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가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난해져 작은 것도 커 보일 때가 있다. 예컨대 매일 반복하는 출근과 퇴근이 가끔은 무척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퇴근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출근, 그 출근을 하기 위해 하고 싶어지는 퇴근, 그리고 다시 출근. 이 루틴의 반복은 정기적인 월급을 받아내기 위한 기본적인 의무이기도 하지만,  통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겐 매일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축복의 신호일 수도 있다. 

노동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사회를 사회로서 존재하게 해주는 사회적 약속의 가장 작은 단위다. 노동을 함으로써 생산물이 축적되고 그 축적된 생산물을 나눔으로써 인류는 사회라는 단위로서 진화할 힘을 얻는다. 사회로부터 받은 교육을 통해 잉여 노동력을 획득한 개인은 그 노동력을 사회에 제공함으로써 살아갈 여유를 얻고 사회는 그 노동력을 자양분으로 삼아 발전을 꾀한다. 노동력의 질이 차별화될수록 여유의 크기는 커지게 되고 어떤 뛰어난 이들은 노동가에서 자본가로 신분을 바꾸기도 하며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도 한다는, 뭐 그런 뻔한 이야기가 떠오르는 이유는 오늘 나의 마음이 약간 가난해졌기 때문이다. 

금호역 개찰구를 빠져나오는데 개찰구 밖에서 어린 소녀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겉옷도 입지 않은 그 소녀는 내 뒤에 있던 그녀의 엄마에게 뛰어가 품에 안기며 말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 이제 집으로 가요.” 

나는 그녀의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다.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여인일 수도 있고 대기업의 중견 간부일 수도 있다. 그냥 지인의 일을 며칠 도와주는 전업주부일수도 있고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일수도 있다. 어쨌든 그 순간의 나는 고작 열시간 정도 책상머리에 앉아 그래프를 끄적거리며 인생 참 고단하네, 라고 불평하다 막 튀어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던 참이었고, 그 소녀의 “고생했다”는 한마디가 나를 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오늘도 고생한 사람”의 하루는 값진 것이다. 그것이 원치 않는 출근과 퇴근의 굴레바퀴에 갇혀 있다 해도 말이다. 네이버 부동산을 보며 세상에 돈 많은 이가 이리도 많구나, 탄식하다가도 반짝반짝 빛나는 삶의 작은 파편을 발견하는 이런 순간은 그저 마음이 가난해지며 어깨를 낮추게 되는 것이다. 

데이브 에거스: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아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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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소설책 크기인 신국판에 신명조체, 폰트 사이즈 10에서 11 정도의 크기로 번역된 책의 두께가 600쪽이 넘어가면 일단 책을 집어 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약간의 고민을 하게 된다. 빠르게 읽어나간다고 해도 최소한 며칠이 걸릴 정도의 분량에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 위해 팔과 어깨의 근육에 양해를 구해야 하는 무게, 그리고 혹시나 이 책을 읽기로 한 결정이 잘못되었을 경우 얻게 되는 내상의 크기 등을 생각할 때 책의 첫 쪽을 넘기기 위해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미국의 떠오르는 신예 작가 데이브 에거스의 데뷔 장편 소설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아픈 이야기>는 장황한 책의 제목만큼이나 수다스럽고, 그래서 분량도 엄청나다.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서사구조를 찾기 힘들 정도로 정신 없이 ‘무언가가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설의 형식은 작가가 품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부모를 모두 암으로 잃은 뒤 7살짜리 어린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20대 초반의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이 겪는 정신적인 혼란을 표현하기 위한 문체와 서사구조는 분명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었다.

제목만큼이나 정신 없는 – 사실 이 소설의 제목이 거의 모든 것을 다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시피 이 소설은 작가의 생애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다큐멘터리든, 뉴스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실제 인물이 2차 가공되어 표현되는 그 어떤 생산품에 대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을 뿐더러, 그렇게 재현하는 것이 갖는 의미 역시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가의 시각과 의도에 맞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현실이 얼마나 일관되게 편향되어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로운 읽기 방식이 될 것이다. 에거스는 이러한 면에서 분명 일정 부분 성공하고 있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다가도 인터뷰 등 다른 형식을 삽입하여 독자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가운데 에거스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여러 부조리를 나쁘지 않은 유머와 함께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결국 작가의 혼란을 독자가 충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고, 반대로 이 책의 단점은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600쪽이 넘는 분량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모든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만, 반대로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밑줄을 긋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단어에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그 어떤 단어도 머릿속에 깊게 박히지는 않는다. 적절히 가볍고 적절히 무거운, 기존의 문학 문법을 적절히 배반하면서도 결국 기존 문학이 물려준 유산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요즘 주목받는 신진 작가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이디 스미스처럼 완전히 판을 엎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줌파 라히리처럼 기존 문학의 토대 위에 미학적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도 아닌, 뭔가 애매모호하고 어중간한,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지루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때문이다.

