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ien Rice: My Favourite Faded Fantasy

damienrice



한국에는 대미언 라이스의 골수팬들이나 전문가들이 워낙 많아서 내가 그의 새앨범에 대해서 구구절절 떠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번 앨범에는 총 8곡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지만 앨범 전체 길이는 꽤 되는 편이다. 5분 이하의 곡이 한곡밖에 없고 8,9분에 달하는 곡도 두곡이나 있다. 작정하고 anti-SNS 적으로 만들었다는 느낌까지도 받게되는, 무겁고 어두운, 시대착오적인 그만의 포크 넘버들이 빼곡히 실려있다. 전작 <9>에서 잔뜩 화가 난듯 보였던 라이스는 이번 앨범에서 조금은 더 안으로 침잠해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말을 거는 상대는 더이상 자기 자신, 혹은 불특정 다수가 아닌, 분명한 ‘한명’이다. 여자일 확률이 높은, 그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개인적인 내용들로 가사를 채웠지만 명료한 멜로디와 그보다 조금 더 명쾌한 메시지가 최고 강점인 라이스의 음악답게 결코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없다. 그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같고, 그의 멜로디는 나의 멜로디같다. 조용하게 통기타 하나로 시작해 웅장한 스트링과 함께 극적으로 확장되며 끝나는 곡의 구성이 매 곡마다 매우 흡사하게 진행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을 쉬이 주지 않는 이유는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갈등을 겪는 라이스의 내면이 앨범 전체에 고스란히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청자는 그와 함께 번민하며 희망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과거를 반추해보게 된다. 정말 좋은 소설은 필자가 완전히 감추어진채 독자의 세계로 이해되는 소설이며, 정말 좋은 영화는 감독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은채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속에 투영시키게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말 좋은 배우가, 영화속 인물에서 배우의 이름을 완전히 지우는 배우이듯 말이다. 라이스의 노래는 라이스밖에 할 수 없다. 오리지널리티를 충분히 획득한 그의 음악은 이제 청자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피어나는 듯 하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의 이야기를 생각했다.

토머스 F. 고셋: 미국 인종차별사

FullSizeRender
(인터넷에 충분히 큰 표지 사진이 없어서 직접 찍었다. 죄송합니다..)

토머스 F. 고셋, 2010년, 미국 인종차별사, 윤교찬, 조애리 옮김, (주)나남.

이 책은 미국역사에서 인종차별이 어떻게 행해져 왔는지 기록한 책이라기 보다는, 미국에 존재했던 인종차별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는 ‘흔한’ 흑인노예의 사진 한장 등장하지 않으며, <노예 12년>과 같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종차별의 구체성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미국에서 행해져온 인종차별을 환기하며 분노로 가득찰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의도적으로 취하고 있는 건조한 서술방식에 금세 지루해하며 실망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책은 학설사(History of Thoughts)에 가까운 책이다. 책의 전반부는 미국과 그 주변국가에서 발전해온 인종이론 발달사를 다루고 있다. 즉 우리에겐 우생학(Eugenics)으로 알려져 있는, 인종적 특성을 기초로 인종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그래서 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학문적 노력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책의 후반부는 미국에서 살아온 인종 간의 관계사를 서술하고 있다. 관계사라고는 하지만 주요 사건의 독창적 분석보다는 학문 및 문학계에 기록되어온 문헌의 꼼꼼한 분석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인종 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판으로 600페이지에 이르는 이 방대한 ‘literature review’는 문학계와 과학계를 아우르며 미국과 그 주변국들에서 인종차별적 시각이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왔고 그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그러한 주장들이 1920년대에 이르러 어떻게 패배하기 시작했는지를 정리하고 있다. 독창적인 시각을 기대한다면 약간의 실망을 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미국과 그 주변국들이 인종 간의 충돌을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발전시켜온 편견의 과학적 토대와 그 뿌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자주 들어온 유명한 이름들이 사실은 매우 완고한 인종차별주의자였음을 그들이 행한 행동과 말의 기록을 통해 증명해내고 있으며, 이러한 비이성적 사고의 흐름이 집단적으로 융성하게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제시함으로써 1940년대 이후, 즉 이 책이 서술하지 않는 시대에도 응용가능한 분석적 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일반대중을 상대로 한 책이라기 보다는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하기 전 단계의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을 상대로 쓰인 좋은 입문서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문학 전공 교수답게 서술 방식을 지나치게 어렵지 않게 가져가면서도 문장마다 정확하게 포인트를 잡아내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그냥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 마음만으로 읽어내려가도 시간 낭비는 절대 아닐 것 같다.

