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Bowie: Black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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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일에 이 앨범이 발표되었고, 카톡방에서 친구들과 이 앨범이 엄청 죽이는 역작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누군가는 보위처럼 예쁘게 잘 늙고 싶다는 말을 했으며, 또다른 누군가는 보위의 모든 앨범을 이제 곧 다 모을거라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하철에서 듣던 음악캠프의 배철수는 보위의 음악을 계속 틀었고, 술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뒤늦게 보위의 음악을 애플뮤직으로 찾아 들었다. 보위 특유의 목소리가 보위 특유의 사운드에 전해져 내 귀에 전달되었을 때,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갈줄 알았는데,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화성으로 돌아가버릴줄은 정말 몰랐다.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늙어가고 있던 그는, 동년배 아티스트들 중 그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요즘’ 음악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에 주저함이 없었으며, 다른 대가들처럼 고고하게 그들이 이룩한 명성 위에서 편안한 방식으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치열하게 작업하며 새로움을 추구했다. 가끔은 그 결과물이 생각보다 좋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늘 새로운 장르와 트렌드에 자신을 섞어내는 것을 반겼고, 즐겼다. 그 행동 자체만으로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다분했다. 늘 예상하지 못했던 음악을 예상하지 못했던 시기에 툭 던져놓듯 발표했던 그는, 죽음마저 그렇게 우리들에게 아무런 기척 없이 전해주었다. 그 날은 그렇게 너무나 슬펐다.

나는 보위의 열광적인 팬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십대 시절, 교과서를 외우듯 음악잡지에 나오던 ’50대 명반’ 운운하는 리스트를 외우며 잡스러운 지식을 자랑하던 때에도 보위의 음반에는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현대음악사에서 당해온, 실제로 그가 이룩한 성과물보다 낮게 평가받아온 이력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팝컬쳐의 정체성 자체를 바꾸어 놓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음악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이후 거의 모든 아티스트의 정체성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음에도, 그의 음악은 늘 다른 대가들의 대작에 비해 낮은 순위에 머물러 있었고, 나 역시 그의 음반을 후순위로 미루어두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반성한다. 그에게 소홀했음을. 그는 정말 굉장한 아티스트였다. <Blackstar> 앨범의 포문을 여는 동명 타이틀곡은 무려 10분여에 달하는 대곡이다. 앨범의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곡은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여러 매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디테일한 부분들을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한 곡에서, 나는 그의 생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가 얼마나 열려 있었는지, 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리고 그가 얼마나 절박했었는지 느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Lazarus” 역시 마찬가지고, 다른 모든 곡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죽음이라는 결정적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아마도 그럴 수 없을테지만), 이 앨범의 모든 곡들은 실로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그 에너지의 크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어서, 때로는 흠칫 놀라기도 하고, 잔뜩 움츠러들기도 한다. 감히 내가 어루만질 수 없는 크기의 에너지다. 생애 전체를 하나의 어떤 것에 올인한 사람이 경지에 올라선 그 다음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어디까지 거대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방백: 너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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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첫번째 달이 끝나기도 전에, 영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2016년 끝자락 즈음 다시 기억하게 될 ‘올해의 음반’이 벌써 두 장이나 나왔다. 백현진이 작사,작곡하고 방준석이 프로듀싱하였으며 김오키, 림지혁, 고상지같은 명망있는 뮤지션들이 세션으로 참여한 프로젝트 듀오 방백의 첫번째 앨범 <너의 손>을 몇 번 반복해서 듣다보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백현진의 세계가 한껏 확장되었음을 알게 되고, 그 넓혀진 세계가 방준석의 품으로 들어왔음을 느끼게 된다. 백현진 특유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여전히 발군이지만 조금 더 명확하게 이야기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의 팔세토 창법 역시 여전하지만, 팝적인 멜로디와 한껏 풍성하게 살려낸 편곡, 그리고 그 안에 살아숨쉬는 훅 등의 다른 요소들에 ‘얹혀져’ 청자를 편안하게 이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 앨범은 백현진의 목소리의 힘만으로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이끄는 그런 일인극은 아닌 셈이다. 