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ien Chazelle: Whiplash

이 영화는 아이들도 볼 수 있게 만든 포르노다. 이게 내가 이 영화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내가 이 영화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로 크게 세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 영화는 전체주의적이다. 이 영화는 ‘최고’가 되기 위해 애쓰는 한 학생과 학생들을 “그들에게 기대되는 것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폭압적인 교육방법을 사용하는 한 선생의 이야기다. 학생은 최고가 되고 싶고, 선생은 그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결국 학생은 최고가 되기 위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가족과 불화한다. 손에서는 피가 나고, 밴드 동료들과 반목하며, 학생도 함께 폭력적이 된다. 하지만 끝까지 선생이 학생을 진정으로 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함구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열린 결말” 타령을 하는 것인데, 혹자들이 주장하는대로 선생이 학생을 극한으로 내몰면서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기 위해 “캐러밴”이 아닌 “업스윙”을 연주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결국 최종적인 성취는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 가져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객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아방가르드”한 드러머의 연주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무대 위로 다시 올라간 것은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가 아니라 desperate한 심정으로 함께 엿먹어보자, 하는 심정이었을 확률이 높다. 아무튼, 그 어느쪽의 결론을 택한다 하더라도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는 단 한번도 뒤바뀌지 않으며, 포식자가 권력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는데 피식자가 희생되는 구조라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최고’가 되어야 하는가. 이 영화가 최악인 두번째 이유는 영화 내내 빈번하게 노출되는 폭력에 대한 ‘시선’이다. 백번 양보해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참스승 플레처론” 플롯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학생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며 자살로까지 이끄는 그런 식의 교육방식은 아무리 “제 2의 찰리 파커”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나는 중학교 2학년때 담임교사에게 학생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뺨을 세차례 세게 맞은 적이 있다.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공교롭게도 내 성적은 계속 상승했고, 결국 전교 4,50등 근처를 맴돌던 성적이 전교 2,3등까지 치솟았다. 그래서 내 뺨을 때린 그 교사는 “참스승”인 것일까? 나는 아직도 공개적으로 뺨을 맞는 것, 혹은 타인 앞에서 당하는 폭력으로 인한 수치심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그 교사를 아직도 싫어한다. 그런 식의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영화가 그러한 종류의 폭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은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다. 어느새 학생도 입에 “fuck”을 달고 살게 된다. 게이와 같은 성적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굉장히 창의적인 욕설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은 최고가 되고 싶은가? 실제 ‘천재’ 혹은 ‘탑’의 삶을 본적이 있는가? 평범하게 가족들과 주말드라마를 보고 장을 본 뒤 온화하게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상대하는 대가들의 모습을 나는 본적이 있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제2, 제3의 찰리 파커를 만들어낼 수 있다.

셋째, 영화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그 흔한 교훈조차 없다. 카메라는 무섭도록 열정적으로 흔들린다. 드럼 위에 흔뿌려진 땀방울, 핏방울 하나까지 섬세하게 담아낸다. 쉴새없이 돌아가고,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감정을 고조시킨다. 영화 내내 끝내주는 재즈넘버들이 흘러나온다. 물론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곡은 아니다. (이 영화는 새로운 곡을 소화할 능력도 없어보인다) 모두가 잘 아는 ‘클래식 넘버’를 이용해 한계를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이 곡들을 들을 때 정말 더블스윙 어쩌구를 생각하며 들을까? 좋은 음악은 그저 좋은 음악이다. 영화는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을 웬 미친놈들의 장난감 정도로 격하시켜버린다. 플롯은 또 어떤가. 선생은 욕을 달고 살고, 학생은 피를 흘려가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게 끝이다. 학생의 역할은 한국 드라마에서는 ‘매맞는 아내’ 정도로 치환될 수 있겠다. 선생의 역할은 김성근이나 박정희 정도의 이름을 달고 나오면 좋을 것이다. 엄하게 꾸짖고, 뉘우치고, 그래서 발전하고, 흐뭇하게 쳐다보고, 그래서 윈윈? 말도 안되는 플롯이다.

