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림: 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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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림 감독의 <더 킹>은 ‘착한’ 작품 의도가 빈약한 서사와 어설픈 연기력에 의해 어떻게 재앙으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박태수라는 가공의 인물이 경험하는 수십년의 삶을 현실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 사이에 끼워 맞추는 팩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 영화는,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99%의 평범한 시민이 이 나라의 진정한 왕(king)이다”라는 낯뜨거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두시간이 넘는 시간을 낭비한다. 감독이 공들여 창조한 박태수의 일대기는 독창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디서 보고 들은 뻔한 내용들의 짜집기이며, 이 인물이 굳이 애를 써가며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시시하다. 그 과정에서 개연성은 실종되었으며 박태수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의 입체성은 처음부터 실종되어 영화 내내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영화가 현실에 바탕을 둔 허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검찰 내부에 존재하는-것으로 알려진- 정치검사들의 행태를 극단적으로 왜곡하여 보여주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색하게 과잉된 에너지조차 준비가 덜 된 배우들이 보여주는 수준 미달의 연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올 뿐이다. 정우성은 더이상 얼굴 하나만으로 영화에 캐스팅되면 안될 것 같고, 조인성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한다”라는 칭찬 외에 해줄 말이 없다. 그나마 현실적이고 입체감이 느껴지는 유일한 캐릭터는 김소진이 분한 안희연 검사 뿐이었는데,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니 이 인물만 실존 인물에서 모티브를 가져 왔다고 한다. 감독의 빈곤한 상상력과 부실한 조사력을 탓할 수 밖에. 참, 류준열이 분한 ‘친구’ 역할은 아예 이야기조차 하지 말자. <친구>가 나온지 15년도 더 지났다. 이제 이런건 그만 했으면 좋겠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나는 술이 주는 효능, 더 정확히 말해 술에 의해 잊혀지게 되는 기억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않는 편이다. 몇 년 전까지는 술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태도를 불신의 핑계거리로 삼았고, 최근에는 술에 의해 흐물흐물해지는 몸뚱아리를 지켜보는 것이 썩 기분 좋지 않아서 술을 멀리하고 있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술을 사랑하고 술에 의지하고 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들의 태도와 자세까지 무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술은 충분히 사랑할만한 것이고, 술만이 창조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며, 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인정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미슐렝 레스토랑에서 빈티지 와인을 마시는 즐거운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생의 고점에서 축복과 기쁨에 겨워 마시는 달콤한 한 잔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술과 경계선을 맞대고 서 있는 다른 축, 그러니까 죽음과 고통, 인내와 생존, 그리고 상실과 흐릿해진 기억과 같은, 조금은 어두운 것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다보니 술이 가진 고유한 쓴 맛의 향취가 책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온다. 술로 고통을 이겨내보려는 사람, 술을 통해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 얼떨결에 벌어진 술자리에서 슬픈 기억을 되살려버린 사람, 술의 또다른 벗인 숙취와 함께 하며 잊고 있던 인간의 저열함을 발견하는 사람 등, 굳이 단편 속 등장인물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충분히 술 생각이 날만한 인생의 불편한 껍질들이 하나씩 둘씩 벗겨진다. 우리는 그것을 슬픔이라고도 표현하고, 특정 사실에 기반하여 이야기하자면 비극이라고도 표현한다. 삶에서 이런 일이 한번 쯤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인생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 일이 일어난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서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안녕 주정뱅이>는 술 생각이 나는, 혹은 술을 마셔야만 할 것같은 그런 슬픔의 순간들이 견디어지는 과정을 정리한 가지런한 엘레지다.

