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의 죽음

8월 26일. 그 날은 2016년 여름의 다른 날들보다 유난히 더 덥게 느껴졌다. 낮 최고기온이 딱히 더 높은 것도 아니었다. 1994년 이후 가장 덥다는 2016년 8월의 아무 날에나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불쾌함이 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다른 날에 비해 조금 더 많이 걸었던 탓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얻은 부정맥이 나에게도 대물림 되나 싶은 걱정이 잠시 들기도 하였지만, 그 날 내내 느꼈던 불안감은 결코 나를 향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와 같이 점심시간에 책을 읽을 한적한 커피숍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있었고, 한 번의 허탕 끝에 겨우 자리를 잡은 직후 서둘러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평소에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폭염이 점점 심해지면서 밭일을 하시는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 최근 문자를 몇 번 보내긴 했지만, 그 날처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문자를 보낸 적은 없었다. 어머니의 답장에는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이모티콘이나 사진을 꼭 덧붙이던 평소의 명랑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불안감은 더 커져 갔고, 서둘러 전화를 했지만 어머니는 받지 않았다. 걱정이 아버지에게 향했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건만 기어코 고집을 부려 해가 떠 있을 때에도 밭일을 하시다가 쓰러지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칠 무렵, 어머니로부터 “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라고 시작하는 긴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사인은 일사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했다.

삼촌이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었다. 그 과정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알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와 관련된 행동이 실행될 것이고 감정이 드러날 것이었다. 사실 혹은 현상의 인식이 감정의 변화로 빠르게 전이되는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에게 “어디로 가면 되나요?”, “몇 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와 같은 문자를 보냈다. 부모의 형제·자매의 사망 시 사용할 수 있는 청원휴가 일수를 알아보고 팀장님과 연수팀 담당자에게 연락을 취해 휴가 절차를 마무리 지은 것이 그 다음 취한 행동이었다. 이런 면에서 매우 다른 나의 누나는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오열하며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우리 삼촌 불쌍해서 어떡하니”라는 누나의 문자에 나는 “그러게”라고 답했다. 감정은 ‘먼저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위치와 역할을 먼저 규정하고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들로 받아들여졌다. 삼촌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해야 할 이들이 있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대충이라도 계획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삼촌의 죽음에 대한 나의 슬픔은 개인적으로 조용히 발현되어도 충분히 괜찮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삼촌의 죽음을 전해들은 이후 첫 몇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애인에게 문자를 보내 약간의 감정을 토해냈다. 애인은 나의 가장 개인적인, 가장 가까운 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감정을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이 대화에서 나는 “슬픔은 나중에 몰려올 것”이므로 단지 “안부를 여쭈어보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느꼈던 죄책감은 이후 장례를 치르는 과정 내내 점점 더 커져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집으로 가는 길, 햇살이 지나치게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올 여름의 태양을 원망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하철 역 앞에서 <빅이슈>를 파는 남자를 보았다. 울컥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5만원짜리 지폐를 한 장 쥐어준 후 “열 권을 팔기 위해 서 있어야 하는 시간 동안 어디 들어가셔서 잠시라도 쉬시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 정도의 인정이 자리잡을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들려 간단히 짐을 꾸린 뒤 서울역으로 향했다. 헤드폰은 넣지 않았다. 옷가지로 인해 가방의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귀에 무언가가 잘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자형과 함께 가는 방법을 계획했지만 그를 기다리게 할 것 같아 따로 가기로 했다. 나는 휴가를 냈지만 자형은 아마도 휴가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피곤한 그의 여정을 처음부터 뒤틀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서울역에 도착한 시각은 6시 55분이었고, 자형은 7시에 출발하는 KTX를 타려던 참이었다. 나는 7시 10분 차를 타고 뒤따라 떠났다. 내 좌석에는 외국인이 앉아 있었다. 티켓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웃으면서 움찔거렸다. 우리는 옆에 앉아 동대구역까지 함께 갔다. 제대로 씻지 않았는지 역한 땀냄새가 풍겼지만 나 역시 앞으로 며칠 동안 비슷한 처지에 놓일 것이므로 마음 속으로도 탓하지 않았다. 작은 기내용 여행가방을 선반 위로 올리지 않은 채 다리 사이에 꼭 끼워놓고 가는 긴장한 모습이 미국 유학을 처음 떠나던 당시의 나의 모습 같아 보였다. 마산까지 가는 그를 위해 창가 자리를 양보할 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에게 말 한마디 걸 용기조차 없었다. 동대구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정도였고, 공사중인 역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계산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지하에 마련된 장례식장에는 자형이 막 도착해서 가족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수녀님 두 분은 성당 아파트, 삼촌이 숨을 거둔 곳으로 들어가 쉬고 계셨고 장례식장에는 서울 고모 내외와 어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함양을 떠난 아버지는 옷가지를 챙기러 잠깐 다시 함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자형과 함께 삼촌의 영정 앞에 절을 하고 밥을 먹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삼촌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따지고 들어가면 모든 일은 인과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가꾸어져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말로 만들어낸 허상일 수도 있다. 일사병으로만 알고 있던 삼촌의 사인은 듣는 이를 황망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언어에 의해 결코 무(無)에서 툭 튀어나온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죽음 직후, 가족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죄책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선 삼촌과 15년을 함께 살아온 대구고모는 최근 파킨슨병이 심해져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삼촌을 떠나 근처의 노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만족과 기대로 한껏 들떠 있었다. 그는15년 간 돌보아 온 삼촌을 혼자 두었다는 죄책감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슬프게도 삼촌을 가장 처음 발견한 사람도 대구고모였다. 쓰러져 있는 삼촌을 본 충격이 그를 혼자 두어서 이런 일을 자초했다는 죄책감과 합쳐져 고모를 심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대구고모의 노인 아파트 이사를 제안한 것은 아버지였다. 할머니를 닮은 고모의 강한 성격은 유약한 삼촌의 병세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부모님의 판단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몸이 더 나빠져 당신과 삼촌의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조차 힘겨운 도전이 되어버린 고모의 상태도 아버지의 판단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대신 부모님이 조금 더 자주 삼촌 혼자 사는 계산성당 앞 아파트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가장 최근 방문 시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집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비록 식사는 조금 더 부실해졌지만 삼촌의 표정은 훨씬 더 편해 보였다고 했다. 비록 이것이 변명이 되지 않을지라 할지라도, 고모와 삼촌의 분가를 제안한 아버지 역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열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을 살갑게 챙기지 못한 당신의 무뚝뚝함을 비롯해 지금까지 그가 행했던 많은 일들을, 그다운 방식으로 자책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였고, 바로 아래 남동생을 챙기지 못한 서울고모 역시 죄책감을 나누어가질 수 밖에 없었다. 가족 모두 한 허망한 죽음을 필연으로 엮으며 자신의 탓을 마음에 새겨 넣고 있었다. 언어를 직조해 만들어낸 인과관계 위에 자신을 올려 놓음으로써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침묵 속에 가두어진 망자의 고난을 나누어 가지려 애쓰고 있었다.

