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nny Abrahamson: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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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어미에게서 태어난다.  어미와 자식은 한 몸으로 9개월에서 10개월을 함께 보낸 뒤, 밖으로 나와서도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거의 모든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는 그들의 어미를 지칭하는 단어이며, 가장 먼저 먹게 되는 음식은 어미의 몸에서 나오는 음료이고, 가장 먼저 이별하게 되는 사람도, 탯줄을 끊음으로써, 그 어미임을 확실히 한다. 자신의 어미를 보지 못한채 태어나는 사람도 많고, 모든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하는 것도 분명 어떤 차원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최근에는 어미가 되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 여성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어미와 자식 간의 관계는 아마도 다른 모든 인간 관계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신비로운 감정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나의 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바깥 세상을 하루라도 빨리 넓혀 나가고 싶었을 뿐, 어머니와의 관계는 항상 뒷전이었다. 어머니를 돌아보고 그의 품에 안길 때는 세상이 무서워졌을 때, 뒷걸음질 치고 싶고 숨고 싶을 때 정도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물음표로 남아있던 어미의 시선을 나의 누나를 통해 요즘 간접적으로 배우고 있다. 누나는 그의 아들과 하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며, 같이 울고, 같이 웃는다. 때로는 너무 한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이를 다그치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순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를 풀어두기도 한다. 방관자인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닐 뿐더러 내가 누나보다 아이 교육에 대해서 더 잘 안다고 절대 말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가만히 지켜볼 뿐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능력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실수를 반복하는 부족한 한 인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 친구들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한 아이의 부모가 된단 말인가, 하고 혀를 찰 때가 많다. 내가 아이를 낳아 키운다고 해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 <룸>은 작은 방에 갇혀 있던 모자가 조금 더 넓은 방으로 옮겨가 살아가는 이야기다, 라고들 많이 이야기한다. 영화의 구성만 보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전반부는 납치당한 뒤 7년동안 감금되어 있던 여자와 그 여자가 낳은 5살된 납치범의 아들이 좁고 낡은 방을 탈출하는 과정을 다룬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렇게 바깥 세상으로 나온 모자가 또다른 ‘갇힘’안에서 적응해가는 이야기다. 여자는 여자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급변한 환경에 혼란스러워한다. 이들은 결국 반목하고,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진다. 씻을 수 없는 상처였던 7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어미와 달리, 아이는 “룸”을 그리워할 정돌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한다. 아이는 그러한 ‘아이다움’으로 자신의 어미를 두 번 위기에서 구해주고, 여자는 아들에 기대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원시적인 폭력에 시달렸던 작은 방에서 조금 더 교묘하고 잔인한 세상이라는 더 넓은 방에서 살아가는 모자의 이야기,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요약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조금 더 잭이라는 아이의 관점에서 보았다. 어쩌면 브리 라슨이 연기하는 어머니 역할은 거대한 맥거핀처럼 느껴질 정도로 큰 의미가 없어보였다. 나에게 이 영화는 한 아이가 어머니와 점점 멀어지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나이의 그에겐 작고 낡은 방 정도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혹은 더이상 작은 방에 갇혀 있을 정도로 어리지 않게 되면서, 그의 삶에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든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강아지와 교감하며, 하늘을 보고 잔디밭을 걷게 되면서, 그의 세상은 점점 넓어지게 되고, 그는 조금씩 덜 어머니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어머니가 없어도 컵케잌을 만들 수 있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고도 굶주림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어머니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좁은 방에서 넓은 방으로 나왔을 뿐인, 또다른 ‘갇힘’과 잊지 못할 기억에 시달리는 그의 어머니와 달리, 소년은 넓은 세상을 그 자체로 받아 들이며, 갇혀 있던 작은 세상에도 쿨하게 작별인사를 건넬 정도로 담담하다. 그는 실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흡수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길러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결코 어머니와 자식을 동일선상에 두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적 주인공이 아니다. 즉, <룸>은 어머니와 자식이 점점 멀어져가는 이야기이자, 한 인간이 원초적인 단계에서 세상을 배워나가는 과정에 대한 아주 미시적인 관찰기이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며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아이가 세상을 배워나가는 과정(쥐부터 강아지까지)을 성실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잭이며 그를 연기한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연기에 대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충실하게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연기는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하다.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철저히 그의 연기이고, 그의 연기가 없었더라면 영화는 아주 지루한 신파극 정도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리 라슨이 연기한 어머니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그의 연기는 극단적인 환경과 맞물려 부족한 인간이 어머니가 되었을 때, 더이상 숭고한 모성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자식과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대화해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모자가 다시 재회한 뒤 나누는 대화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미안해.”