풍성한 지원군이 그의 목소리를 감싸고 있고, 그가 내뱉는 단어들은 조금 덜 현학적이 되었다. 그리고 음악은 조금 더 부드럽고 아름다워졌다. 물론, 백현진의 스토리텔링 기법과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색깔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러한 결과물은 영화 <경주>에 삽입된 “사랑”에서의 협업에서 약간은 짐작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네이버뮤직에 따르면, 백현진과 방준석 이 둘은 팝에 기반을 둔 송라이팅을 그대로 살리고 그것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지켜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작업방식의 변화를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부분은 ‘음악의 시각화’에서 오는 것 같다. 두 아티스트 모두 영화작업에 깊이 관여해온 사람들이다. 포티스헤드(Portishead)가 음울한 음악(혹은 음향) 조각들을 하나 둘 이어붙여 하나의 명료한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듯, 방백의 음악도 각각의 곡마다 명료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존재하고, 그 안에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존재한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백현진의 힘 덕분이기도 하고, 이를 거부감없이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 프로듀서 방준석의 힘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음악계에 전무후무하게 존재하는 한 보컬리스트의 가장 매끄러운 면을 찾아낸 이 음반은, 사실 거의 모든 곡이 균일한 감성을 전달하면서도 각각의 존재감을 설득력있게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음반으로서 가지는 완결성 측면에서도 분명히 그 가치를 평가받을만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좋은 음반이다. 어쩌면 한국의 Antony and the Johnsons라고 할 수도 있을, 그런 음반이 나왔다.

이승우: 신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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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단편소설집 <신중한 사람>은 정말 말 그대로 신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은 신중하다 못해 머뭇거린다. 의심하고, 주저하며, 갈등한다. 이들에게는 확정된 현재도, 확정된 미래도 없다. 가끔은 과거도 기억 속에서 뒤틀린다. 세상은 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가끔은 불친절하고, 때로는 이 신중한 사람들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괴롭힌다. 이들의 특유의 신중함이 독이 되어 발을 물기도 하고, 가끔은 순간적인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들어주며, 또 어떤 때에는 일상을 조용히 잠식하는 지긋한 절망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인물의 내적 갈등이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음에 반해 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그리 구체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들의 실명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이들이 어떤 시간에 살고 있는지, 나이대는 어떻게 되는지, 성별은 어떻게 되는지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어느 도시에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읽다 보면 과연 이들이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긴 한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모호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간략하게, 필요한 정보만을 준 채, 이 신중한 사람들의 비틀거림에 집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의 구체성을 극복하여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어주는 토대가 된다. 그래서 각각의 단편은 아주 깊고 구체적으로 인물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 확정된 것이 없는 세계에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세상에서, 의심하고 고민하며 앞으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꾸려 나갈 것인가. 그것은 각각의 인물이 처해 있는 어떤 특수한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만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약간의 신중함을 본능처럼 지니고 있다. 확정된 것이 없는 세상을 확정되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닐텐데,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 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떤 종류의 곤경에 처한다. 그리고 그 곤경 자체가 부조리가 되어 세상을 거울처럼 비춘다. 이 책의 마지막 단편은 그러한 생각이 직설적으로 드러난, 일종의 선언문같은 느낌마저 드는 강한 어조로 씌여 있다.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수많은 부조리에 한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몽유병처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일까, 혹은 더욱 더 강한 회의와 의심으로 자신의 몸을 거울처럼 만들어 세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일까.