삼촌은 2001년 할머니의 죽음 이후 조현병 증세가 심해진 뒤에도 새벽미사에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남산동에서 이 곳 동산동의 한 아파트로 이사온 이후 삼촌의 일과는 항상 새벽미사로 시작했다. 그에게는 밥을 챙겨먹는 것보다 훨씬 명확하고 자동적인 하루 일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망시간으로 추정되는 새벽 5시는 새벽미사를 보기 위해 준비를 할 시간이다. 발견 당시 삼촌은 외출복을 깔끔하게 입고 있는 상태였고, 검안을 담당한 의사는 발코니 문을 열기 위해 그 방향으로 움직이던 중 거실에서 쓰러져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무척 더웠던 2016년의 여름, 삼촌이 머물던 아파트의 발코니 문은 항상 굳게 닫혀져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 소리를 지르던 삼촌때문에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옆 집 목사의 항의 이후 그 문은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다. 미사 도중 일어나 움직이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내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로부터 주의를 받은 이후 집 발코니에서만 소리를 내었지만 그조차 옆 집 목사의 항의로 하지 못하게 되자 발코니 문까지 닫아 버리고 선풍기 한 대로 더위를 이겨내려고 했던 것이다. 집에는 에어컨이 있었다. 하지만 삼촌은 어찌된 이유였는지 에어컨 역시 한 번도 틀지 않았다. 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고 부모님과 고모 등으로부터 생활비를 타서 쓰던 그에게 전기세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삼촌의 죽음은 일사병으로 인한 심장마비였다. 그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혹은 만들어낸다면, 예상 밖으로 더웠던 이 여름의 더위부터 미사 시간에 삼촌의 행동을 제지한 사제, 발코니 문을 닫게 한 목사, 삼촌을 24시간 관찰하지 못한 고모, 그 고모를 따로 나가 살게 한 아버지, 혹은 이 모든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나까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울 수 있을 것이다. 차관까지 올라가고 싶은 공무원이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잘잘못을 가리는 행위가 지금 우리에게, 혹은 망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삼촌은 죽었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1년에 몇 번 되지 않은 시간에서조차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침묵을 벗 삼아 그림자가 되는 것을 자청했던 삼촌이 정말 영원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끊임없이 악마와 싸우며 자신을 지키려 했던” 그가 비로소 기나긴 사투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편한 잠을 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삼촌이 중얼거리며 내뱉은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다. 혹여 누군가 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할지라도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그나마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소리’는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 구절을 계속 중얼거렸다고 한다. 어머니의 주장처럼 당신 안에서 점점 커져가는 다른 자아로부터 원래 자아를 지키기 위한 자기최면일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삼촌에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종교에 대한 신념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최후의 욕망일 수도 있다. 새벽 다섯 시, 그는 “가톨릭 신앙인”으로 사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죽기 전 무엇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혼자 힘으로 그 시간에 갈 수 있었던 곳은 대구 시내에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삼촌의 정신이 또렷하던 시절, 그러니까 삼촌에 대한 나의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그는 사려 깊은 신학자였고 늙은 부모님을 돌보는 살뜰한 살림꾼이었으며 열렬한 삼성 라이온스의 팬이었고 조카를 데리고 나가 서점에서 책을 사주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여주던 따뜻한 삼촌이었다. 매 방학마다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삼촌이 살고 있던 대구로 며칠 씩 ‘휴가’를 떠났는데, 그 때마다 나는 삼촌에게 물어볼 질문 들을 몇 가지 추려가곤 했다. 질문들은 대부분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 중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것들이었다. 주일학교에서 교리를 가르쳐주던 교사들은 대학생들이었다. 일반인보다 가톨릭 교리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할 수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궁금한 것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부모님은 자식에게 특정 지식을 가르쳐주는 스승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자식에 대한 욕망이 투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년에 두 번, 삼촌과 나누는 긴 대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속에 쉽고도 명쾌한 설명이 담겨 있었다. 삼촌은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를 특히 좋아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심부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친지가 모이는 명절은 너무 번잡스럽고 정신 사나웠지만, 우리 가족만이 와서 조용히 머무르는 여름과 겨울의 며칠은 삼촌에게도 꽤나 들뜰만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주 좋은 대화 상대였다. 그 누구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재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주로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면서 큰 목소리로 떠드는 삼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거실에서 빈둥거리며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기도 하다가 졸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영화나 정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될 무렵, 삼촌은 나와 누나를 데리고 나가 서점에서 책을 선물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 삼촌이 사주었던 <삼국지> 한 질은 아직도 함양의 부모님 댁에 남겨져 있다. 키가 컸던 그는 종종 나를 들쳐 업고 휘휘 돌리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술을 좋아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겨 쓴 맥주를 한 잔 받으며 함께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제, 늙은 아버지와 함께 어울리는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치워야 할 것, 날라야 할 것, 대접해야 할 것, 배려해야 할 것을 신경쓰고 있었다. 그는 고스톱에도, 바둑에도, 술에도 능하지 못 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서 삼촌보다 한 수 위였던 아버지나 큰아버지를 그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그의 정신이 또렷하던 시절, 그는 좋은 아들이었고, 조용하지만 사려깊은 동생이었으며, 정다운 말 벗이자 충직한 집사였다.

