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Carney: Begi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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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열풍이 한차례 지나가도 난 뒤, 이 영화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비판이 서서히 고개를 들 무렵에도 난 여전히 이 영화를 지지했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가치는 아마추어적인 카메라워크라던가 풋풋함을 넘어서 어색한 수준에 종종 다다르는 배우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빛이 바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음악이 훌륭했으며, 다음으로 감독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을때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화면으로 정확하게 묘사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여러가지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오리지널리티를 담보해주었다.

<Begin Again>에서 감독은 판을 조금 더 크게 키웠다. 음반회사에서 퇴물이 된 프로듀서가 잘나가는 가수인 남자친구에게 실연당한 여자와 만나 여러 동료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좋은 음악을 만들어 –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 어려움을 극복한다, 라는 플롯은 심플하고 정직하다. 키라 나이틀리나 마크 러팔로같은 전문 배우들을 기용해서 영화를 정말 영화답게 만들었다. 카메라는 여전히 풋풋하게 흔들리지만 그 안에 담긴 배우들은 프로페셔널하게 캐릭터를 만들어나간다. 전작의 여운을 이어가고 싶었는지 아담 리바인이라는 비전문 배우(하지만 수퍼스타!)를 캐스팅해서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하는 연속성도 보여준다. 음악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만큼 나쁘진 않다. 그걸 왜 키라 나이틀리가 불러야 했냐, 인디스러움이 거세된 리바인이 부르는 팝송이 영화의 결과 이질적이다, 등등의 비판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음악 자체가 몹시 구린건 아니다. 뉴욕이라는 배경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재료들은 다 괜찮아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고유한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재료들을 혼합해서 결과물로 보여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감독에게 찾아야 할 것 같다.

감독은 여전히, 음악을 매우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웃고 떠들때 만들어내는 향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화면을 통해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해낼 수 있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불운하게도 영화는 딱 거기까지만 좋다. 그 외의 모든 장면들은 끊임없는 카피와 모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물론, 단 한 장면, 한 씬을 위해서 영화의 다른 모든 서사를 포기하는 과감한 영화들이 종종 나오긴 한다. 그 장면 하나로 기억되는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불운하게도, <Begin Again>에서 감독이 캐치하고자 했던 그 ‘음악으로 하나되는 사람들의 행복한 에너지’조차 짜게 식은채로 박제되어 전달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임팩트가 덜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씬들조차 <Once>의 카피요 모방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가능한 사건들을 지루하게 배열함과 동시에 ‘빵 터져야 하는’ 부분에서도 확실한 임팩트를 주지 못한채 성급하게 마무리짓는다. 등장인물들은 충분히 힐링이 된 듯 보이고, 각자 알아서 잘 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관객에게 이 영화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를 생각해보면 떠오르는게 딱히 없다. 좋은 음악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공명’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얼모스트 페이모스>에서 우린 한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음악비지니스와 음악이 다름을 확실히 인지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거대한 레슨을 하나씩 받아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It Might Get Loud>에서 우리는 참 행복했다.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에서 느낀 서늘한 외로움은 또 얼마나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었는가. <Begin Again>은 이러한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insight도 없고, lesson도 없으며, 심지어 originality도 없다.

John Maloof and Charlie Siskel: Finding Vivian Ma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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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큐멘터리 필름은 비비안 마이어라는, 한 비밀스러운 사진작가를 발견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연히 그녀의 “brilliant”한 사진들을 발견한 감독은 그녀가 구글에서조차 검색이 되지 않는 미지의 인물임을 알게 된다. 사진업계는 물론 결국 스스로 그녀의 발자취를 찾기 시작한 제작진은 그녀의 직업이 babysitter였으며, 180cm에 가까운 거구였고, 목에는 항상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메고 다녔으며, 무엇보다 그녀와 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돌본 사람들, 혹은 그녀의 친구들은 비비안 마이어가 프랑스 출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뉴욕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조금씩 다르게 가르쳐 주었고, 심지어 자신의 악센트를 의도적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으며, 평생 혼자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가난하게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남긴 수만장의 사진이 거장 사진작가들에게 극찬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들이라는 사실이며, 권위있는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그녀의 사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제작진은 그들 스스로 그녀의 사진을 프린트하고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단순히 놀라운 사진작가를 발굴해내어 사람들에게 알리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작가가 가진 어두운 심연으로 파고들어가기에 이른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녀가 왜 그토록 어둡고 힘겨운 삶을 고독하게 살아야했는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녀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찾아내는 성과를 이루며 마무리짓지만, 그녀가 ‘왜’ 그런 삶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열린 질문으로 남겨둔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에게 직접 질문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모두에게 완전히 잊혀질뻔 했던 한 뛰어난 여성 사진작가의 작품들을 발굴해내어 세계에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비비안 마이어라는 개인의 삶을 ‘잊혀짐’과 ‘기억됨’이라는 테마속에 녹여냄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소통의 방식’과 ‘선택된 삶’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굉장히 재미있고, 놀라울 정도로 신선하다.

사진들: 12.17.14-12.17.23

여행중에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로 옮겼다.


IMG_2671경제학과 건물 앞에서.

IMG_2670경제학과 안의 강의실. 여기서 강의를 듣고 강의를 했다.

FullSizeRender 80YMCA of Rockies, Estes Park.

FullSizeRender 52Table Mesa

FullSizeRender 70볼더 전망대에서 본 학교 전경. 

FullSizeRender 82Cautaugua trail.

IMG_2685Boulder Creek 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공원. 별을 많이 볼 수 있다.

FullSizeRender 66난 정장 입은 사진이 참 좋다.

FullSizeRender 63엄마와 파트리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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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셀카봉때문에 신남.

FullSizeRender 4스캇, 캐런, 크리스형, 크리스형의 친구, 크리스, 스티브, 나.