Ridley Scott: Mar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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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을 이제서야 봤다. 자막 없이 아이튠즈에서 충동적으로 빌려서 본거라 공학적인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아마 자막이 있었다 해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 우주인-이자 식물학자-이 화성에 고립되고, 감자를 키워 먹고, 지구와 연결되어 구조되기까지의 큰 흐름을 따라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는 놀랍도록 긍정적이고, 단순하고 명쾌하며, 명석하고 창의적이다. 우주에서의 생존에 최적화된 DNA를 가지고 있고 well-educated되어 있다. 그를 구조하기 위해 애쓰는 NASA의 사람들 역시, 각자의 역할에 최적화된 성격을 ‘타고 났다’. NASA의 총책임자는 냉정한 판단능력과 부하직원들에게서 최대의 성과를 뽑아내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가지고 있다. 화성 프로젝트 총책임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추진력과 부하직원을 생각하는 끔찍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Hermes호의 선장은 한 명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다섯명의 생명을 걸 줄 아는 용기와 생애 처음으로 대면하는 급박한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혜, 그리고 가장 위험한 순간을 자신의 몫으로 돌리는 희생정신까지 가지고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unexpected event’역시 영화-와 원작 소설-의 원만한 흐름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해결책이 튀어나와 ‘debug’한다. 그렇다. 이 영화-와 원작 소설-은 problem solving에 관한 이야기이고, bug-debug의 반복 속에서 에러를 제거해 가는 ‘공대생’들의 이야기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건물 어딘가의 불을 밝히며 문제를 푸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전세계의 엔지니어링-너드들의 일상을 ‘우주 속 미아’라는 극적인 환경으로 살짝 메이크업했을 뿐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과학자의 ‘캐릭터’에 집중하고 있다. 이 영화는 적절한 소스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뽑아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그래밍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일반적인 헐리우드 무비 엔딩으로 치닫는 영화의 후반부에 오히려 맥이 탁 풀려버리는 감이 있다. 전세계가 응원하며 구조되는 과정은 의외로 감동이 덜하다. 힘이 빠져 있다.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 스페이스로 나오니 오히려 시시하다. 반대로 화성에서 혼자 생존하는 이야기나 지구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에선 생생함이 느껴진다.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이 되자 머뭇거린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 자체로 ‘공대생’의 장점과 단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 봤다. 감정적으로는 전혀 동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울컥했던 순간은 데이빗 보위의 스타맨이 나오던 장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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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씨가 매우 추웠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지하철역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고, 여의도역 2번 출구로 나와서 몇 분 걷지 않아 바로 회사 건물 입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출근길에 추위를 많이 느낄 틈은 없었다. 점심도 회사 바로 건너편에 있는 빌딩에 있는 철판볶음집에 갔고, 퇴근길에는 택시를 타고 백화점으로 가서 장을 본 뒤 지하철을 이용해 안전하게 귀가했다. 요리조리 살살 잘 피해 다닌 셈이다. 나는 감사하게도 그게 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추위를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많이 있다. 그들에게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쉼터를,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따뜻한 국물 한그릇을 제공해드리지 못함을 자책한다. 매달 백만원 가까운 돈을 세금으로 내기 때문에 국가에게 그 책임을 미룬다는 그럴듯한 핑계도 이런 날씨에는 너무 궁색해 보인다. 제발, 이 추위에 아무도 건강을 해치지 말았으면 한다. 소녀상 앞에서 비닐을 뒤집어 쓰고 새벽을 보내는 젊은이들을 특히 더 생각한다.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장을 본다는 것은 사치일 수 있다. 오늘 나에게는 마음을 녹이는 과정이었다. 