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AKR20140430088200005_02_i

미국은 중산층을 위한 나라다. 미디어에 노출되거나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미국 사람’은 중산층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상품이나 정책은 이 중산층을 타겟으로 집중되어있다. 실질적으로 미국을 지배하는 “1%”는 절대 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소탈하게 옷을 입고 주유소에서 스스로 주유하며 자신이 “중산층과 다를바 없음”을 어필한다. 그들은 그 어떤 다른 계층, 다른 세력에게도 의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 안에서 ‘조용히’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 반대로, 중산층의 아래에 있는 계급, 즉, 서민 혹은 빈민층에게 미국은 결코 너그럽지 않은 사회다. 이들에게 있어 유일한, 절대절명의 목표는 중산층으로의 계급상승이다. ‘어메리칸 드림’은 바로 이 미국 중산층 계급으로의 편입을 뜻한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계급간의 이동이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고, 이 계급간 이동에서 핵심적인 허리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중산층이다.

미국의 중산층은 마르크스 이론에 존재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중산층에 가깝다. 즉, 미국의 중산층은 현재 OECD에서 정의하고 있는 중위소득 기준 50~150%에 속하는, 문자 그대로의 ‘중간자적 계급’이 아니라,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도 일정 기간 이상 생존할 수 있는 잉여자본을 축적하고 있고 언제라도 쁘디 브루주아지, 즉, 소자본자 계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고소득 임금노동자, 혹은 영세사업자를 가리킨다. 현대사회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국가가 미국이고, 그 미국을 대표하는 계급이 중산층이라면, 우리는 미국의 중산층에 대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사고를 하고 있는가,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는 다이아스포라 문학이 영미 현대문학의 주류안으로 편입되는 수준이 아니라 문학의 흐름을 주도하게 된 역사적인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한 유태인 가정의 속살을 비춤으로써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계급의 위선과 부조리를 파헤친 작품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미국의 중산층은 백인-도시인이라는 단일한 뿌리 위에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시골-외국에서 유입된 이민자 계층이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문화적 공기를 형성하며 진화하는 계층이다. 그중 유태인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장 견고하게 지키며 주류에 성공적으로 편입한 집단이기에, 로스가 이들에게 미국 중산층의 대표성을 부여해 이 계급의 모순을 분석하는 과정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스포츠, 외모, 돈, 가정. 미국에서 찬반 논란 없이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들이다. <미국의 목가>는 이 모든 가치들을 성공적으로 획득한다 하여도, 사회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아의 깊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개인의 인생이 어떻게 비극으로 치닫을 수 있는지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위대함’을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의 층위로만 읽히지 않는 다층적인 구조에 있다. 아버지와 딸, 아내와 남편, 타인과 자아, 사회와 개인, 계급과 계급, 물질과 정신, 보수와 진보, 사회적 변화와 개인적 가치의 완고함, 육체와 정신 등, 현대사회에서 ‘갈등’이 존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상대적 개념들을 건드리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시선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 서사구조는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으며, 넘치지 않는 묘사로 일관하고 있지만 건조하지 않다. 꼭 필요한 내용들만을 표현하고 있지만 충분히 풍성하며, 균형을 잃지 않지만 충분히 정치적이다.