일주일 넘게 이 책을 가지고 출퇴근하며 책을 끝내기 위해 많은 끈기와 용기를 내야 했다. 내가 투자(..)했던 노력만큼 이 책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미국의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일으키는 재미있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있는 젊은 작가의 역사적인 데뷔작(퓰리쳐상 최종 후보까지 갔다고 한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낭비가 많은 소설이었다.

볼빨간 사춘기: Red Pl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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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스케”와 “케이팝스타”를 보고 자라며 뮤지션의 꿈을 키운 세대가 있다. 아이돌을 꿈꾸다가 이러저러한 사연들로 인해 인디씬으로 흘러들어온 뮤지션도 있다. 이들이 꿈꿔온 음악관은 그 전 세대와 어떻게 다를까? 이 세대가 만들고자 하는 음악의 선과 결은 기존 대중음악 산업에서 고수되어온 소비방식과 여전히 맞닿아 있을까? 수년 간 급격하게 달라진 씬의 패러다임과 달리 전부터 음악을 들어온 사람들은 여전히 음악을 듣고 있다. 이들에게 새로운 세대의 음악은 여전히 “좋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볼빨간 사춘기의 데뷔 음반 <Red Planet>은 최근 한국 팝음악의 급격한 변화과정에서 한번 쯤 생각해봄직한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다. “좋은 음악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라는 단순한 명제가 최근 한국 음악시장에서도 성립할 수 있음을 증명한 대단히 뛰어난 음반이다. 이들의 음악에는 핸슨도 보이고 리한나도 보이고 아델도 보이는데 그 어느 레퍼런스 하나도 그대로 베껴쓴 티가 나지 않는다. 기존에 존재하는 팝음악의 문법을 뻔뻔하게 빌려 쓰면서도 그룹만의 정체성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요인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보컬 안지영의 음색과 소화력일 것이다.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색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버해서 내세우지 않아 금방 질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보컬의 독특함을 십분 살려주는 훌륭한 작곡, 작사 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볼이 쉽게 빨개지는 여리고도 당돌한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낸 가사와 이를 잘 녹여낸 멜로디 라인, 그리고 깔끔한 편곡까지, 음반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들이 평균 이상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평론가들은 가장 볼빨간 사춘기다운 노래인 “우주를 줄게”나 알앤비 장르를 훌륭히 소화한 “나만 안되는 연애”를 가장 선호할 것이고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혹은 막 통과한 팬들은 “You(=I)”같은 달달한 노래를 좋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싸운날”이나 “반지”처럼 감수성 충만한 노래들이 좋다.

화려하지 않은 단순한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꽉 찬 팝음반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소중한 음반이다. 이건 최근 양적 확대에만 치중한 나머지 속이 텅 빈 영혼없는 음악을 양산해내는 메이저 음반사들에게 적지 않은 충고가 될 것 같다. 좋은 비교대상으로 최근 오랜 커리어 끝에 최초의 솔로 음반을 발표한 태연의 예를 들 수 있다. 화려한 세션과 엔지이너 등을 대동한 채 화력을 쏟아부었지만 음반의 그 어떤 지점에서도 좋은 팝 음악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커리어 내내 대체 무엇을 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볼빨간 사춘기의 이 음반을 들으며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실감했으면 좋겠다. 이런 처지에 놓인 베테랑 메이저 뮤지션들은 비단 태연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계의 종말, 숙제의 시작. 

