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Pornographers: Brill Bruis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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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캐나다 밴쿠버를 기반으로 결성된 파워팝그룹 뉴 포르노그래퍼스는 2005년에 발매한 역작 <Twin Cinema>로 정점을 찍고 지난 10년동안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은 7명의 멤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뿜어져 나오는 높은 수준의 에너지 레벨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단 한번도 ‘새로움’을 기준으로 평가되지 않았으며, 단지 이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에너지 레벨의 높고 낮음에 의해 역작과 졸작의 여부가 판가름되어 왔다. 각 시대에서 가장 유행한 사운드만을 뽑아 내어 자신들 음악의 자양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 60년대의 사이키델릭, 70년대의 글램, 80년대의 뉴웨이브 등등 – 결국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운드의 정체성은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의 색깔과 높이만으로 결정되어졌던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긴 슬럼프는 이러한 음악제조방식이 양날의 검으로 돌아왔을 때의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밴드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점점 화려해질 수록, 이들이 함께 모였을 때 만들어내는 사운드는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Dan Bajar와 John Collins는 Destroyer의 명작 <Kaputt>을 만들었고, Neko Case와 N.C.Newman은 각각 훌륭한 솔로앨범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Kathryn Calder와 Todd Fancey 역시 솔로 활동을 계속하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고 Blaine Thurier는 심지어 영화를 만드는 독립 필름메이커로 활동해왔다. <Twin Cinema>이후 10년은 이들이 다시 예전과 같은 ‘캐미스트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Brill Bruisers>는 이러한 세간의 우려를 멋지게 잠재우는, 끝내주는 음반이다. 이 앨범에서 멤버들은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하면 안되는 것, 혹은 해도 잘 못할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앨범의 첫곡이자 타이틀곡인 “Brill Bruisers”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처럼, 두개의 드럼과 네명의 보컬, 두개의 기타와 키보드, 신서사이저를 한꺼번에 몰아 넣어 에너지 레벨을 극대화시키면서도 어지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질서정연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어떤 ‘정점’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 정점에는 하나의 밴드로서 확고히 존재하게끔 하는 밸런스와 멤버 각각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팝적인 창의성이 공존하는, 이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독특한 어떤 세계가 있다. 개인적인 앨범 베스트 트랙인 “Fantasy Fools”나 “War on the East Coast”처럼 Destroyer의 뉴오더 혹은 큐어 버전부터 니코 케이스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Champions of Red Wine”나 “Hi-Rise”까지, 수퍼 인디록 밴드가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훅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성과 통일성이 공존할 때 뿜어져 나오는 묘한 아우라가 앨범 전체를 감싸고 있다. 물론, 이 앨범은 ‘그해의 최고 앨범’같은 수식어가 따라 붙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은 아니다. 뉴 포르노그래퍼스의 음악 자체가 그렇다. ‘그해의 앨범 50선’에는 들어갈 수 있겠지만, ‘넘버원’이라고 칭송되어지는 그런 사운드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앨범이 밴드의 역사에서 가지는 위치는 명확해보인다. 이 앨범을 기점으로 이들은 다시 일어섰으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아마도 이들의 다음 앨범은 이 앨범만큼 끝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10년동안 범작들만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을 놓지 않고 꾸준히 기다려줄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언제든지, 다시 한번 끝내주는 음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이 앨범은 그런 확신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Jenny Lewis: The Voya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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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루이스가 전작 <Adic Tongue> 이후 6년만에 발표한 세번째 스튜디오 앨범 <The Voyager>는 아티스트로서 한단계 도약한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그녀의 커리어에서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앨범으로 기억될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헐리우드와 팝음악 산업에 노출되고 그 안에서 성장해온 그녀가 컨트리와 블루스라는 자신의 음악적 토양 위에 어떻게 그녀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인상적인 넘버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이 결과물의 상당부분은 프로듀싱을 맡은 라이언 아담스의 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루이스는 아담스와의 작업이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그녀가 이끌던 밴드 릴로 카일리의 해체와 연인인 조니 앤 제니 프로젝트 활동의 종료 등) 이 앨범의 제작기간동안 그녀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The Voyager>는 활기넘치는 에너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라이언 아담스의 손길이 강하게 느껴지는 팝적으로 세련되게 정제된 곡들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루이스는 그녀의 음악적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컨트리와 블루스 위에 신스팝이나 디스코같은 다른 장르까지 흡수하며 음악적 지평을 충분히 확장하고 있다. 마이 캐미컬 로맨스 이후 이 앨범처럼 프로듀서의 색깔이 강하게 느껴지는 음반은 뮤지션의 그 이후의 커리어에 대해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되는데, 제니 루이스의 경우에는 이 앨범 전까지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슬럼프를 끝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더 많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녀의 솔로 앨범 전작 <Acid Tongue>는 지나치게 어둡고 단조롭고 지루했다. 릴로 카일리의 2013년 앨범이나 조니 앤 제니의 2010년 앨범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기엔 무리가 많은, 교착 상태에 빠진 범작들이었다. 제니 루이스는 이미 축복받은 송라이팅 능력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결국 본인이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해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낸 셈이다. 아담스는 그녀를 올바른 목적지로 안내한 듯 보이고, 루이스는 이제 드디어 아주 좋은 팝 넘버들을 생산해내는 요령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다음 앨범에서 어떤 ‘경지’를 맛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Allejandro G. Inarritu: 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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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은 <보이후드>가 가져갈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버드맨>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버드맨>을 본 뒤에도 나는 <보이후드>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확신’에서 ‘바램’으로의 변화는 상당히 큰 것이다. 그만큼 <버드맨>은 대단히 뛰어나고 영리하며 유쾌하고 지적으로 자극적인, 멋진 작품이다. 이냐리투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혹은 터닝포인트로 기록될 영화이고, 마이클 키튼의 필모그래피에도 아마도 비슷한 수식어와 함께 기록될 것이다. 플롯부터 캐스팅까지, 촬영부터 사운드까지, 대사 하나하나부터 큰 철학적 질문까지 모든 면에서 거의 완벽에 가깝게 설계되고 구조화된,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를 경험했다. 단지 좋은 기획과 캐스팅에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찬 작품으로 결국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멋지게 소화한 키튼과 이야기의 큰 판을 설계한 이냐리투 모두에게 크래딧을 주고 싶다.

