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나는 술이 주는 효능, 더 정확히 말해 술에 의해 잊혀지게 되는 기억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술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태도를 불신의 핑계거리로 삼았고, 최근에는 술에 의해 흐물흐물해지는 몸뚱아리를 지켜보는 것이 썩 기분 좋지 않아서 술을 멀리하고 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술을 사랑하고 술에 의지하고 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의 태도와 자세까지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술은 충분히 사랑할만한 것이고, 술만이 창조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며, 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인정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슐렝 레스토랑에서 빈티지 와인을 마시는 즐거운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생의 고점에서 축복과 기쁨에 겨워 마시는 달콤한 한 잔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술과 경계선을 맞대고 서 있는 다른 축, 그러니까 죽음과 고통, 인내와 생존, 그리고 상실과 흐릿해진 기억과 같은, 조금은 어두운 것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술이 가진 고유한 쓴 맛의 향취가 책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온다. 술로 고통을 이겨내보려는 사람, 술을 통해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 얼떨결에 벌어진 술자리에서 슬픈 기억을 되살려버린 사람, 술의 또다른 벗인 숙취와 함께 하며 잊고 있던 인간의 저열함을 발견하는 사람 등, 굳이 단편 속 등장인물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충분히 술 생각이 날만한 인생의 불편한 껍질들이 하나씩 둘씩 벗겨진다. 우리는 그것을 슬픔이라고도 표현하고, 특정 사실에 기반하여 이야기하자면 비극이라고도 표현한다. 삶에서 이런 일이 한번 쯤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인생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 일이 일어난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안녕 주정뱅이>는 술 생각이 나는, 혹은 술을 마셔야만 할 것같은 그런 슬픔의 순간들이 견디어지는 과정을 정리한 가지런한 엘레지다.

전작들에 비해 보다 더 강렬해진 서사와 한결 매끄럽게 정돈된 표현 사이에서 권여선은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의 고단함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처음에는 묵직하게 달려드는 서사구조에 저릿함을 느껴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가(“봄밤”) 시각적으로 파고드는 강렬함에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이모”) 인간 심리의 심연을 가지런히, 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드는 비판의식에 레퍼런스를 찾아보기도 했다(“실내화 한켤레”). 어쨌든, 소설가들이 뽑은 지난 해 가장 좋았던 책, 뭐 대충 이런 제목의 리스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그 정도의 찬사를 받을만큼 뛰어난 책이구나 싶더라. 지금까지 내가 읽은 권여선의 책은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그리고 장편 <레가토> 등 총 세 권이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과거 권여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색깔을 잘 지키면서도 그의 위치를 독보적인 곳까지 올려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봄밤”과 같은 작품이 주는 강렬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2 thoughts on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1. 은 저도 읽은 후에 되게 강한 느낌을 받았는데요. 이 작가, 술을 정말 좋아하는 작가구나 싶더라고요. 술을 마시는 장면장면이 예사롭지 않달까요. 많은 애주가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고 하는데, 저는 을 읽고서는, ‘아 나도 술을 좀 줄여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품이 지독한 숙취를 남겨주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이 술 깨려면 좀 음주를 쉬어야겠어, 하는 느낌이요. 저는 권여선이라면 와 을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그 책으로는 권여선이 단편 소설로 제게 인상을 남기지 못했거든요.

    종혁님의 권여선 소설 리뷰라니, 좋으네요!
    :)

    • html이 꺽쇠 표시를 잘못 인식했는지 그 안의 글자들이 보이지 않네요 ^^; 하지만 어떤 말씀 하시려는지는 잘 알겠어요.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술들은, 그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그 숙취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술 냄새가 더 독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블라디보스톡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ㅋㅋ 거기서 마시는 술은 어떤 맛인지 궁금하네요. 무사히 귀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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