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레 피오르: 초속 5000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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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기본적으로 노마디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이 책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작가의 짧지만 확실한 설명처럼, 이 책은 노마디즘이 사랑과 우정을 어떻게 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한 남자가 있고, 그 남자가 사랑한 여자가 있으며,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불알친구가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일한 화폐를 사용하는 유럽이라는 대륙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지며, 청소년기의 풋풋한 감정에서 머리가 벗겨지고 뱃살이 구겨지는 나른한 중년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람때문에 가슴이 설레이며, 아주 유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중요해지는, 하지만 그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생의 다른 부분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버거운 존재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온다.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의 시기를 거치며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다시 헤어진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통과한 시점에서 관계는 한번 더 뒤틀린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포기하며, 삶으로 돌아간다. 이 책은 이러한 아주 보통의 삶, 아주 일반적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터전’과 ‘이주’라는 개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비단 유럽뿐이겠는가. 미국도 마찬가지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먼 곳으로 대학을 가고, 그곳을 다시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고 가는 이방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한번 이방인은 영원히 이방인’이라는 한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전 오하이오 출신이예요” 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는건, 새롭게 정착하는 곳에서 최대한 다다를 수 있는 지점이 ‘경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상징적 제스쳐이기도 하다.

노마디즘은 떠나온 고향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 내가 떠나온 고향은 이미 이전의 고향이 아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감정적인 거리로 쉽게 치환된다. 롱디가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낯설다. 이미 예전에 나를 반갑게 안아주었던 그 고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나는 아까 이야기했듯 영원한 경계인일 뿐이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쉽게 정착할 수 없는 노마드의 삶. 이것은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우리 한국인에게 아주 낯선 주제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들은 어린 나이부터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들은 서툰 한국말과 김치를 잘 먹지 못하는 식성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을 듣고 또래 한국인 아이들과 어울린다. 현지에서는 유리벽을 실감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와도 특유의 딱딱한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을 따스하게 품어주지 못하는 한국을 야속하다고 할 수 없고, 이들을 완전히 받아주지 못하는 새로운 땅의 사람들을 차갑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노마드의 숙명같은 것이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아주 단순한 서사구조 안에서 감정적인 풍요로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풍경들 덕분이다. 그림체는 등장인물의 심정을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때로는 어두워졌다가, 때로는 화사해지고, 때로는 마구 휘갈기는 듯 하다가, 때로는 아주 섬세하게 입술의 떨림까지 잡아낸다. 장소에 따라 빛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북유럽의 드라이한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고, 이집트의 습하고 눅눅한 공기는 또 다른 북터치로 그려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른 공간들이 인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림을 통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물의 뒷모습에서, 발걸음에서, 손가락 끝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것. 마누엘레 피오르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최소한 섬세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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