 장진우가 노리는 시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금호동보다 더 좋은 터는 없을 것이다. 이미 옥수동은 “옆구정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구정의 소비문화에 잠식당했다. 그만큼 부동산 가격도 많이 올랐다. 래미안 옥수리버젠과 옥수삼성아파트를 끼고 있는 독서당로에는 이미 셰프찬부터 초록마을까지 젊은 세대를 위한 소비패턴을 고려한 가게들이 다수 들어와 있다. 동호대교에서 올라와 터널을 두개나 통과해야 하는 약수, 혹은 신당동은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다. 그곳은 이미 ‘너무 강북’이다. 성수동으로 다리 하나, 압구정으로도 다리 하나, 한남동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의 금호동은 주차시설만 갖추어져 있다면 적당한 자본을 투하하여 차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다.

정작 금호동의 정체성을 지키는 맛집은 은성보쌈이나 원조칼국수보쌈과 같은 금남시장이 품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이다.  혹은 이미 서울숲을 끼고 들어와 나름의 위치를 확보한 고메트리가 있다. 재래시장이 품은 오래된 식당과 장진우식 신식 다이너들과의 격차는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커 보인다. 금호동에서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완전히 다른 두 주거집단의 색깔만큼이나 온도차가 심하다. 중요한 점 하나는 기존의 주거집단이 베르베르에 가서 식사를 할 일은 없지만 새로운 주거집단은 얼마든지 은성보쌈에서 한끼를 해결하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소비력과 문화적 확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요미식회에 한번 나오기만 하면 그곳은 힙스터들의 성지가 될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금호동은 신 주거집단의 문화적 정복이 멀지 않은 곳이다. 금호산길이 새로운 경리단길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금남시장이 재래시장으로서 갖는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해보인다.  금호동은 이제 막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멋부림 속에 어느 정도의 정체성이 담보될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이미 우리 아파트 앞에도 해외 맥주 보틀샵이 하나 생겼다. 그 가게에서 몇십미터만 내려오면 직접 원두를 볶아서 판매하는 커피숍과 콘크리트 벽을 그대로 드러낸 인테리어를 뽐내는 듯한 커피숍이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금호동 안에 위치한 이 새로운 형태의 가게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들쑥날쑥한 셀링 포인트와 특별하게 기억에 남지도 않는 맛들(고메트리는 맛있다, 고메트리는!). 하지만 최소한 어떤 시도의 흐름은 읽히고 있다. 그 흐름이 자본의 어깨에 올라 타서 특정 소비계층의 취향과 만나게 될 때 이 ‘동네’는 타지인들이 시간을 내어 방문하게 되는 관광지로 다시 태어나게 될 수도 있겠다 싶다. 지금 현재 한 지역의 어떤 태동기를 목격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조던 필레: 겟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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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아웃>은 명민한 영화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 감독 조던 필레는 이영화에서 특유의 B급 감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흑백 갈등과 차별이라는 미국사회의 뿌리깊은 문제를 미시적인 시선에서 효과적으로 다루어냈다. 미국사회를 떠받드는 핵심은 ‘가족’과 ‘이웃’이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3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잠재적인 인종 및 계급 갈등을 극복하고 단일국가로서의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강조되는 ‘커뮤니티’의 가치덕분이다. 개인의 가치를 억압하지 않지만 가족과 공동체의 위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학교, 군대, 이웃 등 그룹화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개념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주입한 결과, 미국 사회는 시민 개인의 자발적인 희생과 참여에 기반하여 각종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견고한 국가적 시스템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은 시민 개개인이 서로를 믿지 못할 때 발생한다. 1%와 99%가 서로를 경멸하고, 여성의 어려움을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수자의 기본권을 다수자가 지지하지 못할 때 사회는 갈라서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잠재적 위험요인은 아마도 모두가 짐작하듯 백인과 흑인 간 인종 갈등일 것이다. <겟 아웃>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갈등의 미묘한 시작점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이와 함께 인디 공포-코메디 영화 장르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며 장르의 형식적인 장점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관객은 충분한 몰입도와 함께 영화 그 자체를 즐기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다. 만약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백인 중산층의 가식과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의식을 같은 유색인종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장치들에서 현실을 환기시키는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을 깜짝 놀래키는 서스펜스 장치의 효과적 사용만으로 인기를 끈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 바로 지금 길거리에 실재하는  공포의 원천을 영화적 언어로 잘 옮겨 놓았으며, 그 결과 영화를 본 이들로 하여금 영화관 밖에서도 그 공포가 지속된다는 생각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만약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이 영화의 숨은 장치들을 100% 이해할 수 없었다면, 혹은 단순히 이 영화를 ‘재미있는 공포영화’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그건 아마도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체득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조금 더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잠재적 가해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선사하는 불편함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 아마도 그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와 예의를 숙지하지 못해 어떤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혹은,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들에게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한국, 그 중에서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다른 인종이 서울에서 공존해야 할 때, 자신들의 문화를 내어줄 의사가 아직까지는 없어보인다. 혹은, 인스타그램 배경으로 썩 괜찮은 도시에 사는 선진국 출신 백인들의 문화에 동참하고 싶은 잠재적 욕망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같은 극우 사이트들 뿐 아니라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평균적인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3% 이하로 내려가고 물가상승률이 2%가 채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어떤 부분은 침체하고 있다는 뜻이다. 돈이 되는 것들은 점점 사라지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더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사회가 되어간다.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시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우리나라로 넘어올 것이고, 아마도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타문화 배경의 시민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국처럼 극도로 예민한 신경질적인 국가에서 문화적으로 조금이라도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겟 아웃>은 굉장히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혀야 한다. 이태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천구와 안산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흉악스러운 인종차별 국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최근 인상깊게 듣고 있는 음반들.