지난 1년: 공공장소

지난 6년동안 한국과 나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맹렬하게 멀어져갔지만,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빠른 시일내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보이는 것들, 혹은 그동안 상당부분 잊고 있었지만 요즘들어 꽤 자주, 절실하고도 새롭게 깨닫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나 연구실이나 집에서 혼자 있을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와 끊임없이 마주치고 헤어진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서로를 스쳐갈 수 있고, 이 정거장부터 저 정거장까지 이삼십분 정도의 시간동안 바로 옆에 앉아 서로의 체취에 익숙해질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이들 중 대부분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허락을 구하지 않은채 신체적 접촉, 혹은 신체적 위협을 가하기도 하는데, 당연히 나에게 불쾌함을 선사한 뒤 사과를 하지도 않는다. ‘공공장소에서의 개인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중 그 누구도 이러한 공공장소에서의 개인공간의 침범행위가 예의에서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요즘 지하철에서 공익광고를 한참 진행하고 있는 대중교통 이용시 백팩 위치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백팩 사용자들은 왜 자신이 버스나 지하철에 탑승할 때 백팩을 벗어서 손에 들거나 바닥에 내려 놓아야 하는지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경험의 축적이나 교육의 부재같은 표면적인 요인들보다 조금 더 깊은 층위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즉, 한국인의 기본적인 사고과정이 왜곡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장면들이 너무 많이 목격되는 것이다. 이들은 공공장소에서의 에티켓에 대해 사고할 때 그 출발점을 ‘나 자신의 편의’로 삼는다. 즉,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빨리,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혹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을 얼마나 자신의 것으로 독점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혹은 타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비추어질지에 대한 고려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진다.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암묵적인 ‘룰’ 자체가 그런식으로 형성되고 축적되다 보면, 선한 의도를 가지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이들이 지속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뒤에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문고리를 잡아주는 경우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한국인들은 공공장소에서 문을 열때 무조건 민(push)다. 절대 잡아 당기지(pull) 않는다. 문 반대편에 서 있는 상대방이 다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나간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간혹 문고리를 잡아당겨 열고 뒷사람이 그 문고리를 이어 잡기까지 문을 지지하고 있다 보면, 그 뒤에 들어오는 사람 중 거의 대부분은 혼자 먼저 빠르게 그 문을 빠져나가버린다. 한 사람의 선의가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돌고 도는 선순환이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슬퍼진 것일까?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나는 뉴욕이나 런던, 도쿄, 빠리,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서울과 대등한 규모의 대도시들에서, 서울사람들이 가진 무례함과 동등한 수준의 예의범절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더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는 않다. 한국인은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예의 없는 사람들로 찍혀버릴지도 모르겠다.

이 국가적 ‘예의없음’은 생각보다 심각한 거시경제적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가진게 인적자본밖에 없는 나라에서 ‘내수’의 대부분은 아마도 외국인들의 방문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지출하는 비용은 상수다. 이들의 주머니를 쥐어짠다고 해서 그것이 내수진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이 좋아서, 서울이 좋아서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쓰고 가는 돈,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실질적인 내수다. (중국인 방문객이 원화로 명동에서 화장품을 사면 이것이 수출로 잡히는가, 국내소비로 잡히는가? 간단한 문제다) 외국인이 한국에 왜 방문하는가? 뚜렷한 사계절같은 소리는 하지 말자. 건물과 사람때문이다. 멋진 건물들이 들어찬 도시에서 구경을 하고, 그 나라 사람들이 만드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 나라 사람들이 품고 있는 문화를 향유한다.(그 문화가 상품의 형태로 존재하든, 무형의 공기처럼 떠돌아다니든 상관없다) 그것이 타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거의 유일한 이유다. 한국의 도시는 어떠한가? 세계에서 가장 근본 없고 계획 없는 스카이라인을 가지고 있는 유리와 철골 덩어리들뿐이다. 사람은 어떠한가? 음식은 먹을만한가? 자랑스럽게 내놓을만한, 발전시킨 문화는 있는가? 다른건 다 떠나서, 영어라도 잘 할줄 아는가? 답이 너무 궁색해진다. 내가 외국인이라면 굳이 이 나라에 방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한국인이 열등해서? 아니다. 한국인은 매우 뛰어나다. 단지 그 뛰어난 재능이 남을 깎아내리고, 남을 모방하며, 규칙을 파괴하고, 규칙 밖에서 이익을 창출하는 쪽으로만 쓰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겁이 많아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어깨를 부딪히고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고도 아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를 풍성하게 가꾸고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채, 현재에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위치를 점하는 것에 더 큰 희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둔감하나 자신의 고통은 크게 부풀려 조금의 이익이라도 더 취할 수 있다면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행위에 대해 한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으나, 헐뜯기를 좋아하며 짜증을 내기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 1년동안 공공장소에서 목격한 한국인들은 이런 모습이었다.

이들은 공공장소에서는 모두 괴물이지만, 각자 소중한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이기도 하고, 나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이기도 하다. 이들이 집에서도 가족들의 어깨를 치고 다니며 찌푸린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 그런면에서, 더더욱, 이들에게 이기적이라는 또하나의 죄명을 추가해야 한다.