12.22.14-12.23.14

꿈을 두번 나누어서 꾼 것 같다. 둘다 좋은 꿈은 아니었다. 하나는 대학원생으로 돌아가 교수님께 야단맞는 꿈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상사들에게 놀림을 받는 꿈이었다. 볼더라는 공간이 환기하는 기억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긴장감이 무의식에 무언가를 불어넣었나보다.

세시반쯤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세수도 하지 않고 가기로 했다. 귀찮았다. 짐을 다 싸고 로비로 가니 예약해둔 리무진 셔틀 운전기사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착한 인도인 아저씨였다. 체크아웃을 하고 발레파킹비용을 지불한뒤 볼더를 떠났다.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했다. 다행히 체크인 서비스는 열려 있었고, 가방을 부치고 시큐리티 체크포인트까지 통과하니 두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스캇과 캐런도 같은 시간에 비행기를 타서 혹시나 하고 게이트가 어디인지 확인해 보았는데 다른 concourse여서 만나지 않고 그냥 각자 갈길을 가기로 했다. 덴버 공항의 탑승 게이트는 세개의 concourse로 이루어져 있고, 무인 전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인천 공항을 설계한 사람이 설계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일루미나티가 공항 곳곳에 그들과 관련된 표식들을 심어 놓았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도 났다. 던킨도넛에서 머핀과 핫초콜렛을 사서 어머니께 드렸다. 나는 미리 싸온 블루베리를 먹었다.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잘 자지 못했다. 덕분에 은희경의 소설을 1/3 정도 읽었다.

시애틀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건 처음이라 약간 헤맸다. 다행히 LA처럼 완전 개판은 아니었다. 구조가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어서 무인전동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끝에 국제선 체크인 코너를 찾을 수 있었다. 아시아나 직원들은 할러데이 시즌이라 그런지 머리에 산타 모자같은 것들을 쓰고 있었는데 조땅콩 생각이 나서 저건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궁금해졌다. 체크인을 끝내고 시큐리티 포인트를 다시 통과하기 전 근처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께는 수프와 핫초콜렛을 사드렸고 나는 터키 샌드위치와 오렌지 쥬스를 먹었다. 시큐리티 체크포인트 앞에는 한 젊은 동양 여자가 울고 있었다. 아마도 연인을 막 떠나보낸 것 같아보였다. 나에게 매우 익숙한 풍경이라 마음이 짠해졌다. 부디 지금 울고 있는 그 마음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다가 언젠가 꼭 같이 이 포인트를 통과하길 바란다고 마음으로만 빌어주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게이트 앞에 있는 면세점에서 담배를 한보루 더 사고, 시애틀 트리뷴을 하나 산뒤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번에는 맨 뒤 가운데 좌석이었는데, 다행히 2-3-2로 되어 있어서 복도쪽 좌석 하나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화장실을 자주 이용하지 않으셨다. 내가 화장실에 갈때만 함께 따라 나오셨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영화를 한편도 보지 못하고 계속 골아떨어졌다. 비행기가 흔들릴때마다 깨어 났고, 맨 뒤 좌석이라 스튜어디스들이 떠드는 소리에도 가끔 일어났다. 하지만 열두시간의 비행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건 처음이었다. 피로는 풀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빨리 가는건 좋았다. 엄마는 계속 영화를 보고 계셨던 것 같다. 무척 지루하고 힘들었다고 하셨다.

서울에 도착하니 23일 저녁 여섯시반이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계셨고, 트위터 친구들이 반갑게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인터넷이 짱인 것 같다. 버스를 타고 신촌까지 와서 택시를 타고 아파트 현관까지 갔다. 엄마는 짧은 거리를 가는 것이 미안해서 웃돈을 택시기사에게 얹어주었고, 그 기사는 돈을 더 받고도 못내 불편한 기색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평소답지 않게 택시기사에게 차갑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짐을 풀고 있으니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나는 몹시 지쳐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할 힘이 없어서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샤워를 할때만 잠깐 나와서 몇마디만 나누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와 아빠가 쉴새없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문 넘어로 들려왔다. 엄마는 나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해 보이셨다. 여행이라는 특수성과 외국이라는 이질감이 엄마에게 필요 이상의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에게 내가 가장 편한 사람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성질 급하고 간단한 사회생활조차 거부하며 신경질만 내는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엄마에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편한 말벗이자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호흡이 잘맞는 파트너였던 것이다. 엄마와 아버지의 시간과 공간에 내가 끼여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편해졌다. 내년 6월이면 완벽한 독립을 하겠지만, 그 전에라도 떨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서 네이버 부동산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와 쓰러져 잠들었다.

12.21.14.

아침에 일어나 엄마를 모시고 성당에 갔다. 성당 가는 길에 엄마와 오늘 일정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주변 경치를 전혀 보여드리지 않은 것 같아 근처에 괜찮은 사이트뷰를 가진 곳 위주로 몇군데 보여드리기로 했다. 에스테스 파크에 가면 참 좋았겠지만, 36번이 다시 괜찮아졌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어 포기하기로 했다.