이직 후 생활리듬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나에게 음악은 일상의 영역에 있기도 하지만 감정의 영역을 지배하는 주된 인자이기도 해서 감정이 고르지 못한 시기에는 음악이 잘 들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한참 어지러웠던 지난 몇달 간 음악을 거의 듣지 못했다. 평이 좋은 신보만 대충 메타그리틱이나 앨범오브더이어에서 체크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새 직장에 무사히 안착하면서 최근 다시 음반을 주문했다. 그것도 한뭉텅이로. 올해 나온 좋은 음반들을 한꺼번에 주문하느라 그렇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보물같은 순간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하나 하나  되새김질하기 전에 간단하게 메모라도 해두고 넘어가야겠다 싶다.

Infinite Worlds by Vagabon

아마존에서 총 열장의 음반을 주문했는데 오토립 서비스를 통해 가장 먼저 들어본 음반이다.  거의 대부분의 매체에서 고르게 호평을 받고 있는데 이전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vagabond’의 의도적 오타일 것으로 짐작되는 이름은 카메룬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Laetitia Tamko의 무대이름이다.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을 왔을 때 그녀는 고등학생이었고 그때부터 악기를 배우기 시작해 지난해 첫 EP를 냈다.  로파이 인디록이라고 뭉뚱그려 묘사할 수도 있겠지만 듣다보면 정제되지 않은 톤에서 남들과 다른 차원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대한 에너지의 원천이 가사에서 나온다는 것이 이 음반이 가진 가치의 핵심이다. 우리가 쉽게 지나쳐가는 일상의 작은 파편들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그녀의 감성은 ‘인디’의 핵심 철학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 같다.

The Order of Time by Valerie June

요즘 인디씬에서 가장 핫한 아티스트인 발레리 준의 두번째 음반인데 듣던 명성대로 탄탄한 소리를 들려준다. 미국 포크 음악에 블루스와 아프리칸 리듬을 끼얹은 사운드스케이프가 매력적이다. 소문에 의하면 스튜디오 음반보다 라이브 무대에서 진가가 드러난다고 한다. 음반으로 들어도 이미 꽉찬 사운드에 마음이 쉽게 풍성해지는데 공연은 또 얼마나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Memories Are Now by Jesca Hoop

요즘 미국 인디 포크 씬이 심상치 않다. 특히 블루스, 일렉트로닉, 컨트리, 인디 록 등 이웃한 장르와 교배하여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제스카 훕은 그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다. 올뮤직의 평가대로 폴 사이먼, 조니 미첼, 바쉬티 번얀 등의 영향력이 느껴지지만 역시 그녀의 커리어를 이야기할 때 뺴놓을 수 없는 사람은 톰 웨이츠다. 몰몬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부모의 이혼으로 미국 여기저기를 떠돌게 되는데, 그 와중에 톰 웨이츠 가정의 가정부로 5년 간 생활하게 된다. 이 기간동안 제스카 훕의 스펙트럼도 극적으로 넓어지게 된다. 소위 조아나 뉴섬 류의 “new weird Americana” 카테고리에 묶일 수 있을 법 한 그녀의 음악은 현대 인디 포크 씬이 어디까지 진화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이정표로 읽힐 수 있다.

