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너무 한 낮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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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숭고함은 타인에 대한 경멸로 시작될 때가 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곤궁한 처지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현실과 정 반대의 길로 자신을 내모는 길을 택한다. 희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종교에 매달리는 모습은 차라리 논리적이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혹은 자신의 모자람으로 인해 발생한 마음의 짐을 이와 관련이 없는 완전한 타인에게 더 큰 상처로 부풀려 넘겨 줌으로써 얻게되는 말초적 쾌감이 마치 면죄부인냥, 회복제인양 부끄러움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이것이 인간 마음의 바닥 언저리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일지라 해도, 그 형상을 지켜보는 마음 역시 편할리 없다.

김금희의 소설집 <너무 한 낮의 연애>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하나같이 어떤 어려움을 견디어내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바라보는 관찰의 대상은 화자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화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단이 된다. 어려움을 견디어내는 수단. 비록 저열하고 옳지 않다고 해도 소설 속 화자는 그 시선을 쉽게 거둘 수 없다. 어쩌면 대상을 억지로 아래로 끌어 내리는 그 비열함이 현재의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직으로 좌천되어 인생의 위기를 맞이한 “너무 한 낮의 연애”의 화자 필용은 관객이 서너명 뿐인 연극을 진행하는 과거의 사랑 양희를 매일 지켜보면서 삶을 견디어 낸다. 과거 인연에 대한 반가움때문이라고 하기엔 뭔가 꺼림찍한 무언가가 필용의 행동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조중균의 세계”의 화자 역시 비정규직의 설움을 딛고 정규직으로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 세상의 변방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회사에서 묘하게 겉도는 조중균”씨”가 구축한 단단한 세계를 애써 낮추어 보려고 한다. 상사가 따라주는 술을 거절할 힘조차 없는 화자는 끝까지 자신만의 규칙을 지키려고 하는 조중균을 우습게 여기는 주변 세상에 결국 굴복하고 마는, 평범하고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세실리아”와 “고기”의 화자, 혹은 주인공 역시 가만 보면 정상은 아니다.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불쌍하고 애처롭게 여길만한 삶을 살고 있다. 거짓과 위선으로 쌓아 올려진 위태로운 그들의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힘은 남들과 아주 조금 다른, 혹은 아주 조금 더 변방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는 타인의 빈틈을 파고들고 끌어내리는 볼품없는 오만함이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이 ‘평범한 비겁함’을, 김금희는 과연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힘을 내어 거부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지금의 현실을 이겨낼 수 있겠냐고 묻는다. 이건 작가 스스로 깊은 성찰을 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솔직함의 영역이다. 한번 접고 들어가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현문에 우답으로 응하지 않기 위해서는 독자 개개인도 꽤 깊은 수준의 반성과 성찰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응당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삶을 견디어 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의 숭고함을 지켜내는 일조차 참으로 힘든 시대이기 때문이다.

A Tribe Called Quest: We Got It from Here… Thank You 4 Your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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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새벽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Show me the Money”라는 프로그램에 한국 뮤지션들이 나와서 하는 말들을 들었다. 원썬이라는 아주 긴 경력을 가진 래퍼가 나와서 오디션을 봤는데(“꼬마 달건이”를 기억한다면 당신도 그와 비슷한 정도로 늙었다고 할 수 있다) 1분도 채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탈락했다. 그보다 한참 뒤늦게 경력을 시작한 심사위원 비슷한 위치에 있던 다른 래퍼, 혹은 뮤지션들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오래 됐다”, “최신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 등의 탈락 이유를 밝혔다. 힙합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구조적 변화가 극심한 음악 장르의 경우 단순히 현재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현재의 흐름에 충실한’ 뮤지션들은, 18년만에 나온 A Tribe Called Quest의 신작을 듣고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현지 유력 평론가들로부터 “90년대 말 타임캡슐로 봉해졌다가 현재에 다시 꺼낸 듯 하다”는 평가를 받은 이 음반도 그저 현재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화석으로 박제되어 버린 늙은 뮤지션들의 ‘올드 스쿨 찬양가’에 불과하다고 혹평할 수 있을까?