나는 이들과 같아지는 것이 싫다. 그래서 내가 배워온, 최소한 현재의 한국사회보다 공중도덕에 있어서만큼은 선진적이라고 스스로 판단한 그 문화를 한국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지난 1년동안 그렇게 남들처럼 다르게 행동해도 나에게 돌아온 피해는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소위 말하는 교통강자이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젊은 성인 남자. 흑인이나 동남아인같은 유색인종도 아니다. 그 누구와 어깨를 부딪혀도 밀려나지 않으며, 혹여나 내가 잘못한 행동을 해도 거칠게 따질 수 있는 사람도 적을 것이다. 그것을 이용한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조심해야했다. 그렇게 비추어질 수 있으니까. 험하게 운전하는 버스기사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공익광고에서 하지 말라는 행동(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지 말기같은 경제적 유인 제공에 실패한 정책까지도)은 하지 않고,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와 같은 말을 먼저 해서 불필요한 신체적 접촉을 최소화하고, 가게 점원부터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까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대화해주는 것. 굉장히 쉬운 일이며 아주 적은 에너지만을 소모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경우 타인의 하루를 조금씩 더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는 행동들이다. 모두가 조금씩 양보한다면, 모두가 더 행복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조금씩 더 이기적이 된다면, 당장의 이익은 조금 늘어날지 모르지만, 모두가 조금씩 더 불쾌해질 것이다. 한국의 공공장소는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빠져있다.  매 순간 실패하며 살고 있다.

지난 1년: 날씨

날씨에 민감한 편이다. 잘 몰랐다.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다보니 서서히 알게 되었다. 나는 날씨에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이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맑은 하늘과 강렬한 태양,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사한 노을,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쌓이는 눈보라같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나의 하루는 날씨에 의해 좌지우지될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날씨와 관련해 각오했던 것은 크게 두가지였다. 봄의 황사, 여름의 습도. 나머지는 참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1년이 지나고, 나의 예상은 틀렸다. 지낼만한 것이 아니라 꽤 괜찮은 1년이었다. 숨쉬기도 버거운 여름의 한철만 잘 이겨내면 딱히 불만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특히, 2014년의 여름은 참을만했다. 혹은, 참을만 했다, 라고 스스로에게 왜곡된 정보를 심어 놓은건지도 모르겠다. 무더위가 지속되던 날들 속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혹은 열흘에 한번 정도는 청명하게 맑은 하늘을 구경할 수 있었고, 그정도면 괜찮은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긴팔 셔츠를 입고 다니기에는 버거운 날들도 많았지만, 무더운 여름은 인간이 기꺼이 견뎌야 하는 자연의 순환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9월부터는 지낼만 했다. 그 매섭다는 여의도의 칼바람도, 예년에 비해 별로 내리지 않는다는 눈과 함께 귓전으로 스쳐 지나갔다. 가을 이후 거칠게 불기 시작하는 바람이 나에게는 호재였다. 바람이 불어야 공기가 순환이 된다. 공기가 이리저리 뒤섞여야 쌓이지 않고 새것이 옛것을 자연스럽게 밀어낼 수 있다. 그 바람은 봄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황사나 미세먼지는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만 목이 칼칼해질 정도로 괴롭혔다. 비가 내린 다음날 청명한 날씨를 가끔 구경할수도 있었다. ‘그곳’이었다면 매일 경험했을 쨍한 맑은 날씨를 ‘이곳’에서는 가끔 맛만 보는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좋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날씨는 생각보다, 나의 기억보다 훨씬 괜찮았다. 서울의 1년은 지낼만 했다.

전세계적으로 이름난 휴양지가 아닌 이상에야, 1년중 한 계절 정도는 괴로울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볼더는 겨울이 혹독하다. 10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5월까지 눈이 내린다. 한겨울에는 오후 네시에 해가 지고, 눈이 많이 내리면 도시로 들어오는 유일한 도로가 수시로 폐쇄된다. 서울은 여름이 힘들다. 기온이 낮지 않은데 습도까지 무척 높은 편이어서 야외활동이 불편할 정도다. 아마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그 어디를 가든, 힘들다, 싶은 날씨는 존재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날씨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일 것이다. 그 날씨와 어떻게 함께 살아가느냐, 일 것이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눈이 발목 넘어까지 쌓여도, 그 안에서 긍정적이고 즐거운 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스바루나 아우디 콰트로를 살 수 있는 좋은 핑계가 생기는 셈이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파우더를 가진 스키장이 주변에 있는 행운을 누릴수도 있다. 날씨가 습하고 덥다고 해도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한 죽지 않는다. 불쾌지수가 머리끝까지 올라가도, 마음이 여유로우면, 즐거운 생각을 하면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의 여름이 싫지 않다. 다만, 한국의 여름을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슬플 뿐이다.