Sick Scenes by Los Campesinos!

이제 관록의 중견 인디록 밴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로스 깜페지노스!의 무려 일곱번째 정규 음반이다. Wichita 레이블로 옮긴 뒤에는 두번째로 내놓는 음반으로 전작 가 2013년에 나왔으니 그 간격이 4년 정도로 그들의 부지런함을 생각했을 때 꽤 긴 편이다. 에서 보여주었던 넘치는 에너지와 불안한 청년 정서의 묘한 공존이 불러일으키는 특유의 감성이 좋아서 이후 계속 찾아 듣고 있는데 에서는 그 힘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 든다. 메이저 데뷔로부터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이제 아저씨 아줌마가 된 이들이 전과 같은 수준의 에너지로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기대는 더이상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그 감성만큼은 여전하다. 범작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팬들에게는 여전히 반가운 음반.

Heba by Lowly

덴마크 출신 드림팝 그룹의 데뷔 음반이다. 드림팝 장르는 왠만하면 다 좋다 좋다 이쁘다 이쁘다 하고 넘어갈 정도로 개인적인 선호도가 있는데, 이 음반 역시 오구오구 좋구나 좋구나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곡들을 꽤 많이 가지고 있다. 꼭토 트윈스의 강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의 음악은 현지에서 비치 하우스, 엠프레스 오브 등과 비교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들보다는 약간 더 일렉트로닉한 쪽으로 기운 드림팝을 하는 것 같다. 좋은 곡들이 많다. 곡들 간 편차도 꽤 있는 편이다.

Guppy by Charly Bliss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디록 밴드의 데뷔 음반인데, 슬리터-키니, 도쿄 폴리스 클럽 류, 그러니까 ‘위저의 아이들’로 분류될 법한 기타 중심의 음악을 구사한다. 흥미로운 것은 매 트랙이 거슬림 없이 쉽고 부드럽게 넘어간다는 점인데 데뷔작에서 이정도의 능숙함을 구사한다는 것이 꽤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아직 몇번 들어보지 않아서 조금 더 들어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Bandwagonesque by Teenage Fanclub

최근 애플뮤직에서 90년대 인디록 컴필레이션을 듣다가 귀에 확 꽂혀서 갑자기 주문장에 추가하게 되었다. 틴에이지 팬클럽의 음악은 항상 좋지만 이 음반이 가진 위력은 역사적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악의 표지만큼이나 기억에 오래 각인될 음반.

Powerplant by Girlpool

친애하는 여성 듀오 걸풀의 두번째 음반이 나왔다.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두 명의 하모니만으로 완성되는 사운드는 구성만으로 이미 독특한 정체성을 품고 있는 바, 이들 음악의 관건은 결국 어느 정도 수준의 에너지를 담아내느냐가 될텐데, 아쉽게도 전작에 비해 약간은 힘이 달리는 것이 느껴진다. 위트 넘치는 가사는 여전한데 조금 더 어두워진 느낌을 받는다. 위치타에서 안티-로 레이블을 옮겨서인지 뭐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색깔이 조금 더 차분해졌고 회색빛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아쉽지만, 여전히 NPR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서 충분히 사랑받을 것 같다.

Pleasure by Feist

NPR의 all music considered에서 언급이 되었던 바와 같이 파이스트의 새음반은 무척 잘 정체되어 있고 파인 튜닝되어있다. 이 음반이 새로운 청자들에게 얼마나 어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전작들을 꾸준히 들어온 이들에게는 대단히 반갑고 고마운 음반이 될 것 같다. 한단계 더 성장했음이 분명히 느껴진다. 그 성장곡선의 방향 자체에 반대한다면 할 말 없지만.

Damn by Kendrick Lamar

메이저 매체들에서 올해의 음반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딱히 반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잘 완성되어 있는 것 같다. 다만 이제 다음 행보부터는 분명히 매너리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가 하는 모든 음악이 항상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항상 좋은 것을 ‘항상’ 한다는 것은 ‘정체’로 읽힐 여지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에게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할 힘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는다.