“괜찮아. 다음엔 그러지 마.”
“약속할게.”

“난 좋은 엄마가 되기엔 부족한가봐.”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내 엄마야.”
“그래, 맞아. 엄마지.”

사과하는 것은 어머니고, 용서하는 것은 아들이다. 부족함을 탓하는 것은 어머니이고, 위로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아들이다. 이들은 눈높이를 똑같이 맞추는 것으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때문에 나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갇혀 있던 방으로 돌아가 “안녕”이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조금 더 확실해졌다. 해피엔딩 맞다.

Adam McKay: Big Sh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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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루이스의 원작을 기반으로 애덤 맥케이가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빅 쇼트>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당시 CDS 프리미엄(간단히 말해 위기가 심해질수록 돈을 버는 금융상품이다)을 통해 큰 돈을 번 실존 인물들을 통해 이 위기의 본질을 파헤친 작품이다. 이들은 월스트릿과 정부의 생각하는 것처럼 모기지 시장이 건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반대로 투자를 함으로써 이득을 챙겼지만, 그 이전에 주요 채권을 구성하고 있는 MBS가 구조적으로 크게 부실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세상에 알린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매우 현명한 투자자들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들이 행한 그 투자 자체를 통해서 금융시장의 비윤리성을 폭로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비윤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나라가 망한다’는 것에 배팅한 사람들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의 상품을 개발하고 여기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레버리지를 덧붙인 은행가들이 아니라, 월급을 받아 빚을 갚아나가는 납세자 개개인이 매우 큰 고통을 당하는 결과가 나와야지만 돈을 따먹는 것이다. 영화속 주인공들이 증오하고 닮기 싫어하는 갑부 은행가들은 위기 이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미 금융당국은 납세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대형 은행들을 구제했다. 구제된 대형은행의 최종책임자는 거액의 보너스를 받고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은행의 상담창구를 전적으로 믿고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던 소액 납세자 수백만명은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으며,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는 유럽으로 건너가 몇 개의 위태로웠던 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촘촘히 연결된 전세계 금융시장은 한 부문의 위기를 증폭시켜 다른 부문으로 전가시킨다. 우리나라도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성장률이 반토막났다. 지금까지도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당신이라면,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흉이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주인공이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아니라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월스트릿의 어떤 백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잘 살고 있으며, 당신은 “헬조선”에서 계속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빅 쇼트>가 이야기는 것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위기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가이트너가 쓴 <스트레스 테스트>는 같은 사건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이 영화 역시 ‘시장’을 생각하며 뻥을 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는 이 영화에서 희생양으로 다루어지는 소액 납세자들이 티켓을 구매해야 하니까, 누군가를 악역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고, 대형은행으로 스카웃되고 싶어하는 금융감독당국자나 윤리의식을 상실한 대형은행들, 그리고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납세자들을 희생시키는 정책당국자들이 좋은 타겟이 되었을 수도 있다. 가이트너는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쪽 입장도 함께 들어봐야 한다. 이 세상은 윤리보다는 돈이 우선시되고 있다. 철학과 예술에서 경제와 금융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빅 쇼트>는 그러한 시대의 핵심을 구성하는 전쟁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신이 피땀흘려 모든 소중한 재산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질 수 있음을, 이 세상의 이치와 구조를 파악한 사람이 수천만명의 재산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빼앗아갈 수 있음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철학이 궁금하다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다.