폭력적이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며, 파쇼적인 영화. 포르노라는 장르에 딱 어울리는 영화다.

이 영화가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은 상당했다. 단순히 이 영화가 재미있어서? 이 영화보다 백배는 더 재미있는 <버드맨>은 다들 보셨는지 모르겠다. <버드맨>은 한국인들이 별로 안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다. ‘한때 최고였다가 몰락한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위플래쉬>는 “최고가 되어라.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라는 ‘명령’을 약 20여년간 들어오며 살아왔지만 결코 최고가 되지 못한채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마약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들 초등학교때 반에서 1,2등 한번씩 해보며 “우리 애도 머리는 좋아요”라는 변호를 받고 자랐을 것이다. 당연히 갈줄 알았던 서울대나 연고대를 가지고 못하게 되었어도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는 “한때 최고가 될 수 있었으나 여러가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되지 못한(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지금 최고인 애들보다 결코 꿀리지 않는 잠재성을 (한때..)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자기기만이 가득차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애를 패서라도, 아이의 손에 피를 흘려서라도 최고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선생에게 아이를 맡길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렇게 못컸으니까, 나도 그런 스승 한명만 제대로 만났으면 지금처럼 비루하게 살지는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자신의 실패한 욕망을 투영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위플래쉬>는 괴벨스의 연설만큼이나 달콤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어제 본 포르노에서 나온 체위를 시도해보길 원하는 그런 수준의 남자만큼이나 애잔하다.

Pawel Pawlikowski: 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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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영화 <Ida>는 주인공 이다가 입은 수녀복과 같은 영화다. 무채색의, 하지만 잘 직조된, 정갈하고, 품위있는 옷. 입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변해주며,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까지 빠짐없이 설명해주는, 그런 옷. 영화는 매우 짧다. 그리고 매우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대사도 거의 없다. 하지만 영화의 층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영화가 내뿜는 에너지도 결코 단촐하지 않다.

줄거리는 <윈터스 본>과 흡사하다. 어떤 폐쇄적인 세계에서 평생 벗어나본 적이 없는 어린 여자가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부모의 마지막 순간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다. <윈터스 본>의 리가 ‘이웃’을 가장한 ‘적’들과 사투를 벌여가며 그녀가 벗어난 적이 없는 그 세계를 지키는 쪽이라면, <Ida>의 이다는 부모의 죽음을 찾아나가면서 자신이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세계를 조금씩 경험해가는 쪽이다. 이와 동시에, 수녀로서의 종신서원을 눈 앞에 둔 어린 이다가 ‘바깥세상’을 경험하며 그 경계선을 확장하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그 ‘바깥세상’에서 이다를 이끌며 그녀와 함께 미스테리한 여행을 떠나는 이모 완다의 이야기는 또다른 축으로 기능하며 이 영화의 층위를 풍성하게 가꾸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폴란드다.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그 곳은 이제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숙청에 의해 다시 피로 물든다. 이모 완다는 “새로운 폴란드”를 세우는데에 크게 공헌한 강경한 사회주의자이자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신여성이다. 이다의 부모는 유대인이었고, 폴란드의 어딘가에서 무참히 살해당한다. 그 부모와 이다를 연결시켜주는 존재인 완다 역시 누군가를 참혹하게 숙청했으며, 그 멍에를 온몸으로 버텨내며 조금씩 무너져내린다.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이다와, 자신이 구축한 세계안에서 고통을 받으며 그 세계를 마무리하려는 완다. 이 두명은 상호 교감하며 인생의 변곡점을 묘한 방식으로 교차한다.