Elwan by Tinariwen

알리 파루카 투레, 아마두와 마리암, 살리프 케이타 등 말리 출신 거장들의 음악이 영미씬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기타를 중심으로 조금 더 로킹한 음악을 하는 티나리웬도 미국 안티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낸 여섯번째 스튜디오 음반 은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음반으로 거론되고 있고, 들어보니 과연 허언이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홀딱 반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말리 음악을 파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박솔뫼: 머리부터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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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문장은 완벽하게 문학적이고 소설은 온전히 문학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음에도 그녀의 작품을 비유하기 위해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역설적이다. 문학이라는 필름 위에 문장이라는 배우를 등장시켜 글자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녀의 능력은 ‘기묘하다’고 표현해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다. 고심 끝에 내가 떠올린 영화는 데이빗 린치와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이었다. 조금 불편한 이미지들로 서사를 구성하되 메타-필름으로도 읽힐 수 있는, 영화적 언어에 능통한 다층적 성격을 지닌 작품들이 떠올랐다. <머리부터 천천히>는 장황하고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학적 이미지가 감지되고, 다시 그 낯선 이미지들의 연결선을 따라가다보면 이 소설이 절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이야기될 수 밖에 없는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된다. 마치 홍상수의 영화들처럼, 어떤 공간에 있지만 그 공간에 있지 않은 초현실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인물을 통해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을 빙빙 돌려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어쩌면 문학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와 같은 서사를 다루는 다른 예술 장르로 절대 재현할 수 없는 문학만의 미덕을 충실히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학 내에서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문체와 주제전달 방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챕터간 구성이 치밀하게 얽혀 있다는 느낌보다는 직관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챕터별로 화자와 주요인물이 바뀌다 보니 서사구조가 아닌 소설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를 따라가는 것조차 조금 벅찰 때가 있었다. 물론 그조차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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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사회는 ‘치욕의 시대’를 살고 있다. 타인에게 얼마나 더 큰 치욕을 안겨주느냐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가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급으로 깔아뭉개는 시도는 그래서 일상화되어 버렸다. 타인보다 조금이라도 계급적으로 우수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지독하게 활용하여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다. 극도로 세분화된 계급구조는 극소수의 승리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로 구성된 사회를 만들어버린다. 사회가 이렇게 ‘각박’해진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듯 좁은 땅덩어리와 많은 인구때문이다. 자원은 부족하고 땅덩어리는 좁으니 땅 한평의 가치가 사람 한명의 가치보다 우선시된다.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더 쉽게 벌 수 있다. 지나치게 높은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공부하고 노력했지만 건물을 물려 받은 친구보다 삶의 질이 훨씬 낮은 현실을 목도하는 순간 힘이 탁 풀려버린다. 노동이 죽어버린 사회, 노동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되기란 쉽지 않다. 사회 전체적인 창조성은 빠른 속도로 고갈된다. ‘집주인’이라는 ‘직업’이 높은 지위로 대접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고용 불안정이 상대적으로 덜한 공무원이 최고 인기 직업이 되었다. 집이나 건물을 살 수 있는 돈을 ‘공짜’로 건네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하면 처음부터 틀린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이 사회는 패배하고 있다. 패배의 대상은 다른 아닌 사회 그 자체다. 사람은 죽어가고 땅과 건물만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개걸스럽게 번식해나간다.

이런 사회에서 ‘조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심리가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다. 영어만 잘 했다면, 능력만 있었다면, 부모가 돈만 대주었다면, “나는 떠났을거야”라고 말하는 겁 많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넘실거린다. 그들의 욕망과 현실 간 괴리가 심해질수록 현실에 대한 투정은 늘어만 가고 외국에 대한 환상은 커져만 간다.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는 자신의 원하는 가치를 찾아 조국을 떠난 한 청년의 고생담을 그리고 있다. 외국에서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겠지만 한국 밖을 벗어나는 것이 더 나은 삶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급적으로 한두단계 밑으로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한국에서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살아왔던 대졸자가 미국에서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세탁소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풍경은 아니다. 언어장벽과 문화장벽은 ‘유리천장’을 두껍게 만든다. 적극적으로 섞이려는 노력을 해도 수십년 간 살아온 터전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의 경계를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갖은 노력을 다해 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경계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2세는 어떠한가.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뿌리의 문제가 그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삶의 구석구석에서 차별을 경험할 것이다. 결국 높은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일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는 외국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업그레이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트레이드 오프’만이 존재할 뿐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계나는 그 트레이드 오프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호주에서의 삶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녀에게는 허풍과도 같은 환상도 없고 조국인 한국에 대한 경멸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조금 더 잘 맞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은 작은 욕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삶의 소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적지 않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 조국의 익숙한 사회 시스템, 언어, 문화, 친구, 가족까지 다 내려놓고 몇년동안 죽을 고생을 해야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나라에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만성적인 남녀차별과 불안정한 고용상태, 삶의 벼랑까지 몰아붙이는 냉정한 사회적 공기 등 싫어하는 것들과 멀리 지내기 위해 그녀는 젊음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한다. 그 결과 그녀가 얻는 것은 작으면 작다고 할 수 있고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다른’ 생활이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작은 일상. 그녀는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고 있을까? 주인공이 ‘한국이 싫어서’ 택한 국가가 호주라는 점이 흥미롭다. 호주는 넓은 면적과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수를 나타내는 곳이다. 그래서 한국과 삶의 패턴이 매우 다르다. 완성품이 아닌 천연자원을 수출하고 노동인구 간 경쟁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다. 대도시를 벗어나면 삶의 속도도 많이 느려질 것이고 집값도 많이 쌀 것이다. 한국과 다른 계절에서 다른 하늘을 품은 그 곳에서 계나가 얻은 작은 일상을 왜 그녀의 조국은 결코 줄 수 없었는지 곱씹어볼 일이다.