전작들에 비해 보다 더 강렬해진 서사와 한결 매끄럽게 정돈된 표현 사이에서 권여선은 술과 함께 하는 인생의 고단함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처음에는 묵직하게 달려드는 서사구조에 저릿함을 느껴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가(“봄밤”) 시각적으로 파고드는 강렬함에 작가의 표현력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이모”) 인간 심리의 심연을 가지런히, 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드는 비판의식에 레퍼런스를 찾아보기도 했다(“실내화 한켤레”). 어쨌든, 소설가들이 뽑은 지난 해 가장 좋았던 책, 뭐 대충 이런 제목의 리스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그 정도의 찬사를 받을만큼 뛰어난 책이구나 싶더라. 지금까지 내가 읽은 권여선의 책은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그리고 장편 <레가토> 등 총 세 권이었다. <안녕 주정뱅이>는 과거 권여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색깔을 잘 지키면서도 그의 위치를 독보적인 곳까지 올려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봄밤”과 같은 작품이 주는 강렬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Diane Coyle: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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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는 GDP, 하지만 그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GDP. “국격”같은 해괴한 개념을 좋아하는 국민적 특성을 가진 어떤 나라에서는 GDP보다 올림픽 금메달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가의 살림살이나 삶의 질, 그리고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위해 사용하는 주된 지표로 GDP를 선호한다. GDP는 완벽하지 않은 지표다. 한 국가의 경제 수준을 하나의 단일한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부터 엄청난 생략과 왜곡을 감수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가 왜 현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권위적인 지표로 자리잡았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GDP가 완벽하지 않다면, 새로운 지표를 개발할 것인지, 혹은 GDP를 보완해서 발전시킬 것인지 여부도 생각해야 한다. <GDP: A Brief but Affectionate History>는 이러한 고민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는 책이다. “역사책”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이 책은 GDP의 현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를 빌려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GDP의 현재 위상과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을 합당화시키기 위한 근거자료로써 GDP의 기원이라던가 발전 과정에서의 여러 실책들, 그리고 GDP에 제기되는 여러 비판들을 시간 순서로 배열하고 있는 셈이다. 목적이 분명한 책이기에 포기하는 지점도 많다. 시간순으로 정리된 역사책이라고는 해도 저자의 주장이 생뚱맞은 곳에서 장황하게 이어지는 바람에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매우 얇고 간결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잘 정돈된 느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또한 GDP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경제학 전공자들에게는 미진한 감이 느껴지는 정보의 ‘깊이’도 이 책이 가지는 또다른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전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탄생한 GDP가 발전 초기 단계에서 이미 후생(welfare)의 측정을 고민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 후생을 현재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보다는 이러저러한 학자들이 이러저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 라는 개괄적인 소개만을 간단히 하고 서둘러 마무리짓는 구성은 전채요리만 먹고 본식을 건너뛴 듯한 공복상태를 유지시킨다. 하지만 GDP와 관련된 여러 혜안들을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이 갖는 가치는 충분한 듯 하다. 아마 많은 이들이 한번 쯤 생각했을 법한 “가정주부의 가사노동은 GDP에 포함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주부의 세탁 노동 가치가 한 나라의 금융산업이 창출하는 가치의 총합의 80%에 달한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과 함께 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한 뒤 그 집에 고용되었던 가정부와 결혼할 경우 GDP가 감소한다는 역설(가정부의 노동가치는 가정주부로 신분이 전환됨으로써 GDP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을 예시로 제시함으로써 GDP가 갖는 통계적 허점을 통렬하게 지적하는 이런 방식의 논리 전개는 학부 수준의 독자가 GDP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보다 정교하고 복잡해진 금융산업이 GDP에 기여하는 바와 인공지능 등 새로운 형태의 자본-혹은 노동-이 탄생함으로써 수정될 수 밖에 없는 기존의 계산 방식에 대한 고민 등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GDP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적당한 수준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한 국가의 삶의 질을 시장가치로 환산된 최종거래 금액으로 정리하는 현재의 방식이 정당한가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이 책은 GDP에 대한 소개서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행복’이나 ‘여가’같은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GDP에 녹여낼 것인가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고민은 Weimann 등이 함께 쓴 <Measuring Happiness>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이 책도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추상적인 개념들을 어떻게 기존 경제학에 융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현재 수준을 확인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Kishi Bashi: Sonderlust