Steve McQueen: Hunger

Hunger movie poster Steve McQueen
영국산 스타일리스트 스티브 맥퀸을 세계에 알린 데뷔작품 <Hunger>는 1981년 북아일랜드의 한 교도소에서 있었던 IRA의 hunger strike 사건을 다루고 있다. 당시 약 75명의 죄수들은 테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서의 대우를 바라며 죄수복 거부, 사역 거부, 감형제도 부활, 동료 죄수와의 자유로운 접촉 등을 요구하며 (말그대로) 벽에 똥칠을 하는 등의 dirty protest 를 벌이고 있었고, 이러한 집단적 단식투쟁이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리더 Boddy Sands는 릴레이처럼 돌아가며 진행하는 장기적인 단식투쟁을 계획하고 자신이 그 첫번째 주자가 된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특사를 보내 단식 중단을 요청했고, 단식기간 중 영국 하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을때 Sands의 부모는 의사의 도움을 거부했다. Sands는 결국 66일만에 숨졌다. 그가 숨진 이후 9명이 더 단식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후 영국 정부는 정치범으로서의 인정을 제외한 모든 조건을 수용했고 단식 투쟁은 마무리되게 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도소 안팎의 사람들의 일상을 리얼리즘적인 시각으로 다룬다. 그 방식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영화는 아주 미시적인 삶의 파편들에 집중하는데, 그 배경들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예컨대 세면대에 고인 물이라던가 아침 식탁에 올려진 베이컨에 몇초씩 시선을 고정시키지만 ‘왜’ 그것들이 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는 영화의 중반 이후에나 뒤늦게 알게 되는 식이다. 심지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의 몇 시퀀스에서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평온한 중산층 마을에서 출퇴근하는 한 중년 남자의 히스테릭한 모습으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이후 이 남자가 교도관이고, IRA 정치범들을 ‘거칠게’ 담당하는 역할을 맡고 있음을 보여주며 하루종일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근심하는 그가 아침 출근길마다 자동차 밑을 유심히 바라봐야 하는 이유를 (결국 그의 근심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장면과 함께) 대구처럼 영화 중반 쯤에 보여준다. 교도소에서 우리가 처음 보게 되는 두명의 죄수는 영화 중반 이후에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바비 샌즈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를 구분짓는 엄청난 롱테이크씬에서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친한 신부와 나누는 이 길고 긴 대화씬이 영화의 주제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즉, 연극적인 방법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이라면, 이 씬이 포함된 신부와의 면회 시퀀스 이후 영화의 끝까지 정직하게 보여주는 샌즈, 그러니까 마이클 파스벤더의 앙상하게 비틀어져버린 몸은 영화의 주제를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맥퀸다운’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스티브 맥퀸은 그의 데뷔작에서, 시각적인 부분을 스타일리쉬하게 잡아낼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상대적으로 희미하게 비추어질 수 있는 언어적인 부분을 파스벤더라는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 그의- 페르소나를 통해 놓치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밸런스를 맞춰가는 명민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는 맥퀸의 영화지만, 파스벤더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Shame>에서도 그러한 성향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것 같은데, 맥퀸은 <Hunger>에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파스벤더의 연기력에 의존하고 있다. 롱테이크씬에서의 능청스러운 악센트부터 시작해서 이후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대사 하나 없이 오로지 육체만으로 표현해내는 파스벤더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눈꺼풀 하나만으로 샌즈의 인생 전부가 담긴 복합적인 감정을 오롯이 뱉어내고 있다. 이에 반해 맥퀸은 꽤 흥미로웠던 전반부에 비해 영화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파스벤더의 기에 오히려 눌리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샌즈의 유년기를 보여주는 부분은 퍽 진부해서 실망스러웠다. 신부와의 면회 장면에서 샌즈는 무엇이 널 이렇게 버티게 만드냐는 질문에 cross country라고 답했고, 달리기가 갖는 특성을 들어가며 “골라인”에 들어가기 위한 자신의 투쟁을 정당화한다. 영화의 마지막 회상씬은 아마도 그러한 샌즈의 신념을 구체화한 것 같은데, 이후 맥퀸의 영화들을 보여 항상 아쉬운 부분이었던 ‘too much’의 뿌리를 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기도 했다.