성당은 그대로였다. 사람들도 그대로였다. 평일미사에서 자주 봤던 할아버지도 계셨고, 나를 자신의 클래스메이트로 착각하고 말을 걸어왔던 볼더 로컬 공대 대학원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떠난다. 로컬 주민은 남는다. 학생들이 중심이 되는 성당이지만, 매일 매일의 미사를 지키고 있는건 늙은 주민들이다. 피터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셨다. 성가도 익숙한 노래들을 그대로 부르고, 미사 방식도 똑같았지만, 아주 약간 영어 기도문을 잊어버린 나만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성체를 모시러 가면서부터 가슴이 무척 뛰기 시작했는데 피터 신부님이 나를 알아보시고 미소를 지어주셨다. 눈물이 잔뜩 고여있는 내 눈을 보고 놀라셨는지 그분도 “body of Christ”라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성체를 내 손 위에 올려주셨고, 나도 “Amen”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와 울기 시작했는데 옆에서 그 모습을 보시던 엄마도 함께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미사가 끝나고 피터 신부님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다음날 있을 여행에 대한 강복을 받았다. 반갑게 기억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아침미사를 보고 경수선배와 자주 갔던 Egg &  I 에 가서 나와 경수선배가 자주 먹던 메뉴를 시켜서 엄마와 함께 먹었다. 엄마는 상호명에 “egg”가 들어가기 때문에 계란이 들어간 메뉴를 원하셨고, 에그 프리타타를 시켜드렸다. 나는 덴버 오믈렛을 먹었다. 엄마는 노부부가 친구들, 혹은 가족들과 함께 여유롭게 즐기는 주말 아침식사 모습을 부러워하셨다. 성질급한 남편을 둔 죄로 식당에서 한시간 이상 있어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이 약간 배어나오는 듯 했다. 나 역시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무언가를 진득히 기다리거나 여유있게 무언가를 마무리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여행 내내 엄마 앞에서 아버지 흉을 꽤 많이 본 것 같다.

Chautauqua 트레일 코스를 지나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볼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많이 더 올라가면 로키산맥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엄청난 뷰가 펼쳐지는데, 우리의 작은 피아트로 거기까지는 무리일 것 같아 그냥 볼더 전망대만 구경시켜드렸다.

테이블 메사로 넘어가서 볼더의 8학군이라고 할 수 있는 페어뷰 고등학교 주변 동네를 보여드렸다. 거위떼가 점령하고 있는 작은 호수가 있고, 굴곡진 길을 따라 굉장히 좋은 뷰가 펼쳐진다. 엄마에게 이곳을 보여드린 이유는 함양땅을 사신 것에 대한 은근한 힐책이었지만, 엄마는 그걸 눈치채지 못하신 듯 보였다. 이제는 좀 이웃들과 함께 편하고 여유롭게 노후를 보내시기를 바라는건 자식의 마음이다. 하지만 반평생을 함께 살며 아버지의 급한 성격을 조금씩 닮아오신 엄마는 이웃들과의 교류보다는 땅과 함께 하는 조용한 삶을 이미 선택하신 듯 보였다. 물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돌아와서 코스트코 쇼핑을 즐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긴 하셨다.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면, 아버지는 아마 시골에 홀로 남으려고 하실 것이다. 그때쯤 되시면 자식들을 이길 힘이 없으시겠지만.

테이블 메사까지 다 보자 강한 바람을 몰고 왔던 먹구름떼가 잠시 걷히는 것 같아 보였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어디에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2008년 7월 18일, 볼더에 처음 왔을때부터 약 1년간 묵었던 곳을 보여드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떠날때만 하더라도 한참 공사중이었던 아라파호 Ave.는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처음 1년간 살던 아파트 주변을 돌면서 잠시 그때 당시 추억을 말씀드린 후, 28th St. Mall에 있는 피츠커피에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어머니를 잠시 그곳에 계시라고 한 후 옆에 있는 애플 스토어에 가서 아이폰을 사서 한국에서 쓸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애플 스토어에서 파는 휴대폰은 티모바일용이라서 한국에서는 4G까지밖에 쓸 수 없단다. full LTE 스피드를 즐기려면 버라이존 제품을 사야 하는데, 현재 버라이존 제품을 사면 무조건 2년 약정으로 쓸 수 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분명히 직구해서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한국과 미국의 공기계값 차이가 한 13만원 정도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펄스트릿으로 가서 차를 주차해놓고 어제 네시간동안 쇼핑했다는 엄마의 쇼핑목록을 하나하나 수거하기 시작했다. 주로 페퍼콘에서 파는 여러가지 잡기들을 샀는데, 엄마 몫으로 산건 정작 몇개 되지 않고 대부분 영건이를 위해 요리하는 누나를 위한 것들이었다. 누나가 만약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다면, 엄마의 누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엄마와 딸 사이에 흐르는 마음의 온도는 무뚝뚝한 아들내미가 감히 넘겨볼 수 없는 뜨거움이 있다. 엄마는 요즘 닭과 관련된 것들을 모은다고 하셨다. 그래서 닭무늬가 들어간 삶을 달걀을 올려놓는 그릇과 향료통을 몇개 샀다. 접시를 몇개 사라고 권해드렸지만 가지고가다가 깨질 것 같다고 한사코 거절하셨다. 안타까웠다. 대신 무쇠로 만든 튼튼한 팬을 하나 샀다.

숙소로 돌아와 둘다 잠시 뻗어 있었다. 한시간 정도 낮잠을 잔 후 차를 반납하러 나왔다. 기름을 다시 채워서 돌려주어야 하는데 이 차가 개솔린인지 디젤인지 알 길이 없어서 아까운 국제전화비를 지불하고 엔터프라이즈에 전화를 걸어 렌트한 차가 레귤러 개솔린임을 확인했다. 기름을 채우려는데 이번에는 또 카드가 안먹혀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돈을 따로 지불했다. 이런 방식으로 기름값을 내본건 또 처음이었다. 차를 반납하고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고, 어머니를 보시고 부슬부슬 비가 내기를 골목길을 걸어 김광민 교수님 댁에 도착했다.

김교수님 댁에서 6개월동안 산 적이 있다. 2013년 1월부터 6월까지. 그때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김교수님이 공짜로 숙소를 제공해주신 덕분에 렌트비를 세이브해서 그 돈으로 한국에 한번 다녀올 수 있었다. 사귄지 3개월만에 이별의 위기를 겪었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일주일동안 한국에 다녀왔다. 그렇게 이어진 연애는 올해 가을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동안 몇번의 이별의 위기가 더 있었고, 아마도 나는 그걸 현명하게 잘 넘기지 못한 것 같다. 아무튼, 그 집은 연애를 처음 시작할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페이스타임, 구글행아웃, 각종 사진들에서 내 모습의 뒷배경을 장식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두시간여동안 시간을 보낸뒤 김교수님의 부인이신 임교수님이 호텔까지 우리를 태워주셨다. 어머니를 들여보내고 친구들이 있는 일리걸 피츠로 갔다.