이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을 연극으로 옮기고자 하는, 왕년의 수퍼스타였으나 이제는 젊은 배우들에게 스팟라잇을 빼앗긴 그저그런 중년 배우의 이야기다. 히어로물에 출연한 경력으로 얼굴은 팔릴대로 팔렸으나 그 이후의 커리어가 지지부진한 이 남자는 성격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서 평론가들로부터는 혹평을, 아내로부터는 이혼을, 딸로부터는 힐난을, 후배 배우로부터는 비아냥을, 내연녀로부터는 이별을 통보받는 그런 사람이다. 딸에게 물려줄 별장까지 처분할 정도로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든 이 연극은 시작부터 엉망진창이다. 캐스팅한 배우는 동료 여배우에게 추근덕거리고, 일을 도와주는 서먹한 사이의 딸은 마리화나를 태운다. 이 연극의 성패를 쥐고 있는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는 혹평을 쓰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고, 공연에 배우로 캐스팅한 애인은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한다. 머릿속이 복잡한 이 남자, 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한 이 사람은 정말 초능력을 가진 수퍼히어로였을까, 아니면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망상에 사로잡힌 가련한 중년일 뿐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호응하며 관객에게 기분 좋은 상상력을 강요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테이크로 이어진다. 물론 여러가지 효과들을 가미한 페이크 롱테이크이긴 하지만, 연극이라는 소재나 주인공의 내면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 등 롱테이크를 택했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메리칸 스나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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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스나이퍼>는 ‘공화당원의 뻔한 전쟁영웅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여지가 존재하는 영화다. 영화는 약 2/3 지점까지 ‘<허트로커>의 보수주의자 버전’으로 충실히 기능하며 그 어떤 새로움도 없이 무기력하게 진행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에서 정반대편에 선 이들의 시선까지도 보듬어안으며 전쟁의 상처를 내재화시켰고, <그란토리노>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던 이스트우드가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격수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는 이 영화에서 그 어떤 새로움도 없이 관습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것은 분명한 퇴보다!’라고 확신할 즈음,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모래폭풍 전투씬 이후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점프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전쟁을 끝낸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집 근처로 추정되는, 허름한 펍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흐느낀다. 매일 매일을 가슴 졸이며 그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랬던 아내는 그런 주인공을 결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카우보이를 꿈꾸던 그에게 텍사스는 고향이라는 이름만 화석으로 남은 낯선 곳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그가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한 이라크는 그의 고향이 아니며, 전우들이 눈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지옥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전역 후 주인공이 천착한 일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참전 군인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돕던 한명에게 살해당한다. 주인공은 어쩌면 마지막까지 경계인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지만 그 공간은 나의 공간이 아니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그 지옥도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머물러 있는 곳에서 떠나온 곳을 추억하며 사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일 수도 있다.