Danny Boyle: Steve J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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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니 보일의 팬이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는 화려한 감각 이상의 묵직한 메시지를 함유하는 주제의식을 영화에 제대로 담아내지 않는 감독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성공은 발리우드를 성실하게 이종교배한 공로상(헐리우드의 잠재적 시장규모를 확대했다는)격으로 주어진 것이었고, 땅 짚고 헤엄치기였던 <127시간>의 매우 흥미로웠던 주제마저 그저 겨우 땅만 짚고 헤엄만 치는 수준으로 치장만 하고 끝냈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 속에 철저하게 함몰된 인간 개인이지만, 이러한 시대에서도 다수의 집중을 선택적으로 받아낸 몇 안되는 ‘개인’인 스티브 잡스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감각에 의지한 채 살아온 감각주의자 대니 보일이 놓칠리 없다. 그래서 완성된 영화 <스티브 잡스>는 놀랍게도 대니 보일의 그 유일한 장점마저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지루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그의 영화답게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지만, 그의 또다른 장점인 감각적인 편집은 세 개의 프레젠테이션 무대의 뒷편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영화에 초대된 또다른 헐리우드산 대형 감각주의자 애런 소킨의 장광설 대사들에 완전히 묻혀 버린다. 그래서 영화를 독식한 것은 자연스럽게 소킨의 대사들이 되어버렸는데, 정작 소킨 역시 제 갈 길을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발생시킨 또다른 재앙이다. 대니 보일이 자신을 희생(?)하여 겨우 차려준, 완전히 연극적이 된 영화의 무대 위에서 소킨이 가까스로 유일하게 완성한 것은 스티브 잡스의 다층적인 성격, 단 하나다. 영화는 그조차 유치한 엔딩씬에서 많은 부분을 증발시켜 버리는 또다른 비극을 저지르지만, 어쨌든 소킨의 재능을 흔적처럼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현실과 가장 가까웠다”라고 평가를 받는 잡스 개인의 형상이다. 그 형상을 완성시킨 이는 다름 아닌 잡스를 연기한 마이클 파스벤더이고, 놀랍게도 이 배우 한 명이 영화를 구원하는 구세주로 존재한다. 실제의 잡스와 거의 닮지 않은 외모를 가진 이 영국 배우는, 결국 관객들로 하여금 화면 위에 잡스가 실재하고 있다고 믿게 하고, 그의 기묘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하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했고 존재함으로써 빛났던 잡스의 본질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것은 전적으로 무대 위에 홀로 세워진 배우가 이룩한 성취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멋진 합을 맞춰준 케이트 윈슬렛과 세스 로건, 제프 다니엘스의 공로다. 보일과 소킨은 배우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영화를 보며 하품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다 배우들 덕분이고, 영화가 졸작의 위기에서 건져 올려진 것도 다 이 배우들 덕분이다.