로컬 맥시칸 식당인 일리걸 피츠에는 스캇, 크리스, 스티브, 캐런과 크리스의 형, 형의 친구 이렇게 여섯명이 있었다. 셀카봉 사용법을 알려주고 크리스와 캐런에게 선물했다. 카우보이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해 이야기하고, 케이팝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리스 형과 그의 친구와 작별한 뒤 펄스트릿 펍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더 술자리를 이어갔다. 나이트로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뒤 열한시쯤 헤어졌다. 아마도 이 그룹의 다음 만남은 2015년 보나루일 것이다. 그곳에서 크리스는 바첼러 파티를 할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는 2014년 보나루에서 입었던 주완 하워드의 매버릭스 저지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낡고 헤어진, 땀냄새가 그득 배인 레플리카 저지였지만 고맙게 받았다. 내가 만약 다시 미국에 온다면, 그건 아마도 2015년 6월 내쉬빌행일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엄마가 이미 짐을 다 싸놓고 계셨다. 간단히 씻고 세면도구까지 챙겨 넣은 후 잠시 눈을 붙였다.

12.20.14.

가장 좋은 방에서 잤다. 캐런이 나에게 좋은 방을 양보하고 카우치에서 잔 덕분이다. 제일 늦게 일어났는데, 크리스는 원래 습성대로 일찍 일어나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스캇 역시 그의 습성대로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했다. 캐런 역시 그의 습성대로 휴대폰으로 판타지 스코어를 확인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전날 밤 늦게 도착해서 어떤 곳인지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조금 더 로키산맥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곳인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멀리는 만년설이 덮인 산들이 모이고, 가까이에는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산들에는 드문드문 집들이 박혀 있었다. 체크인을 하는 곳과 각종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는 큰 건물들을 중심으로 개별 캐빈들과 아파트형 콘도들이 띄엄띄엄 위치해 있었다. 어제 엄마가 볼더 크릭을 산책할때 내가 만약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면, 양가 부모님과 함께 다같이 볼더로 놀러오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에스테스 파크에서 사나흘 정도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캇이 모닝커피를 한잔 하고 싶다고 해서 administration center에 있는 작은 카페테리아로 갔다. 거기서 크리스에게 오늘 어떤 프로그램들이 있는지 대충 설명을 들었다. 대부분 아이들을 대상으로 개설된 것들이라 우리가 즐길만한 것이 딱히 없었다. 예를 들면 archery같은 것도 12세 미만을 대상으로 하는거라 우리가 하면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결국 아침에는 탁구를 쳤다. folly pong이라고 네명이서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흑인 꼬마아이를 불러서 함께 즐겼다. 이후 정식으로 탁구 복식을 쳤는데 아까 그 흑인 친구가 계속 함께 놀고 싶어하길래 탁구채를 쥐어주고 함께 치게 했다.

탁구를 치고 밖으로 나오니 스티브가 도착해있었다. 스캇과 나는 스티브의 SUV 뒤에 매달려서 캐빈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고 18홀짜리 퍼팅게임을 했다. 나는 꼴찌를 했다.

점심을 먹었다. 16인치짜리 피자 두판을 다섯명이 먹었는데 다 먹지 못해 1/4 정도를 남겼다.

캐빈으로 돌아와 잠시 수다를 떨었다. 내가 네시에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친구들은 내가 먼저 떠나고 해가 떨어진 뒤 <Bad (der) Santa>라는 비급 영화를 볼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는 농구를 하기로 했다. 체육관이 괜찮았다. 천장이 낮아서 포물선을 높게 그리는 3점슛은 가끔 천장에 맞았지만 그보다 우리들이 너무 늙어서 농구를 제대로 할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다섯명이어서 2대2로 3점내기를 반복해서 했다. 아까 아침에 함께 탁구를 쳤던 흑인 아이가 다시 우리에게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농구를 함께 하기엔 그 친구가 골대까지 공을 던질 힘이 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생전 처음으로 타보았다. 어려웠다. 많이 넘어졌지만 재미있었다. 다섯명중 세명이 스케이트를 처음 타보았고, 나는 그중에서도 캐런과 함께 가장 못타는 축에 속했다. 2대2로 경주를 했는데, 캐런과 내가 출발하는 모습을 따로 비디오로 찍었다. 웃겼다. 그곳에서 다섯명이 다 함께 나온 유일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한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근처를 그냥 걷기로 했다. 숲속으로 들어가서 horseshoe throwing 을 했고, 큰 바위 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튜브 그네를 타기도 했고, 피구 비스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시시껄렁하게 별거 아닌 것 가지고도 재미있게 놀았다. 친구들이랑은 원래 그러고 노는거다. 뭘 해도 재밌다.

스티브의 차를 빌려타고 볼더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로키산맥을 빠져나오는게 목표였는데 에스테스 파크를 벗어나 라이온스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36번이 아예 폐쇄된 상태였다. 30분 넘게 운전해온 산길을 다시 돌아가 에스테스 파크에서 7번을 탔다. 7번은 36번보다 더 산길이었다. 돌고 돌아 라이온스에 도착하니 이미 두시간이 지나 있었다. 볼더에 도착해 스티브가 사는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볼더라도 호텔로 돌아오니 여섯시 반이 지나 있었다. 친구들에게 36번이 폐쇄되었다는 사실을 이메일로 전해 주었다.