나는 그가 여자를 사귀었는지, 혹은 결혼을 할 기회가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어떤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혼자 몰래 읽으며 미소 짓던 장면은 지금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가 옆에서 “러브레터”라고 놀렸던 것도 기억이 난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두 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울컥한 마음에 대구로 내려갔다. 당시는 2002년이었고 할머니의 상을 치른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삼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차례로 떠나 보내고 동산동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을 그는 차분하게 저녁을 차려주었고, 다음날 나를 데리고 해인사에 갔다.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다. 나는 니콘 FM2 카메라로 그를 찍었다. 그 사진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여자친구가 막 헤어지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철없는 스무 살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삼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때 삼촌은 마흔 살 즈음이었다. 2016년 나의 나이, 서른 다섯과 더 가까운 나이였던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그와의 여행 이후 몇 달 뒤 나는 군대에 들어갔고, 이후 삼촌의 자폐적 기질은 조현병으로 발현되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삼촌이 사회활동을 하지 못한 이유인 이 병의 원인을 군대에서의 경험-폭행으로 인한 의가사제대-에서 찾는 가족이 있다. 반면 삼촌의 사회기피적 성향은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지나치게 강한 성향의 할머니와 누나들의 등쌀에 시달리며 유아기부터 발전해온 탓이라고 주장하는 가족도 있다. 하지만 대구에서 상경하여 서강대를 졸업할 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살던 그였다. 그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던 내가 사려 깊고 자신감 넘치던 그의 모습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1993년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대구고모는 우울증을 달고 빠리에서 돌아 왔다. 유학 전에도 서로를 죽일 듯 사랑하며 미워했던 할머니와 고모는 중간에서 사각지대를 만들어주었던 유일한 중재자인 할아버지의 부재 이후 더욱 극심한 갈등관계로 치달았다. 유약한 막내 아들이자 나이 어린 동생일 뿐이었던 삼촌이 할머니를 모시는 것이 삶의 유일한 소명이었기에 강하고 대찬 성격의 고모와의 갈등을 피하지 않았던 것이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었을까. 둘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모의 사랑은 고모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고모의 사랑은 결코 관용적이지 않았다. 고모는 삼촌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그 지극한 사랑은 철저히 고모의 색으로 칠해져야 만족되는 것이었다. 삼촌은 약하고 여렸으며, 착하고 순했다. 할머니 밑에서 짓눌려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이제 고모 밑에서 다시 짓눌림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 것이 힘들었는지 집 밖으로 자주 나갔고, 며칠 씩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연락이 잠시라도 닿지 않으면 고모는 극도로 불안해져 어머니와 서울고모를 붙들고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는 무릎이 불편한 고모를 대신해 보따리 하나를 싸 들고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며 삼촌을 찾아 나섰다. 그 와중에 나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의 무수히 많은 갈등이 존재했을 것이다. 삼촌이 의지할 곳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를 혼내거나 닦달하지 않는 사람, 그를 항상 포근히 받아줄 수 있는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의 인생에서 만나 사랑을 하는 상대가 반드시 필요했다면, 그건 우리가 모르는 누구여야 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없었다.

제대 이후 학업과 유학 준비로 정신 없던 어느 날, 마포의 집으로 삼촌이 갑자기 찾아 왔다. 집에는 마침 어머니가 없었고 나와 누나만이 있었다. 과일을 내어오고 삼촌과 마주 앉았다. 삼촌은 대뜸 진화론에 대해 물었다. 표면적으로는 진화론이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지만, 결국 창조론에 반하는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나와 누나는 성의껏 답했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그가 우리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는 우리의 말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우리의 대답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결국 한 시간여의 기묘한 ‘대화’는 어머니가 급하게 귀가한 후에야 마무리되었다. 누나는 무척 기분이 상해 보였고, 나는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다. 내가 알고 기억하던 삼촌이 아니었다. 이후 나는 유학을 떠났고, 더 이상 부모님으로부터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건네 듣지 못 했다. 나는 미국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고, 내 얕은 그릇은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에게 많은 정성을 쏟을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몇 년 뒤 누나의 결혼식에서 삼촌을 다시 만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자형과 함께 마포의 아파트에서 뒤풀이를 하던 중 삼촌은 갑자기 일어나 “저 가겠습니다”하고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급하게 뒤쫓아 나갔고, 삼촌은 “잘 있거라” 한 마디만 남기고 어두운 서울의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이후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었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서 삼촌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져 혼자 귀가하거나 다른 행선지로 떠났다. 그 곳에서 며칠씩 머물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대구 동산동 아파트로 돌아와 고모와 함께 지냈다. 증세가 심해지자 어머니는 이천에 있는 한 병원으로 삼촌으로 보내는데 성공했고, 수많은 난관 끝에 처방 받은 약을 삼촌 스스로 복용하게 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나는 삼촌이 걱정되어 가끔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삼촌의 안부를 물었다. 어머니의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그럭저럭 잘 지내시지 뭐,” 혹은 “요즘은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얌전히 잘 계셔”와 같은.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삼촌은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가족은 조용히 가족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를 치르고 싶어했다. 하지만 한국의 장례문화는 그러한 바램을 흔쾌히 들어줄 정도로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계산성당의 연령회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했다. 연령회장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모님이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의금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 정도였다. 사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결정했던 것인데, 이후 수많은 연령회원들이 들이닥쳐 끊임없이 연도를 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이 곳의 장례 문화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촌이 했던 사회생활은 빈첸시오회와 신학대학원 정도였다. 두 곳에서 만난 인연들은 첫 날 저녁부터 장례미사까지 계속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들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한참을 앉아 있다 돌아갔다. 삼촌도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했다면, 저런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이 미래의 가난을 담보하는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항상 ‘흠’ 안에서 발견되었을 뿐 그것이 개인의 신념에 의한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는다는 행위가 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선호되어온 이유로는 자신의 유전적 형질을 보존하고자 하는 생물학적 본능 외에도 경제적 부흥기에 투자가치가 높은 ‘자산’의 규모를 불리는 행위에 대한 경제적 타당성, 그리고 뒤틀린 유교문화 내에서 장기적으로(거의 영원히) 거느릴 수 있으며 굴복시킬 수 있는 손아랫사람을 생산하는 것에 대한 욕망의 크기 정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가족에게는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았다. 이것을 주노 디아즈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푸쿠”인 셈이다. (어머니는 그것을 “자폐증 유전자”라고 표현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혹은 그 윗 세대에서 생긴 어떤 기묘한 기운으로 인해 아버지의 형제 여섯 중 다섯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이 가족 안에 공고히 자리잡은 까닭에 성직자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푸쿠”의 변질된 형태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독한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적 질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아버지의 가족이 만만치 않게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결혼과 섹스라는 ‘세속적’인 가치를 금기시하게 된 것은, 할머니가 총 11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상당히 모순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신앙심이 대단히 금욕적인 생활양식과 합쳐져 이 두 가치관이 숭상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멸종시켜 버린 것이다. 서울의 유쾌하고 시끌벅적한 환경에서 성장한 어머니는 헛기침과 고함소리가 공존하는 엄격한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로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자기 안에서 꿈틀거리는 “푸쿠”를 학문으로 이겨내려 했고, 그렇게 사회와 다른 방식으로 멀어져가는 아버지를 대신해 선이 얇은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는 거친 세상과 싸워야 했다. 어린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바라봤던 집안 풍경은 비교적 명료하다. 아버지는 항상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하면 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들려 인사를 받아주고는 이내 다시 책상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책상을 제외한 모든 곳을 책임졌다. 나는 아버지의 필사적인 뒤통수와 어머니의 앙 다문 입술을 모두 기억한다. 이들은 아버지가 물려 받은 “푸쿠”를 나름 성공적으로 극복해낸 커플로 기억될 것이다. 불행히도 아버지의 형제들은 아버지만큼 사회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인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교회, 혹은 자기 자신 안으로 파고들어간 탓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고 있다. 지나친 사랑은 미워함의 다른 이름이며, 지나친 신념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다.