Todd Haynes: Car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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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의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할 때에는 그만큼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70년 정도 되지 않는 이상, 이 매체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을 부분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인물에 대해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쓴다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이 무모한 시도가 성공을 거둘 때도 있다. 한 인물의 어떤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을 이해하게 만들고, 그 인물을 껴안게 만들며, 그 인물에게 손을 내밀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랬고, <트루먼 쇼>가 그러하였으며, 누군가는 <하워드 오퍼스>나 <애니 홀>을 이 목록에 넣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캐롤>은,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채택한 영화들 중 아마도 인물 그 자체에 가장 집중한 영화일 것이며, 그와 동시에 인물을 관객에게 드러냄으로써 그 존재의 당위성을 가장 성공적으로 획득한 영화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아주 특별한 한 연인에 관한 영화임과 동시에 아주 보편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레즈비어니즘이 더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며 그저 평범한 사랑의 한 분파일 뿐이라는 것을 선언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캐롤과 그녀의 연인이 겪어야 하는 삶의 불편함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지만,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결정적인 한 순간을 이들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처음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부터 이 둘이 사랑에 빠질 것임을 직감하며, 주변의 어려움이 이들을 갈라 놓을 때에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은 특별한 것이지만(1950년대 동성애는 질병으로 취급되었고 캐롤은 영화 내내 그녀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묘사된 딸의 양육권까지 포기하며 테레즈를 지키려 한다), 그 어려움이 다른 무엇으로 치환된다 한들 이들은 결국 만나게 될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철저하게 퀴어 영화이며, 레즈비어니즘 위에서만 이해해야 영화가 내포하는 의미를 보다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가 줄곧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이성애자 남자들의 행태에서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이 처한 계급적 차이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의 가치에서 어렵지 않게 “그저 또 하나의 사랑”은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어려운 사랑을 했으며, 그 사랑은 특별했으며, 그와 동시에 “normal”한 사랑이었다. 영화는 아마도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마도 최근 보아온 그 어떤 영화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이 영화의 엔딩씬에서 캐롤와 테레즈가 짓는 표정은 영화의 모든 것을 상징한다. 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테레즈는 계급의 장벽도 함께 뚫어야 한다. 이 마지막 씬에서 테레즈의 시선으로 비춰진 카메라는 심하게 흔들리는데, 갓 빠져나온 중산층 파티의 자유분방함과 대비되는 상류층 파티의 엄격함을 뚫어내고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그녀의 마음은 카메라의 흔들림만큼이나 많이 어지럽고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캐롤을 발견하고도 웃지 못한다. 캐롤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다린 테레즈를 기다리는 마음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다시 만났다. 케이트 블란쳇은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을 독보적인 연기를 통해 완벽하게 구현해내는데, 아마도 루니 마라의 빛나는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극작가 Phyllis Nagy는 파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동명 소설(원제는 <The Price of Salt>였지만 이후 <Carol>로 개명되었다)을 약 15년에 걸쳐 영화 대본으로 각색하였다. 그녀의 스크린플레이는 이야기되는 것보다 이야기되지 않는 것에 더 집중했고, 토드 헤인즈는 그녀가 만들어낸 “관찰과 제스쳐에 관한 영화”를 필름으로 담아 냈다. 토드 헤인즈는 케이트 블란쳇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인데, <아임 낫 데어>에서 그가 블란쳇에게 준 역할은 그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밥 딜런 중 가장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밥 딜런이었다. 환상은 거의 없었고, 다큐멘터리 필름이나 사진에 기록된 밥 딜런 그 자체를 연기해야 했다. 물론 블란쳇은 그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캐롤>은 캐롤과 테레즈, 혹은 블란쳇과 마라가 주고 받는 몸의 대화가 거의 모든 것을 차지하는 영화이고, 대사로 존재하지 않는 부분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화다. 헤인즈와 내기는 아마도 이 두명의 연기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블란쳇과 마라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두 배우의 표정과 숨소리, 손가락 끝의 떨림과 발걸음의 변화를 따라가기만 해도 행복으로 가득 찰 지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헤인즈는 이 두 배우가 주고 받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까지 성공적으로 포착해냄으로써 관객에게 ‘특별하지만 일상적인 사랑’의 힘을 무리 없이 전달하고 있다. 영화의 음악과 촬영 역시 이 들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의상도 훌륭하다. 찌질해야만 했던 이성애자 남자들의 찌그러진 미간은 너무 평면적이었지만, 그들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지루함을 최소화했다.

좋은 퀴어 영화고, 좋은 로맨스 영화이며, 그저 좋은 영화다.