전혀 기쁘지 않았고 안도했다. 탄핵에 찬성한 다수의 시민과 그들의 요구에 순응한 다수의 국회의원 중 상당수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승리”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보였다. 당신이 ‘우리나라’를 ‘48%’로 정의한다면 기쁨에 취해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데 시간을 할애해도 좋겠지만, ‘52%’까지 포함한 나라 전체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제의 판결은 우리가 오답을 찍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반성의 시작이자 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치루어야 하는 많은 비용 중 일부였을 뿐이다.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나라의 리더를 끌어내리는 이 엄청난 사건이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완전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광장으로 뛰쳐 나온 수많은 시민의 목소리에 국회의원들이 겁먹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 촛불의 목소리 또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일이었으니 이 모든 과정의 완전함이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헌재의 판결문은 이 나라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으며 그동안 쌓아올린 지식과 지혜의 힘이 한 부분을 굳건히 지탱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 소중한 자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헌재의 판결문은 우리에게 앞으로 풀어 나가야 할 많은 숙제 중 첫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도 일부분 가르쳐 주었다. 좌와 우의 대립을 넘어,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공동체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태극기를 들고 헌법을 조롱했던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들의 우상과 함께 추종자들은 멸망하고 있다. 그들의 신은 인간에 의해 끌어내려졌으며, 신과 그의 가족이 창조한 세계는 역사의 치욕스러운 부분에 위치하게 되었다. 전체주의적 사고에 지배당하며 착취당하는 삶에 긍지를 느꼈던 이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식들은 어버이인 그들을 경멸하며, 세계는 너무 빨리 변해서 더이상 그들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고령화 리스크, 장수 리스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쉽게 죽지도 않는 이들은 나라에서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 것만 같다. 이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자존심은 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자부심이니, 그 ‘나라’의 존재를 잘못 정의한채 살아온 우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조기와 십자가를 태극기와 병렬로 연결하며 헌법을 무시하고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그들의 사고체계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평생 착취당해온 삶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이기에 목숨을 걸고 박근혜와 그녀의 가족에게 자신들의 삶 전부를 투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노년층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스스로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지든,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불편한 한끼를 얻어먹든, 그들에게 선택지는 단 두가지 뿐이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집착하고 공원 무료 급식을 당연하게 얻어 먹는 이들에게 박근혜는 ‘삶의 의미’를 제시해준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신에 가까운 정치인이었다. 평생 그들을 착취한, 혹은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한 독재자의 딸이었기에 신의 위치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끌어내려지는 모습을 지켜본 그들이 온전히 삶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그들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거다. 나라가 걱정해야 할 문제다. 단지 피해야 할 늙은 똥덩어리가 아니라 마땅히 보살펴야 할 취약계층이다.

이들의 존재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더 많은, 더 중요한 숙제가 잔뜩 남아있다. 한 세계는 종말했다. 그 세계는 현대 한국사를 지배한 무척 무거운 그림자였다. 마침 그 세계가 창조한 중공업, 제조업 중심의 산업체계도 붕괴하고 있다. 휴대폰과 자동차를 파는 세상은 곧 끝날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일은 더이상 독재자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드니 빌뇌브: 컨택트(Arr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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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홍보팀의 멍청한 제목 바꾸기 행위로 인해 영화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전체적인 의미가 완전히 왜곡될 위험에 처한 <컨택트>는 굉장히 잘 가공된 깔끔한 SF 영화다. 누군가는 지구 밖 생명체와의 ‘접선’에 초점을 맞추어 동명(..)의 영화 <콘택트>를 떠올렸을 것이고, 다른 어떤 이는 비선형적인 시간의 흐름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과학 이론에 흥미를 느껴 <인터스텔라>와 같은 영화를 비교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연식이 좀 된 관객이라면 <미지와의 조우> 등을 떠올리며 이 영화가 반드시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보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외계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인류를 구하기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SF 장르의 일반적인 소재를 제외하면 감독과 배우의 역량에 의해 오롯이 자기 색깔을 지키며 독보적인 위치를 획득하고 있다.