나는 이스트우드가 크리스 카일이라는 실존 인물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고 생각한다. 또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들의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가 그의 사려깊은 전작들에 못미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완성도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 사랑하는 ‘딸’을 잃은 뒤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던 주인공의 모습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순간’을 가지고 있음도 인정한다. 영화를 끝내는 부분에서 말이다.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주인공의 아내의 시선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 마지막씬이 영화를 구원하는 거의 유일한 장치였다.

Bjork: Vulnic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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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ork(NPR과의 인터뷰에서 “비욜ㅋ” 혹은 “비요(ㄹ)ㅋ”라고 읽으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었다)은 8장의 정규앨범을 통해 현대 팝음악계에서 가장 독특한 자신만의 위상을 적립해왔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세계를 공고히 창조했고, ‘경쟁’ 혹은 ‘비교’라는 개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몇 안되는 아티스트로 남아 FKA Twigs같은 요즘 소위 가장 잘나간다는 뮤지션들의 뿌리, 혹은 원천으로 기능해 왔다. 다른 차원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음악을 포함하는 장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비욜ㅋ의 음악’으로만 정의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모든 것을 이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녀, 전작 <Biophilia>에서 자신의 세계가 만나는 접점을 지구와 대자연으로까지 확장한 이 전무후무한 아티스트가  9번째 새앨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 앨범을 전작들과 비교하며 “가장 가슴아픈 앨범”이라고 표현했다. 파트너였던 매튜 바니와의 이별이 이 앨범에서 그녀가 이야기하는 거의 전부다. 그녀로 하여금 이 앨범을 만들게 한 주된 인자이자, 앨범의 세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비욜ㅋ는 연인과의 이별을 극복하기 위해 현악에 기반을 둔 노래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현악 작업을 할 때에는 아픈 기억이 잘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육중한 베이스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때리는 일렉트로니카 사운드가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새앨범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연결고리라면,1997년작 <Homogenic> 이후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트링 사운드는 비욜ㅋ 특유의 광활하게 확장되는 세계관의 핵심으로 존재한다. 덕분에 이 앨범은 아마도 비욜ㅋ의 2000년 이후 작업물 중 가장 영화적으로 다가온다. 포티스헤드의 동명 타이틀 2집처럼 청각을 시각으로 치환하는 시네마틱한 사운드라는 뜻이 아니다. 약 58분동안 진행되는 소리들은 뚜렷한 ‘구조’, 즉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즉, 영화적 서사를 음악으로 옮겨놓았다는 의미다. 9장의 정규앨범들 중 가장 개인적인 앨범이자 가장 내밀하게 아티스트의 심연으로 파고들어가는 앨범인 이 <Vulnicura>는, 지금까지 그녀의 앨범들 중 가장 확고한 서사구조를 가진 앨범이자 가장 구체적인 앨범이기도 하다. 그녀의 세계는 늘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어떤 특정 색깔, 혹은 특정 조각품으로 머릿속에서 치환되는 과정은 흔한 일이었다. 즉, 늘 구체에서 추상으로 이미지화가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그녀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아닌, 그녀가 주인공이 되어 음악 안에서 완결된 이야기를 진행하는 ‘화자’로 존재하고 있다. 비욜ㅋ는 연인과의 이별을 음악의 소재로 가지고 들어오는 모험을 감행하며 영화적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주인공이 되어 발화의 주체가 된다. 그렇게 비욜ㅋ의 세계는 다시 한번 확장한다.