어머니가 십여년 이용했던 그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지금 내가 장을 본다. 그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어머니는 지난 십여년동안 얼굴을 서로 알고 지냈다. 과일코너를 담당하시는 분, 두부코너를 담당하시는 분, 생선코너를 담당하시는 분, 모두 지난 십년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고용이 계속 이어지게 한 회사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하루종일 앉지도 못한 채 냉랭한 손님들을 상대로 친절함을 제공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참고 견딘 그 여성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튼, 그곳에서 요즘 파는 딸기는 아주 맛있다. 나는 오늘 그 딸기를 사기 위해 그곳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가격표 앞에 마음은 오그라들기 마련이고, 그 중에서 가장 싼 딸기를, 마감시간 할인까지 붙여서 더 싸게 샀다. 명란젓도 사고, 시리얼도 사고, 블루베리도 샀다. 요거트도 사고, 초밥도 샀다. 각 코너를 담당하시는 분들은 냄새가 새지 않게 두번 세번 과잉 포장을 했지만, 집에 돌아와 쉽게 봉지 매듭을 풀 수 있도록 약간 헐겁게 묶는 섬세함도 갖추고 있었다. 계산대에선 포장을 대신 해주었는데, 하나의 큰 봉지에 모든 음식들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과한 포장은 다시 벗겨내어 차곡차곡 쌓아주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그 웃음과 친절함때문에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파는 음식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과 웃음을 나누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라면, 웃음을 선물받는 값을 그정도로 치루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와서 분리수거를 했다. 분리수거를 하고 올라오면서 택배를 받았다. 향뮤직에서 주문했던 음반들이 보름이 걸려 도착했다. 한 장의 음반이 예정보다 늦게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집에 온 뒤 지금까지 계속 오늘 받은 음반들을 이어서 듣고 있다. 조성진 콩쿠르 음반을 드디어 씨디 음질로 들었고, 그 유명한 실리카겔의 EP도 들었다. 역시 칭찬을 많이 들었던 모노톤스의 음반과 사람12사람의 음반을 들은 뒤 밤신사의 짧은 음반도 들었다. 지금은 가을방학의 3집을 듣고 있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트렘폴린, 우효, 잠비나이, 록큰롤라디오, 정차식, 그리고 이 음반들을 늦게 받게 만든 방백의 음반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초밥을 먹고 딸기를 먹고 음악을 들으니까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심장이 여전히 무거운 추에 깔린채 찌그러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가시지 않았고, 지독한 편두통은 며칠째 오른쪽 정수리를 쪼아대고 있다. 오늘 아침에 머리를 감았더니 머리카락이 한웅큼 빠져 있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오늘 점심을 함께 한 회사 동료는 왜 요즘 말이 없냐며, 연애하느라 바쁘냐고 눙쳤다. 아침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공직자 재산신고를 해야 하는데 부모님의 주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부모님에 대해 고지거부 신청을 했는데, 그래도 주소변경 신고는 해야 하나보다. 어머니에게 시골집 주소를 물어보면서 어쩔 수 없이 안부도 같이 물어야 했다. 당분간 부모님과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에 대한 타박은 오히려 귀여운 애교 정도로 넘길 수 있다. 내가 괴로운건, 이미 인생의 한고비를 넘기고 이 치열한 삶의 나선에서 홀연히 빠져나간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현재 나의 비참함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함양 시골집이 참 좋아서 자꾸 가고 싶으면서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너무 춥다. 날씨는 춥지 않다. 볼더에서 자주 겪었던 날씨다. 비슷한 기온에 강풍과 폭설이 함께 오거나 아예 볼텍스가 와버려서 고속도로가 전부 마비되었던 그곳보다 오히려 맑은 하늘과 함께 온 추위는 반갑기까지 하다. 앞서 적었던, 이 추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어쨌든, 날씨는 춥지 않다. 겨울을 견디는건 일도 아니다. 마음이 추운게 문제다. 마음이. 너무 춥다. “남의 일”을 자신들의 단순한 회로구조에 집어 던져 버린 뒤 “외로워서 그러네”라고 해답을 성급하게 제시하려는 주변인들의 폭력을 피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눈이 높다”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깨닫지 못하는 그들은 나의 소중한 친구, 혹은 직장동료, 혹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누군가이겠지만, 최소한 지금의 불안정한 나의 심리상태에서 이들과 적극적으로 말을 섞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막다른 골목에서 우왕좌왕 방황만 하고 있다. 가끔 가슴이 너무 답답해 숨쉬기가 힘들 때도 있다. 내가 왜 이러지는 나도 잘 알수가 없어 답답하고 속상하다.

