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이 점점 강해지던 즈음이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one-shot society”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할 만큼 나이와 성별에 주어지는 단계별 절차를 성실히 수행해야만 낙오되지 않는 빽빽한 사회구조 안에서 6년의 긴 시간을 공백 상태로 방치해둔 기회비용 중 하나가 ‘혼기’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의 교육과정을 끝내고 비로소 자산과 자본을 바삐 축적하여 결혼을 위한 털갈이를 해야 할 시기에 오롯이 외국의 시골에 처박혀 자기자신의 내적 수양만을 위한 삶을 살았으니 결혼시장에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두번째 이유는 결혼이라는 행위와 그 이후 예상되는 삶의 노선이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의무’와도 같은 성격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통해 부모로부터 부를 이양받고 이를 자양분으로 삼아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양육의 여유를 획득하고, 그렇게 재산과 자녀라는 양대 자산에 투자하는 과정에서 노후를 대비하는, 우리 윗세대가 성공적으로 경험한 그 과정이 과연 우리 세대, 그 중에서도 나라는 특정 개인에게 적합한 삶의 노선인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속된 표현을 쓰자면, 결혼으로 인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다. 세번째 이유는 이보다 조금 더 개인적인 것으로, 과거 결혼을 통해 관계를 장기적으로 지속하고 싶었던 상대와의 이별과 이후 이어진 관계의 실패에서 스스로에 대한 기대 수준이 크게 낮아진 탓이다. 나는 이 사회의 평균적인 가치관을 가진 평균적인 여성들이 좋아할만한 것을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내가 가진 독특한 것들(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이 소수의 여성에게 어필해 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관계를 가져 왔다. 그리고 바로 그 내가 가진 독특한 것들로 인해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고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이 몇번 반복되다 보면, 내가 가진 그 것이 미래의 어떤 상대방에게 줄 것이라고 예상되어지는 상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상처를 줄 정도의 깊은 관계를 더이상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길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관계들에서의 실패는 죄책감의 무게를 더해 주었다. 죄책감이 커질수록 과거와 같은 수준의 용기를 낼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소위 “결혼하지 않는 30대 남자”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지는 않았다. 안정적인 소득과 다양한 취미를 가진 남성에게 결혼은 일종의 기호에 따른 선택사항일 뿐이지만, 나는 결혼이 두려웠고 그 단계까지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논문이나 쓰면서, 음악이나 듣고 스포츠 중계방송이나 보면서 늙어가는 것이 나와 타인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관계를 생산하는 것이 공해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의 걱정은 일종의 세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당연히 현재의 아내를 만나면서부터다. 위에 열거한 결혼을 하지 않기로 한 이유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결혼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결혼이라는 방법을 통해 아내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과거의 관습을 따르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제약을 가하기 때문에 완벽한 관계 형성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과 흡사한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면서 결혼으로 인한 비용은 최소화시키는 동거가 더 나은 관계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에서는 동거와 결혼이 형식으로 보나 효용으로 보나 실질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데이트-동거-결혼으로 이어지는 서양식 관계 발전 단계를 경험하기 전 데이트에서 바로 결혼 유무를 선택해야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 커플의 경우 결혼 이후 발견되는 부작용으로 인해 관계에서의 고통이 더 커질 때가 있음을 종종 목격한다. (모텔이 그 부작용을 상당 부분 잠식시켜주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결혼은 침대 위보다 침대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대부분이고 모텔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한국인 커플에게 결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고, 경제불황으로 인해 결혼이 선택사항이 된 요즘 그러한 리스크가 감소하는 순효과 역시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튼, 나에게는 경제적 요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돈은 혼자 벌어도 충분할 정도로 벌고 있었다. 앞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아내에게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아내와 동거가 아닌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엮이고 싶었던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국 문화 안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 존재했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는 이 사람을 만나면서 전에 없었던 새로운 욕망이 생겨남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관계가 주는 양가적 가치는 생각보다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 즉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증거물이자 성과물인 사회적 관계들이 목격하고 증명하는 가운데 인정된 관계는 법적인 효력을 넘어 사회적으로 부부 외 요인이 침범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형성하게 해준다. 그 영역은 인류가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온 ‘가정’이라는 영토이고, 그 가정 안에서 구성원은 각자의 책임을 다해야 함을 사회적으로 선언하게 된다. 