이 앨범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이다. 그리고 전작들보다 무겁고 아름답다. 그녀가 내뿜는 기운을 제대로 감당할 사람이 지구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그녀의 패션을 두고 우스꽝스럽다고 비웃는 사람들조차, 텅빈 공간에 홀로 앉아 그녀의 앨범을 두시간 정도 듣고 난 뒤에도 그녀를 비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대상화시키고 자신을 상징화시키는데에 능숙하지만, 그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대상화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그리 즐겨 하지 않았다. 이번 앨범에서 그녀는 조금은 더 무겁게 가라앉아버렸지만(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조금 더 세밀해졌고, 조금 더 솔직해졌으며, 조금 더 아름다워졌다. 비욜ㅋ의 앨범을 다른 뮤지션들의 작업물과 비교하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 그녀는 그녀의 세계안에서 살고 있고, 우리는 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이번에는 아예 그녀의 실재를 경험하게 된다. 여전히 황홀하다.

김사월 X 김해원: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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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가장 많이 들었던 국내 음반은 사람12사람과 김사월X김해원의 데뷔 EP였다. 두 그룹 모두 여성 보컬리스트가 포함된 혼성 듀오이며 전자음악과 포크라는 장르를 한국적인 차원(Korean dimension?)에서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트위터에서 김사월X김해원을 “The XX에 대한 한국의 대답”이라고 표현한 것을 봤는데, 사운드스케잎의 ‘비어있는 부분(void space of music)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12사람이 Chvrches, London Grammar, Purity Ring, Broods 등 여성 보컬을 전면에 내세운 전자음악 뮤지션들에 대한 한국의 대답이라고 이야기하면 100점짜리 답안이 될 수 없듯이(나는 Dum Dum Girls 등 고딕 리바이벌 음악들과의 연관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김사월X김해원을 단순히 ‘힙’한 서양 장르와의 비교를 통해 추켜세우려는 시도 역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음악은 비어 있으면서도 꽉 차 있고, 세련되었으면서도 과거로부터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단촐한 악기 구성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충만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음악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워야 할 곳과 채워야 할 곳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을 음악적 ‘겸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음악적 역량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채워야 한다는 욕심에서 벗어나 음악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 듀오는 그것을 이 데뷔작에서 성공적으로 성취하고 있다. 메시지의 전달 과정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느껴진다. “지옥에나 가버려”라는 과격한 제목을 달고 있는 노래도 사실 듣다보면 오히려 귀엽다는 느낌까지 받게 되는데, 이는 이들이 ‘과잉’에서 스스로를 철저히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틀곡인 “비밀” 이나 “사막” 연작들에서 느껴지는 오리지널한 리듬과 훅들은 완벽에 가까운 절제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이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음악적 형식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데뷔작의 완성도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된다. 그저 섹시하기만 한 앨범이 아니라, 매우 단단한, 한해를 대표하는 음악이 될 자격이 있는 앨범이다.

장필순: SOONY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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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에서 장필순은 더이상 속삭이지 않는다. 목이 갈라질 정도로 밖으로 내지르고, 디스토션이 들어간 전자기타 소리를 넣기도 하고, 심지어 랩까지 등장시킨다. 단순히 음악적 완성도가 성숙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스스로 느낀 아티스트의 장르 다각화 시도라고 하기엔, ‘누가 장필순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나’라는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그녀는 진심을 다해 노래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팬시하게 음악을 포장해서 세간으로부터 좋은 점수를 따보려는 그런 류의 뮤지션이 아닌,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제로서 음악을 선택하는, 본질적인 부분을 고민하는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때”에서 사랑을 대하는 그녀의 서늘한 감정은 “맴맴”에서 그대로 계승되고, “TV, 돼지, 벌레”에서 직설적으로 표현되는 날카로움은 “휘어진 길”에서 발전되며, 조동진-하나음악의 전통은 “빛바랜 시간 거슬러”에서 느끼는 반가움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번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더이상 이룰 것이 없을 정도의 성취를 이뤄낸 그녀가 무언가를 새롭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안으로부터 시작되는 본질적인 요구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할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진다. 제주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어야 할 그녀가 다시 우리에게 무언가를 던져주고 싶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뜻이고, 우리는 그녀를 통해 세상의 불안함을 되돌려 받는다.