어머니는 다행히 잘 살아계셨다. 어제 함께 산 음식들을 남기지 않고 다 잘 드셨고, 오후에는 네시간 정도 밖에 나가 그릇 가게나 데코레이션 가게를 구경했다고 하셨다. 길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나의 신신당부때문에 멀리 나가지도 못하시고 펏스트릿 주변만 맴돌았다고 하셨다. 점찍어둔 그릇이 몇개 있다고 하셨으니 내일 함께 가서 다 털어 올 생각이다. 나도 볼더의 플랫아이언이 나온 그림이나 사진을 하나 사서 오피스에 걸어 둘 생각이다.

씻고 나오니 어머니가 남은 음식들을 차려 주셨다. 볼더에서까지 어머니는 나에게 식사를 차려줄 생각만 하신다. 음식을 먹으며 간단히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하고, 나는 몹시 피곤해 침대로 쓰러져 골아떨어졌다. 깨보니 새벽 두시였다. 화장실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나의 이불을 펴주시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셨다.

12.19.14.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버려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정장을 아예 입었다. 다시 호텔로 들어올 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발레 파킹 밖에 되지 않는 호텔이라 울며 겨자먹기로 발레를 했는데 차를 찾을때 팁으로 5불을 줬다. 적당한 수준인지 모르겠다. 차문까지 열어주고 시트도 원래 내 포지션으로 맞추어주는걸로 봐서는 무척 친절한 발레파킹인데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한번도 발레 파킹을 해본적이 없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 새파란 하늘이 무척 가깝게 땅과 맞닿아 있었고, 햇살은 미치도록 강렬했다. 정장만 입고 다녀도 괜찮을 정도로 따뜻했다.

바로 학교로 올라갔다. 전날 두번이나 찾아갔지만 없었던 파트리샤가 이번에도 노크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메인오피스에 가서 마리아를 먼저 만났다. 항상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을 처리했던 마리아는 나를 봐도 놀라는 기색없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킴벌리의 오피스에서 마리아, 킴벌리와 함께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밖에서 파트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서 달려왔어”하면서 등장한 그녀와 반갑게 포옹을 했다. 킴벌리는 놀랍게 살을 뺀 것 같아보였다. 원래 무척 작고 아담했던 그녀가 더 작아보였다. 내가 만난 백인중에 가장 작은 사람인 것 같다. 내 후임으로 들어온 자비에가 덴버에 직장을 구해 Web Assistant GAship을 포기했다고 한다. 학과는 새로운 사람을 뽑을 계획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킴벌리는 다음 학기 내내 혼자 일해야 한다고 했다. 킴벌리가 나중에 졸업식장에서 “빡세게 일하고 많은 돈 받을래, 아니면 나랑 다시 일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래?”하고 물었을때 정말 후자를 택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좋은 보스였다. 마리아, 킴벌리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전달하고 파트리샤와 함께 그녀의 오피스로 이동해서 조금 더 수다를 떨었다. 엄마가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든 가방을 전달했고, 파트리샤는 이미 6개월전 나를 통해 전달받은 엄마의 선물-소반-이 손자손녀들의 체스판 받침대로 잘 쓰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몇십년된 골동품 소반이 콜로라도 어딘가에서 꼬마들의 체스놀이를 위해 쓰이고 있다니,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소반의 남은 인생은 굉장히 윤택할 것 같다. 파트리샤는 엄마를 만나고 나니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확한 표현은 “You were so kind to everyone, and your mom is, too. Now I understand why you were so.” 비스무리했던 것 같다. 나는 학교 사람들을 꼭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정확하게 증명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항상 남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그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선행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 누구보다 가깝고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가족 중 한명에게 내가 정말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것이 그냥 아무런 의미없이 잊혀지는 것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이 나를 정말 좋아했고, 지난 6개월동안-내가 그들을 생각한 것 만큼이나-나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플러스였다. 기뻤다.

밖으로 나오니 한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점심약속은 열두시였고, 남은 시간동안 내가 자주 산책하던 Boulder Creek을 엄마와 함께 걷기로 했다. 패밀리 하우징에 차를 주차하고 남쪽으로 슬슬 내려갔다. 개울은 여전히 맑았다. 강한 햇빛이 물줄기에 반사되는 모양새가 너무 예뻤고, 잠시 쉬어가는 듯한 오리떼와 그들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도 예뻤다. 볼더에서 별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언덕까지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곳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아빠 하나가 아이 둘을 데리고 잔디밭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열두시에 경곤씨를 만났다. 마지막해에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왔고, 그때부터 이메일로 여러가지 팁을 주다가 한국으로 돌아갔을때 마침 출국을 아직 하지 않고 있어 한번 밥을 먹었던 사람이다. 너무나 예의바르고 착한 분이었다. 본바탕이 선하다고 할까, 겸손과 친절함이 몸에 벤 사람이었다. 엄마와 함께 셋이 라크버거에 가서 버거를 먹고, 바로 옆에 있는 플랫아이언 커피숍에서 차를 한잔씩 마셨다. 경곤씨는 다행히 적응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강추했던 스바루를 샀고, 내가 강추했던 뉴튼코트에 잘 정착했으며, 내가 부탁했던 도영씨가 다행히 잘 보살펴주고 있다고 했다. 한학기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 볼더와 사랑에 빠진듯 했다. 하긴, 우리 엄마는 볼더에 온지 사흘만에 사랑에 빠졌으니까.경곤씨는 도영씨와 나에 대해 가끔 이야기한다고 했다. 내가 1년만 더 있었으면, 셋이서 정말 많은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 하고. 하지만 난 내 모든 경험과 노하우를 도영씨에게 다 전수해주고 왔다. 도영씨는 그것을 발전시켜(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이니까) 경곤씨에게 전달해주고 있고, 몇년 뒤 경곤씨와 도영씨가 볼더를 떠날 때쯤 새로운 한국인이 그 경험을 다시 전수받게 될 것이다. 그때쯤 나는 볼더를 많이 잊고 살 것이고, 볼더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선배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선배의 이름이 후배의 머릿속에 남아 있으면 안된다. 다만 후배가 선배보다 조금 더 앞에서 수월하게 출발할 수 있게 도와주는게 선배의 유일한 역할이자 의무이다. 경곤씨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역할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졸업식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엄마를 모시고 펄스트릿 홀푸드에 갔다. 시간이 많지 않아 물건을 사지는 못하고 그냥 한바퀴 휙 돌고 나왔다. 엄마는 지금까지 여행 내내 “네가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뻔 했다”라는 말과 “여기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살면 참 좋을텐데..”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홀푸드는 그런 엄마의 생각에 쐐기를 밖는 결정타와 같았다.