남들이 보기에 “재밌는 커플”인 이 이다와 완다의 짧은 며칠간의 여행과 그 이후에 이 두사람 앞에 벌어진 변화들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폴란드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을 오롯이 필름안에 담아낸다. 묵직한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조용히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수다스러운 영화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며 밀도 높게 시간과 공간을 채운다. 그렇게 사유의 세계를 확장시키는데에 크게 일조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화면구성이다. 4:3 비율로 양옆을 과감히 잘라내고 흑백으로 색을 없애버린 뒤 인물과 배경에만 집중한 화면은 매 씬, 매 시퀀스가 뛰어난 사진작품을 보는 것 같은 완벽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지만 아랫부분을 뭉텅 잘라버리는 파격 속에서도 영화는 끊임없이 영화의 주제, 영화의 화두와 긴밀히 호흡한다. 대사가 별로 없어도 영화가 충만해질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화면 그 자체, 소리 그 자체로 끊임없이 관객과 대화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서 중요한 기제로 쓰이는 존 콜트레인의 음악은 수녀복 안에 갇힌 이다의 자아, 혹은 담배연기 속에 억지로 감추려고 하는 완다의 고통을 충실히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콜트레인의 <Giant Steps>를 다시 꺼내 듣고 싶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완전히 열려 있다. “별거 없는” 세상을 살짝 맛본 이다는 다시 정갈하게 수녀복을 차려 입고 길을 떠난다. 마주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잇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다의 눈빛은 전과 묘하게 달라져 있다. 그녀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한낱 뜨내기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청년의 품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것일까. 그 어느쪽을 택한다 해도 이다의 선택은 이모 완다의 삶이 던져준 교훈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폴란드의 삶이기도 하다. 이다는 이모가 신던 구두를 신고 이모가 피우던 담배를 피워본다. 그리고 다시 수녀복을 꺼내입는다. 이다의 이 행동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닌, ‘그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폴란드가 모든 것을 껴안고 앞으로 걸어가야 하듯이 말이다.

정작 중요한건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실질임금인상이 경기부양을 위한 최선의 정책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정작 경기부양을 위해 최저임금인상을 정치권이 일치단결하여 추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가진 불안함의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정작 중요한 것, 혹은 정작 다급한 것은 최저임금이 아니라 평균임금이다. 둘째, 최저임금인상이 경기부양 및 평균임금 인상에 미치는 효과, 혹은 영향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즉, 최저임금인상이 과연 이 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경기부양책인가, 혹은 가장 적절한 실질임금인상 방안인가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일단 그래프부터 보자. 모든 자료는 OECD 홈페이지에서 받은 공식자료들이다. 모든 단위는 $US(PPP)로 통일했다.