마누엘레 피오르: 초속 5000킬로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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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에서 “기본적으로 노마디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이 책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작가의 짧지만 확실한 설명처럼, 이 책은 노마디즘이 사랑과 우정을 어떻게 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한 남자가 있고, 그 남자가 사랑한 여자가 있으며,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불알친구가 있다. 이들의 관계는 단일한 화폐를 사용하는 유럽이라는 대륙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어지며, 청소년기의 풋풋한 감정에서 머리가 벗겨지고 뱃살이 구겨지는 나른한 중년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람때문에 가슴이 설레이며, 아주 유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만큼 중요해지는, 하지만 그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생의 다른 부분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버거운 존재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온다.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의 시기를 거치며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다시 헤어진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 이상을 통과한 시점에서 관계는 한번 더 뒤틀린다. 다시 누군가를 만나고, 포기하며, 삶으로 돌아간다. 이 책은 이러한 아주 보통의 삶, 아주 일반적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터전’과 ‘이주’라는 개념 안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비단 유럽뿐이겠는가. 미국도 마찬가지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먼 곳으로 대학을 가고, 그곳을 다시 떠나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고 가는 이방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한번 이방인은 영원히 이방인’이라는 한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전 오하이오 출신이예요” 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는건, 새롭게 정착하는 곳에서 최대한 다다를 수 있는 지점이 ‘경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상징적 제스쳐이기도 하다.

노마디즘은 떠나온 고향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 내가 떠나온 고향은 이미 이전의 고향이 아니다. 물리적인 거리는 감정적인 거리로 쉽게 치환된다. 롱디가 실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낯설다. 이미 예전에 나를 반갑게 안아주었던 그 고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나는 아까 이야기했듯 영원한 경계인일 뿐이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쉽게 정착할 수 없는 노마드의 삶. 이것은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우리 한국인에게 아주 낯선 주제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들은 어린 나이부터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들은 서툰 한국말과 김치를 잘 먹지 못하는 식성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을 듣고 또래 한국인 아이들과 어울린다. 현지에서는 유리벽을 실감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와도 특유의 딱딱한 문화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을 따스하게 품어주지 못하는 한국을 야속하다고 할 수 없고, 이들을 완전히 받아주지 못하는 새로운 땅의 사람들을 차갑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다. 노마드의 숙명같은 것이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

아주 단순한 서사구조 안에서 감정적인 풍요로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풍경들 덕분이다. 그림체는 등장인물의 심정을 적극적으로 묘사한다. 때로는 어두워졌다가, 때로는 화사해지고, 때로는 마구 휘갈기는 듯 하다가, 때로는 아주 섬세하게 입술의 떨림까지 잡아낸다. 장소에 따라 빛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도 재미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이 북유럽의 드라이한 공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고, 이집트의 습하고 눅눅한 공기는 또 다른 북터치로 그려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른 공간들이 인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림을 통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인물의 뒷모습에서, 발걸음에서, 손가락 끝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것. 마누엘레 피오르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최소한 섬세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이바라 리에코: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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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바라 리에코가 <우리집>에 깔아놓은 판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먼저 등장인물들을 최악의 환경으로 보내버린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지옥도로 주인공들을 보내버린 뒤,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그래서 리에코의 작품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와 무척 비슷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다르덴 형제가 극도의 사실주의적인 기법으로 현실을 환기시키는 쪽이라면, 리에코는 비현실성을 극대화시키며 풍자와 왜곡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실을 극적으로 불러낸다. 방법은 다르지만 이들이 가진 철학과 공기는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에 부딪혔을때 우리는 편하게 웃을 수 있는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 다르덴 형제는 희미하게 그럴수도, 라고 말하고 있고, 리에코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예스, 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에코가 조금 더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는 인기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고 한다. 리에코의 세계에 등장하는 일본의 모습은 한국의 그것과 놀랍도록 유사하지만, 그녀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절망에 익숙해진 자들과 이제 막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른 속도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현실에 대한 수긍과 극복, 혹은 적극적인 부정 사이의 간극 말이다.