나의 투쟁은 세상을 향한 투쟁이기도 하다. 내가 스스로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순간부터 나는 세상에게 굴복하기 시작한다. 바비 샌즈는 그러한 면에서 폭력적인 IRA에 가장 적합한, 외곬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은 자살이 아니라 멍청함때문에 널 처벌하실 것이다”라는 신부의 비판에 그는 “그 신은 당신의 거만함과 소심함을 외면하지 않을거다”라고 맞받아친다. 교도소 안에서의 투쟁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결국 대처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죽음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내면안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음으로써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든 육체를 극복하고 ‘정신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투쟁방식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의 죽음이 최소한 조금은 숭고한 차원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맥퀸의 데뷔작은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짓눌리지 않고 경쾌하고 담백하게 그 과정을 서술해내고 있다.

Sarah Polley: Stories We Tell

Stories-We-Tell-poster
<Take This Waltz>가 특별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남녀관계에 대한 서늘함이 결코 냉소적인 시각으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이 아닌, 오히려 그 반대편의, 거부할 수 없는 관계의 운명적 속성을 받아들이는 내재화 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영화를 보고 난 후 꽤 오랜 기간동안의 저릿함을 경험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계속 이 영화의 장면들, 대사들이 생각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여자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결코 패미니즘적인 시선을 적극적으로 담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보아온 그 어떤 영화들보다 여성을 위한 강하고 굵은 메시지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목욕탕신에서 여성의 육체를 적나라하게 잡아내는 장면이나, 레오나드 코헨의 동명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녀관계의 거의 모든 것을 뱅글뱅글 도는 카메라 안에 잡아내는 장면을 보며 어떻게 1979년생의 배우 겸 감독이 자신의 두번째 영화에서 이런 것들을 가능케 했을까, 하고 요즘에도 가끔 생각하곤 한다. 이 우매한 질문에 대한 해답의 한조각을 <Stories We Tell>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다. 사라 폴리 감독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폴리 감독의 형제 자매들, 아버지(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관계의 주변인들이 그녀가 11세때 암으로 사망한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풀어놓는 이야기(들)를 담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 형제들로부터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라는 농담을 들으며 성장했고, 그 농담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 되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찾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아나가던 그녀는 18세때 역시 배우였던 어머니가 동료 배우와 불륜 관계에 있었으며 그 배우가 자신의 생부라는 루머를 접하게 되고, 그 루머를 추적해나가던 중 영화 프로듀서였던, 어머니와 불륜을 저지른 자신의 생부를 약 29세 무렵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평생 그녀를 키운 그녀의 또다른 아버지가 직접 쓰고 읽은 영화의 나레이션은 담담하게 자신의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불륜을 저질렀으며, 그 이후 그녀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살을 붙이는 것은 각기 다른 성을 가진 폴리 감독의 형제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를 알고 있는 주변인들의 기억들이다. 이들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이다. 다이앤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를 모두 다르게 기억하고 있고, 이들이 이야기하는 다이앤에 대한 기억들은 종종 폴리 감독의 ‘목적’과 충돌하기도 한다. 이들은 카메라 뒤에 있는 폴리 감독에게 항의하기도 하고, 따지기도 한다. 즉,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이 ‘이야기(들)’를 이끌어 나가고 싶은 것이다. 이 미묘한 신경전에서 폴리 감독은 끝까지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 그녀는 영화 내내 결코 적극적인 발화자로 기능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나레이션 녹음 장면에서 얼굴이 포착되고 또다른 아버지(생부)와 주고 받았던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에서 살짝 목소리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결코 적극적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무도 관심없어할 것 같은 이 멍청한 가족의 이야기”를 하나의 극적인 영화적 사건으로 탈바꿈시키는 방식은 발화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 사이에 비어있는 공간들을 대역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재현해내는 것 정도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폴리는 모두가 각기 다르게 이야기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하나의 독립된 여자 개인으로 직조하게 된다.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한 개인에게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무리 냉정하려고 해도 감정적이 되기 쉬웠을 것이며, 더욱이 그러한 사실을 완성된 장편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어지간한 지혜와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 영화가 다이앤이라는 한 여성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심지어 어떤 ‘서늘함’까지 느끼게 만든다는 것은, 영화가 끝난 후 사라 폴리라는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정도로 이 감독의 시선이 매우 단단하고 냉철한 것임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폴리 감독은 결코 흔들리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완벽한 자기 개인사를 통해 드러낸다. 어쩌면 이 영화는 스스로가 주인공이 된 <Take This Waltz>의 또다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신을 낳은 다이앤은 끊임없이 극단적인 수준까지 에너지를 분출했고, 욕망했으며, 그 욕망을 결코 숨기지 않았고, 욕망을 실현한 댓가로 받은 고통도 순순히 감수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었”으며, 그녀의 남편을 많이 사랑하기도 했고, 적게 사랑하기도 했다. 그게 여자다. 사랑과 임신, 육아와 자아실현이라는 상충된 가치들 안에서 끊임없이 욕망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존재. 사라 폴리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가장 민감한 주제를 가장 솔직하게 풀어냈다. 참 무섭고, 못된 여자다. 그래서 참 좋고, 매력적인 여자다.