소설은 우선 재밌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구어체로 진행되기 때문에 문체도 맛깔스럽고 페이지도 쉽게 넘어간다. 현지인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묘사도 사실적이고 공감대도 폭넓게 형성될 수 있다. 그 와중에 한국을 조국으로 하는 젊은이들의 고단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길은 결코 무책임하게 밝지 않다. 하지만 절망으로 가득차 있지도 않다. 절묘한 균형감각이 흥미롭게 읽힌다.

dignity

나는 노빠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해 몇 년 전 어설픈 일기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이후 그를 ‘정치적으로 죽인’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렀고, 나는 지금 한국에서 그가 한 때 몸담으며 꿈을 키웠던 곳을 위해 일하고 있다. 아직 국회의원실과 직접적인 업무를 주고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오며가며 그들의 호흡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가 그토록 물리치려고 애썼던 망령의 딸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사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대통령을 뽑게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은 문재인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것 없이 누군가의 후광에 기대어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이라는 그 친구 나름대로의 판단을 들었다. 박근혜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 친구가 당시 지지했던 안철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우는 등 이룬 것이 많기 때문에 믿을만 하다는 논리였다. 그 친구의 논리대로라면 전자와 같은 “후광에 기대려는 사람”의 대표격이 박근혜라면, 후자의 경우 이명박을 안철수와 비슷한 범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친구처럼 문재인을 노무현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아 대통령직에 오르려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닌,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유명한 말은 노무현 그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작가이자 문재인 대선캠프의 영상팀장이기도 했던 정철영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아!”와 “아~”로 구분했다. 만나는 즉시 이미지와 색깔이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오는 사람이 노무현이었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의중을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는 사람이 문재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 먼저 세상에 발견되었고, 문재인은 그의 친구가 저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길까지 배웅한 뒤에야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세상이 “아~”하며 문재인의 색깔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에게 ‘자격’과 ‘경력’이 필요하고 그 것들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도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면, 거대 정당을 이끌고 몇차례의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보다 더 화려한 경력과 더 단단한 자격을 갖춘 이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철저하게 이용한 그녀의 몸에는 동물적인 정치적 본능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수성가의 표상이었던 이명박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국가의 재산을 사유화시키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라는 또다른 기업인 출신 정치인에게 몰표를 주고 대통령 후보로 성장시킨 호남의 심리 역시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치적인 레주메가 일천한 그에게 하나의 정당을 ‘창업’시켰다는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우리도 대안을 가져보자”는 열망을 실현시켰으니 말이다. 문재인은 다른 방식으로 자격을 획득했다. 노무현 정부 내내 민정수석과 사회수석 등 청와대 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경험을 쌓았지만 그는 여전히  노무현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색깔과 그만의 철학을 포기하지 않으며 정당을 일궈나갔다. 그의 성품에 매료된 인재들이 민주당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촛불이 켜진 광화문으로 뛰쳐나간 수많은 정치인들 중 문재인이 ‘선택’된 것 역시 필연적이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색깔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색깔은 노무현과 다르지만 노무현만큼 깊게 새겨질 수 있는 것이었고, 그 결과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된다. 세상을 바꿀 기회. 노무현이 꿈꾸었지만 보지 못했던 그 세상. 노무현과 만난 것이 “운명”이었다면 이제 문재인은 스스로 운명의 다음 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더이상 노무현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며 “친문세력”에 대한 비토로 상대방의 비난의 물결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다.

