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의미를 가지려면

사람들은 해의 뜨고 짐에 따라 하루, 라는 단위를 만들었고 그 하루를 잘게 쪼개어 시간과 분, 초를 만들어 이를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이라는 개념은 자연의 섭리를 참고하여 창조되었지만 철저히 인간적이고 기계적인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언젠가 반드시 죽고 마는 인간에게 처음과 끝이 보이지는 않는 무한성을 가지는 시간은 굉장히 무겁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몇 시에 보자, 몇 시까지 끝내야 할텐데, 와 같은 아주 세속적이고 주변적인, 혹은 한계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잠에서 일어나 다시 잠들기 까지의 ‘하루’는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순환의 약속이다. 이 하루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깨지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행복해도, 혹은 아무 생각이 없어도 이 하루는 반드시 시작되고 반드시 끝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하루 스무시간씩 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해가 뜨고 짐에 따라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 시침의 규칙성을 막지 못한다.

그 한정된, 하지만 연속된 단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신체의 각 기관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먹어야 하니 음식이 필요하고, 충분히 쉬어야 하니 몸을 기대거나 누일 곳이 필요하다. 다른 인간과 교류하며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옷가지나 화장품 따위도 필요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최소한의 신체 활동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론 인류 전체의 활동이 굼떠지는 요즘에는 이 노동의 지분도 조금씩 낮아지고 있지만. 노동을 하지 않을 때 인간은 주로 쉬거나 잔다. 힘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쉬거나 자기 위해서 일을 한다. 제대로 쉬거나, 제대로 자기 위해서. 혹은 제대로 먹기 위해서. 이것이 주가 되는 삶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가장 본질적이고 본능적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활동이 바로 먹고, 자고, 싸고,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는 인간도 있다. 혹은, 노동이 단순히 신체 활동을 유지시키기 위해 돈을 비롯한 온갖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업화가 극도로 진행되고 모든 가치의 단위가 화폐로 통일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목적과 삶의 목적이 완전히 일치하는 하루를 완성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정을 꾸리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다 못해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24시간 중 얼마나 많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봄직 하다.

소비 그 자체로 의미를 찾는 사람이 있고, 소비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다른 무언가가 자기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철저히 계획되어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일 수도 있다. 소비의 반대말로 흔히 생산을 떠올린다. 밥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음악을 듣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행위를 우리는 흔히 소비생활이라고 표현한다. 돈을 써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산활동은 수익을 창출해야만 하는 것일까? 팔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집에서 그리는 행위는 생산이 아니라 치료나 자위로 분류되어야 할까? 그것으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여성 뿐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아주 작아도 좋으니 창문이 있는, 그런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개인적인 공간에서 인간은 24시간 중 일정 부분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해도 좋다. 가족과 함께 보던 드라마를 이어서 봐도 좋고, 글을 써도 좋다. 그림을 그려도 좋고, 그 안에서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어도 좋다. 그 방 안에서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나는 그 행위가 하루 24시간이 의미를 갖게 만드는 첫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무언가 공허함을 느낀다면 자신이 들은 음악을 한번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고, 단순히 음악을 들은 날짜와 시간, 그 당시의 날씨, 혹은 음반의 가격같은 정보를 적어보아도 좋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소비생활을 정리해서 제공해주지 않는다. 소비의 여력이 허락하는 한 무작위로 주어진 정보와 감정적 충동, 계획에 대한 믿음 등이 뒤엉켜 한 단위 한 단위의 소비가 축적되어 간다. 소비생활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역사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정의내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표절이 아닌 이상 지금 적어내려가는 한 줄의 글귀는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지금 긋는 선 하나, 지금 누르는 버튼 하나 역시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행위의 끝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공기 중에 사라져버리는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요즘 읽는 책은 뭐야?”

라는 질문에 즉각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어제 뭐 먹었어?”, “최근에 본 영화 어땠어?”, “오늘 입은 옷은 뭐야?”같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루를 구성하는 어떤 것을 충분히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의미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조금 더 확고한 의미를 지니는 단계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쓴 글 보여줄 수 있어?”

라는 질문은 “요즘 무슨 생각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소한 인간에게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이것이 그림이든, 요리든, 최근에 산 옷들의 조합이든, 뭐든 좋다. 현대사회는 소비로부터 출발해 생산으로 끝맺음될 때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답다. 관건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아로새길 수 있느냐일 것이고, 그 과정의 시작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 즉 자기 자신만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부터 발현될 수 있다. 똑같은 유니클로 티셔츠라고 할지라도, 그 옷이 누군가의 옷으로 기억될 수도 있고 그저 작년에 입었던 옷으로 기억될 수도 있으며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공산품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 공산품을 구매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무한한 시간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확실하게 말이다.

요즘 나의 하루는 몹시 규칙적이다. 아침 일곱시 쯤 일어나 씻고 옷을 입으면 아내가 밥을 차려준다. 아침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면 정해진 시간에 버스와 지하철이 온다. 좁은 지하철을 타고가는 30분 정도의 시간에 책을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회사에서는 주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회사를 위한 글이 아닌, 나를 위한 글도 쓴다. 시간을 잘 분배해야 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위한 글쓰기는 주로 보고서의 형식을 지니며, 그 안에 나의 소신과 믿음을 담아내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보고서들로 인해 나는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으며 아내와 함께 따뜻한 곳에서 편히 잠들 수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주로 논문의 형식을 지닌다. 아직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미완성 글들이 전부다. 이 글들을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끝내지기를, 즉 논문 형식의 글이 ‘완결’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에의 기고 및 학회 발표 등의 과정을 통해 내 손을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몹시 중요한 일인데, 왜냐하면 내 삶의 하루 중 이 글을 쓰기 위해 바치는 시간이 가장 의미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나와 전혀 상관없을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쓰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헛된 바람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여섯시 즈음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책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약속이 있다면 약속을 소화하고, 그렇지 않다면 집으로 돌아오 아내와 밥을 지어 먹고 집을 청소한다. 그러다 서로 몸을 포개고 누워 방송 프로그램을 돌려보다 열두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살기 위해 쓰인다. 자고, 먹고, 싸고, 청소하고, 일한다. 나를 위해,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하루에 많아야 서너시간 남짓이다. 이 시간이 나머지 모든 시간을 떠받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나는 상당히 위태로운 하루를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하루가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조금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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