데이비드 밴: 자살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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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살’과 ‘알라스카’,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다섯 편의 단편소설과 한 편의 중편소설을 모은 선집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분절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주제의식을 미묘하게 변주하며 마치 제이디 스미스 류의 정신분열적인(..) 장편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알라스카에 거주한 작가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모티브를 따오기도 하고, 그 기억을 정반대로 뒤집어엎기도 하며, 기억을 일부러 희미하게 흩뿌려 놓기도 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알라스카에서 살았으며, 부모가 이혼한 뒤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으나 방학 때마다 아버지가 거주한 알라스카로 돌아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에게 알라스카에서 함께 살 것을 권유했으나 작가는 거절했고, 이후 아버지는 자살했다. 이 선집은 작가의 죄책감과 기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담담히 기술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만약 함께 살게 되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하며,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을 일부러 왜곡시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덕분에 이 선집에 포함된 중,단편은 모두 허구이지만 한편으로 회고록이기도 한,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창조되는 회고록이라는 형식은 작가의 기억이 몹시 고통스러운 현실이라는 점에서 심정적인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만듦과 동시에, 그 다양한 변주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면서 승화되는 지점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코맥 맥카시를 연상시키는 건조한 문체 또한 쉽게 납득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 선집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절망스러운 기억에 대한 담담한 회고록이자, 그가 기억 너머로 나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지금 현재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형태로 발현되었기 때문에 더 놀라운 것이며, 그러한 뒷배경 속에서 타당성을 획득하는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 역시 매력적으로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이 더 읽고 싶어졌다.

Tom McCarthy: Spot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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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light]은 탐 맥카시의 필모그래피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영화이고,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기록될 영화이며, 더 나아가 그의 영화에서 켜켜이 쌓아 올려진 맥카시의 사회윤리적 시선이 얼마나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재평가받게 할 영화이다. 그의 톤은 [Win Win] – [Visitor] – [Spotlight]을 거치며 조금씩 건조해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거나 ‘소통’의 불일치성에 좌절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그는 주어진 환경 자체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환경 안에서 인간 개인이 할 수 있는 필사적인 노력을 추적할 뿐이다. 그의 과거작들과 [Spotlight]이 갖는 작은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의 지난 영화들이 인간 개인의 과오로 인해 발생한 결과물을 납득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극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 [Spotlight]은 인간 개인이 차마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환경에 대해 조금 더 완전한 방식의 승리를 거두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작이 오히려 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는 2001년 보스턴 글로브의 심층취재 특별팀인 ‘Spotlight’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에서 발생한 사제의 아동 성추문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을 다룬다. 로비를 중심으로 한 네 명의 팀원은 아이리쉬 미국인이 주류인 보스턴 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톨릭 교구와 정면 승부를 벌여야 한다. 기자들은 끊임없이 협박과 회유를 당한다. 단순히 타자로 존재하는 거대권력과 싸우는 거라면 오히려 속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환경은 그리 간단치 않다. 보스턴 토박이인 팀장은 교구와 긴밀히 연결된 지인들과 불화해야 한다. 외부에서 영입되어 이 사건에 대한 취재를 지시한 신임국장은 유태인이자 철저한 ‘외부인’으로, 그 지시의 정당성을 의심받는다. 라이벌 회사인 보스턴 헤럴드에서 이 사건을 먼저 기사화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존재한다. 법원마저 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는지 공개가 되어야 할 소송관련 자료들이 사라져버린다. 이들에게 남은 것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지금 당장 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지금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학대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책임감 뿐이다. 실화를 다루고 있고 영화적인 장치를 최대한 배제한 채 그들의 행적을 가만히 따르는 것에 충실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목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울림을 준다. 911 사태가 터지고 모든 취재가 잠정중단되었을 무렵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도 당장 기사화할 수 없다는 팀장의 지시에 울분을 터뜨린 마이클의 표정, 결혼도 하지 못한 채 학대당한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 가라비디안이 마이클에게 “do your work”라고 할 때의 결연함, 기사가 나가고 난 뒤 일요일에 회사 앞에서 만난 마이클과 로비가 나누는 사소한 미소, 기사를 읽던 사샤의 할머니가 물 좀 달라고 할 때의 손떨림 등, 인상적인 장면이 굉장히 많다. 영화는 좋은 각본과 성실한 연기에 의해 감독의 의도를 완전하게 체현한다.

