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나이즐리: Relish 맛있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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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여러가지 ‘종족’으로 나뉜다. 나와 비슷한 부류, 혹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 이런 식으로 각자의 기준에 맞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분류하곤 한다. 그리고 ‘내 종족’을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같은 것이 있다. 이 책의 작가인 루시 나이즐리는 나와 비슷한 카테고리에 묶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소한 것에 기뻐하며, 타인과 다르다는 것에 주눅들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물론 내가 이렇게 이상적이라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 지향점 정도랄까..)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엄마에게 선물받았다. 요리와 관련된 책들을 사랑하시는 엄마가 그 많은 책들 중 이 책을 꼭 집어 나에게 선물해주신 이유도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루시 나이즐리같은 사람을 키운 어머니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촉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뒤 어머니의 부엌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 이 책에 나오는 귀여운 레시피들을 직접 따라해보기를 원하진 않으셨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직업과 삶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서울 한복판에 살다가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며, 부모가 직접 키운 채소를 먹고 자랐고, 부모를 떠나 8년(나이즐리가 뉴욕을 떠나 시카고에 있었던 시기도 8년이다) 정도 홀로 살아가기도 했다.

루시 나이즐리는 요리를 좋아하는 부모의 기운을 충실히 물려받아 요리와 음식을 통해 행복을 찾아간다. 그는 식탁에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음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그 축복의 시간을 기꺼이 떠안는 사람이다. 나는 한때 ‘음식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학기간동안 ‘나의’ 부엌에서 ‘나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이 없는 음식을 복작복작 만들기 시작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행위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보다 건강한 음식을 찾게 되었고, 잠시 채식을 경험하면서 영양에 대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국의 음식을 그리워만 하다가 홀푸드에서 직접 재료들을 찾아내어 나만의 한국음식을 하게 되었고, 고국이 몹시 그리워 참을 수 없을 때에는 한밤중에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그 냄새를 맡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잠들 수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의 부엌을 굳이 들어가고 싶지 않아 잠시 요리를 쉬고 있지만, 지금도 하루에도 몇번씩 무엇을 먹을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지 상상을 하곤 한다. <어제 뭐먹었어?>와 같은 만화가 주는 효과도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우리의 일상에서 하루 세끼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그걸 그냥 ‘때운다’라고 생각하면 너무 아까울 것 같다. 차라리 조금 시간을 더 쏟아서라도 조금 더 건강한 음식, 조금 더 사랑스러운 음식을 해서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쪽을 택하겠다. 지금은 엄마가 차려주는 소박한 밥상이 너무 좋지만, 언젠가는 내가 나만의 밥상 로테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Relish>는 아주 따뜻한 책이다. 작가는 사랑스럽고, 그의 가족 역시 사랑스럽다. 굳이 뉴욕과 시카고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만의 사랑스러운 식탁을 차릴 수 있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교훈이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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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갖는 유니크한 ‘어메이징함’은 씨네21을 보면 자세히 나오니 나까지 중언부언 떠들지 않겠다. 이 영화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간의 흐름을 우리까 어떻게 받아들이고 공유해야 하는지, 어떻게 시간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영화적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여담이지만 <인터스텔라>가 설파하는 시간의 관념이 <보이후드>가 이룩한 성취 앞에서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 절실히 느꼈다) 영화는 시간 그 자체이며,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목도하는 관찰자이자 시간을 받아들이는 주체로서의 카메라이기도 하다. 엘라 콜트레인이라는 한 소년이 메이슨 주니어라는 역할로 분해 1년에 15분의 분량씩 총 12년간 촬영한 이 필름은 영화적 완벽함 그 자체로 가득차 있다. 우리가 다르덴 형제 영화의 어떤 절정에서, 거스 반 산트 영화의 어떤 절정에서, 소피아 코폴라의 그것에서, 혹은 우디 앨런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가장 절절한 순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희열이 매 15분마다 새롭게 되풀이되며 마법같은 체험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슴 벅찬 연속성(continuity)이 있다. 이창동의 말처럼, 다음 세대의 영화는 삶의 한 부분을 뚝 떼어다가 펼쳐놓는, 기승전결의 틀에 갇히기 보다는 삶의 일부로 기능함으로써 삶 안으로 적극적으로 편입해 들어오는 형태가 되어야 할텐데, 링클레이터는 아예 그냥 영화를 삶 자체로 만들었고, 그 결과 영화가 삶이 되고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 삶의 모든 순간들이 다 녹아들어가 있다. 