몇년 전 덴버 다운타운에 위치한 Larimer rounge라는 작고 허름한 공연장에서 키쉬 바쉬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오십에서 백 명 남짓한 관중을 앞에 두고 그는 바이올린 하나만을 든 채 홀로 무대에 올랐다. 루프 머쉰(?)을 이용해 무대 위에서 연주한 사운드를 겹겹이 쌓아 올려 하나의 노래를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그의 공연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풍성했으며 지루하지 않았다. 겸손하고 온화했던 그의 무대 매너와 함께 좋은 기억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시애틀에서 태어나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일본계 미국인 아티스트 키쉬 바쉬의 세번째 정규 음반 <Sonderlust>는 변화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음악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바이올린 등 현악 기반의  클래식 음악에 적극적으로 의존했던 지난 두 장의 음반과 달리 이번 음반은 그리즐리 비어의 크리스 테일러를 공동 프로듀서를 맞아들여 뉴욕-브루클린 인디 사운드의 정취를 흠뻑 받아들임과 동시에 전작부터 짐작되어 온 ELO, 비지스 등 7,80년대 디스코/훵크 사운드에 대한 애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드럼 등 리듬 파트에 유명 세션을 초청하고 오브 몬트리얼의 전 멤버였던 잭 콜웰과 협연하는 등 악기 구성도 다양화했다. 결과는 근사하다 못해 놀라울 정도다. M83의 지난 최근 음반을 들었을 때의 충격과 비슷한 수준이다. 과거를 현재로 훌륭하게 되살려냄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더 크게 확장시켰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위상 역시 확고히 정립했다. “Why Don’t You Answer Me”는 음반의 백미일텐데, 전에 볼 수 없었던 키쉬 바쉬의 음악세계가 아주 거대한 에너지레벨로 훅 들어올 때의 쾌감이 짜릿하다. 이 곡 외에도 “Can’t Let Go, Juno”, “m’Lover” 등 번뜩이는 재치와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로 가득한 곡들이 많다. 1월에 들었던 많은 음반들 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음반이다.

NxWorries: Yes Lawd!

아프리카계 아버지가 한국계 어머니에게 휘두른 주먹질의 결과로 튀긴 핏물이 집 밖 거리로까지 새어나간 후에야 14년 간 이어진 가정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산타 바버라 근교 마리화나 농장에서 이유없이 쫓겨나 갓 태어난 어린 아들과 아내와 함께 거리에서 노숙 생활을 해야 했던 Anderson .Paak의 과거는 <Venice>나 <Malibu>와 같은 음반 제목만큼이나 아름답고 달콤한 그의 음악에 아로새겨진 팽팽한 긴장감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최근 음반 <Malibu>는 지난 해 가장 흥미로운 흑인 음악이었다. 스티비 원더부터 켄드릭 라마까지 떠오르게 하는 장르 파괴적인 그의 다재다능함은 특유의 음색과 뛰어난 곡 구성 능력으로 인해 비평적 찬사와 대중적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최근까지 닥터 드레와 활발한 곡작업을 할 정도로 ‘출세’한 그는 지난 해 프로듀서 Knxwledge와 함께 프로젝트 NxWorries(“no worries”로 발음하면 된다고 한다)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하나 더 발표했다. 이 둘은 2015년 2월 싱글 “Suede”를 Stone Throw Records의 사운드클라우드에 공개하며 존재를 처음으로 알렸는데 이 곳과 유튜브 등에서 백만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컬트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이 노래에는 그 유명한 Gil Scott-Heron이 참여했다). 그 결과 같은 해 여름 Earl Sweatshirt의 투어에 합류하여 함께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 것이 NxWorries의 이름으로 행해진 처음이자 마지막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2016년 3월 또다른 싱글 “Link Up”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고, 그해 6월 앤더슨 박이 이 프로젝트의 첫번째 정규앨범의 발표를 확인하면서 데뷔가 공식화되었다.

그렇게 해서 공개된 첫번째 음반 <Yes Lawd!>에는 선공개되었던 “Suede”와 “Link Up”, “Lyk Dis”를 비롯해 총 19개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음반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업이 앤더슨 박의 <Malibu>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하니 그의 전성기가 막 시작되기 전 모습을 알고 싶다면 들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할 것이고, 굳이 그런 ‘시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닥터 드레와 켄드릭 라마 등 웨스트 코스트의 거물 아티스트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뮤지션과 프로듀서가 합심해서 만든 음반이니만큼 힙합과 네오 소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봐야 할 정도의 완성도가 있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5~70년대 흑인음악을 시도했던 백인 뮤지션들의 음악에서 영감을 찾는 앤더슨 박의 경계를 허무는 사운드메이킹은 Knxwledge의 손길이 더해져 조금 더 풍성해졌다. 엘에이 근교의 가난한 흑인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관계의 형성과 커뮤니티 안에서의 단결을 잊지 않고 전달하는, 따뜻함과 냉정함이 교차하는 특유의 가사도 여전하다. 앤더슨 박은 앞으로도 더 많이 성장할 것이고 주목받을 것이다. 흑인이라는 인종 자체에 갇혀 폐쇄적인 문화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다양성을 무기 삼아 흑인 음악의 세계를 무한하게 확장하려고 하는 그의 현재를 목격하는 것은 그래서 즐거우면서도 중요하다.