잠은 장례식장에서 잤다. 동산동 아파트는 수녀님과 고모님들의 몫으로 남겼다. 첫날 밤은 고모부와 어머니, 자형과 함께 잤는데 대충 방석과 얇은 이불을 깔고 잤다. 둘째 날 밤은 아버지와 어머니, 서울고모, 고모부와 함께 잤다. 유가족 수면실에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 다행히 뜨거운 물도 잘 나왔다. 이틀 모두 샤워를 하고 화장품까지 바르고 잤다. 푹신하지 않은 잠자리가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새벽에는 잠결에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피곤함은 가장 좋은 수면제다. 새벽미사 이후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지 못하는 문상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계산성당의 신자들이었으므로 내가 이들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녀가 없었던 삼촌의 상주는 유일한 남자 조카인 내가 되어야 했으므로 나는 영정 앞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작은 문제라면 가톨릭 문화에서 문상은 절 두 번 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는 문상에서 대부분 30분 이상 소요되는 위령기도를 바치게 되는데, 대구교구의 경우 기도문을 그냥 읽지 않고 특유의 가락을 붙여 읊게 한다. 이 가락은 유교 장례식에서 듣게 되는 곡(哭)과 흡사한 형태로 느껴진다. 가톨릭은 다른 종교에 비해 지역 토착화가 비교적 덜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장례문화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전통적인 유교적인 방식에 복종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유교의 조상과 비슷한 개념을 가톨릭에서 굳이 찾자면 성인(saint), 혹은 순교자(matyr)에 해당할텐데, 이 위령기도에서는 하느님과 성모님, 성인들에게 망자의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끊임없이 애원한다는 점에서 현대 불교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적 기복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이 가톨릭 기도문에서는 ‘슬픔’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고, 기도의 힘으로 연옥의 고통을 면하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정말 중요한 것은 30분 넘게 소요되는 이 기도의 시간동안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둘째날 나는 그렇게 총 일곱번의 위령기도를 문상객들과 함께 바쳤고, 유학생활 이후 거의 하지 못하게 된 양반다리 자세를 오후 내내 하고 있어야 했다. 밥은 문상객들에게 내어주는 기본적인 육개장을 계속 먹었다. 매년 먹어야 하는 육개장의 총 그릇수가 사람마다 정해져 있다면 나는 벌써 그 마일리지를 다 채운 느낌이었다. 앞으로 당분간 육개장은 먹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정말 맛있는 육개장을 끓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물론, 서울로 돌아온 후 육개장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렸다.

둘째 날에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오전에 예정되었던 염습과 입관예절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삼촌은 유서를 남기지 않고 죽었으므로 자살의 징후가 있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었다. 당연히 타살의 흔적도 없었다. 중부경찰서의 한 형사는 울부짖는 고모와 형제들을 딱하게 여겼을 수도 있고, 한 달 넘게 지속되는 더운 날씨에 지쳐 그저 귀찮은 절차를 생략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의사의 소견서에 기대어 병사로 처리된 검안서가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사고사로 되돌아온 사실을 가족이 알게 된 시간은 당일 아침이 다 되어서였다. 최초 발견자인 대구고모는 경찰서로 불려가 심문을 받아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였다. 누군가 삼촌의 죽음을 의심한다면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담당 검사와 경찰의 몫이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삼촌의 죽음의 원인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모든 책임을 고려하는 것은 공무원의 본능적인 행동양태다. 결국 저녁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입관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고, 뒤늦게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염을 할 수 있었다. 망자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입관예절은 통곡의 장이 되기 쉽다. 시체는 단지 영혼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몇십년 간 보아온 살과 머리카락, 피부를 보면 울컥하는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장례 절차 자체가 이 ‘껍데기’일 뿐인 시체를 유가족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과정을 총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영혼이 있다면, 삼촌의 영혼은 그 시간 시체 안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온 육체 안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지순례를 좋아했고 걷는 것을 즐겼던 삼촌은 조금 더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그 곳을 이미 멀리 떠나갔을 것이다. 그의 흔적을 붙잡고 슬퍼하는 것은 유가족의 권리이자 욕망일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른 하나의 사건은 묘자리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주교회관으로 가서 군위에 있는 가톨릭 묘원에 이미 사둔 가족의 묘자리 중 하나를 택해 미리 그 값을 지불해야 했는데, 다섯 곳의 묘자리 중 엉뚱한 곳을 택하는 바람에 다음날 하관예절을 진행하기 위해 묘자리를 하나 더 파야 했다. 묘자리 비용과 장례 비용 모두 내가 돈을 보탰지만, 부모님은 며칠 뒤 전액을 내 계좌로 송금했다. “네 결혼비용을 미리 지불했다고 치자”라는 문자는 분명히 사족이었다.