우리는 이미 영화의 결론을 잘 알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는 이후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다루었고, 전 세계에서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교황은 반복적으로 해당 사건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다. 많은 사제들이 파문당했다. 언론은 때론 또 하나의 거대 권력이 되어 누군가를 탄압하는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사회적 사명감을 잃지 않을 때, 거대 권력의 폭거를 제어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이고, 시민 개개인의 관심과 노력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 현실이 이상과 다름을 인정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보스턴 글로브의 신임 편집국장과 부국장, 스팟라잇 팀장과 팀원은 언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냈다. 탐 맥카시는 그 과정을 더 많은 이들이 알 수 있게 영화라는 매개체를 이용하여 잘 포장했다. 선한 마음이 선한 마음을 만났을 때, 세상은 조금 더 선해질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그러한 판타지에 대한 작은 실험장치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아주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 증조부는 구미 지역에 최초로 성당을 건립하는데 크게 일조한 분이고, 아버지의 형제 자매 중 세 분이 성직자이며,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복사 생활을 하고 예비신학생으로 신학교를 들락날락거렸다. ‘사제의 사생활’은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에게조차 금지된 영역으로 터부시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꽤나 은밀한 부분까지 엿볼 수 있었던 셈이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통계적으로 약 6%의 사제들이 성(性)적인 부분에서 잘못을 저지를 확률이 있다. 나의 큰아버지는 부디 그런 분이 아니었길 바라지만, 내가 가까이 지냈던 수많은 사제들 중 그 누군가는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에서 기자들은 독자의 53%를 차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취재에 도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협박을 하기도 한다. 일종의 진영논리가 작용한 셈이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씬은 기자들의 기대보다 훨씬 큰 독자의 반응을 보여준다. 이건 가톨릭 신자들이 가진 독특한 중립성때문이기도 한데(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은 후보 지지율 뿐만 아니라 낙태나 동성애같은 이슈에 대해서도 정확히 50-50으로 스플릿되어 있었다. 낙태와 동성애에 대해 가톨릭이 공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완고한 입장에 비추어보면 놀라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기자들의 소명의식과 그 진실을 왜곡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성적인 시민이 조응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는 일은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수많은 부러움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 역시, 한국 가톨릭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들을 맹렬히 비난할 의사가 충분히 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며, 중요한 것은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지금 내가 속한 사회가 나에게 주는 혜택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은 내가 속한 사회에 익숙해진 나의 안락함이다. 안락함을 포기한 채 고단한 일상을 감수하는 기자들이 그토록 찾고 싶어했던 단 하나의 가치를 영화는 선명하게 드러낸다. 모두가 한번쯤 보고 음미해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who drives whom?