음악을 한답시고 알레스카까지 가버렸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 가족을 만나 미니밴을 끌고 다니는 아저씨가 되어 있고,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를 부르며 아침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개구쟁이 누나는 동생에게 기숙사 방을 빌려주는 센스를 발휘하는 대학생이 된다. 두 아이를 억척스럽게 키워낸 어머니는 아들이 집을 떠나 대학으로 향하는 날 울음을 터뜨리며 이제 자기에게 남은건 장례식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가족을 시간 안에 녹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영화적 마술이고, 마술적 리얼리티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으로 즐거웠을 것이다. 소년의 성장담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실로 완벽한 멜랑꼴리함을 전달해줄 것이다. 텍사스가 그리운 사람에겐 원없이 텍사스 사투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전달해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이 영화가 정말 완벽했다. 그 이유는, 내가 바로 영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소년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텍사스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겪으며 성장한 이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가 만나게 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나는 소년의 유년시절 친구는 될 수 없었겠지만,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들었을 법한 따분한 경제학원론 수업의 강사였으며, 만약 이 소년이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아마도 오피스 어딘가에서 함께 수다를 떨었을 동료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소년이 18세가 되어 대학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급하게 자막을 올려버리지만, 사실 이 소년의 삶은 그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으며, 나는 이 소년이 대학에서 만나게 될 사람으로 기능하며 살아가는, 영화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마술인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 영화가 완벽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소년은 이렇게 커 왔으며, 그래서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우리가, 이 소년의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영화가 세상이 되고 세상이 영화가 되는 순간이다.

토이: Da Ca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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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하반기 ‘큰맘’ 먹고 산 음반들이 몇장 있다. 서태지, 김동률, 이적, 윤상, 신해철같은 ‘한국형 어덜트 컨템프로리’ 장르에 있는 뮤지션들의 신보였다. 꽤 신경을 써서 반복해서 들었고, 그 중 가장 좋았던 음반이 이 토이의 새앨범이었다. 물론 이 “좋았다”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내가 들어왔던 음악들과 같은 차원에서 쓰이지는 않았다. 진부한 표현들이 난무하는 이 음반이 현대 음악 산업의 프런티어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으며,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도 못할뿐 아니라, 한 장르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또한 쉽게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한 곳으로 숨어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건너 뛰고 싶은” 트랙들이 꽤 되기 때문에 앨범의 전체적인 구성 또한 불편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앨범을 인상적으로 들었다. 유희열이라는 사람이 여전히 ‘아티스트’로서 기능하고 싶어한다는 ‘욕망’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힙합 뮤지션들을 데려와 노래와 랩을 시키고 오랜 기간 쌓아온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는 그의 태도에서 그 나름대로의, 그만이 가진 내부적인 ‘프론티어’가 확장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40대가 되고 아이가 생기고 등에 짊어져야 할 것이 많아진 이 ‘한국형 어덜트 컨템프로리’ 장르의 서식자들은 더이상 창의적인 음악을 도전적으로 쏟아낼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보이지만(여기서 ‘언제는 그들이 그런 창의성과 용기를 가진 적이 있었던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라고 해두자), 여전히 그들 나름대로 사투를 벌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감지할 수 있는 트랙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가요’의 범주 안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니는 형식적 틀 안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 최소한의 ‘웰메이드’를 성취해내는 그의 작업방식이 폄하될 이유를 사실상 찾기 힘든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희열이라는 음악인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라는 질문부터 이미 희미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시장에서 그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명확해질리 없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회사의 대표로 나와 누군가를 평가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음악인들을 섭외하고 그들에게 공중파 무대를 선사해주는 입장에 있는 사람, 즉 ‘갑’의 위치에 있는 그가 이정도 퀄리티의 음악을 지금 이 시대에도 뽑아내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분명한 시그널을 보내지 않은 우리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사실 과분한 선물이라고까지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No One Knows”, “Piano”, “Pianissimo”, “Always Being Strangers” 정도가 좋았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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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요란하게 선전되어 있는 것처럼 2011년을 줄리언 반스의 해로 만든 이 소설은 사실 노벨라, 즉 중편에 가까운 짧은 분량을 가지고 있다. 