두시반에 졸업식장으로 갔다. 겨울 졸업식은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큰 강의실을 빌려서 한다. 들어가자마자 패트릭이 보여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신학생이었다가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경제학도로 삶의 방향을 크게 바꾼 친구였고, 함께 스포츠를 즐기면서 친해졌다. 오늘 도우미로 왔다고 했다. 졸업식 가운을 입고 기념촬영을 간단히 한 뒤 조이를 만났다. 조이는 아까 아침에 잠깐 학교에 들렸을때 자신의 오피스를 찾아오지 않아 서운하다고 했다. 나중에 킴벌리가 말해주었는데, 나를 가장 그리워한 사람이 조이라고 했다. 쓰레기통을 비울때마다 나를 언급한다고 한다. 내가 그녀의 쓰레기통을 대신 자주 비워주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조이는 새로운 포지션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릴리가 하던 학과 스케쥴링 업무인데, 그 전에 했던 단순 비서 업무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조이에겐 예쁜 손자 손녀들이 있다. 오늘 그녀는 나에게 페이스북 신청을 했는데, 페이스북 사진도 손자 손녀를 양손에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오늘 박사를 받는 사람은 나와 잭, 두명이었다. 잭은 내 일년 후배였지만 나보다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잭의 TA를 한적도 있다. 함께 Bon Iver와 Feist의 공연을 본 적도 있다. Red Rocks에서! 잭은 ANU에 취직했다. 잡마켓에 나가지 않고 지도교수추천으로 바로 임용됐다. 경제사를 전공하는 친구인데 경제사는 취업에서 운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캔버라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캔버라에 스타벅스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좀 늘었으려나. 캔버라는 볼더와 비슷하다. 볼더보다 크고, 인종차별이 조금 있으며, 한국사람이 훨씬 많다. 그런데 이것도 7년전 기억이다. 지금은 그곳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당시 홈스테이를 했던 노부부가 가끔 생각난다. 그때도 무척 고령이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있을지 궁금하다. ANU에 취직해서 그분들을 다시 뵙는 상상을 가끔 했는데, 어쩌면 잭이 그분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참 이렇게 재미있다.

졸업식을 했다.

엄마를 모시고 다시 홀푸드로 가서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점심 찬거리를 간단히 샀다.

엄마를 호텔룸에 안착시켜 드리고, 비상연락망을 적어 드린뒤, 여러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엄마는 자신이 보살핌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행내내 그랬다. 그래서 이것저것 챙김을 받는 것을 어색해 했다. 그래도 자식된 입장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 노인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맘편할리 없다.

루벤에 갔더니 스캇, 캐런 뿐만 아니라 에드, 기슬라, 더스틴,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3년차 애들 두명과 그들중 한명의 여자친구가 함께 있었다. 오스틴과 켄드라도 있었다. 내가 갔더니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던 것 같다. 에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똑똑하고 좋은 친구였다. 역시 경제사를 전공하지만 그가 이번 잡마켓에서 분명히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수퍼스타가 될거다. 대학원에서 만나 결혼까지 한 기슬라와 더스틴도 이번에 보스턴으로 간다. 스캇과 나중에 이야기했지만, 이번에 잡마켓에 나가는 친구들이 모두 수준급의 실력파들이다. 기대가 아주 크다. 파트리샤에게 듣기로 다행히 이번 잡마켓이 무척 좋다고 한다. 부디 모두 잘되기를. 에드, 기슬라, 더스틴과는 거기서 작별했다. 우리가 다시 만날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볼더 카페로 자리를 옮겨 조금 더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스틴도 잡마켓에 나간다. 그도 매우 똑똑한 친구다. 메인 출신의, 전형적인 백인. 고등학교때 만난 켄드라와 몇년전 결혼했다. 그도 잘 풀릴 것이다. 크리스와 스티브가 볼더 카페에 도착했고, 스캇과 나, 캐런과 크리스는 밖으로 나와 드디어 에스테스 파크로 향했다.

볼더에서 에스테스 파크까지는 한시간 정도가 걸린다. 운전은 캐런이 했다. 음악을 크게 틀고 수다를 떨며 그곳으로 갔다. 우리가 묵을 곳은 YMCA of the Rockies. 크리스는 벌써 네번째라고 한다. 지금 크리스가 사귀고 있는 케이티의 딸인 노라를 위해 찾은 곳이라 그런지 각종 activity program이 모두 아이들을 대상으로 꾸며져 있었다. 우리가 점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캐빈에 짐을 풀고 가지고 온 티비와 PS4를 설치했다. 매든과 2k14, FIFA를 함께 플레이했다.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았다. 별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캇이 갑자기 졸리다고 해서 씻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12.18.14.