그 타임캡슐에서 막 꺼낸 듯 하다던 음반의 묘사의 바로 뒤에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업적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새로운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다” 라는 극찬이 있었다. 원 멤버 Phife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데뷔 음반 <People’s Instinctive Travels and the Path of Rhythm> 발매 25주년을 기념한 The Tonight’s Show에서의 깜짝 재결합 공연은 18년만의 새로운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그동안 멤버들 사이에 남아 있던 불화와 앙금을 잠시 덮어두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했을 것이다. Q-Tip의 진두지휘 아래 그의 홈스튜디오 등에서 녹음된 이 음반은, 첫 곡의 첫 비트부터 올드 스쿨 힙합의 향수를 확 불러일으키는 장치들로 충만하지만, 그와 동시에 현시대 흑인음악의 위치와 위상을 현명하게 수용한 신중함도 엿보이는 수작이다. 90년대 흑인 음악판에서 가장 창조적인 공동체로 기억될 어 트라이브 투 콜드 퀘스트가 거의 완전한 오리지널 멤버의 구성으로 새로운 음반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거장들이 자진해서 이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크레딧에 등장하는 이름들만 간단히 열거해봐도 켄드릭 라마, 앤더슨 박, 버스타 라임스, 안드레 3000, 잭 화이트(!), 엘튼 존(!!) 등 실로 대단한데, 이 음반의 놀라운 성취는 바로 이렇게 이름값만으로 대단한 뮤지션들을 초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기운에 눌리거나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의 음악으로, 하나의 고유한 정체성 안에 이 모든 음악적 다양성을 잘 녹여냈다는 사실이다. 이건 전적으로 총괄 프로듀서를 담당한 큐팁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앤더슨 박이 객원 보컬로 참여한 음반의 열세번째 트랙 “Movin Backwards”와 잭 화이트, 엘튼 존 등이 참여한 음반의 네번째 트랙 “Solid Wall of Sound”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크레딧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노래가 참 좋다~ 역시 대단한 그룹이야, 했을 정도로 객원 뮤지션의 이름이 노래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안드레 3000과 함께 한 “Kids” 역시 음반의 백미로 손꼽힐 정도로 훌륭하다. 자칫 “우리가, 우리 시대가 짱이었어!”라고 꼰대질을 하는 배나온 아저씨가 될 뻔한 이 음반은 그러한 ‘아재근성’을 슬기롭게 모두 피해가며 ‘그저 좋은 흑인 음악’이 무엇인지 후배들에게 한 수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그 가르침은 유행을 따라가지 않아도 좋은 음악은 얼마든지 창조될 수 있으며 현재와 충분히 소통하면서도 과거의 유산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교훈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진리를 음악 그 자체로 충실히 보여줄 수 있는 예술가는 세상에 손꼽을 정도로 적다. 이 전설적인 그룹의 마지막 음반은 그렇게 역사 속에 다시 한번 아로새겨졌다.

Jenny Hval: Blood B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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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사람들의 성(surname)은 대부분 특정 장소의 오래된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들의 조상이 살던 곳, 그 곳의 (하지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오래된 지명이 뿌리에 대한 기억, 혹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Hval”(“Vaal”이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실제로 들어보면 “(우)바알” 정도 느낌?)은 노르웨이어로 고래를 뜻한다고 한다. 노르웨이에서 나고 자란 뮤지션 Jenny Hval과 그녀의 조상이 고래의 뱃속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요나 정도가 아니면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그 고래의 뱃속에서 나온 듯한 제니 바알의 음악은  <Blood Bitch>에서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 듯 보여진다.

