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잠시 일본 도쿄로 피신(?)을 왔다. “피신”이라고 하기엔 새벽 다섯시부터 시작된 4일의 짧은 출장 기간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바쁜건 똑같다. 다른 종류의 바쁨으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새로움을 맛볼 수 있으므로, 그 찰나의 흥미로움을 “피신”이라고 표현해야만 하는 요즘의 내 삶에 애처로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방금 전까지도 저녁을 먹은 자리에서 바로 내일부터 이틀동안 숨막히게 진행되는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린 머리에 글자를 쑤셔넣고 있었다. 몇개월전 몬트리얼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대책없이 구경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뼈저린 반성만 안고 돌아왔고,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를 해보자 마음을 먹었건만 출국 전날까지 회사에서는 다른 업무로 야근을, 개인적으로는 지방을 오고 가며 어른들을 찾아 뵙느라 기어코 일본으로 건너와서야 준비를 하기 시작했으니, 나의 미련함과 게으름을 탓하는 길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대학원생 시절에는 이렇게 정신 없이 머릿속을 괴롭힐 때마다 블로그를 열어 어설픈 문장들을 만들어내며 한숨 돌리곤 했는데, 한국에 와서는 차마 그럴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혹은 서울생활이 내게 준 다른 종류의 정신없음과 바쁨은 블로그를 열 힘마저 빼앗아가 버린 것인지 궁금하다. 올 해 구입한 음반이 백 장을 넘고 그 중 감동을 받은 음반이 최소한 스무 장 이상은 될텐데 그에 대한 수다조차 전혀 떨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신상에 벌어진 일이 어떠한 차원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혼자 말 없이 보낼 수 있는, 즉 음악을 들으면 생각에 빠질 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혹은, 한국어가 더이상 ‘고프지’ 않게 되어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와 회사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만으로 한국어에 대한 갈증이 완전히 풀리고 있을 수도 있다. 둘 중 그 무엇이 원인이든,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움켜지고 살고 있다. 생활은 조금씩 더 안정을 찾아 가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많이 가난하고 혼란스럽다.

이제 더이상 서울을 여행하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를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 이라고 다시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도쿄에 도착해서 모노레일을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무척 ‘외국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곳에서 외국인이 맞다. 그 느낌이 참 오랜만이어서 놀랐던 것 같다. 어느새 서울의 지하철에서 그 어느 순간에도 화를 낼 준비가 된 상태로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어깨 사이를 쏙쏙 피해다니면서도 하루의 아침을 망치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큰 돈을 대출받아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러한 행동을 ‘저지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정착을 하게 될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서울을 여행하는 사람에서 서울에서 사는 사람으로 정체성을 바꾸었고, 앞으로 최소한 2,3년은 더 이곳에서 살아야 할 것 같다. 마포와 충정로 등 서울의 북서쪽에서 주로 생활해 왔지만 새로 옮겨갈 곳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서울의 북동쪽이다. 외국인이 범람하여 매일 문화의 공기가 바뀌는 서울의 세련된 곳을 떠나, 재래시장이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서 있는, 서울의 몇 남지 않은 진짜 ‘동네’로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그 곳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더이상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이게 만든다. 준비하는 과정은 듣던 것만큼 힘들고 정신없지만,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생활을 지속하게 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 같다. 점점 더 복잡해져가는 머릿속도 한결 가지런히 정리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막연히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들어준 사람에게 고맙다.

내일은 꼭 맛있는 스시, 혹은 우동을 먹었으면 좋겠다.

명동

요즘 명동에 자주 온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오는 것 같다. 단지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길거리에서의 예의가 지켜지지 않는 공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즐겨 찾는 곳이 아니었지만 요즘 어쩔 수 없이 자주 오다 보니 이 곳의 풍경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한국인보다는 외국인이 훨씬 많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이질적인 공간. 이태원처럼 목적이 있는 누군가에 의해 건설된 구역이 아니라, 돈을 들고 이곳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태계. 이 곳은 이 곳만의 문화와 규칙이 있다. 방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몇 장 찍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