서로를 구속하는 강력한 장치가 생기는 셈인데, 이 구속으로 인해 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속의 최소 ‘단위’라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 부모가 만든 그들의 ‘가정’ 안에서 살아 왔고, 대학 졸업 이후에는 사실상 사회와는 별개로 존재하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 내가 번 돈으로 나를 위해 소비하는 생활은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일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가장 단순하고 낮은 수준의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장 ‘닫힌’ 활동이고 가장 파급효과가 작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활동으로 삶이 전적으로 만족된다면 굳이 관계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여년 전 국어 교과서에 나오듯 인간에게는 듣고 싶은 욕망,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남을 만지고 싶은 욕망과 남에게 발견되어지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결혼은 그러한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정의하고 강제하는 수단이다. 이 형식을 나의 것으로 수용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관계의 단위를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삶을 재정의내리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더 나아가고 싶었다. 그것을 ‘외로움’이라고 표현해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인 욕망의 씨앗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어떤 것’을 타인과 나누기 위한 적극적인 통로를 찾고 싶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결혼이라는 강제적이지만 안정적인 포멀한 관계 안에서 장기적으로 한 사람과 깊은 감정과 지식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행위가 주는 효용을 지금까지 무시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전적으로 현재의 아내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나에게 두려움을 깨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그 과정에서 조금 비틀거려도 괜찮을거라는 위안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두번째 이유다. 결혼을 통해, 함께 사는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얻기를 원했다면 결혼이 잘못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끊임없이 받는 유혹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상대방에게 넘기고 싶은 유혹, 나의 마음을 상대방이 헤아려주고 나에게 맞추어 주기를 바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에게 결혼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행위를 안정적인 관계 안에서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였다. 상대방에게 한없이 베풀고 싶을 때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최대한 벗어나고 오해의 여지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한국에서는 결혼이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한없이 해주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의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조차 그 욕망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결혼을 포기하게 된 이유, 결혼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의 근본에는 이러한 의심과 오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아내는 주면 주는대로 받아주는 사람이었고, 나로 하여금 위와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는 힘껏 베풀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고, 나다운 나를 왜곡시키지 않고 오롯이 드러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 외 다른 어떠한 것도 결혼을 결심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물론 아직도 다른 몇가지의 두려움은 남아 있다. 과연 오랜 기간 성적인 끌림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육아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등의 중요한 질문들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앞으로 답을 찾아 나가야 한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성인 두 명이 만나 시작하는 결혼이라는 관계 안에서 근본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를 나답게’ 드러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어떤 누군가에게 “왜 당신은 선택되지 않았는가”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이 어떤 누군가에게 “왜 당신은 이런 것을 주지 못했는가”라는 힐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오롯이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며, 최근 몇개월 내 삶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온 단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4 thoughts on “나는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가

  1. 저야 워낙 종혁님 글을 좋아하긴 하지만, 마지막 문장이 특히 인상깊네요.

    ‘최근 몇개월 내 삶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온 단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단 한사람과 새해에도 복 많이 받고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랄게요.
    해피 뉴 이어!
    :)

    • 다락방님, 오랜만이예요. 저는 다락방님의 블로그 주소를 잃어버려서 업데이트를 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ㅅ; 축복 감사합니다. 탈고도 안한 비문투성이의 글을 읽어주시니 오늘따라 특히 더 감사하네요. 해피 뉴 이어!

  2. 저야 뭐 별다를 바 없이 늘 그런 일상을 살고 있어서 딱히 업데이트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기에 주소를 알려드리려고 하니, 아아 이런, 여긴 비밀댓글이 안되네요. …. 패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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