새벽 네시에 눈이 떠졌다. 옆을 보니 어머니가 없었다. 화장실에서 소리가 들리길래 노크를 해보니, 아버지와 카톡을 주고받기 위해 화장실에서 한시부터 앉아계셨다는 것이다. 진동이나 무음도 있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다시 주무시기 시작했고, 나는 그때부터 깨어 있었다. 전날 저녁 볼더의 공기를 다시 느끼고 혼란을 많이 느껴서 잠시 번뇌에 휩싸였다. 서울에서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던 볼더에 대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환기되면서,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공부에 대한 열망도 함께 되살아났다. 돈과 지위, 그 밖에 재미있는 것들이 모두 모여 있는 한국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고 미국의 시골에 박혀 있는 학교에서 외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새벽 내내 번뇌를 거듭했다. 결론은, 아직 가족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지 않은 현재의 내가 가질 수 있는 욕심이라는 것과, 그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둘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침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으셔서 혼자 여덟시반쯤 밖으로 나가 30분쯤 걸어가서 차를 한대 빌렸다. Fiat 500. 아주 작고 귀여운 차였다. 앞으로 가볍게 치고 나가는 맛도 없고 오르막길은 무척 힘들어하는 등 운전하는 재미는 거의 없지만, 완전히 퇴화된 형태로만 존재하는 뒷좌석 덕분에 한층 더 이뻐보이는 외관과 운전석 주변의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어머니와 둘이 며칠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차를 빌려서 돌아왔을 때에도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셨다. 이대로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홀푸드 체인인 Ideal Market에 가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샀다. 클램 차우더 수프, 치킨 토티야 수프, 빵 두조각, 오렌지 쥬스 두개, 어머니의 군것질거리로 과자 몇개, 에너지바 몇개, 블루베리 제일 작은 것 하나, 오렌지 두개. 어머니를 깨워서 아침을 차려 드리고 함께 먹었다. 열한시반쯤 함께 학교로 가서 차를 세우고 학과 건물로 갔으나 파트리샤는 점심식사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학교를 구경시켜드리며 UMC로 가서 서점에서 기념품을 몇개 샀다. 깃발 두개와 아버지를 위한 밀짚모자 하나, 조카 영건이를 위한 셔츠 하나, 그리고 내가 편하게 입을 셔츠 하나. 같은 건물 3층에서 졸업식 가운을 빌렸다. 빌리는 값만 $50불이고 늦게 반납할 경우 $350의 벌금을 내야 하는데 이 가운을 구입하려면 $950이 든다고 한다. 그냥 벌금 내고 가져가면 안될까? 짐들을 차에 두고 학교를 조금 더 산책한 후 도영씨와 그의 여자친구, 강현이 형을 만나 파이브 스파이스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 쌓였던 말을 두서없이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영씨와 강현이 형이 사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께 내가 4년동안 살았던 집의 구조를 보여드리고, 내가 살던 집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곳은 그대로 있는듯 보였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파트리샤를 찾았지만, 회의중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2년차때 살던 루이스빌의 타운하우스로 향했다. 그 곳 역시 그대로인 듯 보였지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뒤, 5시 30분에 김광민 교수님 가족분들을 만나 호텔 1층 Spruce라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교수님이 7시 30분에 시험 감독을 들어가셔야 해서 7시가 되기 전 헤어졌다. 어머니를 모시고 펄스트릿 위쪽에 있는 Trident에 가서 어머니께 아메리카노를 사드리고 나는 핫초콜렛을 마셨다. 숙소로 돌아와 친구들의 연락을 기다리며 정신 못차리며 자고 있었는데, 스캇이 그만 약속을 잡는 이메일을 실수로 자기 자신에게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나에게 알려주었다. 친구들과는 내일 졸업식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옷을 갈아입고 씻었다.

Caribou: Our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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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의 뮤지션 Dan Snaith의 원맨 프로젝트 Caribou의 여섯번째 스튜디오 앨범 <Our Love>는 그의 전작들을 들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나에게 머리로 느끼는 전자음악의 구조적인 재미와 몸으로 느끼는 댄스음악의 감각적인 즐거움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지적인 음악한의 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오웬 팔렛과 제시 란자 등이 참여한 이 앨범은 매 트랙마다 풍성한 사운드와 지루하지 않은 비트 위에 “subtle”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한 묘한 오리지널리티를 창조해내고 있는데, 이 murky한 느낌의 사운드가 이 앨범을 반복해서 듣게 만들며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리게 반드는 힘의 원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앨범을 굉장히 오랫동안 반복해서 들었는데,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던 가사들이 하나씩 귀에 꽂히기 시작하면서 이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조금씩 선명하게 드러기 시작했다. 여러 매체에 따르면, 이 앨범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허락되지만 스튜디오에 스스로를 가둔 나에게는 쉽게 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딸을 낳은 Snaith 의 개인적인 고민들을 담은, 상당히 personal한 앨범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앨범의 각 트랙들은 결코 플로어에서 몸을 달구기를 원하는 청자들만을 위해 플레이된다는 일차원적인 느낌을 주지 않으며,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며, 머리로 들어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싱글커트된 “Can’t do without you”같은 경우 “(I) can’t do without (you)” 한구절을 무수히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And you are the only thing I think about” 과 “And you are the one I dream about”이라고 고백하면서 노래를 마무리짓는다. 단순한 사운드 위에 노래의 제목이 끊길듯 이어지며 되풀이되는 동안 음악은 점차 층위를 쌓아나가며 두터워지고, 마지막에 이르러 호흡이 매우 가빠질때쯤 부끄러움을 이겨내며 토해내듯 한마디를 고백해내는 식이다. 뒤이어지는 “Silver”도 마찬가지다. 절대 노래의 주제를 처음부터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꼭꼭 숨기지도 않는다. 주제어 한두마디를 던져주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느낌이다. 아마도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무척 많은 생각들을 이 노래에 꾹꾹 담아 놓았을텐데, 청자들은 어떤 이미지를, 어떤 개념을 떠올릴지 궁금해하는 만든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앨범은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피치포크로부터는 “This is rich, strange, endlessly fascinating music: a subtle, beautiful triumph”라는 평을 받았고, 올뮤직으로부터는 “All told, Our Love stands as the most straightforwardly danceable Caribou album to date, but holds on to both the experimental bent and composition-minded musicality that helped build the project’s one-of-a-kind sound world”와 같은 찬사를 받았다.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46위까지 올라갔으니 상업적으로도 크게 실패한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고민과 생각들에 동의를 해준 사람들이 꽤 많았나보다.