많은 이들이 정치인과 기업가를 혐오한다.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부당한 방식을 통해 가져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갑”을 상징하게 되었고, “갑”은 “을”을 탈취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지금 너무 급하다”라는 핑계를 댄다. 그들도 사실 어려우니 이해를 좀 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먹고 살기 어려우니, (나보다 조금 더 약한) 너를 약탈할게, 라고 약자에게 사정하는 척 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위와 비슷한 ‘사정’을 많이 목격한다. 지하철이나 사람을 치고 지나갈 때,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인식하고도 문고리를 잡아주지 않을 때, 새치기를 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를 때, 이들은 의도적으로 악한 마음을 먹고 있는, 반(反)윤리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다. 이들의 표정에서 “내가 지금 급해서 (좀 봐달라)”, 혹은 “먹고 살기 힘드니 (좀 봐달라)” 정도의 절박함이 읽힌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어봐도, “어쩔 수 없이 그랬다” 정도의 변명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에게 ‘배려없음’이란, 마치 이 사회의 거짓말과 같이, 딱한 사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선택적 윤리규정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철학의 형성과정은 양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개별적인 민초들의 생활습관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컨센서스가 발전하기도 하고,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몇몇 소수집단에 의해 하향식으로 뿌리내려지기도 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확인이 된 바다. 구성원 개개인의 의식구조와 정치인, 자본가, 언론, 공무원 등 어젠다 세터의 철학이 상호작용을 주고 받으며 한 사회의 집단적 가치관을 형성하고, 이것이 누적되어 ‘문화’ 혹은 ‘국민성’이라고 부르는 특질로 체현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이들을 통제하고 약탈하는 “갑”이 탄생했을까,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는 “갑”이 “을”을 탈취했기 때문에 “을” 역시 이러한 지배자의 가치관을 물려받게 된걸까? 전자가 맞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후자가 맞다면 이 사회의 일반적인 구성원은 지배계급에 복종하며 사는 피지배계급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전자가 민주주의의 디스토피아적 가능성을 재현하고 있다면, 후자는 근대화가 진행되지 못한 사회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어느쪽도 그리 달콤해보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들

새로운 서울 생활에서 전에 찾아볼 수 없는 극적인 변화를 세가지만 꼽아 보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커피를 마신다. 그것도 많이 마신다. 카페인에 대한 두려움이 서울 생활의 피곤함에 의해 강제로 극복되어졌기 때문이고, 커피를 정말 잘 내리는 좋은 커피가게들의 가치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술보다는 커피를 앞에 두고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를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커피를 많이 마신다. 둘째, 사람들을 집으로 부른다. 여러명을 들여도 답답하지 않을 정도의 좋은 공간을 얻었기 때문이며, 사람들에게 내 공간을 내어주어도 될 정도로 마음이 많이 너그러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만큼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타는 사람으로 변화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내 공간으로 불러 함께 노는 것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인트로벑에게는 매우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잘 웃지 않게 되었다. 길가를 걸어가다가도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밝게 웃으며 인사하던 작은 동네에서, 백팩으로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도 뒤돌아보지 않는 대도시로 오면서 어느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웃어주지 않는 동네에서 혼자 웃어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임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웃어주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두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참 피곤한 일이라는 사실을 몇 번을 더 애써 거부한 뒤에야 인정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조금 더 자주 찾고 있고, 나의 몸은 조금 더 피곤하고 지쳐 가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미국에서보다 더 많은 음악을 듣고, 더 많은 음반을 사고, 더 많은 술을 마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고 있다. 여전히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지만 꾸준히 피스톤스와 아스날, 브롱코스의 게임은 챙겨 보고 있고, 전보다 책은 조금 더 적게 읽으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한마디로 조금 더 병신같아 진 것이다. 내 삶에서 균형을 찾지 못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도 불안함을 느낀다.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여유를 잃어버리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지쳐 떠나간다. 지금 나는 그런 종류의 위기를 겪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동안 갖게 된 몇가지 확신들 중에는 꽤 그럴듯한 것도 있는데, 예를 들어 지금까지 믿어 왔던 삶의 방식을 꾸준하고 우직하게 고수해 나가야 나에게 가장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조금 더 확실한 모양의 나를 타인에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절망스럽게도, 만에 하나 그렇게 하여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나와 인연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나의 손을 떠난 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게 변할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으며, 다행스럽게도 많이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하지만 여전히 많이 부족한 모습으로 이 나이에 당도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신이 되어가는 속도를 늦추는 노력과 함께, 아직도 고쳐나갈 수 있는 부분을 하루 빨리 찾아내어 조금 더 나은 나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 앞에 최소한 그 순간 갖추어진 최선의 모습으로 떳떳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제 사람들을 정리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 속에서 나를 더 확실하게 발견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국 사회에서 한국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 어떤 존재인지 그려나갈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아낄 수 있는 사람,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 챙기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계속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고, 그 와중에 누군가를 만날 것이다. 나의 길이 깨끗했으면 좋겠다. 그 길 위에서 어떤 다른 길과의 교차점을 만드는 순간,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떳떳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