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신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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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단편소설집 <신중한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신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신중하다 못해 머뭇거린다. 의심하고, 주저하며, 갈등한다. 이들에게는 확정된 현재도, 확정된 미래도 없다. 가끔은 과거도 기억 속에서 뒤틀린다. 세상은 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가끔은 불친절하고, 때로는 이 신중한 사람들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괴롭힌다. 이들의 특유의 신중함이 독이 되어 발을 물기도 하고, 가끔은 순간적인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들어주며, 또 어떤 때에는 일상을 조용히 잠식하는 지긋한 절망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인물의 내적 갈등이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음에 반해 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그리 구체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실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이들이 어떤 시간에 살고 있는지, 나이대는 어떻게 되는지, 성별은 어떻게 되는지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읽다 보면 과연 이들이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긴 한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모호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간략하게, 필요한 정보만을 준 채, 이 신중한 사람들의 비틀거림에 집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구체성을 극복하여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그래서 각각의 단편은 아주 깊고 구체적으로 인물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확정된 것이 없는 세계에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세상에서, 의심하고 고민하며 앞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갈 것인가. 그것은 각각의 인물이 처해 있는 어떤 특수한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만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약간의 신중함을 본능처럼 지니고 있다. 확정된 것이 없는 세상을 확정되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닐텐데,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 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떤 종류의 곤경에 처한다. 그리고 그 곤경 자체가 부조리가 되어 세상을 거울처럼 비춘다. 이 책의 마지막 단편은 그러한 생각이 직설적으로 드러난, 일종의 선언문같은 느낌마저 드는 강한 어조로 씌여 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수많은 부조리에 한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몽유병처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일까, 혹은 더욱 더 강한 회의와 의심으로 자신의 몸을 거울처럼 만들어 세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일까.

5 thoughts on “이승우: 신중한 사람

  1. 저는 이곳에서 발견하는 책들을 매우 신뢰하는데요, 이 책은 그중에서도 읽고싶어지는 소개글이네요ㅎㅎ. 바쁘신 와중에 꾸준히 독서하시는 것 정말 대단하세요.

    • 책만 읽고 원래 할 일은 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ㅎㅎ 요즘 마음이 좀 어지러워 일 안하고 농땡이 피우고 있어요 ㅋ 전 재미있게 읽은 책이예요. 추천드릴만 합니당.

  2. 앞쪽의 몇 편만 읽었는데, 마치 인터넷에서 우연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잔뜩 담긴 블로그를 발견한 기분이었어요ㅋㅋ. 이야기와 사람에 목말라서, 그렇게 사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 화자가 다들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또래였다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쪼록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해요ㅎㅎ.

    • 우왓 읽고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맞아요, 나이 많은(?) 작가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상당히 경쾌하고 가벼웠어요. 하지만 주제의식은 엄청 무겁구요.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finish it!

  3. 오늘 끝냈어요! 잘 읽고있다고 남겼지만 사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적으신 대로 화자들은 의심하고, 주저하고, 갈등하는데 이 성향들이 ‘신중한’이라는 말로 묘사될 수 있다면, 저는 ‘신중한’ 화자들이 하나같이 곤경? 삶?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인상깊었어요.

    얼마 전 친구 덕에 알게되었는데 ‘자살하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이유를 정말로 인식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불행을 감추고, 치명상에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사소한] 치통에 대해 불평한다.’라고 유명한 작가(하이네)가 말했다고 해요. 여기서의 치통은 자신의 불행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자기기만일텐데, 제가 이 화두에 빠져있어서 그런지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코드가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성향, 행태인 것 같더라고요. ‘머뭇거리고, 의심하고, 주저하는’ 성질을 묶어서 누구나 나름대로 ‘x’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신중한’을 여기에 대응하니 아이러니가 느껴지기까지 했어요. ‘신중함’때문에 진짜 문제에 도달하지 못한다니.

    단월에 집을 지은 기러기 아빠는 ‘신중한’ 태도로 자신이 삶에서 원하는 바와 방향을 제외한 다른 부차적인 모든 것을 고려하다 끝내는 유일한 꿈이 짓밟히는데, 이것을 직시하지 않고 누추한 다락을 꿈의 궁전인 것처럼 인식하기로 하죠. 소설가 윤은 자신이 익명으로 썼던 부끄러운 편지(열등감과 뒤틀린 내면)와 J의 치부를 같이 접어 가방 깊숙히 묻어두고요.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갈등의 본질은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덮어버리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해소되거나 완화되지 않고 항상 중단되기만 할 뿐이라고 느꼈어요. 이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니까 ‘이미, 어디’는 이처럼 본질을 보지 못한다면 삶에 어떠한 서사적 진행도, 결절도 생길 수 없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고요. 아무리 ‘끔찍한 것들’을 떠나고 끊어내려 노력해봐야 끔찍한 것들의 실체를 마주보지 못한다면 저 ‘이미’에서 이 ‘이미’로 무의미하게 옮겨올 수 밖에 없다는…

    칼을 모으는 건물주나 여자에게 돈을 갖다 부은 화자도 마찬가지였고요. 둘 다 안정감을 위해 품에 넣는 그 칼은, 아버지와의 뿌리깊은 갈등이나 자신의 곤란한 현재 상황에 대한 인식을 차단한다는 점에서요. 딥 오리진에서도 화자가 가진 소설가 T에 대한 열등감이 핵심인 것 같은데, 다른 표절 소동에 감춰진 것이 그랬고요. 뒤틀린 내면과 해묵은 감정을 제대로 돌아보는 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런 면에서 딥 오리진은 다 읽고나니 제목이 수수께끼처럼 풀리는 느낌이었어요ㅎㅎ.) 머리로 읽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제 삶의 모습을 누가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 같아서 읽는 동시에 투사와 해석을 저절로하게 됐어요ㅠㅠ.

    아무튼 이게 개인적으로 많이 치우친? 해석과 감상이란 걸 깨달은 건 마지막 작품에서였어요. 더불어 이렇게 쉽게 화자들(혹은 타인)이 자기기만적이라고, 어리석다고 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게 도드라지기도 했고요. 저렇게까지 고통스럽고 무력한 상황에서 과연 ‘본질’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본질이 보이기 때문에 진실이 통하지 않는 부조리 앞에서 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말이 아리송했지만, 아무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무력감을 줄만큼 거대한 부조리를 대면하게 되잖아요. 이 작품은 그 부조리와 ‘용광로 같은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이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세상을 거울처럼 비춘다’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되네요.

    본문보다 긴 댓글을 남길 생각은 아니었는데 앉아서 적다보니까 이렇게 됐네요ㅎㅎㅎㅎㅎㅎ. 이게 뭔가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오랜만에 픽션을 잘 읽어서 감사의 마음도 표할겸 몇마디 남기고 싶었답니다. 암쪼록 날이 추운데 몸 마음 건강히 지내시길 바랄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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