FKA Twigs: LP1

download (1)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댄서/프로듀서 FKA Twigs의 첫번째 풀렝쓰 정규앨범의 이름은 심플하게 <LP1>이다. 그녀가 전에 발표한 두장의 EP의 이름도 <EP1>, <EP2>였다. 너무 많은 의미를 담지 않은 포장지 안에 음악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나름의 야심이 담겨 있는 것일까. 그녀의 본명은 Tahlia Debrett Barnett 이다. “FKA Twigs”라는 무대명은 댄서로 활동하던 시절 얻은 “Twigs”라는 예명을 원래 가지고 있던 다른 뮤지션의 항의를 받고 “Formerly Known As”의 약어인 FKA를 이름 앞에 붙여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1988년생, 이제 막 26이 된 이 젊은 아티스트는 뮤지션보다는 댄서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릴 듯 하다. 체조선수이자 댄서였던 어머니와 평생을 산 그녀가 한번도 만나지 않은 생부 역시 재즈 댄서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유전적 형질은 충실히 가지고 태어난 셈인데, 오직 그녀만이 유색인종이었던 가톨릭 사립학교에서 10대 시절을 보내면서 내적으로 넘치는 끼는 억압되었을 확률이 높고(그녀는 그 시절을 “in the middle of nowhere”라고 회고했다), 결국 17살에 런던으로 이주해 본격적인 댄서로서의 커리어를 살게 된다. Jesse J같은 뮤지션의 백업댄서로 활동하다가 프로그램에도 나가고 프로듀서들의 눈에도 띄면서 재능이 발견되는 것은 숨막히는 학창시절을 참아내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을터. 2012년 첫번째 EP <EP1>을 발표한 뒤 데뷔앨범을 발표할 때까지 2년 정도가 걸렸다.