19세에 노르웨이의 고딕 메탈 밴드의 보컬(..)로 시작한 그녀의 음악 커리어를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멜번대학교에서 창작과 공연예술을 전공한 뒤 노르웨이로 돌아와 Rockettothesky라는 무대명으로 발표한 두 장의 음반으로 자국에서 명성을 쌓았고, 이후 본명인 Jenny Hval로 돌아와 로컬 레이블인 Rune Grammofon을 통해 발표한 두 장의 음반, 특히 그 중 두번째 음반인 <Innocence is Kinky>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음반의 성공을 바탕으로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Sacred Bone’s Record와 계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그녀의 미국에서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음반이 2015년에 나온 그 유명한 <Apocalypse, Girl>인데 이 음반을 묘사하기 위해 많은 평론가들이 곤욕을 치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avant-garde electronic, art pop, experimental folk 등 기존에 존재해왔던 음악 개념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복잡하고 어려운 표현들의 출현은 그녀의 음악이 얼마나 정의내리기 힘든지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Apocalypse, Girl>은 신경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강박증에 걸린 로맨티스트를 보는 것과 같은 다차원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음반이다. <Innocence is Kinky> 시절부터 보다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자기 표현같은 개념이 보다 명확하게 정의된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인터뷰에서 제니 바알은 타인에 의해 정의내려진 여성의 고정관념과 주변적인 특징, 즉 창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투영시키는 폭력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힌 바 있다. <Apocalypse, Girl>은 그러한 그녀의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난 첫번째 시도이자, 최초로 대규모로 진행된 북미 투어에서 화제가 된 그녀의 전위적인 포퍼먼스와 함께 인디씬에서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이 된 화제작이기도 했다.

<Blood Bitch>는 전작에 비해 음반으로서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작에 비해 한결 편안해졌다. 조금 더 “팝음악처럼 들린다”라고 표현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올란도라는 이름을 가진 벰파이어의 여행기, 혹은 피에 대한 깊은 성찰이라는 컨셉 음반을 표방하고 있지만, 여기에 바알 자신이 전작들에서 사용했던 음원과 멜로디, 가사를 뒤섞어 새로운 사운드스케이프를 창조하는 등 메타음악적인 성격도 강한 음반이기도 하다. 즉 과거에 해왔던 음악적 기록과 퍼포먼스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일반적 개념, 집단적 정체성으로서의 자각을 함께 강화시켜나가고 있는데,  그녀의 표현대로 “가장 허구적(fictional)이면서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personal) 음반”인 셈이다. 70년대 인디 호러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음반의 중심 서사구조와 음악적 이미지 창조 작업의 결과물 뿐만 아니라(호러 영화의 이미지를 음악으로 재현한 이 음반의 제작 목적이 “개인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기 말하는 그녀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전작들에 비해 보다 과격해진 메시지와 한결 따뜻해지고 명확해진 멜로리 라인과 너그러운 사운드스케이프가 동시에 선사하는 묘한 균형감이 무척 흥미롭다. 귀에 들리는 단편적 소리들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미지, 혹은 전체적인 공간 자체에 집중한다면 더 깊고 더 즐거운 그녀만의 음악세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줄리아나 바윅(Julianna Barwick)과 함께 최근 가장 즐겨 들은 여성 종합예술가의 결과물이다.

해나 피터드: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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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번역 이야기로 시작해야겠다. 이 책의 번역은 한마디로 엉망이다.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재창조 작업이다. 언어는 그 것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 역사와 심지어 공기의 냄새까지 품고 있으므로, 하나의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을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이 수반되어야 한다. 굳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번역하기 위해 작가와 이메일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영어라는 텍스트 뒤에 숨어 있는 도미니칸-어메리칸 이민자 문화의 컨텍스트까지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는 번역가의 수고스러운 과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명은 제 갈 길을 찾을 것이다>의 번역은 놀라울 정도로 성의가 없고 게으르다. 자신의 지식이 일천하여 올바른 번역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원문을 병기하는 방식으로라도 독자에게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채, 번역가는 원작의 원어가 갖는 문체를 완전히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 각각의 단어가 가진 고유한 의미까지 꽤 자주 왜곡하고 있다. 결국 영어 원문을 찾아 읽게 만들고 마는 번역가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한국의 번역 문화는 많이 발전했다. 열정과 실력을 두루 갖춘 우수한 번역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허세에 찌든 가짜 번역가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굴라쉬 브런치>라는, 단 한 글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엉망진창의 동유럽 여행기를 쓴 사람이 이 작품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다.