Run the Jewels: Run the Jewels 3

“지구 상에 우리보다 똑똑한 래퍼는 없다”라는 Killer Mike의 호언장담은 최소한 El-P와 함께한 Run the Jewels의 세번째 음반까지는 유효한 듯 보인다. 이들은 담대하고 뻔뻔하며, 용기 있고 똑똑한데다가 치밀하고 성실하기까지 하다. 데뷔 음반이 일종의 충격파였고 두번째 음반이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본격적인 선언이었다면 세번째 음반은 이들의 (앞으로 계속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디스코그래피의 첫번째 절정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 같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모두가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꽤나 어려운 성공의 선결조건 중 하나다. 권력에 기죽지 않는 깡다구와 경쟁상대를 제압하기 충분한 내공, 이를 결과로 뽑아낼 수 있는 실행능력 등 삶에 대한 자세부터 일상의 생활 하나까지 신경 쓸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쓸데없는 허세와 한심하기 이를데 없는 만용이 판치는 힙합 음악계에서 ‘똑똑한’ 음악을 발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운드 측면에서의 견고함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 전달까지, 런더주얼스의 음악은 듣는 재미로 넘쳐난다. 비트는 새롭고 신난다. 두 명의 베테랑 래퍼가 내뱉는 랩은 라임과 플로우 모두 나무랄데가 없는데, 여기에 더해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더해진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꾸준한 비판의식은 이번 음반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단순한 “fuck war”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조지 부쉬가 어떤 짓을 했는지, 무기 판매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통쾌한 펀치라인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영어 원어민이 아닌 나조차 귀에 따박따박 박힐 정도로 가사전달력이 뛰어나다. 단순히 풍부한 사운드와 ‘죽이는’ 비트, 랩으로 무장한 좋은 힙합 음반이 아닌, ‘현시대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 혹은 그 이상의 위상을 가지는 훌륭한 대중음악 음반으로 기억될 것이다.

야광토끼: Stay Gold

야광토끼는 검정치마와 함께 한국적 디아스포라 예술을 한국 인디 음악계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몇 안되는 젊은 뮤지션이다. 어린 시절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성장한 임유진과 조휴일은 미국의 감수성을 흡수한 언어(신스, 일렉트로닉, 혹은 인디 기타팝)로 음악을 만들지만 한국의 언어(한국어 가사)로 음악을 만들기도 한다. 영미 인디씬의 최신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음악 구조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주는 ‘친밀한 어색함’과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한국의 인디음악팬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조휴일의 음악이 일반적인 한국인의 음악 청취 방식을 기분좋게 배반하는 아이디어에서 오는 신선함을 미덕으로 가지고 있다면, 임유진의 음악은 보다 적극적으로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젊은-여성’이라는 영역 안에서 고민하고 있다. <Seoulite>라는 1집 음반 제목에서부터 이러한 정체성의 고민이 역력이 뭍어나는 편인데, “Lond-D”에서 장거리 연애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Comm Ave.”에서 추억이 담긴 거리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는 등, 야광토끼는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내적 심경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꽤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이것이 보컬 음색이 가진 독특한 매력, 뛰어난 건반 연주 능력과 합쳐져 그 해 가장 달콤쌉사름한 신스팝 음반을 만들어 냈다. EP <Happy Ending>은 위와 같은 야광토끼의 음악적 정체성이 가진 독특한 밸런스가 묘하게 무너진 느낌이었다. 음 하나 하나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던 데뷔 음반에 비해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부분이 아무런 의미 없이 장식품으로만 쓰이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두번째 정규 음반 <Stay Gold>는 야광토끼가 가장 잘 하는 것을 가장 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운드는 전작에 비해 훨씬 차분해졌지만 이와 동시에 빈틈없이 풍성해졌다. “Room 314″등에서는 전에 없던 새로운 사운드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 결과물이 꽤나 만족스럽다. 사운드 못지 않게 디아스포라적 메시지 역시 진화하고 있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이제 제법 오래 되었는지 그녀는 조금 더 서울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곡 “Romance in Seoul”을 비롯해 “북악산로”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한국적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혹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복잡한 심경을 그녀만의 단순하고도 명쾌한 가사 전달 능력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음반의 전체적인 구성도 매끄러운 편이다. 음반을 차분하게 닫는 마지막 곡 “Don’t Forget Me”까지 듣고 나면 마치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나이라는 서른을 넘어선 지금, 그녀는 두 개의 세계를 경험한 이야기를 두 개의 세계가 결합된 방식의 음악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 과정이 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워진 듯 해 썩 만족스럽다.