노무현을 죽인 두 개의 망령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박정희로 상징되는 친일반공주의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십자가라는 불가해한 조합의 상징물에 의지하며 과거에 천착하려는 천박한 종교적 열망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어지러운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괴물처럼 약자를 잡아 먹으며 성장한 천민 자본주의 세력이다. 재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어난 이명박은 이 괴물이 낳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씨앗이었다.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의 힘으로 전자를 밟고 일어설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면 그보다 조금 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후자는 선거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죽은 노무현과 살아남은 문재인을 괴롭혔다. 그 망령 중 일부는 안철수에게 붙었다. 성공한 기업인, 한국사회에 몇 안되는 올바른 소리를 하는 오피니언 리더, 기업의 생리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한 이해도 밝은 해결사 이미지. 안철수는 이 시대의 좋은 대안이었다. 망령의 일부는 홍준표에게 붙었다. 죽어도 문재인은 싫다는 사람들은 박근혜가 속한 정당에서 배출한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정당이 매 선거마다 택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잘못을 많이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이번에 내세우는 후보는 과거의 잘못과 상관이 없다” 라는 논리로 무장하여 무지한 노년층과 이기적인 부유층을 자극한다. 이게 정확하게 먹히는 지역이 바로 대구와 경북, 그리고 서울 강남구다. 대구와 경북에 사는 그 사람들은 이런식으로 매번 스스로를 기만한 결과 모든 나쁜 경제지표에서 순위권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대구는 망해가고 있지만 이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우한 현실은 남탓을 하면 그만이다.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는 아마 5년 뒤에도 유효할 것이다.

문재인이 기적적으로 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김대중도 하지 못했고 노무현도 하지 못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고 삼성도 지금까지 쌓아온 시스템을 더 견고하게 만들며 버틸 것이다. 대구와 경북에는 아직도 수백만의 사람이 살고 있다.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부유층은 더 집요하게 재산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검찰과 같이 영원한 권력을 가진 집단은 다시 한번 대통령을 모욕주려 할 것이다. 이 모든 장애물을 문재인 혼자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번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입을 것이며 어쩌면 영구히 다리를 절게 될지도 모른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 자체로는 아무런 성취도 얻을 수 없다. 무수히 공격받고 무수히 넘어질 그의 옆과 뒤와 앞에서 그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노무현이 세상을 등질 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집단적 부채의식이 ‘미안하다’라는 말을 기어코 한국인의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세월호 사건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을 생각하게 되었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렇게 아주 큰 씨앗 하나를 한국사회에 심어 놓았다. 문재인이라는 큰 나무 주변에는 그 씨앗으로부터 솟아난 작은 풀잎들이 함께 해야 한다. 그래서 땅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그래서 비가 와도 나무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 내가 앞으로 5년동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노빠다. 빠는 빠답게 해야 할 일이 있다.

지난 주말 여행: 창원, 대구, 서울.

지난 주말에는 창원과 대구에 다녀왔다. 결혼 이후 매 7일마다 한 번씩 주어지는 주말의 상당 부분이 ‘가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내 입장에서는 아내의 가족으로까지 가족의 범위가 확대된 셈인데, 원래 익숙한 나의 가족에게 새로운 멤버를 소개시켜주고 친해질 시간을 마련해주는 작업이 필요한지라 기존의 가족에게 할애하는 시간 역시 비례해서 증가하게 되었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 입장라 ‘우리’의 가족에게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이 몇곱절은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결혼을 통해 서로의 부모에게서 떨어져나와 법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가정을 생성하게 된 것이 오히려 ‘예전’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창원은 결혼 전에는 한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는 도시다. 군대 시절 바로 윗 고참이 창원 출신이었는데 힘이 무척 세고 단순 무식한 문제 해결방식을 선호하는 성격 탓에 “황소개구리”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양반과 잡담을 할 때 항상 나오던 단어가 “상남동”이었다. 아시아 최고의 유흥가, 외국인 노동자의 천국, 빌딩 하나에서 모든 욕망을 해결할 수 있다, 등등의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으로 보아 창원 시민으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나에게 창원의 이미지는 딱 그정도였다. 그 당시 현재 아내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장인 장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가 바로 그 상남동 한복판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뿐더러, 더 나아가 지난 주말 그 가게에서 장인 장모님을 도와 일을 거들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현재 창원은 예전 도시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마산과 계획도시 창원, 그리고 신/구시가지가 섞여 있는 진해 등 세 도시가 통합되어 있다. 도시 간 거리가 존재하는데다 분위기도 많이 달라 하나의 완전한 도시라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깔끔하게 구획된 도로와 공공기관들이 대규모 공단과 함께 자리잡은 창원은 쾌적하고 평화롭다. 그 요란스럽다는 상남동조차 서울의 명동이나 강남역과 비교하면 한적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사람들은 많이 사납지 않으나 경상도 사람 특유의 서두름과 퉁명스러움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도시의 분위기 자체는 우리나라에서 ‘지방’이 갖는 여러 편견에서는 꽤나 자유로운 편이다. 낙후되었다는 인상은 쉽게 가질 수 없으나 이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 역시 찾기 힘들다.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점령한 유흥가 틈새로 가끔 보이는 동네 상점들 역시 홍대나 성수 어딘가에 있는 흔적을 그대로 베낀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이건 아마 전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홍대나 성수 등 ‘핫’한 동네 역시 특유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그들 역시 윌리엄스버그나 포틀랜드 어딘가에 있는 무언가를 훔쳤을 가능성이 높다.