Sharon Van Etten: Are We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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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3년 전, 섀런 반 에텐의 <Tramp> 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는 미국 아티스트의 ‘지역성’에 집중했다. 단순히 서부 출신인지, 남부 출신인지에 따라 그 뮤지션의 음악적 고향이 달라진다는 단순한 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브루클린과 뉴저지, 어퍼 이스트 사이드와 할렘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한 문화적 정체성의 차이를 음악에서 실감하기 시작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어느 ‘씬’에 있었는지가 인디 뮤지션의 뿌리부터 (데뷔라는 형태의) 출발까지를 굵직하게 설명해줄 수 있다면, 그 아티스트가 정식으로 전국 규모의 앨범 배급을 맡기는 첫 계약을 체결하는 레이블의 위치와 그 이후 발표하는 두번째, 세번째 앨범의 성격이 이후의 행보를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는 짐작 정도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

반 에텐은 뉴저지 출신의 여성 뮤지션이다. 뉴저지에서 자랐고, 미들 테네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나 1년만에 자퇴했고, 브루클린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인디뮤지션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 이후 두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인디애나 블루밍튼에 기반을 둔 Jagjagguwar 레이블과 계약을 맺고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는 <Tramp>를 발표하게 된다. 이 앨범을 제작하면서 더 내셔널, 베이루트 등과 교류를 하게 되면서 그녀의 음악세계도 활짝 넓어지는 계기를 맞이한다.

<Are We There>는 Jagjaguwar에서 발표하는 그녀의 두번째 앨범이자, 첫번째 셀프-프로듀싱 앨범이기도 하다. 뉴욕의 문화 아래서 자란 뮤지션이 시카고와 인디애나 등 미드웨스트의 정서를 충분히 흡입한 뒤 드디어 본인의 시선으로 세상과 삶에 대해 노래하는 첫번째 앨범인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앨범의 첫곡인 “Afraid of Nothing”부터 스케일이 훨씬 크게 확장된 인상을 받는다. 그녀는 <Tramp>에 비해 훨씬 느리게 호흡한다. 그게 그녀의 원래 호흡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건 그 느린 호흡 속에 태어나는 음악이 아름다움이 놀라운 수준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확신에 차 있고, 오버하지 않으며,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한다. 직설적이지만 공격적이지 않고, 돌려 말하지 않지만 충분히 깊고 포근하다. 잔뜩 날이 서 있는 맹수의 날카로움보다는 드디어 자신의 것, 자신의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 자의 여유로움이 한껏 뭍어난다. “Your Love is Killing Me”같은 곡이 갖는 절절함은 그녀가 ‘진짜’이고 ‘진심’이라는 증거물이다. 이 곡부터 “Our Love”, “Tarifa”, “I Love You, but I’m Lost”까지 이어지는 음반의 전반부는 상실한 것, 잃어버린 것, 혹은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회한의 정서가 한껏 배어있는데, 이 감정은 “You Know Me Well”에서 이루어내는 작은 반전을 기점으로 극복과 성장, 이해와 관용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앨범의 분위기는 결코 밝지 않다. 그녀는 포기할 것은 확실히 포기한다. 결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상처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걸 인정하고 놔두고 가는 것이 그녀가 택하는 방식이다. 나쁘지 않아보인다. 마지막곡 “Every Time the Sun Comes Up”에서 “매일 해는 다시 뜨고 난 또다시 문제에 빠져버리지” 라고 되내이곤 이내 흥얼거리고 킥킥거리며 앨범을 마무리짓는 그녀의 방식. 즉, 그녀는 스스로 무언가를 확실히 결론내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앨범 타이틀에는 물음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 에텐은 인터뷰에서 이를 “open end”를 나타내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는데, 앨범에 혼재되어 있는 슬픔과 후회, 이해와 포기의 정서들이 결코 하나의 단어로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앨범이 가진 또다른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녹음 당시 존 래넌과 패티 스미스가 실제로 사용했던 악기들을 사용했다는 일화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그녀의 음악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요즘 음악’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루츠록과 컨트리, 포크와 어덜트 컨템프로리 팝이 뒤섞인 듯한 그녀의 음악은, 그렇다고 ‘올드’하지도 않다. 어느 시대에 가져다 놓아도 좋다는 의미이고, 미래 어느 시점에 들어도 여전히 좋을 것이라는 뜻이다. 올뮤직닷컴에서 별 다섯개 만점을 받은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2014년을 그녀의 해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