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이가 되어 솔잎을 먹게 되었다.

출근 첫 주가 끝났다. 출근 첫날이었던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엔 이 곳 사람들과 섞여 강원도 고성에서 열린 연찬회에 다녀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몇시간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세끼를 함께 먹고 술까지 마시며 인사를 나누었다. 정장 차림으로 만나도 어색할텐데 평소 보기 힘든 사복 차림으로 이틀 밤과 낮을 함께 보내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introvert계의 교과서인 내가 처음 만난 사람들과 몇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술까지 나누어 마시고 잠까지 같이 자다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본격적인 첫 출근은 수요일부터였고, 임명장을 받고 인사를 다니고 자리 세팅을 하는 등 절차 상 필요한 일들을 다 끝낸 목요일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오늘 간부 보고를 들어가고 부서 내 회의까지 참석하니 대략적인 프로세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는 일은 전에 다니던 곳과 매우 비슷하다. 한 달에 한 번 거시경제와 관련된 시의성 높은 주제를 선정하여 개조식 보고서를 쓴다.  1년에 두 번 경제성장률을 예측한다. 초안을 쓴 뒤 1차 관리자의 검토를 받고 2차 관리자의 승인을 받으면 최종 결재자의 결재까지 득하여 출판 등의 방법으로 외부로 공개한다. 혹은, 내부 보고 수요가 있을 경우 같은 절차를 수행하되 외부로 공개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보고한 뒤 마무리한다. 그 과정에서 이 바닥 특유의 형식에 구속당하는 경직성이 있을 것이고, 외부의 시선을 고려하여 글의 톤을 ‘조절’하는 절차도 있을 것이다. 업무의 형식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어떤’ 글을 ‘어떻게’ 쓰는지가 약간 다른 것 같다.

우선 실무를 위한 보조 역할이 아닌, 거시경제 전반에 걸쳐 시의성 있는 이슈라면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는 저자의 재량권이 어느정도 확보되는 듯 보인다. 기관의 입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저자의 주관을 글에 담을 수 있는 여지도 어느정도는 존재하는 것 같고. 초안을 완성한 뒤 관리자의 ‘수정’이 어느 수준까지 개입하는지 한번 겪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띄어쓰기까지 꼼꼼하게 수정하기 보다는 기관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한 뒤 코멘트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원고가 완성되는 것 같다. 그정도만 되어도 “글을 빼앗긴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 같다. 우선 글자 크기가 15p 에서 11p 로 확 줄어 들었다! <- 가장 큰 기쁨

개인적으로 금융감독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것, 특히 금융산업의 본질적인 greedy한 속성과 시장 중심의 사고방식에 더이상 구속당하지 않는 것이 기쁘다.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정책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게도 전 직장과 유사하지만 거시경제 전반에 걸쳐 신속하게 현상을 분석하는 업무를 연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분명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금융감독, 특히 은행감독에 한정하여 지식을 축적하였던 과거 3년과 달리 이제는 살펴봐야 할 부문이 경제 전반으로 확대되다 보니 깊이는 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시경제를 전공한 사람의 입장에서실물경제를 직접 대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흥분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떤 이는 “같은 일을 더 적은 돈을 받으면서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낮게 평가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나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송충이와도 같다. 금융산업에서 정책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특히 금융정책과 금융감독을 함께 총괄하는 기관의 감독을 받는 회사에 속해 있다 보니 시장에서 권력이 거의 없는 개별 소비자를 위한 정책적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업무 환경이라면 직접적으로 정책적 제언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저자의 시선을 담아낼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시경제를 공부하는 사람, 특히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처럼 뭉툭하고 광범위한 거시경제정책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 정책이 개별 경제주체 개개인에게 미치는 실질적 효과에 대해 고민하고 그 결과에 대한 입장이 어떠한지 밝힐 수 있는 책임감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관의 입장에 의해, 혹은 시장의 입장에 의해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기 힘들게 감추는 행위는 보고서를 “예쁘게 잘 쓰는” 좋은 부하직원으로 비추어질 수는 있어도 거시경제의 올바른 순환을 돕는 정책가의 모습은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그 결과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것이 학자의 사회적 책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낮은 임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 머무는 동안 어떤 글을 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위와 같은 목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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