대구에는 태어날 때부터 줄기차게 오르내렸다. 아버지의 고향이자 조부모님 등 친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1년에 최소한 두 번은 왕래했던 것 같다. 중공업 도시인 창원과 달리 대구는 제조업 위주로 발달했다. 산 속에 갇힌 분지 지형이 주는 폐쇄적인 문화에 더해 생활의 호흡조차 조금 더 빨라질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은 전국에서 발전이 가장 더딘 도시라는 오명을 안게 만들었다. 뻥 뚫린 도로와 높게 솟은 빌딩, 모노레일과 같은 눈요깃거리들은 기간산업의 침체 속에서 부동산 시장 버블 붕괴 등의 위험요인으로 쉽게 연결될 수 있다. 도시는 덥고 답답하다. 사람들은 성마르고 공동체의식은 결여되어 있다. 공동체의식의 탈을 뒤집어 쓴 집단 이기주의만이 여러 곳에서 감지될 뿐이다. “세월호는 교통사고일 뿐”, “친손자와 외손자는 다르다”, “문재인은 무조건 싫다” 등의 표현을 아주 최근에 그곳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서울에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뿌리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 줄기 어딘가에는 대구라는 지명이 반드시 출현할 수 밖에 없다. 거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틀간의 고된 여정을 마치고 서울역으로 돌아와 집으로 가는 길에 서울의 밤 풍경이 조금 달리 보이는 것을 느꼈다. 창원과 대구에 걸려 있는 수많은 네온사인과 간판들은 서울의 몇년 전, 혹은 몇십년 전 걸려있던 것들을 가져다 놓은 느낌이다. 서울과 창원, 대구는 같은 2017년을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을 ‘후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서울이 조금 더 빠르게 베낄 뿐이다. 왜냐하면 자본은 항상 서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들 교육때문에, 집값 상승폭때문에, 벌이가 괜찮은 직장때문에, 문화적 혜택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등 이유는 다양하다. 사람들이 서울에서 떠나지 못하니 자본도 서울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자본은 ‘더 새롭게’가 아닌 ‘더 빠르게’에 집중되어 소모된다. 누가 더 빠르게 베낄 수 있는가의 싸움을, 현대 한국사회는 여전히 하고 있는 셈이다. 창원과 대구라는 지방에서도 꽤 좋은 도시들이 고유성을 상실한채 서울을 쫓아만 가고 있는 것도,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순간의 차익만을 노리며 현재의 위상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는 것도 결국 나라의 고유한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 성북동에서 곤지암으로 가게를 옮긴 단골 미용실 사장님께 “영어 공용화”에 대해 말씀드렸다. 언어적 장벽이라도 허물어버리면 더 많은 노동인구, 그것도 젊은 층에 집중된 사람들 사이에서 왕래가 더 빈번해질 것이고,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문화적 장벽마저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 내 생각에 한국은 현재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섬나라다. 사실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은 토플시험 만점 받는 것이 일도 아니라고 한다.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문화적 고립성이다. 미국에서, 혹은 다른 영어권 국가에서 그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면 한국사회의 꽤 많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름’을 경험하고 와야만 한국에서 ‘다름’이 인정받을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는 다름을 인정받기 힘든 구조다. 역설적으로 더 큰 격차의 다른 문화를 경험한 자만이 한국 사회에서 그 다름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창원부터 대구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지난 주말 여행동안 내가 고민한 부분이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한국은 불균형과 노골적인 차별이 일상화된 사회다. 윗 세대의 아랫 세대에 대한 억압,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당당한 차별, 자본가와 노동자 간 넘을 수 없는 장벽 등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채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불균형, 혹은 차별의 대상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폭력일 것이다. 이 나라의 절반이 만성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또다른 절반은 그것이 폭력인지 모른채 살아가거나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음으로써 비판의 대상에서 피해 나가려는 소극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갉아먹는 수많은 요인들 중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남녀 불균형, 혹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고, 가장 먼저 해방되어야 하는 계급이 여성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여성운동, 혹은 페미니즘 운동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 한국 여성의 위상이 지금과 같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과 불편함을 문학의 차원에서 다루는 작업은 매우 소중하고 더 발전되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현재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30대 중반 여성의 ‘평균’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평균’의 삶을 살아가는 가상의 여성이 겪는 다양한 폭력을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표현한다. 