셋째 날에는 장례 비용 정산을 하고 장례 미사를 치렀다. 영정 사진은 내가 들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이어 세번 째 드는 영정이었다. 관을 들 사람이 없어 운구차 기사의 손까지 빌려야 했다. 영정을 들고 관 앞에 서서 걷다 보면 관을 든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연령회장이 보통 앞에 서서 그 속도를 조절해주는데, 이번 연령회장은 내 몸을 만져가며 반 말로 늦춰라, 빨리 가라, 하고 명령하듯 말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연령회장은 이후에도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다. 전형적인 대구의 거친 노인 남성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장례미사는 고모부의 형제 사제가 집전했다. 우리 가족은 가톨릭 사회에서 큰아버지의 가족으로 기억된다. 큰아버지는 주교품을 받지 않았지만 교황으로부터 명예 전속 사제로 확정된 사제에게 부여되는 몬시뇰의 지위까지 오른 사람이다. 2012년 큰아버지가 소천했을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당시 연구실에서 아버지가 보낸 이메일을 통해 사망소식을 전달받았다. 아버지는 상을 다 치르고 난 후, 사망 후 나흘이 지난 다음에야 나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부모님은 전에도 비슷한 짓을 저지른 전력이 있다. 한 동네에서 무척 가깝게 지낸 친구 건희가 인도에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 사실을 나에게 감추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친구를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약한 부모님은 지나치게 나를 염려한 나머지 내가 능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지나친 사랑과 염려가 나의 인생을 방해한 것이다. 나는 삼촌처럼 미쳐버리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부모님의 과보호적 사랑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장례미사에는 누나도 참석했다.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인 누나는 아들 영건이를 데리고 새벽 네 시에 집을 떠나 기어코 아침 여덟 시에 대구에 도착했다. 다행히 영건이는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신의 엄마를 독차지한 까닭인지 미사 내내 뿌듯한 표정이었다. 장례미사가 열린 계산 성당을 가득 채운 수녀님들은 영건이를 보며 신기해 했고, 영건이도 그들이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쳐다봤다. 누나는 미사만 본 뒤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군위에 있는 가톨릭 묘원에 삼촌의 시체가 담긴 관을 묻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이야기했듯 묘자리를 잘못 정한 바람에 묘를 다시 파는 해프닝이 있었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으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또다른 기도를 참아낸 끝에 무사히 흙을 덮을 수 있었다. 점심은 버스에서 빵으로 때웠다. 대구로 돌아와 연령회원들을 떠내 보내고 가족들을 동산 아파트 옆 작은 식당으로 들여보낸 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그 곳을 빠져 나와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내가 떠나기 전 대구고모는 20만원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대구에 갈 때마다 겪는 일이었다. 그의 사랑은 늘 헌신적이지만 일방적이다. 동대구역에서 혼자 앉아 갈 수 있는 특실 표를 끊었고, 그로부터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할 때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바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어제는 누나네 가족의 이사가 있었다. 어머니는 함양에서 하루 휴식을 취한 뒤 서울로 올라와 누나의 이사를 도와주었다. 어머니의 역할은 첫째 손자 영건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둘째 손녀 은호는 아직 낯을 가리는지 어머니의 품을 싫어했고, 덕분에 누나는 은호를 안은 채 이사를 지휘해야 했다. 나는 퇴근을 하고 바로 계양으로 향했다. 도착할 무렵 사다리차가 막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자형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로 나를 낮이했고, 우리는 근처 돼지갈비 집에서 식사를 한 뒤 돌아와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버렸다. 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건이의 주장에 못 이겨 놀이터에 잠시 들렸다. 영건이는 놀이터에서 무척 열정적이었다. 자신보다 덩치도 더 크고 말도 더 잘 하는 다른 아이들에게 밀리지 않고 이 곳 저 곳을 뛰어 다니며 더 높은 기구에 도전했고 새로운 방식의 낙하운동에 자신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기꺼이 맡겼다. 나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는 영건이를 따라다니던 도중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대구에서의 사흘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영건이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누나와 자형은 영건이를 세상과 부딪히게 내버려 두었다. 그 곳에서 넘어지거나 다치는 것은 영건이의 몫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는 가치들도 오롯이 영건이의 것이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만난 손자와 노는 것이 마냥 즐거워 보였다. 당신의 아들이 있는 성산동 집으로는 오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손자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했는지 계양 집에 남겠다고 말했다. 열 시 쯤 그 곳을 떠나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삼촌은 자녀가 없었으므로 내가 삼촌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 것은 부모님의 숨죽인 바램이기도 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은 연금을 받게 된 덕분에 부모님은 은퇴 후에도 삼촌에게 용돈을 보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보다 열 살이나 어린 삼촌을 ‘언제까지’ 도와줄 수는 없어 보였고, 그 몫은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착각이었는지, 혹은 스스로에게 행한 거짓말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부모님의 존재를 핑계 삼아 삼촌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 받는 것은 우리 가족의 오랜 전통이었고, 나는 그 전통을 미국에 있는 동안 끊어지지 않기를 바랬다. 미국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에 삼촌은 꼬박꼬박 답장을 해주었다. 우리가 카드를 통해 주고 받는 말들은 뻔한 안부 인사 정도였지만, 나는 그 카드를 통해 면죄부를 받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먹고 사느라 여유가 없어서”라는 좋은 핑계는 “너의 더러움만큼 나도 더럽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 누구도 죄를 지은 여인에게 돌을 함부로 던질 수 없듯, 나 역시 돌을 맞아 상처를 입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이 삼촌의 삶을 구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삶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016 Mercury Music Prize 미리 둘러보기

머큐리 음악상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발표된 모든 장르의 음악에 대해 시상하는 상으로, 영국인 아티스트 혹은 영국인이 50% 이상인 그룹이 해당 기간에 발표한 모든 음반이 평가 대상에 포함된다. 시상식은 10월에 열리지만 후보는 8월 초에 미리 발표되는데, 올해부터는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후보에 대해 일반인들도 투표를 통해 선정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심사위원단은 아티스트, 음악산업 관계자, 언론인 등으로 구성되는데 올해 심사위원 중 우리가 알만한 인물로는 제시 웨어, 자비스 코커, 제이미 컬럼, 울프 앨리스, 가디언지 음악 담당 기자인 헤리엇 깁슨 등이 있다. 1992년 영국음향협회(British Phonographic Industry)와 영국음반소매협회(British Association of Record Dealers)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모두가 짐작하다시피 브릿 어워드에 대한 대항마 성격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브릿 어워드 역시 영국음향협회에서 주관한다능ㅋ) 브릿 어워드에 대한 대안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노력이 가끔 너무 과할 때가 있는데, 역대 수상자 내역을 보다 보면 ‘요즘 뭐하나?’싶은 사람들도 꽤나 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힙’한 음악만을 쫓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만큼 그 해 가장 임팩트가 강한 음반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꼽힌다. 음악계의 판도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작녀에는 벤자민 클레멘틴이 <At Least For Now>로 이 상을 수상했다.

올 해에도 후보작들의 면면이 쟁쟁하다. 올 해 음악계 최대 뉴스이자 모두의 큰 슬픔이었던 데이빗 보위의 앨범도 있고 일렉트로니카로 들어선 아노니, 레트로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 마이클 키와누카의 음반도 있다.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후보작들을 미리 볼 필요가 있듯, ‘죽어버린’ 그래미나 브릿 어워드를 대신할 참신성을 가진 머큐리 음악상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후보작들을 한번 쯤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moonshapedpool_blog-580
라디오헤드의 이 음반이 그들의 커리어에서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반이라거나 커리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음반이라고 평가할 사람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라디오헤드는 거의 항상 좋은 음반을 발표해왔으며 팬들을 실망시키는 순간조차 다른 대부분의 뮤지션들보다 훨씬 더 나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번 앨범도 역시 좋지만, 소위 음악의 ‘판’을 바꾸는 혁신은 발견하기 힘들다.워낙 진보를 거듭해온 밴드이기에 더이상의 혁신은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음악공학, 혹은 사운드 아키텍쳐의 관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구석이 제법 많은 음반이기도 하다. 음악보다는 ‘소리’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는 밴드의 모습이 보인다. 깨끗한 음질로 헤드폰을 끼고 천천히 들을 때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david-bowie-blackstar-2016-billboard-1000

올해 머큐리 음악상이 보위의 죽음으로부터 겹겹이 쌓인 애도의 감정을 이겨낼 수 있을까? <Blackstar>는 음반 자체로도 무척 뛰어나지만, 이 음반을 둘러싼 집단적 감정의 무게가 너무도 무겁기에 음반의 완성도를 객관적으로 바랄볼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 음반이 올해 최고의 음반인가, 라는 질문에서 감정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머큐리 음악상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그러할 것이다. 드라마틱하지만 진부한, 혹은 모두의 마음을 달래줄 어떤 순간이 시상식장에서 연출될지도 모른다.

