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 풍경

창백

 

<창백한 언덕 풍경>은 내가 사랑하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역사적인(!) 첫번째 장편 소설이다. 1982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마침(..) 나도 1982년에 태어났으니 억지로 인연을 꿰어맞출 핑계를 하나 얻은 셈이다. (이렇게 억지로 거짓된 필연에 발목잡힌 다른 작가로 프란츠 카프카가 있다. 그는 나의 생일로부터 정확하게 99년 전인 1883년 7월 3일에 태어났다) 발표 당시 이미 좋은 평가를 받았고 권위있는 상도 받았다는 소개글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시구로 특유의 정갈하지만 꼼꼼한 문장과 ‘기억’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시도는 이미 이 첫번째 소설에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어린 시절 떠나온 일본과 현재 거주 중인 영국을 오가며 소설의 배경으로 삼는 점은 어디에선가 들었던, 많은 작가들이 첫번째 소설에서 자전적인 부분을 알게 모르게 삽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작가의 초창기를 조금 더 재미있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한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일본을 ‘기억’하는 모습이 전후 어지러운 시기 거짓말과 외로움, 착시와 의존 등의 개념에 치여 힘들어했던 어두운 과거였다는 점은 작가와 ‘떠나온 나라’와의 관계가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물론 이시구로는 디아스포라 문학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통적인 영미문학의 문법을 따른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다만, 현대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일본식 이름을 안겨준 한 나라를 어떻게 떠나보냈는지, 혹은 그 안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의 커리어를 따라올라가면서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일같다고 느꼈다.

소설은 무척 그답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그의 문체는 담백하고 조용하다. 문장은 결코 성내는 법이 없으며 읽는이가 숨가쁘지 않게 닥달하지 않는다. 서사는 천천히 흘러가며,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과정이 꼼꼼하고 정적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마저 가볍거나 잔잔하지만은 않다. 원폭으로 인해 전쟁을 포기한 나라에서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개인의 삶은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고 무시될 정도로 단순하거나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속여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며, 누군가의 어려움을 무시해야 할 정도로 마음이 가난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 기대어, 때로는 거짓말의 힘에 의존하며 환상을 키워나가야만 현실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힘겨운 삶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던 많은 이들 중 한 명을 그저 조용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았던 관찰자로서의 작중 화자가 주제의식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는 것은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다. 작가는 작중 화자가 현재시점에서 가지는 죄의식을 전후 일본의 부채의식과 연결지음으로써 작가는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되살려 놓는다. 이시구로는 원폭, 혹은 전쟁과 관련된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야기를 전개시키지만, 거대한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말없이 매몰되어 버린 개인의 삶을 화자의 눈을 통해 끄집어 내되 이를 화자의 현재 상황, 즉 현대사회의 타자화되고 파편화된 인간관계와 대구를 이루도록 배치함으로써 독자 개개인이 일반적인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삶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시구로의 조용하고 담백한 문체조차 이러한 주제의식을 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다. 그만큼 빈틈 없이 꽉 짜여져 있어 읽는 맛이 좋다.

4/5

2 thoughts on “가즈오 이시구로: 창백한 언덕 풍경

  1. 오랜만에 들렀는데 업데이트가 되어 있길래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댓글을 달아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예전에 한 권 읽어보았는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다시 읽기엔 괴로울 것 같지만요.. 우선 창백한 언덕 풍경.. 올 추석때 읽을 책으로 기억해 두고요ㅎ 올려두신 나머지 글들도 고마운 마음으로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저와 생년월일 같으신 분 처음 뵙네요!

    • 오랜만에 들르신 분을 위해(?) 댓글도 늦게 달아드립니다 (..) 저에게 가즈오 이시구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믿음을 주는 작가예요. 뛰어난 작품을 반드시 만날거라는 기대같은 믿음보다는, 그의 글을 읽으면 반드시 얻게 되는 표현과 감정이 있을거라는 안도감같은거죠. 그래서 그의 작품은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아, 이번주는 이시구로를 읽어야겠어, 하는 마음으로요.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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