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준비.

내일은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올 것 같아 오늘 미리 써둔다.

볼더는 내게 제 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아니, 두번째 집, 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겠다. 내가 서울이 아닌 부암동이라는 좁은 지역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듯, 미국이라는 큰 나라보다는 볼더라는 작은 학교도시에만 집중하고 싶은 것도 거창한 ‘고향’ 혹은 ‘삶의 터전’같은 개념보다는 ‘집’, ‘방’과 같은 작은 이미지로 그곳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6년을 살았고, 그곳에 살기 전에는 한국에만 있었다. 25년을 한국에서 살았고, 그중 군대 2년을 제외하면 계속 서울과 그 근교에만 거주했다. 이사를 꽤 자주 다닌 우리 가족의 역사에 비추어볼때, 15년을 살았던 부암동과 6년을 살았던 볼더만이 나에게 거주지로서의 애착을 안겨주는 유이한 장소인 셈이다.

나는 이곳에서 대학원을 입학하고 졸업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처음 지낸 곳은 군대였지만, 내가 스스로 주거지역을 선택해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애쓴 곳은 볼더가 처음이었다. 2008년 7월 18일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때 그곳엔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미리 그곳에서 살고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나를 도와주었고, 생긴것도 참 신기했던 백인 학교 직원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너무나 낯선 곳이었기 때문에 더 무모하게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지금 유학을 다시 떠나라고 하면 가지 못할 것 같다.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등에 짊어진 짐이 2008년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하룻강아지 그 자체였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부도 너무 못했고, 영어도 너무 못했으며, 인관관계는 한국에서처럼 너무 서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너무나 미약한 ‘미생’이었던 나는, 결국 ‘미생’인채로 남았지만, ‘미생’인채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하나둘씩 사귄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있다. 나와 함께 그곳을 떠난 사람들중 일부는 이번에 내가 다시 그곳에 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곳으로 다시 모인다. 나를 보기 위해, 혹은 나를 핑계로 보고 싶은 다른 얼굴들을 보기 위해. 기댈 곳 하나 없던 그곳에 홀홀단신 건너 갔던 나는, 그곳을 떠나기 이틀전 술집에서 펑펑 울며 떠나기 싫다고 몸부림쳤다. 내가 그곳을 떠나기 싫었던 이유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홀푸드도, 탄성이 절로 터져나오는 플랫아이언의 웅장한 모습도, 친절한 주민들도 아니었다. 미국은 나에게 너무나 거친 곳이었다. 한국에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그곳에선 매순간 긴장을 극도로 해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억울한 일도 많았고 가슴아픈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곳을 떠나기 싫어 통곡을 했던건,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그곳을 제2의 집이라고 부르고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때문이고,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나게 될 어느 시점부터 그곳은 나에게 그저 하나의 지명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즉, 지금이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빠른 시기가 아니면, 그곳에 가야할 의미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 매우 절박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지금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 순간을 지나면 결국 후회를 하게 될 다른 순간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의도적으로, 굉장히 냉정한 마음으로 볼더와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곳의 친구들이 들락날락거리는 페이스북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아주 친한 몇명의 친구들과의 이메일도 최소한으로만 주고 받았다. 볼더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들은 검색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너무 보고 싶은, 학교 직원들과 교수님들에게 이메일 한통 쓰지 않았다. 이유는 딱 한가지였는데, 그렇게 그곳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맡게 되면 지금 단단히 마음먹은 나의 삶의 리듬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두려웠다. 나는 6년동안 떨어져 있던,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은 어떤 곳의 삶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곳은 전에 내가 기억하던 그곳과 동일하지만, 약간 다르기도 하다. 사람들은 조금 더 많이 화가 나 있고, 그들의 걸음걸이는 조금 더 빨라졌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공기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렇게 남을 밟고 올라서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얇은 완충장치가 이들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마냥 방관자적, 관찰자적 시각으로 살 수는 없었다. 난 이 사회가 이런 곳일줄 알고 왔다. 그동안 많이 망가진 이 사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국에서 열심히 공부를 마친 한 한국인이 이 사회와 함께 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노라고 알리고 싶었다. 나 하나의 힘은 너무 미약할지라도, 그래서 잘 보이지 않게 될지라도, 비겁하게 ‘먹고 살기 힘드니 이민이나 가고 싶다.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이 사회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볼더라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회를 그리워할 틈이 내 마음엔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제 그렇게 억눌러두었던 그곳에 대한 뼈에 사무친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다. 나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에게 꼭 그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어머니, 아버지여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살아온 그 누구라도 좋았다. 내가 지난 시간동안 이곳에서 이런 삶을 살았노라고, 꼭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 최대한 많이 남아 있을때 꼭 보여주고 싶었다. 2년, 3년 후의 그곳은 더이상 나의 고향, 나의 집 볼더가 아니게 될 것이므로, 최대한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나의 비행기 티켓, 호텔 방, 렌트, 음식값까지 해서 한달 월급이 고스란히 날아갔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곳에서 어머니에게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올 것이다. 여기가 내가 자주 갔던 커피숍이고, 이곳에서 핫초콜렛과 차이티라떼를 매일 사마셨는데, 월말이 되면 통장에 돈이 다 떨어져 그조차 마시지 못했노라고, 이렇게 세세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라도 그곳에서의 내 삶을 털어놓고 나면, 나는 그제서야 그곳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기억은 한정적이다. 그곳을 잊게 될 것이다. 잊기 전에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나면 그건 더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놓아주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곳에 간다. 수요일 오후,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4 thoughts on “여행 준비.

  1. 매몰차고 냉정한 행동들 이면에 종종 한없이 흔들리고 쉬이 무너져내리는 마음이 있다는게 슬픕니다. 그래도 마음껏 무너져내려버릴 기회를 만드셨네요. Bon voyage!

    • 아무리 스스로에게 독하게 군다고 해도 결국은 나약한 인간이잖아요. 가끔씩 정줄 놔버리고 술취해서 헛소리할 때도 필요하듯, 그렇게 꼭꼭 쌓아올린 감정도 해소시켜줄 시점이 있긴 있나봅니다. 잘 다녀올게요!

  2. 잘 다녀와요. 건강하게.
    나는 이러니저러니해도, 종혁씨를 블로그에서 만나는 게 제일 좋으네요. 종혁씨 블로그의 글은 언제나 마음을 건드리니까요.
    :)

    • 잘 다녀왔습니다! 마음을 건드리다니, 분에 넘치는 칭찬이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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