real labour rigidity

흔히 임금계약의 경직성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명목 경직성은 학계에서도 많이 연구가 되어 있는 주제이지만, 노동의 실질적 이동, 혹은 진화가 더디게 이루어지는 현상을 거시경제학 관점에서 통찰력 있게 들여다본 연구결과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사용자 측의 임금 요구 수준에 맞게 노동의 공급이 신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바이지만, 특정 계층, 혹은 특정 노동 집단이 언뜻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판단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의 공급을 의도적으로 중단시키는 사례에 대한 모형화 작업은 (최소한) DSGE 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특히 문제가 될 여지가 많다고 생각되는 사례 두가지만 기록해본다.

먼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서 정년을 채운, 혹은 정년에 근접한 세대가 두번째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경직성이 발생한다. 원래 이들의 계획대로라면 은퇴 연령에 도달했을 때까지 모든 충분한 자산을 바탕으로 부를 유지한 채 연금 등의 노후대책을 통해 생을 마감해야 하는게 정상이지만, 이들 스스로 창출한 역피라미드 구조의 인구 생태계에서는 연금이 효율적인 노후대책이 될 수 없으며 그 외의 다른 생계수단을 마련해야만 한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이를 부동산 시장에서 찾고 있는 듯 하다. 즉 부동산 시장의 끝없는 거품 생산을 통해 자산가격을 뻥튀기하고 이를 되파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여 생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작용은 크게 두가지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부동산 가격 상승을 통한 자산의 축적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즉 시장에서의 균형가격만이 상승할 뿐인 이 현상은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해 반드시 수요 측의 효용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것이 젊은 세대에게 전적으로 귀속되고 있으며, 이 결과 세대간 갈등이 증폭될 뿐더러 젊은 세대의 빈곤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이는 또다른 부작용인 노동 시장에서의 공급 부족 사태로 이어진다.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여 은퇴 이후 제 2의 직업을 찾으려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영업으로 몰린다. 은퇴자금을 가지고 가게를 차린 영세자영업자는 이들 스스로 자초한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의해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디폴트로 내몰린다. 많은 경험을 축적한 베이비부머가 치킨집과 같은 단순 노동 사업으로 몰리는 이유는 경직적인 한국의 사내 문화와 적극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술을 습득하려 하지 않는 보수적인 사회 문화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 부장까지 한 사람이 자동차 기름을 닦을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은퇴 시기에 다다른 기성 세대는 자신들이 자초한 함정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이를 하나만 낳다 보니 자신들을 부양할 젊은 세대가 극적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부동산 시장에 올인하다 보니 그 거품때문에 은퇴 후 생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차라리 금융상품에 투자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올바른 투자는 기업의 자본을 확충시켰을 것이고 건전성을 확보한 기업은 더 나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는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아이를 조금 더 많이 낳았을 것이다. 경제가 떠받들어 주는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성 세대는 금융 지식이 무척 부족한 편이고, 높은 인구 밀도와 좁은 땅덩어리에서 인간의 노동력보다 땅과 건물의 존재 가치가 더 귀하게 대접받는 시대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노동력을 귀하게 여기고 가족과 개인의 소중함을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했더라면 좁은 땅덩어리가 가지는 한계를 인간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직적인 사회 문화는 또다른 노동의 실질적 경직성을 불러온다. 바로 젊은 세대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이다. 이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 즉 사용자는 더 적은 임금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혹은 높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과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 중 낮은 임금을 제시하는 기업의 수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직자, 혹은 노동 공급자가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경쟁자들보다 먼저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던가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 생활을 영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전자는 인적자본에의 투자이고, 자본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들은 “금수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인적자본을 확충하는 것에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러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노동자는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젊은이들은 차라리 실업 상태를 택해버리고 있다. 이 현상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부모 세대의 가치관이 아직 젊은 세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부모 세대에서 대학 졸업자가 갈 수 있었던 기업의 수준과 현재 젊은 세대가 동등한 학력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기업의 수준은 당연히 같지 않다. 7~10%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던 시대는 기회의 시대이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발전하고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다. 2~3%대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시대는 정체의 시대다. 안정적으로 현실을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이 각광받는다. 7,9급 공무원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을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이 시대의 가치와 요구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성의 오류’가 발생할 여지 역시 존재한다. 개개인으로서는 안정적인 공무원에 지원하기 위해 집에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 몰라도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경제에 자극이 될 수 있는 총명한 재능들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기업 관점에서 봐도 비슷하다. 개별 기업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기 위해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를 줄인다. 신입사원 규모를 줄이고 희망퇴직을 실시하여 피고용인 규모를 줄이면 당장의 재무구조는 개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기침체를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줄여버리는 결과를 불러 오는 것이다. 결국, 젊은 세대는 시장에 신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실업률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지금 당장 중소기업에서 입에 풀칠할 정도로 다급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비용으로 저당잡아 버릴 수도 있다.

