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52016

오후 한 시까지 침대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일곱시에 눈이 떠졌지만, 블라인드를 내리고 억지로 어둠을 만든 뒤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이 떠질 때마다 휴대폰을 열어 카톡방을 보며 키득거리다가 팟캐스트 피드나 NBA 경기를 틀어 놓고 다시 잠에 빠졌다. 잠시 일어났다 다시 잠들 때마다 새로운 꿈을 꾸었다. 트위터에서 알게 된 사람과 플로리다 해변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고(플로리다에 가본 적은 없다), 아버지를 도와 나무를 베다가 멧돼지를 만나기도 했다. 얕게 잠들었기 때문에 피로가 덜 풀렸다고 투덜거리기에는 정오 이후에도 침대에서 꼼지락거릴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축복이었다.

이번주는 유난히 힘겨웠다. 저녁마다 약속이 생겼다. 집에 일찍 들어가지 못해 쌓인 피로를 불면증으로 부추겼고, 나흘 연속 이어진 타인과의 저녁 식사는 소화불량까지 만들어냈다. 찬바람을 지나치게 많이 맞은 어느날 아침 갑자기 눈이 아팠고 열이 났다. 사실 마음만 꾹 다잡으면 금요일까지 버티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옆에 두고 투정부릴 사람 하나 없는 하루 하루가 꾀병을 키운 것 같다. 16일’이나’ 주어진 올해 연차 휴가 중 하루 정도는 이렇게 낭비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달콤했다. 오후 한 시까지 침대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를 하는 동안 작년에 발매된 로우와 윌코의 새앨범을 들었다. 먼지를 털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고, 바닥을 쓸고 닦고, 냉장고를 정리했다. 하수도가 막혀 있는 상태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그 쪽은 포기했다. 언젠가는 뒤엎어야 한다. 그 ‘언젠가’를 정하는 일은 내일의 나에게 미루었다. 청소 다음 계획은 낙원 상가에 들려 클라리넷 수리를 맡기고 기타를 하나 산 뒤 집에 들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행위가 오늘 휴가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낙원상가행은 포기하고 잠시 앉아 만화책을 읽었다. <자학의 시>로 유명한 고다 요시이에의 <신 이야기>라는 책이다. 무척 재미있게 읽고 있다. sarcastic하고 bittersweet한 유머가 나랑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서 아파트 지하 1층 빨래방에 셔츠 다섯장을 맡겼다. 이제 사장님과는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 왜 회사를 안갔냐고, 외출은 어디로 하냐고 물어보셨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너그럽게 대해드리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민의 정이 있다. 2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 가방을 두고 왔다. 사실 이 실수때문에 오늘의 계획이 약간 흐트러지긴 했지만, 덕분에 더 게으를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준비시간에 걸린 식당문은 닫혀 있었고, 근처에 있는 빈 브라더스로 가서 플랫화이트 한 잔을 시키고 잠시 쉬었다. 빈 브라더스의 커피는 나쁘지 않았고, 꽤 좋은 플랫화이트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플랫화이트를 만드는 곳은 아니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돌아갔고, 가방을 넘겨 받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합정 근처를 돌아다니는 동안 인터넷의 새앨범을 들었다. 인터넷 내한공연을 예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2호선을 타고 방향을 바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지금도 역사문화공원인지 문화역사공원인지 헷갈린다.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 구린 이름을 누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운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앉아서 가는 동안 앱을 통해 인터넷 내한공연 티켓을 예매했다. 카카오톡 등의 도움으로 공인인증서 없이 예매에 성공한 뒤 ‘세상 참 많이 좋아졌군’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때 쯤 카톡방에 공인인증서와 결제시스템에 대한 불평과 불만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ㅂ를 만나 평양면옥으로 향했다. ㅂ는 머리를 짧게 깎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가르마 정도는 있었는데, 이제는 가르마조차 타지지 않는 남자같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잘 어울렸다. ㅂ는 머리통도 예쁘고 얼굴도 작고 예쁘기 때문이다. 평양면옥의 편육은 잘게 썰어져 나왔다. 적당히 질기고 적당히 맛있었다. 냉면은 육수가 매우 옅고 슴슴했는데, 오이나 기타 다른 맛이 강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면은 약간 쫄깃했고, 전체적으로 ‘옛날 냉면’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매우 큰 행복감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다른 좋은 평양냉면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ㅂ과 나는 오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곳에서 편육과 냉면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참 좋았다. 사실 나는 화요일에도 을밀대에 혼자 가서 냉면을 한그릇 먹고 왔는데, 추운 날 먹는 냉면이 조금 더 맛있는 것 같다. 우선 사람 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국립극장으로 가기 전 태극당에 들려 배우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나는 태극당은 처음이었는데, 참 좋은 공간이었다. 리모델링을 했다고 하는데, 마치 요즘 중구난방으로 지어지는 “힙”하고 “모던”한 건물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고전적이고 “촌스러운” 마감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무 천장은 높았고, 시대착오적인 샹들리에와 벽화는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무뚝뚝한 직원들의 태도와 냄새나는 화장실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서울에서 내가 정말 좋아할만한 빵집, 좋아할만한 공간을 찾은 것 같다. 영국에서 수입해온 앤티크 가구들을 전시해 놓은 가짜 앤티크 커피숍들의 뺨을 후려 갈기는 ‘authentic’하고 historic한 공간이었다. 물론 빵도 무척 촌스럽고 맛있었다.

동대입구역에서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국립극장까지 걸어올라갔다. 동국대와 신라호텔 사이에 있는 공원도 예쁘게 잘 조성되어 있었고, 극장까지 걸어가는 길도 나쁘지 않았다. 극장에 조금 일찍 도착했고, ㅂ은 로비에서 많은 지인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ㅂ이 좋아하는 언니와 아주 유명한 대금 연주자분을 소개 받아 나도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겨울 이야기>는 헝가리 연출가가 연출하고 우리나라 배우들이 공연한 셰익스피어 원작의 연극이다. 총 공연시간은 두시간 반이었고, 중간에 인터미션이 15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양손 프로젝트의 손상규 배우가 주연으로 연기했다. 공연은 아주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언어가 다른 연출가와의 미스커뮤니케이션 문제가 반드시 있었을 것 같고, 실제로도 있었다고 들었다. 배우들의 에너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 끝까지 올라가 있었고, 그들의 목에는 핏줄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현대적인 감각으로 새롭게 꾸민 무대와 발랄한 감각의 연출, 그리고 뛰어난 베테랑 배우들의 기빨리는 연기,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셰익스피어만이 마음에 들어왔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그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압도하는, 400년 전 죽은 셰익스피어가 남긴 대사 하나 하나가 뿜어내는 기운이 엄청났다. 공연 중 “정직한 뼈”라는 대사가 나온다. 결국 나도 죽어 없어지고 뼈 한조각 정도 남길텐데, 그 뼈가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직한 뼈 한조각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을 마치고 ㅂ은 친구들과 배우들을 만나러 대기실로 갔고, 나는 밖에 남아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ㅂ이 나왔고 우리는 동대문문화역사인지 역사문화인지 아무튼 그 역까지 돌아가며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케이시 머스그레이브스의 새앨범을 들었다.

집은 서늘했다. 보일러를 켜고 전등을 켰다. 태극당에서 사온 빵을 하나 먹었다. 컴퓨터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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