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이 지나가고
누구나 원했던 어른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원하던 바대로 잘 성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 꿈꾸었던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거나 젊은 시절 추구했던 목표로부터 상당히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과연 실패한 삶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원하던 바를 모두 성취한 삶을 성공이라고 치켜세울 수 없듯, 꿈꾸던 목표에 결국 다다르지 못한 삶을 실패로 규정하고 그 삶을 사는 사람을 패배자로 낙인찍는 것은 몹시 위험한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관계, 혹은 관계의 공백에서 찾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주로 가까운 사람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혹은, 부재에 다다름으로써 등장인물로 하여금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의 배우들을 매우 잘 다루는 그의 연출능력을 생각할 때 인물 간 관계를 통해 삶에 대한 발견을 성취해나가는 방식은 퍽 효율적으로 보인다. <태풍의 지나가고>에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주인공이 나온다. 그는 어른이 되지 못한 대가로 아내와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한켠에서 미성숙한 아들을 적당한 온도로 보살피는 늙은 어미가 있고, 헤어진 남편을 애증의 눈으로 바라보는 전 아내가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재는 주인공과 몹시 닮았다고 전해지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이다. 주인공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때에는 그가 혹시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는 ‘돈 되는 것’을 찾을 때 뿐이다.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며 살아가는 그가 결국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것은 가족이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새로운 낭만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집착하는 것도 가족이다. 아무것도 모를 것만 같았던 어린 아들이 부모를 일깨우는 것도 결국 완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히로카즈는 완전한 형태의 가족이 최선이라는 진부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 그 책임을 지는 방식이 너무 참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고, 그것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조금 덜 파괴적으로, 조금 더 희망적으로, 혹은 조금 더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속죄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15년동안 쓰지 못한 소설을 결국 완성시킬 수 있을까? 그는 돈을 빌리기 위해 누나를 찾는 일을 멈출 수 있을까? 아들을 위해 양육비를 밀리지 않고 보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버릇이 한순간에 고쳐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그는 아버지가 남긴 귀한 벼루를 갈며 새롭게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자신의 민낯을 확인한 주인공이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과오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질 수만 있다면, 15년 묵은 소설이 완성되는 것쯤은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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