사실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 사고체계가 지배당한다”는 한 가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윤회적 구성을 가지는 외계인의 언어를 인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외계인과 한 언어학자의 사투(?)를 자연스럽고 적절한 서사구조라고 받아들이긴 힘들다. 먼저 작품의 설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위의 가설이 옳다고 해도 천재적인 한 언어학자에 의해 해독된 새로운 차원의 언어가 강대국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의해 전세계로 뻗어 나가고 그 결과 인류가 그 언어를 사용하게 되어 3천년이 지난 뒤 그 언어를 창시한 외계 생명체를 돕게 된다, 는 ‘미래’를 관객들도 먼저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간극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원형으로 보여지는 외계인의 문자가 해독되는 과정에서 관객이 참여할 틈을 전혀 주지 않고, 그 구조적 ‘비밀’은 등장인물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 자체로 간직된 채 영화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들과 동떨어진 차원에 사는 권력자들에 의해 인류의 미래가 수정될 수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약간 전체주의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설정을 비롯해 영화 곳곳에서 논리적 비약,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이 크게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첫째, 드니 빌뇌브 감독의 고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기대를 접고 그러려니 하며 보게 되는 것이고, 둘째, 빌뇌브 감독이 이러한 오류들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른 부분에서 극복을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비극적 미래를 뻔히 보면서도 그 미래를 향해 담담히 걸어 나가야 하는 언어학자를 연기한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가 영화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빌뇌브 감독은 그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 <그을린 사랑> 이후 <시카리오>와 <컨택트>를 거치며 온전히 자기만의 리듬,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분위기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누가 봐도 빌뇌브의 영화다, 라는 인장을 처음부터 찍고 들어가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보기 좋다. 아마도 최근 10년 간 가장 자기성찰적이며 내성적인 SF 영화일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여전히 확고한 ‘입장’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 그가 SF 쪽으로 빠져서 <블레이드 러너> 속편을 만들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이 잘 못하는 것을 최소화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천재가 아닌 범인의 재능을 가진 작가들에게 필요한 미덕이다. 에이미 아담스는 빌뇌브의 전작들에서 그저 소모되다시피 한 여배우들의 위치를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그녀는 이 영화가 빌뇌브의 영화가 아닌 아담스의 영화로 기억되게 만드는데, 감정의 아주 미묘한 부분까지 표정의 작은 일그러짐만으로 표현해내는 연기가 매우 탁월했다.

<컨택트>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contact)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그들이 지구에 내려와(arrival) 주고간 선물(“gift”)이 과거를 미래로 연결시키고 미래를 현재로 내려오게 하여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내딛게(arrival) 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베리 젠킨스: 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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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완벽한 영화다. 영화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영화’ 자체가 되어 그 단어를 정의내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누가 “영화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문라이트>가 영화입니다”라고 답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이 허언같이 느껴진다면 질문을 조금 더 구체화시켜도 좋을 것이다. “2010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이 10년을 꿰뚫는 단 한 편의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영화를 선택할겁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앞으로 어떤 영화를 더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 영화를 맨 앞에 세우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영화는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리더가 바뀌는 나라, 동성애 커플에 대한 법적 지위가 인정되는 나라에서 이민자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는 나라로 넘어가는 나라, 수백만 달러를 하루 아침에 벌어들이는 헤지펀드 매니저와 십대 시절부터 마약과 폭력에 노출되고 쿠폰 한 장으로 사나흘을 버텨야 하는 흑인이 30분 거리에 사는 나라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다. <문라이트>는 뉴스가 밝은 조명으로 비추어도 시원찮을 현실을 파란 달빛으로 비추는 영화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한 남자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인데 영롱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게 슬픈 그 남자의 눈동자 속에 달빛을 머금은 파도가 일렁인다. 미칠 듯 아름답고 놀라울 정도로 빈틈이 없으며, 그 어떤 다른 영화보다 강직하다. 벨기에의 작은 공업도시를 다르덴 형제가 지키고 있다면 미국 마이애미의 빈민가엔 베리 젠킨스가 발길을 거두지 않고 있을 것이다. 희곡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 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이 영화를 눈부시게 만드는 것은 촬영, 연기(와 디렉션), 음악, 편집과 같은 순수한 영화적인 요소들이다. 까에따노 벨로주의 음악이 나오는 와중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면에서 회상 장면을 거쳐 식당으로 넘어가는 씬을 비롯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하는 마지막 씬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영화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흑인 사회 내에서의 동성애에 대한 폭력적 시선, 교육 시스템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같은 묵직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무거움을 온 몸으로 표현해 낸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의 공일 것이다.리틀, 샤이런, 블랙을 연기한 미천한 경력의 세 배우는 나오미 해리스나 자넬 모네처럼 카메라에 많이 노출된 배우들의 틀에 잡힌 연기를 압도하다 못해 깔아뭉개 버린다. 영화가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현실을 비추는 빛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나 <엘리펀트>를 떠올렸을 것이다. 다른 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해피투게더>가 연상되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탠져린>이나 <발라스트>를 되짚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 영화는 괴물처럼 그 모든 것을 집어삼켜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재창조해냈다. 아마도 영화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 이유를 제시한 작품일 것이고, 영화가 앞으로도 사랑받아야 한다면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한 작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