위의 두가지 사례는 모두 노동 공급의 실질적인 부분에서의 경직성, 혹은 ‘inertia’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대한 근거로 기능한다. 늙은 세대는 늙은 세대대로,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노동의 비신축적 공급, 혹은 전환 현상에 기여하고 있다. 이들의 선택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가치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선택을 매 기마다 한다고 가정한다면, 늙은 세대는 치킨집을 더이상 차리지 말아야 한다. 젊은 세대는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인정받는 기업으로 취직하던가 그와 동등한 대가가 예상되는 스타트업을 차려야 한다. 의도적 실업과 의도적 파산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되는 사회라면 그 나라 경제는 이미 마비 수준으로 치닫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왜 트위터를 그만 두었는가

작년 가을부터 결혼 준비를 시작하면서 하지 않게 된 것이 세가지 있다. 하나는 음반을 구입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설을 읽는 읽이었는데 이 둘은 결혼 이후 생활이 안정되면서 다시 재개하게 되었다. 정말 단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서 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트위터인데, 이건 의도적으로 그만 두었고, 결혼 이후에도 하지 않고 있다. 와이프와 결혼 전, 아니 연애 전부터 트위터 상에서 알던 사이였으므로 트위터가 와이프에 대한 정보를 일정 부분 제공해주었기에 어쩌면 트위터가 ‘소개팅 주선자’의 역할 중 일부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와이프와의 지속 가능하면서도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재미나고도 유익한 플랫폼을 우리의 인생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우선 우리는 트위터를 싫어하지 않으며, 트위터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트위터만이 가지는 미덕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트위터를 잘 이용함으로써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명동 성당 서점에서 <하느님과 트윗을>이라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사버렸다. “하느님과 트위터는 공통점이 많다. 24시간 쉬지 않고 떠든다는 것부터 시작해서…”라는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어쨌든 종교도 트위터를 이용하는 세상이다) 다만, ‘굳이 트위터가 우리 관계에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답을 얻을 수 없었으며, 트위터가 야기할 수 있는 몇가지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생각이 강했다. 이 부작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예컨대 ‘세컨계정’의 존재와 그것의 활용 범위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트위터라는 매체 하나에 얽메여 상대방을 믿지 못한다면 다른 어떠한 것도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즉, 트위터가 문제가 아니라 트위터를 둘러싼 시선과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굳이’ 불화의 씨를 남겨두어야 할 정도로 트위터가 각자의 삶에 중요하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라고 생각한다. 트위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트위터로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던가 트위터를 끊지 못하는 중독 상태에 처해있다는 것일텐데, 나는 두 경우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트위터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과 평생 함께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트위터 정도 되는 것을 삶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이 결과가 내가 트위터를 하찮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매 순간마다 트위터는 나에게 큰 희열과 재미를 안겨 주었다.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부터 병신 짓을 자랑하고 싶은 순간까지, 트위터는 꽤나 유용한 매체로 내 삶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다만, 이제 트위터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가 삶에 생겼을 뿐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트위터를 삶에서 아예 제거해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트위터를 하지 않게 된 이후 한동안 허전함에 시달렸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어도 할 것이 없어 이리 저리 스위핑만 하다가 다시 창을 닫곤 했다. 괜히 인스타그램에 사진만 많이 올리게 되었다. 스포츠 경기 결과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거나 요즘과 같은 국정농단 사태에서 네티즌들의 뼈 있고 기발한 개그코드를 접하고 싶을 때 찾아볼 곳이 없어 아쉬움이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부수적이고 주변적인 것들이다. 트위터를 관둔 이후 좋아진 것들도 많다. 우선 다시 ‘긴 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 두 마디 정도로 서론부터 결론까지 모두 종합되는 세상은 그만큼 많은 오해와 극단적인 태도가 득세할 수 밖에 없다. 트위터는 완벽하지도 않고 기존의 세상이 가지고 있던 미덕마저 깎아 내리는 부작용까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하고도 감정적인 세상이다. 트위터를 관둔 이후 어제서야 처음으로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중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반가우면서도 짠했다. 수많은 대담 프로그램이 유행하는 시대에서조차 진중권은 트위터 밖 세상에서는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다. 유명인 뿐만이 아니다. 