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ny Boyle: Steve Jobs

240506
사실 대니 보일의 팬이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는 화려한 감각 이상의 묵직한 메시지를 함유하는 주제의식을 영화에 제대로 담아내지 않는 감독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성공은 발리우드를 성실하게 이종교배한 공로상(헐리우드의 잠재적 시장규모를 확대했다는)격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땅 짚고 헤엄치기였던 <127시간>의 매우 흥미로웠던 주제마저 그저 겨우 땅만 짚고 헤엄만 치는 수준으로 치장만 하고 끝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 속에 철저하게 함몰된 인간 개인이지만, 이러한 시대에서도 다수의 집중을 선택적으로 받아낸 몇 안되는 ‘개인’인 스티브 잡스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감각에 의지한 채 살아온 감각주의자 대니 보일이 놓칠리 없다. 그래서 완성된 영화 <스티브 잡스>는 놀랍게도 대니 보일의 그 유일한 장점마저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지루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그의 영화답게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지만, 그의 또다른 장점인 감각적인 편집은 세 개의 프레젠테이션 무대의 뒷편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영화에 초대된 또다른 헐리우드산 대형 감각주의자 애런 소킨의 장광설 대사들에 완전히 묻혀 버린다. 그래서 영화를 독식한 것은 자연스럽게 소킨의 대사들이 되어버렸는데, 정작 소킨 역시 제 갈 길을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발생시킨 또다른 재앙이다. 대니 보일이 자신을 희생(?)하여 겨우 차려준, 완전히 연극적이 된 영화의 무대 위에서 소킨이 가까스로 유일하게 완성한 것은 스티브 잡스의 다층적인 성격, 단 하나다. 영화는 그조차 유치한 엔딩씬에서 많은 부분을 증발시켜 버리는 또다른 비극을 저지르지만, 어쨌든 소킨의 재능을 흔적처럼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현실과 가장 가까웠다”라고 평가를 받는 잡스 개인의 형상이다. 그 형상을 완성시킨 이는 다름 아닌 잡스를 연기한 마이클 파스벤더이고, 놀랍게도 이 배우 한 명이 영화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존재한다. 실제의 잡스와 거의 닮지 않은 외모를 가진 이 영국 배우는,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화면 위에 잡스가 실재하고 있다고 믿게 하고, 그의 기묘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하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했고 존재함으로써 빛났던 잡스의 본질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대 위에 홀로 세워진 배우가 이룩한 성취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멋진 합을 맞춰준 케이트 윈슬렛과 세스 로건, 제프 다니엘스의 공로다. 보일과 소킨은 배우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영화를 보며 하품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다 배우들 덕분이고, 영화가 졸작의 위기에서 건져 올려진 것도 다 이 배우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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