오늘은 너무 힘들어서 네, 라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고 그냥 죽고만 싶었다. 절망스러운 시간들만 쌓였다. 내가 품은 시간들이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위대함

노점상이나 가판대 상인, 혹은 청소부같은, 서늘하고 냉정한 바깥 공기를 그대로 받아내며 일하는 중년의 여성이 짓는 환한 미소만큼 아름답고 위대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다. 사회로부터 제공되는 거의 모든 도움이나 혜택을 담담히 포기한채, 그리고 삶의 절망과 피로를 뒤로 한 채, 꼿꼿이 선 그녀의 맑은 정신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그 미소를 볼 때마다 나는 무너져 내린다. 그녀는 세상을 이기고 있다.

고다 요시이에: 신(神)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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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헬조선”이라는 말이 공중파 뉴스에 버젓이 등장하는 세상, 서로 눈을 절대 마주치지 않고 미안하다는 말도 절대 하지 않는 타자들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벌이는 공공장소를 품은 세상, 을을 옥죄는 갑과 그 갑을 다시 옥죄는 수퍼갑이 겹겹이 세상을 나누어 가지는 초열지옥과도 같은 세상, 서로 반목하고 시기하며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이 더이상 흉이 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얼마전 친구 한 명이 지하철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술을 마셨는지, 혹은 정신이 원래 이상한지 모를 한 중년의 남자가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고, 그 칸에 타고 있는 누구도 그 사람을 저지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직접 나서 그 중년의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와보니, 그 행패를 부리던 중년 남자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있던 여성 한 명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더란다. 당연히 그 누구에게서도 고맙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축약해 놓은 것 같은 이야기였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부모님께, 책에서 배웠던 ‘선(善)’의 개념이 흔들리고 있는 요즘이다. ‘착함’이 ‘어리석음’과 동의어로 사용된 지 꽤 된 것 같다.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말도 어느 정도 정설로 자리잡았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선행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남을 밟고 올라서도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독하고, 자신이 얻을 것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이고, 이러한 가치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미덕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맞는 사회인가? 멍청할 정도로 착하고,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누어 주고,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아무런 보상 없이 용서하고, 자신만큼 타인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잘못된 사람인가, 옳지 않은 사람인가? 혹은, 이런 사람이 ‘잘’ 살 수 없는 사회가 옳은 사회인가?

고다 요시이에의 <신 이야기>는 이토록 혼란스러운 요즘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조금 많이 이상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신이 있다. 가만 보아하니 가끔씩 지구로 놀러오는 것 같다. 지구 뿐 아니라 전 우주를 관장하는 신인 것 같은데 뭔가 허술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돈가스 덮밥을 먹기 위해 노가다판에서 육체노동을 하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장기를 좋아한다(하지만 잘 두지 못한다). 신을 알아보는 착한 여성 루나의 도움이 없다면 아마 길바닥 어디선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신은 착하다. 자신의 음식을 뺏어 먹는 사람에게 남은 음식까지 다 내어주고 따뜻하라고 꼭 껴안아준다.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고 기다리며, 절망하는 와중에도 자신을 찾아와준 루나에게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는 “관계맺는 것”과 “용서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인간과 인간은 이어져 있으며, 그 관계 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 혹여나 침범당한다면, 끊임없이 용서해주는 것, 이것이 지구를 착하게 만든다고 믿는 신이다. 신은 지구에서 많은 것을 얻고 간다.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천사들에게 증언한다. 하지만 그건 그가 그만큼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련하고 멍청해 보이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방식은, 오늘 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내일 잘릴지도 모르는데, 눈 앞에 있는 지하철의 자리가 몇 초 뒤에는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여유롭게 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다 요시이에는 노숙자라는, 이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을 계층으로 현현한 신의 모습을 부담스럽지 않게 보여준다. 오늘 먹을 것이 없어도, 오늘 밤 잠들 곳이 없어도, 충분히 웃을 수 있고, 베풀 수 있으며,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많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지만 강력한 표현의 힘으로 증명한다. 나는 이 작가의 의견에 반대할 그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전몽각: 윤미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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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의 첫번째 문단을 읽는 순간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책장을 넘기는 중간중간 코가 시큰거리는 것을 참아야 했으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기 전에는 이미 울고 있었다. 각 사진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조차 책의 맨 뒷편으로 숨겨 버리고 아무말 없이 그저 가족들의 모습만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참 벅차게 다가왔다. 책을 덮은 다음에는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윤미를, 당신의 가족을 이토록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어서 감사하고, 그것을 기록해주어서 감사하고, 또 소수만이 접할 수 있었던 기적적인 결과물을 복간해준 것도 감사하다.