짧다는 것이 자칫 충분한 네러티브와 표현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앙상함이라는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반스 정도 되는 작가라면 꼭 필요한 단어를 최고의 구성 안에 집어 넣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결과물이라고 추측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반스는 첫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치밀하게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조합해 하나의 완결된 주제의식,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라인을 거침없이 표현해낸다. 기억의 왜곡과 타인에 대한 폭력, 죄의식과 구원이라는 일반적인 개념들을 지극히 평범한 주인공의 의식 속에서 충격적인 서사구조를 통해 구현해냄으로서 오리지널리티와 보편성을 모두 획득함과 동시에 가독성까지 확보했다는 점이 부커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났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그저그랬다. 인생과 의식에 대한 냉철하고 통찰력있는 시각 자체는 인상적이었으나, 그 시각의 색깔이 내가 좋아하는 쪽이 아니었다. 독한 시선을 넘어서서 지적능력을 과시하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가진 것이 사실이고, 지나치게 단순한 내러티브를 지나치게 현학적인 수사들로 꾸미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거북한 치장이 보이지는 않았나 하는 트집을 잡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어전히 가즈오 이시구로 스타일의 느리고 침착한 문체를 더 좋아하며, 오히려 이시구로의 담담한 묘사력이 인생의 본질을 더 잘 꿰뚫어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고 고백해야겠다. 반스의 소설은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게 읽고 난 뒤에 남는 씁슬한 감정은 비단 소설의 주제의식이 강렬하게 각인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Jonathan Glazer: Under the S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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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글레이저는 데뷔작품인 <탄생>에서 우아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서스펜스를 잘 녹여냈고, 더 나아가 확실한 반전으로 영화의 ‘맛’까지 깔끔하게 잘 뽑아낼 수 있다는 능력을 증명한 감독이다. 이후 감독으로는 굉장히 오랜 공백기를 가진 뒤 내놓은 작품인 <Under the Skin>에서 글레이저 감독은 다른 감독의 작품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유지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을 풀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려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를 통해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 서사구조는 단순하며, 철저하게 보여지는 것을 적절할 시점에 보여질 수 있게끔 하는데에 기능하고 있다. 즉, 이 단순한 서사구조는 몇몇 굵직한 씬에서 보여지는 장면들이 설득력을 얻게끔 하는데에 충실하며, 그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하나의 강렬한 주제의식을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의 음악도, 배우들의 표정도, 적절하게 선택된 영화의 배경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영화 제목이 그대로 주제라고도 할 수 있으며, 영화의 주인공인 ‘로라’가 보여주는 신체의 모든 부분 부분들이 각각 주제를 구현하고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로라는 총 다섯명의 남자들을 만나는데, 처음 두명의 남자는 로라가 남성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설명하게 의해 보여지고, 세번째 남자를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영화 속에서의 ‘충돌’이 발생하며, 네번째 남자를 거쳐 다섯번째 남자에 이르면 영화가 드러내는 주제의식이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즉, 영화는 끊임없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소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먹는다’와 ‘사라진다’, 그리고 ‘파괴한다’라는 개념과 맞물려 이미지화함으로써 과연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정말 타자화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떠한 폭력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발생하고 있는지 상당히 명료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영화는 모호하지 않으며, 지루하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다. 실제로 스칼렛 요한슨이 검은 머리를 한 채 카메라를 숨기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찍은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요한슨이 외계인으로 분해 인간의 삶 깊숙히 파고들어 그들의 삶을 ‘낯설게’ 보이게끔 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배우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일반인들의 틈 사이에 끼여 그들의 삶을 ‘낯설게’ 보이게끔 한다는 점에서 메타시네마적인 요소 또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며, 요한슨이 연기나 감독의 메시지 전달 능력 등에서 상당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