Tame Impala: Currents

download
오스트레일리아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도시 Perth는 언뜻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제대로된 길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같은 기세로 광활하게 펼쳐진 내륙의 사막지역이 동남부의 큰 도시들과 이 도시를 확고하게 단절시켜 놓는 것처럼 보인다. 지리적으로는 물론 그럴 수 있다. 아마도 비행기를 타야만 시드니나 멜번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 천만명이 넘는 대도시 서울에는 절대 오지 않을 것같은 신진 인디 밴드들이 꼬박꼬박 들려 공연을 하고 가는 곳이 이 도시이며, 많은 배낭여행족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기점으로 삼는,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는 도시가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꽉 막혀 있는 섬과 같은 서울보다, 세계 곳곳의 문화도시들과 조금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천재 뮤지션 케빈 파커가 이끄는 3인조 밴드 Tame Impala의 세번째 스튜디오 앨범 <Currents>를 처음 듣는 사람은 우선 당혹스러워 할 수도 있다. 60년대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성공적인 재림이라는 네오-사이키델릭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이 촉망받는 밴드가 이번엔 기타가 아닌 신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알앤비와 같은 흑인음악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뿅뿅거리는 사운드 위에 전형적인 펑크-디스코 리듬이 울려퍼지기도 하고, 춤을 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장시간 공간을 채우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변신, 혹은 커리어의 전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테임 임팔라는 이미 1집 <Innerspeaker>에서 2집 <Lonerism>으로 넘어갈 때에도 만만치 않은 변화의 폭을 보여준 전례가 있다. 테마를 정해 외골수로 밀고 나가던 데뷔작과는 달리 2집에서부터 이미 적극적으로 신스와 샘플링을 사용하고 있으며, 팝뮤직에 대한 파커의 애정을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3집은 2집에서 내세웠던 변화를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즉, 데뷔 앨범이 존 레논이었다면, 소포모어 앨범은 폴 매카트니 쯤 될 것이고, 이번 3집은 브라이언 윌슨 정도가 될 것이다. 파커의 손에 들린 악기가 다를지라도, 여전히 테임 임팔라의 음악은 테임 임팔라만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특정 지역,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범용성을 여전히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앨범 역시 uniqueness와 universality를 동시에 달성하는 좋은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Currents>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변화는 장르나 악기와 같은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사운드스케이프를 구성하는 방식, 즉 구조적인 부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작에서 파커는 텍스처를 겹겹이 쌓아올려 레이어를 두텁게 만드는 쪽을 택했다. 여기에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곁들여져 테임 임팔라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었다. 3집은 한결 단순하고 간결해졌다. 기존에 존재해왔던 여러 장르들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위에 오로지 파커의 팝적인 감각을 양념으로 삼아 미니멀한 아키텍쳐를 가능케 했다. 1집이나 2집을 사랑했던 팬들이 3집을 두고 “싱겁다”거나 “힘이 빠진다”라고 불평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찐한 사운드가 조금 묽게 희석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기존에 존재해오던 것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밴드의 의도를 제대로 읽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앞서 길게 언급한 Perth라는 지역의 특성과 이번 앨범의 컨셉을 설명한 파커의 인터뷰 등과 연결시켜볼 때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전작은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Perth뿐만 아니라 빠리  등 유럽의 큰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진행한 투어에서 파커는 극도의 외로움을 느꼈고, 이것을 음악으로 표현해냈다. 역설적이게도 사운드스케이프는 빡빡했으며, 레이어는 두터웠다. 외부로부터의 고독을 음악안에서 counteractive 하게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언뜻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3집의 타이틀곡이라고 할 수 있는 “Let it Happen”은, “무언가를 막거나 변화시키려고 할 때, 그것을 그냥 그대로 흘려보낼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는 깨달음에서 착안한 노래다. 즉, 파커는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을 애써 새롭게 해석하려고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그렇게 흘려 보내는 것. 호주라는 대륙의 서쪽 끝에 “고립되어 있는” 한 도시가 여행객들을 받아 들이고 또 “떠나보내”듯, 다양한 층위의 문화를 힘껏 품었다가 테임 임팔라와 같은 대형 밴드를 세상에 내보내듯, 파커의 음악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이 팝뮤직에 존재하는 다양한 장르를 품는 방향이라면, 나는 굳이 반대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라고 밝힌 “The Less I Know the Better”가 이러한 새앨범의 철학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너무나 전형적인 디스코-펑크 넘버인 이 곡은 장르안에서 그대로 박제화되어 버리지 않고, 테임 임팔라라는, 외롭지만 열려 있는 채널을 통과해, 대프트 펑크의 “Get Lucky” 이후 우리가 간직하게 될 최고의 모던-클래식 넘버로 재탄생할 준비를 마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앨범의 거의 대부분의 곡들이 비슷한 심상을 전달한다. 좋은 앨범이고, 연말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