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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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갖는 유니크한 ‘어메이징함’은 씨네21을 보면 자세히 나오니 나까지 중언부언 떠들지 않겠다.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간의 흐름을 우리까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유해야 하는지, 어떻게 시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영화적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여담이지만 <인터스텔라>가 설파하는 시간의 관념이 <보이후드>가 이룩한 성취 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 절실히 느꼈다) 영화는 시간 그 자체이며,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목도하는 관찰자이자 시간을 받아들이는 주체로서의 카메라이기도 하다. 엘라 콜트레인이라는 한 소년이 메이슨 주니어라는 역할로 분해 1년에 15분의 분량씩 총 12년간 촬영한 이 필름은 영화적 완벽함 그 자체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다르덴 형제 영화의 어떤 절정에서, 거스 반 산트 영화의 어떤 절정에서, 소피아 코폴라의 그것에서, 혹은 우디 앨런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가장 절절한 순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희열이 매 15분마다 새롭게 되풀이되며 마법같은 체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슴 벅찬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 이창동의 말처럼, 다음 세대의 영화는 삶의 한 부분을 뚝 떼어다가 펼쳐놓는, 기승전결의 틀에 갇히기 보다는 삶의 일부로 기능함으로써 삶 안으로 적극적으로 편입해 들어오는 형태가 되어야 할텐데, 링클레이터는 아예 그냥 영화를 삶 자체로 만들었고, 그 결과 영화가 삶이 되고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삶의 모든 순간들이 다 녹아들어가 있다. 음악을 한답시고 알레스카까지 가버렸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 가족을 만나 미니밴을 끌고 다니는 아저씨가 되어 있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를 부르며 아침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개구쟁이 누나는 동생에게 기숙사 방을 빌려주는 센스를 발휘하는 대학생이 된다. 두 아이를 억척스럽게 키워낸 어머니는 아들이 집을 떠나 대학으로 향하는 날 울음을 터뜨리며 이제 자기에게 남은건 장례식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가족을 시간 안에 녹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적 마술이고, 마술적 리얼리티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으로 즐거웠을 것이다. 소년의 성장담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실로 완벽한 멜랑꼴리함을 전달해줄 것이다. 텍사스가 그리운 사람에겐 원없이 텍사스 사투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전달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이 영화가 정말 완벽했다. 그 이유는, 내가 바로 영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소년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텍사스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성장한 이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가 만나게 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나는 소년의 유년시절 친구는 될 수 없었겠지만,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들었을 법한 따분한 경제학원론 수업의 강사였으며, 만약 이 소년이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아마도 오피스 어딘가에서 함께 수다를 떨었을 동료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소년이 18세가 되어 대학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급하게 자막을 올려버리지만, 사실 이 소년의 삶은 그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으며, 나는 이 소년이 대학에서 만나게 될 사람으로 기능하며 살아가는, 영화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마술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 영화가 완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소년은 이렇게 커 왔으며, 그래서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우리가, 이 소년의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영화가 세상이 되고 세상이 영화가 되는 순간이다.

4 thoughts on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1. 에단호크를 어린 시절 그가 에 출연했던 순간부터 흠모해왔던 저로서는 방부제같은 이 분의 매력을 만끽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었던 영화였어요.

    • 에단 호크도 이제 신뢰감을 주는 예술가로 머릿속에 각인된 느낌이예요. 오래 전부터 좋아하셨군요!

    • 워드프레스의 html 시스템때문에 제가 영화 제목을 적은 줄이 빠졌네요. ㅎ “죽은시인의사회”에 나왔던 시절부터 에단호크에게 빠졌더랬습니다. 당시 연극을 못하게 하는 부모님때문에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던 엘리트 청년으로 나왔는데,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포옥. ㅎ

    • 맞아요. 그 장면 저도 기억나요. 무척 인상 깊었어요. 그게 에단 호크였군요.. 크흐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우리들을 보살펴주고 있었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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