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커피: 플랫 화이트

FullSizeRender 2최근 테일러 커피 본점이 임대차 재계약을 무사히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으로 최소한 2년은 같은 자리에 있는 테일러 커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홍대와 그 주변을 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지켜보면서, 진취적이고 용감한 분들이 애써 가꾸어 놓은 소중한 공간이 부동산이라는 무지막지한 돈놀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모습을 너무 많이 지켜봐 왔기에, 제발 이 곳만은 그런 방식에 의해 사라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테일러 커피는 내가 “단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로컬, 스페샬티 커피숍이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부끄러운 것이, 단골이라 하면 매일같이 들려서 그곳을 지키는 분들과 가족처럼 지내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나는 요즘 홍대와 집이 조금 더 멀어졌다는 핑계로 몇주에 한번 겨우 찾아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가련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용기를 내어 “단골”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이곳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거의 유일한 전문 커피숍이기 때문이다. 내가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이곳에서 내어주는 음료를 마시며 힘을 내고 기운을 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와 희망을 안고 찾아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아까 썼듯 자주 찾아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테일러 커피 본점이라는 공간을 사랑하고, 그 공간에서 우러나오는 커피와 그 향기를 사랑하며,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이 흥미롭다. 워낙 커피맛으로 유명한 곳인지라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 ‘로컬’ 특유의 색깔은 의외로 희미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이 곳이 홍대 스페샬티 커피숍의 오리지널리티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그곳을 거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는 커피,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내어주는 플랫 화이트를 가장 좋아한다.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때였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몹시 피곤했다. 눈이 시뻘개질 정도로. 하지만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집에 가면 뻔한 저녁일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날만큼은 그 과정을 밟기가 싫었다. 그래서 무작정 테일러 커피로 향했다. 손에는 책조차 들려 있지 않았다. 책도 없이 커피숍에 가다니! 그런 미친 짓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날 해보았다. 그곳에서 플랫 화이트를 시켰고, 마셨다. 입술 끝에서부터 부드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눈물이 찡 하고 쏟아져 나왔다. 그날은 몹시 힘든 날이었고, 일주일의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던 평일 저녁이었다. 나는 빈속이었고, 카페인에 몹시 약한 탓에 저녁에는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그 한잔의 플랫 화이트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몹시 고마웠다. 나는 ‘위로의 언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무언의 고통과 슬픔을, 타인이 단어와 낱말과 문장으로 위로해준다는 것이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그날 그 한잔의 플랫 화이트는 지치고 피곤한 나를 아무말 없이 너무나 잘 위로해주었다.

테일러 커피의 플랫 화이트는 어떤 바리스타가 어떤 날씨에 만들든 늘 일정한 맛을 보여준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부드러움과 코와 혀를 자극하지 않는 연한 향, 그러면서도 목구멍 저 너머까지 충실하게 채워주는 풍부한 맛. 마실 때마다 항상 만족하고,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이건 집에서 절대 만들지 못한다. 내가 집에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커피는 좋은 원두로 내린 핸드 드립 정도일까. 하지만 프렌치 프레스나 드립커피같은 집에서 마시는 커피가 절대 채워주지 못하는,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커피가 있다. 테일러 커피의 플랫 화이트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깊은 위로.

6 thoughts on “테일러 커피: 플랫 화이트

  1. 플랫 화이트라는 커피는 제게 생소하네요. 그래서 감히 무슨 맛인지 상상할 수도 없어요. 얼핏 사진으로 봐서는 우유가 들어가는 것 같은데…

    몇해전이었어요.
    몇해전에 아주 힘들고 고단한 날, 친구가 회사로 호두파이와 치즈파이를 보내줬어요. 저는 그걸 집에 가져가서는, 식탁 위에 두고, 씻고 먹어야지,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아니야, 친구가 보내준건데, 맛이라도 볼까, 하고는 가장 먼저 치즈파이를 꺼내서 한 입 물었는데, 정말 너무 맛있는 거에요. 근데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났어요. 너무 맛있어서, 제가 그날 고단하고 힘들었던 걸 위로해주는 바로 그 느낌이었어요. 맛있는 음식이, 그 본연의 맛으로 위로를 해주기도 하는구나, 하고 그때 알았어요.

    종혁님이 비오던 그 날 입에 물던 플랫 화이트가, 제가 그날의 치즈파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 플랫 화이트는 라떼와 똑같은데, 커피원액과 우유 중 무엇을 먼저 넣는지만 다르대요. 그러니까, 커피에 우유를 섞느냐, 우유에 커피를 섞느냐의 차이겠죠.

      위로가 되는 음식, 분명히 있죠. 그리고 음식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 중 큰 부분이 그런 위로에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요리를 하고, 식당에 가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요.

  2. 아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요. 아주 간단한 음식이 그 어떤 말보다 사람보다 위로가 될 때가 있죠. 먹는 순간 위로가 오감으로 밀려오는 그런 때.

    플랫 화이트 참 좋아하는데… 제가 사는 마을에 정말 플랫 화이트를 잘 내리던 카페가 얼마 전에 문을 닫아서 상심 중입니다T T 테일러 커피는 처음 들어보는데, 홍대에 갈 일이 있으면 꼭 들러봐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그쵸 그쵸. 사람들의 말 한두마디보다 어떤 음식이 혀 끝에 닿고 목구멍을 넘어갈 때 더 큰 위로를 받을 때가 있어요.

      테일러는 당분간 문을 닫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2년은요. 그러니 한번 가보세요. 홍대입구역 6번출구 근처에 있어요. 산울림 소극장 뒷골목!

  3. 어렸을 때,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심하게 놀림받은 날이 있었습니다. 울기 직전인 상태로 그날 집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마침 핫케익 가루로 핫케익을 만들어주시더군요. 맛있다기보다는 굉장히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자주 핫케익을 찾았고 그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을때마다 핫케익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핫케익이 원래는 팬케익이라 부르는 것도 몇년전에 알았는데,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음식이란게 이래서 좋은것같아요. 사람의 배를 채워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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