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d Haynes: Ca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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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할 때에는 그만큼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70년 정도 되지 않는 이상, 이 매체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을 부분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인물에 대해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쓴다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이 무모한 시도가 성공을 거둘 때도 있다. 한 인물의 어떤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을 이해하게 만들고, 그 인물을 껴안게 만들며, 그 인물에게 손을 내밀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랬고, <트루먼 쇼>가 그러하였으며, 누군가는 <하워드 오퍼스>나 <애니 홀>을 이 목록에 넣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캐롤>은,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채택한 영화들 중 아마도 인물 그 자체에 가장 집중한 영화일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인물을 관객에게 드러냄으로써 그 존재의 당위성을 가장 성공적으로 획득한 영화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아주 특별한 한 연인에 관한 영화임과 동시에 아주 보편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레즈비어니즘이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며 그저 평범한 사랑의 한 분파일 뿐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캐롤과 그녀의 연인이 겪어야 하는 삶의 불편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만,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결정적인 한 순간을 이들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처음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부터 이 둘이 사랑에 빠질 것임을 직감하며, 주변의 어려움이 이들을 갈라 놓을 때에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특별한 것이지만(1950년대 동성애는 질병으로 취급되었고 캐롤은 영화 내내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묘사된 딸의 양육권까지 포기하며 테레즈를 지키려 한다), 그 어려움이 다른 무엇으로 치환된다 한들 이들은 결국 만나게 될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철저하게 퀴어 영화이며, 레즈비어니즘 위에서만 이해해야 영화가 내포하는 의미를 보다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가 줄곧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이성애자 남자들의 행태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이 처한 계급적 차이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가치에서 어렵지 않게 “그저 또 하나의 사랑”은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어려운 사랑을 했으며, 그 사랑은 특별했으며, 그와 동시에 “normal”한 사랑이었다. 영화는 아마도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도 최근 보아온 그 어떤 영화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이 영화의 엔딩씬에서 캐롤와 테레즈가 짓는 표정은 영화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 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테레즈는 계급의 장벽도 함께 뚫어야 한다. 이 마지막 씬에서 테레즈의 시선으로 비춰진 카메라는 심하게 흔들리는데, 갓 빠져나온 중산층 파티의 자유분방함과 대비되는 상류층 파티의 엄격함을 뚫어내고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그녀의 마음은 카메라의 흔들림만큼이나 많이 어지럽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캐롤을 발견하고도 웃지 못한다. 캐롤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다린 테레즈를 기다리는 마음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다시 만났다. 케이트 블란쳇은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을 독보적인 연기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해내는데, 아마도 루니 마라의 빛나는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극작가 Phyllis Nagy는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동명 소설(원제는 <The Price of Salt>였지만 이후 <Carol>로 개명되었다)을 약 15년에 걸쳐 영화 대본으로 각색하였다. 그녀의 스크린플레이는 이야기되는 것보다 이야기되지 않는 것에 더 집중했고, 토드 헤인즈는 그녀가 만들어낸 “관찰과 제스쳐에 관한 영화”를 필름으로 담아 냈다. 토드 헤인즈는 케이트 블란쳇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인데, <아임 낫 데어>에서 그가 블란쳇에게 준 역할은 그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밥 딜런 중 가장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밥 딜런이었다. 환상은 거의 없었고, 다큐멘터리 필름이나 사진에 기록된 밥 딜런 그 자체를 연기해야 했다. 물론 블란쳇은 그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캐롤>은 캐롤과 테레즈, 혹은 블란쳇과 마라가 주고 받는 몸의 대화가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영화이고, 대사로 존재하지 않는 부분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화다. 헤인즈와 내기는 아마도 이 두명의 연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블란쳇과 마라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두 배우의 표정과 숨소리, 손가락 끝의 떨림과 발걸음의 변화를 따라가기만 해도 행복으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헤인즈는 이 두 배우가 주고 받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까지 성공적으로 포착해냄으로써 관객에게 ‘특별하지만 일상적인 사랑’의 힘을 무리 없이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음악과 촬영 역시 이 들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의상도 훌륭하다. 찌질해야만 했던 이성애자 남자들의 찌그러진 미간은 너무 평면적이었지만, 그들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지루함을 최소화했다.

좋은 퀴어 영화고, 좋은 로맨스 영화이며, 그저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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