어린 시절부터 남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학교에서 여학생에 대한 비논리적인 억압에 힘없이 저항도 해보며 자라다가 성추행과 성폭력에 무작위로 노출되는 삶을 견디어 내어야 한다. 시스템적으로 불공평하게 설계된 취업관문을 어렵게 통과하면 육아가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위치에서 처음부터 다시 불공정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결국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가정주부가 되면 자아실현은 배부른 사치처럼 느껴지고, 시댁의 눈치없는 잔소리에 익숙해질 때쯤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이처럼 딱히 실패하지도, 딱히 특별한 삶을 살지도 않은 이 평범한 여성이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을 얻게 된다고 마무리짓고 있는데 그 섬뜩한 결론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은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위와 같은 여성주의적 시각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는다 해도 대단히 멍청한 책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먼저,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노골적으로 페미니즘 문학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 어떠한 새로운 경향이나 에너지를 느끼기 힘들다. ‘평균적인 여성’을 가공하여 대다수의 여성에게 공감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하나 낳은 여성이 한국사회 여성의 삶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형적인 평균의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위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 여성이 훨씬 많을 것이고, 위와 같은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이 82년생 김지영씨의 삶은 많은 여성들에게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읽힐 수 있다. 페미니즘이 사치처럼 느껴지면 안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 안에서 함께 호흡해야 한다. 왜 페미니즘을 드러내기 위해 ‘평균’적인 여성의 삶을 시대순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것인가. 또한, 개개인에 따라 여성주의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갖는 다른 가치에 의해 무시될 수도 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여성, 혹은 아무런 문제 없이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자란 여성 등 ‘평균’이 아닌 양 극단에 속한 여성들이 고민하는 것들이 과연 김지영씨의 삶과 호응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어떠한 답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김지영씨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무리한 설정을 지나치게 많이 삽입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이 폭력적으로 타자화되고 있다. 가족 내에서 모든 특혜를 받는 남동생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없고, 아버지는 멍청한 존재로만 묘사된다. 김지영씨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남성은 폭력의 주체로서만 기능한다. 심지어 이 책의 화자인 정신과 의사조차 자기 자신이 만성화된 남녀 차별의 주체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사회의 절반을 멍청하게 묘사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을 위하는 최선의 방식인지 고민을 많이 했는지 의문이다. 발전적이지도 않고, 자기성찰적이지도 않으며, 이유없이 남탓만 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투정만 잔뜩 적혀 있다. 이 책에는 ‘그래서’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가 없다. 고통의 나열은 이미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걸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이 2016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더욱 더 안타까운 점은,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씨조차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일차원적이다. 문장은 새롭지 않다. 건조한 기사나 칼럼을 읽는 느낌이다. 신문 등에서 따온 구체적인 수치가 등장할 때마다 그래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 책의 저자는 성실한 정보수집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문학이라는 예술의 영역에서 일할 만큼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목적이 너무 뻔히 읽혀서 재미가 없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나이브해서 설득력이 높지도 않다. 차라리 기사나 칼럼의 형식으로 썼다면 재미없는 글 하나 읽었네, 하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소설의 영역에서 이런 책을 읽으니 오히려 기분이 나쁘다.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글이 아니다. 논문이나 칼럼이라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정책적 해결점을 제시해야 할 것이고, 문학에서는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고통의 한 단면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권여선의 <레가토>가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프로의 냄새가 나지 않고 아마추어의 설익은 의욕만 잔뜩 읽히는 책이다. 차라리 대학생의 습작이었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