0a271d4e67bd880000c1807d71fee9ed7a4834a7

가디언지는 마이클 키와누카의 두번째 음반이 그를 70년대로부터 구출하는 역설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쩌면 레트로라는 틀에 갇힐 수도 있었던 그의 음악세계는 이번 음반에서 현대의 감각을 확실히 획득하며 성공적으로 외연의 확장 뿐 아니라 확실한 정체성 역시 획득했다. 과거의 장르를 현대에 ‘리바이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2010년대의 감성을 녹여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완성도 높은 노래들이 빼곡하게 실려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힘이 달리는 느낌도 받는다.

f139b703
나타냐 칸의 목소리는 이번 음반에서 유난히 가라앉아 있다. 몇몇 노래에서 그녀만의 카랑카랑한 샤우팅은 여전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보다 차분해진 사운드때문일까? 이것을 ‘정제’라고 받아들일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원천적인 에너지의 소실이라고 판단할지는 청자의 몫이다. 나는 전자라고 느꼈다. 그녀의 팬이기 때문은 아니다.

SC333-ANOHNI-FC-420x420
이 음반에서 <I am a Bird Now>에서와 같은 절창을, 어떤 감정의 절정을 느끼고자 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음반을 듣는다는 것은 안토니, 혹은 아노니가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어떤 초입을 목격하는 과정이다.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그녀답다. 이 음악이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장르인지 고민하기 이전에 이 장르에서조차 너무나 그녀다운 색깔이 뭍어나오는 현상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존재감, 그녀를 가장 쉽게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다.

Laura-Mvula-The-Dreaming-Room-2016
머큐리 음악상 홈페이지에서는 일반인도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얼마나 반영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나도 투표를 했다. 이 음반에 투표했다.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인종’ 자체가 장르를 규정짓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지만 그 인종이라는 요소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 음반은 흑인음악이 왜 여전히 흑인음악인지, 왜 그들이 가장 잘 할 수밖에 없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반에 실린 매 노래가 아름다운데 그 느낌이 너무 절묘해서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Laura Mvula의 목소리는 아름답다. 그녀가 창조한 세계 역시 아름답다.

savages art

새비지스는 항상 새비지스였다. 항상 그들의 음악을 해왔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잘 해왔으며, 그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왔다. 이번 음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결과물이 그들 커리어에서 어떤 절정을 건드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머큐리 음악상이 그 해 발표된 가장 좋은 음반들 중 해당 뮤지션의 커리어에서 가장 훌륭한 음반일 경우 수상한다는 말도 안되는 규칙이 있다면 당연히 이 음반이 수상해야 할 것이다. 요즘 메탈/코어 씬에서 단연 군계일학이다. 다들 알겠지만 이 그룹은 멤버 전원이 여성이다. 여러 음악 장르 중 가장 마초적이라고 알려진 장르에서 그 어떤 남성보다 더 파워풀하고 직선적인 음악을, 여성을 위한 메시지를 담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페미니스트다.

The-1975-I-Like-It-When-You-Sleep-For-You-Are-So-Beautiful-Yet-So-Unaware-of-It-Promo
The 1975의 이번 음반은 무척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다. 사운드는 한치의 빗나감도 없이 정리되어 있고 들어올 때와 나갈 때, 끓어오를 때와 터뜨릴 때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너무 완벽해서 감히 미워할 수조차 없는 모범생을 보는 느낌이다. 다만 그만큼 재미도 없다. 귀에 거슬림 없이 몇 번을 계속 들었는데도 기억에 꼭 박힌 트랙이 없다는건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다.

53702-channel-the-spirits
프리 재즈의 어떤 극단을 경험할 수 있는 The Comet is Coming의 데뷔 앨범 <Channel the Spirit>은 이 후보명단에 포함된 음반들 중 가장 충격적이었고 가장 흥겨웠으며 가장 재미있었고 가장 흥미로웠다. 이 음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청자의 몫이다. 다양한 반응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무척 재미있게 들었다. 도저히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다양한 장르가 재즈의 입 속으로 들어가 삼켜져 하나의 괴물이 탄생했다. 아주 아름다운 괴물이.

jamie-woon-making-time
이번 후보명단의 또다른 모범생 제이미 운의 소포모어 앨범 <Making Time>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음반이다.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상찬을 받았고 다른 많은 시상식의 복수의 부문에 후보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제너럴한’ 평단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감미롭고 깔끔하다. 딱히 불만이 없는 음반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역시, 그리 큰 재미도 없다.

large
NME로부터 “영국의 스트릿 뮤직씬에서 이정표와 같은 음반이며 세계 음악사에 있어서도 아주 약간의 진보를 가져올 정도로 대단한 음반”이라는 칭찬을 받은 Skepta의 네번째 스튜디오 정규앨범 <Konnichiwa>는 음반 전체에 흐르는 에너지 레벨로만 보면 후보작들 중 단연 최고이고, 완성도 면에서도 흠잡을 곳 없는 탄탄한 구성을 보여준다. 나는 그가 좋은 음악을 하고 있고 좋은 커리어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이지리아 뿌리를 잊지 않고 음악을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야수같은 캐릭터가 지적인 송라이팅 능력과 함쳐져 야누스적 매력을 뽐낼 때 무척 멋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후보작 중 하나인 Kano의 <Made in Manor>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음악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올해 상반기(1월~6월)에 산 음반의 개수를 세어보니 90장이 넘었다. 1년에 4~50장 정도 사서 들었던 예년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너무 많은 음반들을 사고 있는 셈이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일주일 내내 한 장을 듣던 시절은 끝났고, 이제 아마존에서 한 번에 열 장씩 주문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컬렉터로서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음반은 꼭 사서 듣게 된다. 그리고 돈이 생기니 사고 싶은 음반은 꼭 사게 된다. 좋은 음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 많이 나오고 있고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선택되어야만  한다. 너무 많은 음악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한 장의 음반에 대해 진득하게 수다를 떨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음악을 듣기만 해도 너무 벅차다. 정리를 해 나가며 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고민이다.