먼저, 2000년 이후 한국의 최저임금은 주변국들에 비해 큰폭으로 상승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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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 변수는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가격 등 명목변수값의 변화로 인한 착시현상(illusion)을 잡아낸 결과값이다. 위의 그래프를 보면 한국은 같은 노동집약적 국가인 터키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은 최저임금 상승률을 보이고 있고, 결국 구매력 환산 실질변수값으로 볼때 일본과 비슷한 수준, 그리고 미국, 영국에 비해 약간 낮은 수준까지 실질 최저임금을 상승시켰다. 이는 IMF 이후 정권을 잡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정책 중 하나이며, 이 최저임금 상승률은 항상 물가상승률, 혹은 평균임금상승률을 앞질러 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최저임금상승률이 큰 폭으로 꺾이지 않은 것은 이러한 ‘추세’가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질 평균 임금의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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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실질 평균임금은 2000년 3만달러 부근에서 2013년 현재 3만5천달러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영국이나 미국, 호주 등 선진국과의 격차가 아직도 극심한 편이며, 그 상승률 또한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년동안 평균임금이 약 5천달러 상승하는 동안 최저임금은 약 6천달러 상승했다. 상승률로만 따지면 평균임금은 약 16.7%, 최저임금은 약 75% 상승한 셈이다. 대부분의 “full time” 노동자가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지난 십년동안 대부분의 노동자가 “왜 우린 점점 가난해질까”라고 느끼는 원인의 본질은 최저임금이 아닌 평균임금쪽에 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위의 두 그래프를 합쳐서 실질 평균임금 대비 실질 최저임금 비율을 구하면 다음의 그래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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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변수로 환산한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에서 한국은 지난 13년간 비약적인 상승세를 이뤘다. 같은 노동집약적 국가인 멕시코의 경우 최저임금을 방어해내지 못하며 오히려 하락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일본의 비율까지 추월하며 최저임금에 있어서는 그 어떤 나라보다 더 강한 보호정책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가진 자원이 노동력밖에 없는 나라다. 그리고 땅덩어리는 좁다. 결국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다수의 노동자가 극심한 경쟁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시장에서의 권력이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부는 정책적으로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아무런 경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비숙련 노동자(low-skilled labor)의 삶의 질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최저임금 상승률을 물가상승률보다 높게 책정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들어선 지난 세 정부는 그것을 무난하게 완수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이 과연 경기부양에 도움이 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가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가? 지금까지도 이미 충분히 최저임금은 물가상승률보다 높은 범위 내에서 인상되어져 왔다. 결국 더 큰 문제는 최저임금이 아닌, 평균임금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실질 변수로 환산한 평균임금의 상승률은 실질 GDP 상승률보다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임금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단위 노동자당 비용과 단위 노동자당 생산성이 있을 것이다. 즉, 사용자측에서 고용해야 하는 단위 노동자에게 투입해야 하는 비용이 높을수록 실질 평균임금은 하락할 것이며, 단위 노동자가 사용자를 위해 뽑아주는 생산성이 높을수록 임금은 상승할 것이다. 다음의 두 그래프는 그러한 임금 결정 요소에 대한 근사치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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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일본이나 유로, OECD 평균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한국의 GDP가 반토막나면서 단위 노동자 한명이 보여주는 생산성에서 이미 성장동력을 상실한 최선진국들과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수준으로 하락했다. 앞서 보인 실질 평균임금의 상승세가 2008년 이후 완연히 꺾여 나간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한국의 단위 노동자 생산성은 이제 더이상 ‘경쟁력’이 아니게 되었다. 기업 입장에서 더이상 임금을 상승시킬 여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대체 가능성’이 월등히 높다. 지금 고용되어 있는 숙련 노동자를 조금 더 싼 값에 부릴 수 있는 다른 노동자로 대체해도 그 비용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현행 법과 제도를 최대한 활용해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해고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크게 찾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정규직이다.

결국, 지금처럼 시장경제 체제 하에서 실질 평균임금의 상승 동력을 더이상 찾기 어려운 장기경기침체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한명이 지속적으로 미래 소득의 증가를 기대하게끔 만드는 정부의 정책이다. 이는 근속연수의 보장과 물가상승률을 하한선으로 보장하는 임금상승률로 기술될 수 있다. 비정규직이 지금 당장 돈을 쓸 수 없는 이유는 언제 잘려나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규직이 돈을 쓸 수 없는 이유는 물가는 오르는 것이 확실하지만 자신의 임금은 언제 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임금의 물가 연동제, 혹은 비정규직의 법적 지위 강화같은 정책이 지원되어야지만 실질적인 내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이보다 조금 더 불명확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그 정책적 시행에 있어 훨씬 더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우선,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이들은 최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들일 것이다. 우리가 경제학원론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최저임금제의 경제적 효과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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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이 w0 에서 w1으로 상승하면 L1-L2 만큼의 실업자가 발생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동일한 수의 노동자에게 최저임금 상승분만큼 임금을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윤극대화 문제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임금비용 안에서 노동자 수를 조절함으로써 비용을 최소화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최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의 이윤이 확대되지 않으면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효과는 0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들을 고용하는 사용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피고용인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도 최저임금 상승분만큼 추가적으로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가?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결국 더이상 피고용인 수도 줄이지 못할 정도로 여력이 없는 영세사업자의 경우 문을 닫게 될 확률이 높으며, 이 경우 실업자 수는 더 증가할 것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비숙련 비정규직 노동자나 이들을 고용하는 영세 사업자 모두,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정작 가장 강하게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최저임금제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추가적인 급격한 최저임금 상승이 경기부양 및 내수증진에 큰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평균임금 상승을 위한 정책을 내놓아야 비로소 소비 여력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