재앙과도 같은 번역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에서 문체가 가지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늘한 감동을 선사하는건 오롯이 해나 피터드의 원작이 가진 괴력과도 같은 힘에 기인하고 있다. 시시껄렁한 동네 얼간이들이 열여섯 무렵부터 사십대 중반을 지나는 시점까지 살아가는 이야기를 “우리”라는 1인칭 복수 시점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21세기의 <앵무새 죽이기>라고 해도 될만큼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과 따뜻한 인간미를 동시에 머금고 있다. 섹시한 동급생과 섹스하거나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인 남자아이들이 득시글거리는 평범한 마을에서 한 여자 아이가 실종된다. “우리”는 그 실종사건과 관련이 된 듯, 관련이 되지 않은 듯 적당한 피해의식과 적당한 핑계거리를 번갈아 둘러대며 지루하고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우리” 중 누군가는 대마초에 찌들어 있으며 다른 누군가는 소애성애자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누군가의 부모는 이혼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끝없는 상상력을 무기 삼아 실종된 여자 아이의 미래를 멋대로 그리며 자위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말투와 어지러운 문장 속에서 삼십여년 간 이들이 살아온 집단적 삶의 실체가 하나 둘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인간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민낯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폭력과 무관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동네라는 세계에서 멀리 달아난 여성과 그를 한없이 사랑한 멕시코 남자,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삶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갖는 신비로운 힘이 발휘된다. 화자는 철저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들이 지껄이는 말들 속에서 대상화된 여성은 뒤틀리고 왜곡된다. 말을 하는 쪽은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저열함을 드러내고, 말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침묵 속에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사춘기의 뒤틀린 욕망이 한 인간을 사지로 내몰수도 있음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전달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독자의 자아성찰까지 이끌어 낸다. 이 과정에서 직조된 서사구조는 매우 탄탄하다. 작품의 화자가 복수로 등장하여 환상과 사실을 오고 가고 시간의 흐름도 뒤죽박죽 섞어 버림에도 불구하고 크게 이해를 방해하지 않는다. 해나 피터드의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볼 것이다. 물론 윤미나의 번역은 피할 것이다.

하루가 의미를 가지려면

사람들은 해의 뜨고 짐에 따라 하루, 라는 단위를 만들었고 그 하루를 잘게 쪼개어 시간과 분, 초를 만들어 이를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적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이라는 개념은 자연의 섭리를 참고하여 창조되었지만 철저히 인간적이고 기계적인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언젠가 반드시 죽고 마는 인간에게 처음과 끝이 보이지는 않는 무한성을 가지는 시간은 굉장히 무겁고 철학적인 개념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몇 시에 보자, 몇 시까지 끝내야 할텐데, 와 같은 아주 세속적이고 주변적인, 혹은 한계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잠에서 일어나 다시 잠들기 까지의 ‘하루’는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인 순환의 약속이다. 이 하루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깨지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행복해도, 혹은 아무 생각이 없어도 이 하루는 반드시 시작되고 반드시 끝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하루 스무시간씩 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해가 뜨고 짐에 따라 흘러가는 시계의 초침과 분침, 시침의 규칙성을 막지 못한다.

그 한정된, 하지만 연속된 단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신체의 각 기관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히 먹어야 하니 음식이 필요하고, 충분히 쉬어야 하니 몸을 기대거나 누일 곳이 필요하다. 다른 인간과 교류하며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옷가지나 화장품 따위도 필요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최소한의 신체 활동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론 인류 전체의 활동이 굼떠지는 요즘에는 이 노동의 지분도 조금씩 낮아지고 있지만. 노동을 하지 않을 때 인간은 주로 쉬거나 잔다. 힘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쉬거나 자기 위해서 일을 한다. 제대로 쉬거나, 제대로 자기 위해서. 혹은 제대로 먹기 위해서. 이것이 주가 되는 삶이 ‘의미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가장 본질적이고 본능적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활동이 바로 먹고, 자고, 싸고,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는 인간도 있다. 혹은, 노동이 단순히 신체 활동을 유지시키기 위해 돈을 비롯한 온갖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업화가 극도로 진행되고 모든 가치의 단위가 화폐로 통일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목적과 삶의 목적이 완전히 일치하는 하루를 완성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정을 꾸리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하다 못해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찾기란 무척 어렵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24시간 중 얼마나 많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봄직 하다.