(어쨌든, 오늘 들었던 Jamie Woon, Laura Mvula, 1975의 새앨범은 너무 좋았다)

Robert Budreau: Born to be Blue

Born-to-Be-Blue-poster-620x896
쳇 베이커가 1960년대 초반 약물중독과 폭행사고 등으로 뮤지션으로서의 생명에 심대한 위협을 느끼던 시절을 다룬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전기영화라기 보다는 감독에 의해 주관적으로 해석되어진 뮤지션의 상상도에 가깝다. <레이>보다는 <아임 낫 데어>에 가까운 뮤지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약물에 찌들고 폭행사고로 인해 틀니를 끼우고 트럼펫을 불어야 했던 것, 특정 약물의 도움을 받아 마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 등은 사실로 알려져 있다. 감독은 여기에 살을 붙여 쳇 베이커가 어떻게 바닥을 찍고 다시 본 궤도로 올라가려고 하는지, 그의 입장에서 서술하고자 노력한다. 가상의 영화촬영 장면이 나오고, 가상의 여인이 등장하고,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가상의 대화가 등장한다. 데이비스는 베이커를 억누르고 여인은 그를 보살피며 다시 끌어올린다. 데이비스를 이기기 위해 다시 마약을 손에 댈 것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깨끗한 정신으로 트럼펫을 불 것인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에 다다르면 감독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베이커의 모습만이 남는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채 실존인물을 그려나가기 위해서는 서사구조의 개연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분명히 실패하고 있다. 서사는 툭툭 잘려 나가며 사건은 우연에 의해 연결된다. 관객이 힘겹게 따라갈 수 있는 부분은 베이커의 여리고 아픈 내면 정도다. 이조차 실제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혹은 다를 것이라는 암묵적 계약을 맺은 상태에서 영화는 한 인간이 바닥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감성에 기대어 전시한다. 그 모습이 애틋하고 안되어 보였다면, 그리고 에단 호크가 절정의 연기를 통해 그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면, 남은 것은 쳇 베이커가 남긴 아름다운 노래들이다. 그의 음악은 지나치게 로맨틱하고 소프트하지만, 그만큼 감정적으로 사람을 뒤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직접 노래를 부르며 한땀 한땀 쌓아 올리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가 에단 호크의 눈동자와 교차되는 그 지점에서 묘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3/5

박찬욱: 아가씨

2016051100649_1
박찬욱은 항상 별 세 개 반짜리 영화를 만든다.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해내지만, 그의 영화에는 전에 없던 새로움도 없고 깊은 성찰도 없다. 시네필로서 가진 풍부한 레퍼런스를 영화 여기저기에 명석하게 배치하고, B급, 혹은 마이너 문화에 대한 애정을 뒤틀린 유머와 함께 성공적으로 영화 속에 녹여낸다. 그의 모든 영화가 그러했다. <아가씨>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감독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지난 몇 년동안 한국에서 꾸준히 LGBT 영화들이 제작되지 않았다면 <아가씨>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작이 없었다면 서사구조는 출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다양한 층위의 문화영역에서 상상되어지고 각색되어지며 발전해온 식민지 시대 조선에 대한 풍부한 자료가 없었다면 배경부터 미장센까지 기댈 언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박찬욱의 영화이다. 누가 봐도 그렇다. 박찬욱은 그렇게 다른 레퍼런스에 기대어 자신의 인장을 박아넣는 데에 아주 능숙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는 만화처럼 재미있다. 누가 봐도 그의 필체가 느껴지고, 누가 봐도 그가 짠 스토리같다. 부족한 창의성을 꼼꼼한 디테일로 매워내는 재주도 대단하지만 육중한 메세지 하나 없이 본인의 색깔을 관객에게 완전히 각인시키는 능력 또한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쓸데 없이 여배우들 벗기는 악취미도 여전하고.

3/5

Sean Baker: Tangerine

maxresdefault
<Tangerine>은 LA를 배경으로 하루 반나절동안 펼쳐지는 작은 소동극이다. LA라고 하면 흔히 비버리힐스나 산타모니카같은 부촌, 혹은 축복받은 날씨와 함께 하는 여유로운 해변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영화는 화려함을 디폴트 이미지로 가지는 이 세계적인 대도시의 가장 어두운 곳을 비춘다. 주인공은 LA의 한 허름한 구역에서 매춘을 하는 트렌스젠더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급, 거기서도 한번 더 차별받는 성정체성을 가진 이 주인공은 포주이자 남자친구인 이를 대신해 한 달의 형을 막 살고 나왔다. 출소하자마자 남자친구를 찾지만, 또다른 트렌스젠더 매춘부인 친구로부터 그가 바람을 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자친구를 찾아 나선다. 그 와중에 저녁에 예정된 작은 공연도 성공적으로 치뤄야 한다. 물론 그 공연은 가수의 꿈을 꾸는 주인공이 허름한 레스토랑에 돈을 ‘내고’ 갖는 공연이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또다른 인물인 택시기사는 트렌스젠더만 찾아서 매춘을 하는 취미를 가진 동유럽 이민자 출신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화려함의 이면에는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낙오한 이들의 초라한 모습이 있다. 소수 계층으로의 부의 집중은 광범위한 다수의 계층의 희생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다. LA는 ‘골드러쉬’로 상징되는 미국 특유의 공격적인 자본주의의 최종 완성판 격인 도시이고, 겉으로 보이는 이 도시의 화려함은 분명 누군가의 머리와 어깨를 짓이기며 세운 무거운 쇠기둥일 것이다. 이 영화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코메디로 다룬다. 영화는 100% 아이폰으로 촬영되었지만, 영화의 서사구조는 아주 전통적인 셰익스피어식 희극이다. 주인공 신디는 단돈 몇 달러를 위해 길에서 마주친 남자의 무례한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함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녀는 친한 친구들만이 관객인 작은 공연에서 영혼을 담아 노래 부르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실제 트렌스젠더이자 LA에서 매춘으로 삶을 이어나간 경험이 있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한 이 영화의 리얼리티가 세련된 전통적 문법으로 스크린에 새겨질 때, 관객은 영화의 메시지에 자연스럽게 설득된다. 정신없는 소동이 LA의 어두컴컴한 밤 속으로 섞여 들어가 잠잠해질 때 쯤, 나는 어느새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앞이 보이지 않는 그 골목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4/5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77319113728_727
얼마 전 아버지가 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이 영화를 추천해 주었더니, 영화 하나를 본다고 해서 아버지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무한한 기쁨이 있고 그 과정을 직접 겪어야만 인간으로서 한단계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영화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책과 비슷하다. 나쁘게 말하면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 듣는 것 정도다. 그래서 영화가 주는 가르침의 한계도 명확하다. 다만,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본 나는 그 친구가 지금 막 세상으로 나온 자신의 아이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육아의 기초적인 단계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에서 아이와의 관계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룩하는 ‘성장’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과는 또다른 차원의 성취라는 것을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일본의 다르덴 형제가 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그러한 심증은 더 굳어졌다. 히로카즈는 윤리에 대해 조금씩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관객에게 특정 수준의 윤리적 판단을 요구한다. “특정 수준”이라고 표현한 것은 감독이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아들이 뒤바뀐 상황을 던져놓고 “당신이라면 친자와 함께 살 것인가”와 같은 예상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대신 “당신은 친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고 묻는다. 두 질문은 모두 윤리적이지만 후자가 조금 더 사색적이고 개인적이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오고 간다. 아내와 아들을 잃게 된 처지에 놓인 망나니 아저씨를 답답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관객에게 “가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묻지 않고 “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를 요구한다. 히로카즈에게 현실의 많은 문제들은 단순한 상식 수준에서 이해 가능하다고 받아들여진다. 그의 관심사는 현상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이 지점에서 히로카즈는 다르덴 형제와 결을 조금 달리 한다. 사회 속의 개인이 아닌, 개인이 또다른 개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뻔해보이는 결말은 감독의 이런 고민들 덕분에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누구나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고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아버지, 혹은 멋진 어른이 되지 못한다. 히로카즈의 최근 영화들은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한 사려깊은 송가다.

