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나 피터드: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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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번역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이 책의 번역은 한마디로 엉망이다.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재창조 작업이다. 언어는 그 것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 역사와 심지어 공기의 냄새까지 품고 있으므로, 하나의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굳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번역하기 위해 작가와 이메일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영어라는 텍스트 뒤에 숨어 있는 도미니칸-어메리칸 이민자 문화의 컨텍스트까지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번역가의 수고스러운 과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의 번역은 놀라울 정도로 성의가 없고 게으르다. 자신의 지식이 일천하여 올바른 번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원문을 병기하는 방식으로라도 독자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채, 번역가는 원작의 원어가 갖는 문체를 완전히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 각각의 단어가 가진 고유한 의미까지 꽤 자주 왜곡하고 있다. 결국 영어 원문을 찾아 읽게 만들고 마는 번역가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한국의 번역 문화는 많이 발전했다. 열정과 실력을 두루 갖춘 우수한 번역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허세에 찌든 가짜 번역가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굴라쉬 브런치>라는, 단 한 글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엉망진창의 동유럽 여행기를 쓴 사람이 이 작품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재앙과도 같은 번역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에서 문체가 가지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늘한 감동을 선사하는건 오롯이 해나 피터드의 원작이 가진 괴력과도 같은 힘에 기인하고 있다. 시시껄렁한 동네 얼간이들이 열여섯 무렵부터 사십대 중반을 지나는 시점까지 살아가는 이야기를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시점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21세기의 <앵무새 죽이기>라고 해도 될만큼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과 따뜻한 인간미를 동시에 머금고 있다. 섹시한 동급생과 섹스하거나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인 남자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평범한 마을에서 한 여자 아이가 실종된다. “우리”는 그 실종사건과 관련이 된 듯, 관련이 되지 않은 듯 적당한 피해의식과 적당한 핑계거리를 번갈아 둘러대며 지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 중 누군가는 대마초에 찌들어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소애성애자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누군가의 부모는 이혼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끝없는 상상력을 무기 삼아 실종된 여자 아이의 미래를 멋대로 그리며 자위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와 어지러운 문장 속에서 삼십여년 간 이들이 살아온 집단적 삶의 실체가 하나 둘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인간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민낯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폭력과 무관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동네라는 세계에서 멀리 달아난 여성과 그를 한없이 사랑한 멕시코 남자,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삶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신비로운 힘이 발휘된다. 화자는 철저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들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대상화된 여성은 뒤틀리고 왜곡된다. 말을 하는 쪽은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저열함을 드러내고, 말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침묵 속에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사춘기의 뒤틀린 욕망이 한 인간을 사지로 내몰수도 있음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독자의 자아성찰까지 이끌어 낸다. 이 과정에서 직조된 서사구조는 매우 탄탄하다. 작품의 화자가 복수로 등장하여 환상과 사실을 오고 가고 시간의 흐름도 뒤죽박죽 섞어 버림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다. 해나 피터드의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볼 것이다. 물론 윤미나의 번역은 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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