트위터 안 자신의 세상을 예쁘게 구축해 놓은 사람들 중 그 밖에서도 트위터 못지 않게 예쁘고 탄탄한 세상을 구축하는 이를 거의 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트위터 안에서 일부러 병신 짓을 하면서 트위터 밖의 모습을 상대적으로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트위터 안에서 담담하고 조용한 이들은 밖에서도 소리 없이 빛난다. ‘트위터에 쓰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비정상적인 행동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트위터에 무언가를 적기 위해 하는 행동이 모두 틀린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들의 총합이 트위터 밖 세계에서도 일관성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목적성을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트위터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훨씬 더 건강한 목적 의식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아직도 여전히 트위터가 그립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다. 트위터 안에서 만났던 수많은 친구들이 그립지만, 그들은 트위터 밖에서도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굳이 내가 트위터 안으로 다시 들어가 그들에게 say hello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휘발성의 ‘계약’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채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트위터에서 만난 친구들 중 그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며, 그들 중 그 누구도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우리는 트위터 안에서 충분히 즐거웠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므로. 그들 중 트위터 밖으로 나와 관계를 확장한 이들도 여럿 있다. 그들과의 관계는 그렇게 다른 세상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지, 트위터를 관계 내에서 완전히 지워도 관계의 성격이 달라지거나 왜곡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블로그도 마찬가지였고, 페이스북도 마찬가지다. 모두 각기 다른 세상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그렇게 넘어가며 관계가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미련때문에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잃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금호동의 한 아파트에서 현실에 천착하며 삶을 일구어 나가려고 한다.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함께 빨래를 널다가 피곤하면 소파에 서로의 몸을 겹치고 누워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 ‘세상’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하다. ‘굳이’ 트위터가 들어와서 자리잡을 구석이 없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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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성장 중이다. 두번째 장편 영화라고는 하지만 <언어의 정원>이 45분 남짓한 중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너의 이름은>이 사실상 본격적인 장편 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아직 그가 갈 길이 멀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두시간 분량의 영화를 꽉 채울 정도의 짜임새 있는 서사구조는 발견하기 힘들고, 여전히 <초속 5cm>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학생 남자아이 감수성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도 답답하다. 동시대 감독으로 자주 비교되는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특유의 서사구조를 완성시켜 나가는 것을 보면 신카이 마코토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그 발전 속도가 아직 매우 더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성장 중”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과거 작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공간과 시간에 의한 ‘단절’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의 미묘한 어긋남에 집중해온 그는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연결’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비록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말이다. 거기에 더해 감독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자연재해 문제를 로맨스와 함께 풀어내는 기민함도 보여준다. ‘노력’과 ‘의지’에 의해 혜성과 같은 천재지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교훈을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고 빨간 실을 부여잡은 채 결국 만남을 이루어낸 소년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치밀한 장면 구성과 혀를 내두르게 하는 표현력은 기대 이상이다. 두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이 아깝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를 꼽자면 그가 창조한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뮤직비디오식 구성은 여전히 감독이 속해 있는 세계를 되새김질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이 역시 일본산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이니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그 음악들이 좋은 것은 덤이다. 감독은 여전히 성장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다음 작품 역시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니, 영화를 본 후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 역시 그리 무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