소비 그 자체로 의미를 찾는 사람이 있고, 소비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다른 무언가가 자기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철저히 계획되어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일 수도 있다. 소비의 반대말로 흔히 생산을 떠올린다. 밥을 먹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음악을 듣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행위를 우리는 흔히 소비생활이라고 표현한다. 돈을 써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산활동은 수익을 창출해야만 하는 것일까? 팔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편없는 그림을 집에서 그리는 행위는 생산이 아니라 치료나 자위로 분류되어야 할까? 그것으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여성 뿐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아주 작아도 좋으니 창문이 있는, 그런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개인적인 공간에서 인간은 24시간 중 일정 부분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부여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해도 좋다. 가족과 함께 보던 드라마를 이어서 봐도 좋고, 글을 써도 좋다. 그림을 그려도 좋고, 그 안에서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수다를 떨어도 좋다. 그 방 안에서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나는 그 행위가 하루 24시간이 의미를 갖게 만드는 첫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무언가 공허함을 느낀다면 자신이 들은 음악을 한번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고, 단순히 음악을 들은 날짜와 시간, 그 당시의 날씨, 혹은 음반의 가격같은 정보를 적어보아도 좋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소비생활을 정리해서 제공해주지 않는다. 소비의 여력이 허락하는 한 무작위로 주어진 정보와 감정적 충동, 계획에 대한 믿음 등이 뒤엉켜 한 단위 한 단위의 소비가 축적되어 간다. 소비생활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역사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할 것이다.

혹은,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정의내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표절이 아닌 이상 지금 적어내려가는 한 줄의 글귀는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지금 긋는 선 하나, 지금 누르는 버튼 하나 역시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다. 행위의 끝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삶이 공기 중에 사라져버리는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요즘 읽는 책은 뭐야?”

라는 질문에 즉각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어제 뭐 먹었어?”, “최근에 본 영화 어땠어?”, “오늘 입은 옷은 뭐야?”같은 질문도 마찬가지다.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루를 구성하는 어떤 것을 충분히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의미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그의 삶은 조금 더 확고한 의미를 지니는 단계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쓴 글 보여줄 수 있어?”

라는 질문은 “요즘 무슨 생각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최소한 인간에게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이것이 그림이든, 요리든, 최근에 산 옷들의 조합이든, 뭐든 좋다. 현대사회는 소비로부터 출발해 생산으로 끝맺음될 때 가장 안정적이고 아름답다. 관건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아로새길 수 있느냐일 것이고, 그 과정의 시작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 즉 자기 자신만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부터 발현될 수 있다. 똑같은 유니클로 티셔츠라고 할지라도, 그 옷이 누군가의 옷으로 기억될 수도 있고 그저 작년에 입었던 옷으로 기억될 수도 있으며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공산품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 공산품을 구매한 사람의 의지와 노력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무한한 시간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확실하게 말이다.

요즘 나의 하루는 몹시 규칙적이다. 아침 일곱시 쯤 일어나 씻고 옷을 입으면 아내가 밥을 차려준다. 아침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면 정해진 시간에 버스와 지하철이 온다. 좁은 지하철을 타고가는 30분 정도의 시간에 책을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회사에서는 주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일이기도 하지만, 회사를 위한 글이 아닌, 나를 위한 글도 쓴다. 시간을 잘 분배해야 가능한 일이다. 회사를 위한 글쓰기는 주로 보고서의 형식을 지니며, 그 안에 나의 소신과 믿음을 담아내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보고서들로 인해 나는 밥을 지어 먹을 수 있으며 아내와 함께 따뜻한 곳에서 편히 잠들 수 있다. 나를 위한 글쓰기는 주로 논문의 형식을 지닌다. 아직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미완성 글들이 전부다. 이 글들을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끝내지기를, 즉 논문 형식의 글이 ‘완결’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에의 기고 및 학회 발표 등의 과정을 통해 내 손을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것이 나에게는 몹시 중요한 일인데, 왜냐하면 내 삶의 하루 중 이 글을 쓰기 위해 바치는 시간이 가장 의미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나와 전혀 상관없을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하며 쓰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헛된 바람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여섯시 즈음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책을 읽기 위해 노력하고, 약속이 있다면 약속을 소화하고, 그렇지 않다면 집으로 돌아오 아내와 밥을 지어 먹고 집을 청소한다. 그러다 서로 몸을 포개고 누워 방송 프로그램을 돌려보다 열두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살기 위해 쓰인다. 자고, 먹고, 싸고, 청소하고, 일한다. 나를 위해,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은 하루에 많아야 서너시간 남짓이다. 이 시간이 나머지 모든 시간을 떠받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진다. 나는 상당히 위태로운 하루를 넘기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하루가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조금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야 할지,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