그녀의 데뷔 앨범은 흔히 “PBR&B”라고 불리우는, 21세기에 변형된 형태로 계승되는 트립합의 한 장르 안에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감각적인 비트와 멜로디라인 위에 쿨한 악기 구성으로 너무 비싸지도, 그렇다고 천박하지도 않은 적절한 섹시함을 갖춘 음악이다. “Two Weeks”나 “Video Girl”, “Pendulum”같은 곡들은 무척 섹시하다. 군더더기 없이 딱 고개를 까딱거리며 PBR 캔 하나 들이키기에 딱 좋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음악이 소모성 클럽뮤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충분히 그 음악적 견고함을 인정받고 있고, 머큐리 시상식에 후보로 올라가 있는 상태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직조한다기 보다는 음악을 이용해 춤을 추는 것 같다. 사람마다 ‘생각을 하는 방법’이 다 다를 것이다. 나같은 경우에는 머릿속에 있는 흰 종이에 글씨를 써내려가는 식인데,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린다고도 하고, 다른 이는 표현할 수 없는 직관적인 이미지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한다. FKA Twigs는 음악으로 춤을 추는 느낌이다. 노래를 불러도,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도, 비트 위에서 뛰어 놀아도, 그녀의 음악은 항상 하나의 잘 계획된 Choreography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로 기억되는 노래가 있고 가사로 기억되는 노래가 있으며 한두개의 단어로 기억되는 노래도 있는데 이 댄서 겸 뮤지션이 만드는 음악은 꿈틀거리는 춤, 그 자체로 기억된다. 그 완성도가 매우 견고하다.

Jessie Ware: Tough Love

Jessie_Ware_Tough_Love


제시 웨어의 데뷔 앨범은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덥스텝같은 잘게 쪼개지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보컬의 묵직한 힘에 놀랐고, 4AD 스타일의 인디팝까지 넘나드는 폭넓은 장르 소화력에 한번 더 놀랐다. 올해 발매된 두번째 앨범 <Tough Love>는 데뷔 앨범까지의 여정을 함께 한 SBTRKT의 품을 떠나 Ed Shreen이나 Miguel같은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한 작업물들을 담고 있다. 앨범은 데뷔앨범에 비해 훨씬 더 두터운 R&B의 색채를 띠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정통적인 장르에 갇히기 보다는 그 장르를 기반으로 여러 장르를 널뛰며 노는 공간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목소리의 힘으로 지긋이 무게중심을 잡는 스타일의 웨어에게 하나의 장르를 태그해버리는건 별로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이 앨범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녀가 나아가고자 하는 커리어의 ‘방향’을 두번째 앨범에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 앨범에서 그녀는 소위 말해 방방 뛰었다. 두번째 앨범에서 그녀는 걷고 있다. 차분하게, 정제된 태도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사뿐사뿐 걷고 있는데 쉽게 치고 들어가서 말을 걸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앨범에서 분명히 어떤 수준 이상으로 에너지를 내뿜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절제’는 ‘세련’된 결과물로 치환되어 아주 좋은 일렉트로팝 넘버들을 탄생시켰다. 비욘세의 최근 앨범이 흑인음악의 동물적인 ‘뿌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켜 주었다면, 웨어의 두번째 앨범은 흑인음악이 가진 지적인 매력의 잠재성을 드러냄으로써 이 장르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그 ‘방향’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만큼 대단한 야심을 가진 앨범이라고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듯 하다.

앨범은 때때로 머뭇거린다. 때때로 오리지널리티를 잃어버리고 흔들리기도 한다. “Kind of…Sometimes…Maybe”는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의 애닲은 구애가는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고, “All on You”는 너무 장르의 관습을 답습한 것은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젊은 싱어송라이터는 창의적인 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고, 이번 앨범에서는 그 위에 특별히 품위와 여유를 더했다. 첫번째로 싱글커트된 “Tough Love”는 그녀가 가진 일렉트로-related 장르에 대한 이해력을 증명하고 있고, “Say to Love Me”와 “Champagne Kisses”, “Keep on Lying”과 같은 발라드 넘버에서는 팝적인 감각 또한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냥 가벼운 팝앨범으로 들어도 베스트고, 우리가 희망하는 영미팝음악의 미래를 알고 싶다고 해도 흥미롭게 들을 수 있으며, 하나의 장르 안에 집중하고 싶다고 해도 충분히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앨범이다. 21세기에 우리가 바랄 수 있는 토니 브랙스턴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좋은 앨범이다.