사진이란게 참 그렇다. 예술의 한 장르이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고자 하는 욕망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보도 혹은 기록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쪽에서 오는 본질적인 가치들도 무시할 수 없다.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로서 기능한다. 하지만 나는 사진이 갖는 가장 큰 미덕, 혹은 아름다움은 ‘기억’과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사진가는 프레임 안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셔터를 누름으로써 그 순간의 시선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한다. 누구나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댈 수 있고, 누구나 셔터를 누를 수 있다. 요즘처럼 거의 대부분이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에서는 그들 각자가 사진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바라볼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진은 다른 사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설 수 있다. <윤미네 집>은 참 아름답다. 단순히 저자가 사진을 잘 찍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아내를,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필사적으로 기억하려고 하는 욕망이 사진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저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잘 팔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피사체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사진 속에서 가족들을 기억함으로써, 언젠가 영원히 헤어지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가족들을 잊어버리지, 혹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그 사진들을 봄으로써 현실이 된다. 우리가 사진 속에서 윤미의 성장하는 모습에 웃고 울면서, 작가의 아내가 늙어가는 모습에 따스함과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사진들에 감정을 불어넣음으로써 작가와 그의 가족을 기억한다. 나는 이런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족의 역사를 공유하게 되어 영광스럽다. 기적에 동참하게 되어 감사하다. 책을 읽으면서 울어본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동지애, 혹은 fraternité, 혹은 camaraderie

한국어로 ‘동지애’, 혹은 ‘형제애’로 번역되는 단어, 혹은 프랑스 국기 중 빨간색을 상징하는 ‘fraternité’ – 종종 ‘박애’로 잘못 번역되는 – 의 영어식 표현인 fraternity, 혹은 camaraderie. 사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어로 표현되는 ‘동지애’나 ‘형제애’는 너무나 협소하다. 그렇다고 영어식 표현인 fraternity나 camaraderie가 내포하는 의미가 한국어로 일대일로 치환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귀찮지만 굳이 뜻을 풀어 ‘목적과 뜻을 공유하는 사람과 나누는 사랑의 감정’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메리엄-웹스터에서는 이 “사랑의 감정”을 그냥 “feeling of friendship”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 등장하는 “friendship”을 굳이 ‘우정’으로 번역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사랑과 우정은 맞닿아있기 때문이고, 이 두 감정이 지극해지면 서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녀간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 지극해지면 우정이 되고, 친구간의 우정이 깊어지면 사랑을 느낀다. 즉,’ 에로스적인 사랑’ 이상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동지애’ 개념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궁극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궁극의 감정”이라 함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최종 종착지같은 감정 같은거다. 그리고 이 ‘동지애’가 바로 모든 종류의 사랑과 우정이 지극해질 때 발견되는 그 궁극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뜨거운 친밀함, 친구에게 느끼는 우정,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동료의식, 가족에게 느끼는 애틋함, 이웃에게 느끼는 편안함,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동지의식,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안도감, 세계인들에게 느끼는 형제애, 이 모든 감정들은 결국 하나의 감정을 향해 있다. 차별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시기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한한 사랑의 감정. 그 감정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김현경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환대’의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고,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체득되는 후험적인 차원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거기까지 다다르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추구한다. 그 감정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인생에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내 인생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은 타인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게 다 허리를 다쳤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