여행 준비.

내일은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올 것 같아 오늘 미리 써둔다.

볼더는 내게 제 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아니, 두번째 집, 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겠다. 내가 서울이 아닌 부암동이라는 좁은 지역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듯, 미국이라는 큰 나라보다는 볼더라는 작은 학교도시에만 집중하고 싶은 것도 거창한 ‘고향’ 혹은 ‘삶의 터전’같은 개념보다는 ‘집’, ‘방’과 같은 작은 이미지로 그곳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6년을 살았고, 그곳에 살기 전에는 한국에만 있었다. 25년을 한국에서 살았고, 그중 군대 2년을 제외하면 계속 서울과 그 근교에만 거주했다. 이사를 꽤 자주 다닌 우리 가족의 역사에 비추어볼때, 15년을 살았던 부암동과 6년을 살았던 볼더만이 나에게 거주지로서의 애착을 안겨주는 유이한 장소인 셈이다.

나는 이곳에서 대학원을 입학하고 졸업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처음 지낸 곳은 군대였지만, 내가 스스로 주거지역을 선택해 혼자 살아남기 위해 애쓴 곳은 볼더가 처음이었다. 2008년 7월 18일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때 그곳엔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미리 그곳에서 살고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나를 도와주었고, 생긴것도 참 신기했던 백인 학교 직원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너무나 낯선 곳이었기 때문에 더 무모하게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지금 유학을 다시 떠나라고 하면 가지 못할 것 같다.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등에 짊어진 짐이 2008년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하룻강아지 그 자체였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부도 너무 못했고, 영어도 너무 못했으며, 인관관계는 한국에서처럼 너무 서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너무나 미약한 ‘미생’이었던 나는, 결국 ‘미생’인채로 남았지만, ‘미생’인채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하나둘씩 사귄 사람들이 아직 그곳에 있다. 나와 함께 그곳을 떠난 사람들중 일부는 이번에 내가 다시 그곳에 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그곳으로 다시 모인다. 나를 보기 위해, 혹은 나를 핑계로 보고 싶은 다른 얼굴들을 보기 위해. 기댈 곳 하나 없던 그곳에 홀홀단신 건너 갔던 나는, 그곳을 떠나기 이틀전 술집에서 펑펑 울며 떠나기 싫다고 몸부림쳤다. 내가 그곳을 떠나기 싫었던 이유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홀푸드도, 탄성이 절로 터져나오는 플랫아이언의 웅장한 모습도, 친절한 주민들도 아니었다. 미국은 나에게 너무나 거친 곳이었다. 한국에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도 그곳에선 매순간 긴장을 극도로 해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억울한 일도 많았고 가슴아픈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곳을 떠나기 싫어 통곡을 했던건,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그곳을 제2의 집이라고 부르고 그곳을 다시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때문이고,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나게 될 어느 시점부터 그곳은 나에게 그저 하나의 지명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즉, 지금이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빠른 시기가 아니면, 그곳에 가야할 의미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지금 매우 절박하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지금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 순간을 지나면 결국 후회를 하게 될 다른 순간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의도적으로, 굉장히 냉정한 마음으로 볼더와 관련된 그 어떤 정보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곳의 친구들이 들락날락거리는 페이스북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아주 친한 몇명의 친구들과의 이메일도 최소한으로만 주고 받았다. 볼더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들은 검색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너무 보고 싶은, 학교 직원들과 교수님들에게 이메일 한통 쓰지 않았다. 이유는 딱 한가지였는데, 그렇게 그곳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맡게 되면 지금 단단히 마음먹은 나의 삶의 리듬이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두려웠다. 나는 6년동안 떨어져 있던,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은 어떤 곳의 삶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곳은 전에 내가 기억하던 그곳과 동일하지만, 약간 다르기도 하다. 사람들은 조금 더 많이 화가 나 있고, 그들의 걸음걸이는 조금 더 빨라졌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공기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렇게 남을 밟고 올라서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얇은 완충장치가 이들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마냥 방관자적, 관찰자적 시각으로 살 수는 없었다. 난 이 사회가 이런 곳일줄 알고 왔다. 그동안 많이 망가진 이 사회를 떠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국에서 열심히 공부를 마친 한 한국인이 이 사회와 함께 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노라고 알리고 싶었다. 나 하나의 힘은 너무 미약할지라도, 그래서 잘 보이지 않게 될지라도, 비겁하게 ‘먹고 살기 힘드니 이민이나 가고 싶다.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이 사회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볼더라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회를 그리워할 틈이 내 마음엔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제 그렇게 억눌러두었던 그곳에 대한 뼈에 사무친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풀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간다. 나와 가장 가까운 누군가에게 꼭 그곳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어머니, 아버지여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좋고,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살아온 그 누구라도 좋았다. 내가 지난 시간동안 이곳에서 이런 삶을 살았노라고, 꼭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살아왔던 흔적이 최대한 많이 남아 있을때 꼭 보여주고 싶었다. 2년, 3년 후의 그곳은 더이상 나의 고향, 나의 집 볼더가 아니게 될 것이므로, 최대한 빨리 보여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나의 비행기 티켓, 호텔 방, 렌트, 음식값까지 해서 한달 월급이 고스란히 날아갔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곳에서 어머니에게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올 것이다. 여기가 내가 자주 갔던 커피숍이고, 이곳에서 핫초콜렛과 차이티라떼를 매일 사마셨는데, 월말이 되면 통장에 돈이 다 떨어져 그조차 마시지 못했노라고, 이렇게 세세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라도 그곳에서의 내 삶을 털어놓고 나면, 나는 그제서야 그곳을 완전히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기억은 한정적이다. 그곳을 잊게 될 것이다. 잊기 전에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나면 그건 더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놓아주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곳에 간다. 수요일 오후,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