4/5

나홍진: 곡성

rqS21YB
<곡성>을 본 후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홍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얄팍한 주제의식을 그나마 현란한 테크닉과 개연성 있는 탄탄한 시나리오로 잘 가리며 버텨 왔던 그였지만, <곡성>에서는 오리지널리티라고는 전혀 없이 여기저기서 빌려 쓴 클리셰들로 떡칠이 되어 개연성을 잃고 마구 흔들리는 서사구조를 편집이라는 교묘한 속임수로 간신히 감춘 모양새다. 속임수에도 클래스가 있다. 모든 속임수가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독자는 주인공의 시선과 인식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사건을 이해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을 보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스릴러 장르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 트릭은 인식론적 주제의식을 부각시킬 때 주로 사용된다. 이처럼 ‘왜곡된 시선’은 잘만 사용하면 특정 장르에서 훌륭한 장치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곡성>에서 사용한 속임수는 아주 단순하고 저열한 방식이다. 개연성 없는 두 사건을 교차편집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거나 특정 인물에 대한 거짓된 단서를 복수의 등장인물로 하여금 발화하게 하여 영화 내에서 ‘소문’을 만들어내는 등의 방식은 사실 속임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유치한 방법들이다.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 놓고 포스터에는 자랑스럽게 “미끼를 물었다”라고 써 놓았다. 뭘 하자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동서양 샤머니즘의 결합, 믿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등등 무언가 있어 보이려는 시도는 중학생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에게 오리지널리티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홍진은 원래 이정도 수준의 감독이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필모그래피는 점점 퇴화하고 있다. 다음 작품 쯤에서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2/5

이수진: 한공주

1893681123_3AsgMaV0_ED959CEAB3B5ECA3BC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는 천우희의 좋은 연기와 한국사회의 가장 아프고 추한 단면인 청소년 성폭력 문제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가감없이 드러냈다는 용감한 주제의식을 제외하고 본다면, 환호성을 지를만큼 엄청나게 대단한 영화는 아니다. 특히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영화의 암묵적인 약속을 무너뜨려가면서까지 ‘전시’한 “선풍기 씬”의 윤리성 문제는 이 영화가 이룩한 소중한 성취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어떻게 보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큰 영화다. 이 소중한 영화가 조금 더 맵시있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 말이다. 이미 10여년 전에 같은 문제를 다룬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판타지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주제의식을 우아하게 승화시켰고,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미숙한 폭력성을 다룬 <파수꾼>이나 <용서받지 못한 자>와 같은 한국 독립영화들 역시 <한공주>보다 훨씬 사려깊은 방식으로 주제를 풀어냈다. 이미 차분히 서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가 충분히 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급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 처리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채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공주>가 남긴 대단한 성취들은 오랜 기간 기억되어야 한다. 천우희의 놀라운 연기는 엄마보다 황정민을 더 자주 봐야 하는 한국 영화의 배우 기근 현상을 해결해 줄 단비와 같은 청신호였다. 영화를 구원해 주는 또다른 수호천사는 역시 마지막 씬이다. 영화에서 말없이 보여준 공주의 여러 행동들이 하나로 꿰어지며 통렬한 아픔과 무한한 희망을 동시에 품게 만드는 그 장면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 혹시나 살고 싶은 마음이 들까봐 수영을 열심히 배운 한 소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소녀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사회 이곳 저곳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녀를 가까이에서 보거든, 방관자적 시선으로 가만히 응원을 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서서 함께 그 길을 걸어가 주어야 한다. 영화에서 공주를 천사처럼 보살펴주려고 노력한 친구들이 결국 ‘그’ 영상을 본 후 전화를 받지 않는(혹은 못하는) 장면은 그래서 무척 뼈아프게 현실적이고 상징적이다. 우리는 그 전화를 받아야 한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야 한다.

3.5/5

고레에다 히로카즈: 태풍이 지나가고

태풍이 지나가고
누구나 원했던 어른이 되지는 못한다. 물론 원하던 바대로 잘 성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 꿈꾸었던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거나 젊은 시절 추구했던 목표로부터 상당히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과연 실패한 삶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원하던 바를 모두 성취한 삶을 성공이라고 치켜세울 수 없듯, 꿈꾸던 목표에 결국 다다르지 못한 삶을 실패로 규정하고 그 삶을 사는 사람을 패배자로 낙인찍는 것은 몹시 위험한 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질문이 하나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관계, 혹은 관계의 공백에서 찾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주로 가까운 사람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혹은, 부재에 다다름으로써 등장인물로 하여금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의 배우들을 매우 잘 다루는 그의 연출능력을 생각할 때 인물 간 관계를 통해 삶에 대한 발견을 성취해나가는 방식은 퍽 효율적으로 보인다. <태풍의 지나가고>에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주인공이 나온다. 그는 어른이 되지 못한 대가로 아내와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한켠에서 미성숙한 아들을 적당한 온도로 보살피는 늙은 어미가 있고, 헤어진 남편을 애증의 눈으로 바라보는 전 아내가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재는 주인공과 몹시 닮았다고 전해지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이다. 주인공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때에는 그가 혹시 남겨 놓았을지도 모르는 ‘돈 되는 것’을 찾을 때 뿐이다.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며 살아가는 그가 결국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것은 가족이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새로운 낭만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집착하는 것도 가족이다. 아무것도 모를 것만 같았던 어린 아들이 부모를 일깨우는 것도 결국 완전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히로카즈는 완전한 형태의 가족이 최선이라는 진부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다.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 그 책임을 지는 방식이 너무 참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고, 그것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조금 덜 파괴적으로, 조금 더 희망적으로, 혹은 조금 더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속죄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15년동안 쓰지 못한 소설을 결국 완성시킬 수 있을까? 그는 돈을 빌리기 위해 누나를 찾는 일을 멈출 수 있을까? 아들을 위해 양육비를 밀리지 않고 보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버릇이 한순간에 고쳐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그는 아버지가 남긴 귀한 벼루를 갈며 새롭게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자신의 민낯을 확인한 주인공이 지금까지의 삶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과오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질 수만 있다면, 15년 묵은 소설이 완성되는 것쯤은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이 더 소중한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